163. 뱀 (10)2022.02.19.
소렐은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천천히 잠에서 깨어났다. 오늘은 조금 날이 풀리기도 하고, 맑아서 어제처럼 우중충한 하늘이 아닌 환하게 맑은 하늘이 반기고 있었다. 덕분에 창문으로 햇살이 성큼성큼 들어왔다.
“일어나셨습니까.”
그녀를 품에 안고 한참 들여다보고 있던 라이킨이 웃었다.
“더 주무시겠습니까?”
이도 저도 대답을 못하던 소렐은 으, 하고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익숙한 몸짓에 그가 소리 내어 웃었다.
“왜요, 왜 그러십니까?”
“아침부터 너무 잘생겼어…….”
그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잘생겨야지요. 공주님 눈에 계속 들어야 하니까.”
“나는 아침에 엉망인데……?”
“전혀요.”
라이킨은 소렐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손을 떼서 천천히 내렸다. 그러곤 흡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이제 씻으실까요?”
그는 그녀가 눈을 뜬 후에는 평소보다 더 다정하게 굴었다. 하녀가 해야 할 일을 공작전하께서 직접 대신했다. 모든 수발을 다 들고 식사 시중까지 들었다. 모처럼 평온하고, 또 애틋한 하루의 시작이었지만 상황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두 사람 다 잘 알고 있었다.
“……오늘 바빠요?”
“공주님 일정에 따라서 달라지겠지요.”
“칼리에르 공께서 그래도 되나?”
“부인 가는 곳에 남편도 따라가면 그만인 거 아닙니까.”
“그럼 다행이라 말하는 건데요.”
그의 품에 기대있던 소렐이 몸을 휙 들고 눈을 반짝거리며 말을 시작하자 라이킨은 슬쩍 웃었다. 무슨 말을 할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어제 일을 그냥 못 넘기겠어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흑마법사들이 또 바실리스크와 연결해서 라이킨을 괴롭힐 텐데, 그때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서 가만히 있지도 않을 거예요.”
대마법사가 주먹을 꽉 쥐고 투지를 불태웠다. 가만 안 둘 테다. 따지고 보면 사냥대회 때부터 어젯밤까지 난리를 친 셈이었다. 결국 마지막에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몰라 불안해서 라이킨의 무의식까지 억지로 보지 않았나.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마법이라고, 두 번 세 번 다시 다짐한 소렐은 씩씩대면서 입을 앙다물었다.
“……완전히 뿌리 뽑지 못한다고 해도, 되는대로 한 방은 날려야겠어요.”
“예, 동의합니다.”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흑마법사들은 슈토넨에 있겠지요?”
이미 당한 게 있겠다, 소렐이 반격하는 건 정당방위였다.
“예. 현재 추측하고 있는 바로는 그렇습니다.”
“그럼 그 추측이 사실인지 확인해보자고요.”
* 대마법사는 이동마법이야 눈을 감고도 할 수 있었고, 행동도 재빨랐다. 어쩌다가 바실리스크의 머리 하나를 뜯어내 삼켜버린 가디언은 최상의 컨디션을 자랑했으니, 이 정도면 슈토넨을 정찰하기엔 꽤 괜찮은 인원 구성이었다.
“저도 슈토넨에 와본 지는 꽤 되었습니다. 백 년도 넘었지요. 발밑 조심하십시오.”
라이킨은 소렐의 발밑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왔을 때가 언제였어요?”
“음…….”
그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전나무가 빽빽하게 자란 숲속은 어찌 보면 글래스턴의 음울함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글래스턴은 곳곳에 깔린 회색 벽돌과 하루 종일 안개로 가득한 어두운 분위기와 달리 그 안에서 대학생들의 소란함이 계속되는 도시였고, 슈토넨은 아주 견고하게 쌓아 올린 요새이자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고풍스러운 지방이었다. 글래스턴은 대학 때문에 계속 바뀌지만, 슈토넨은 변화가 아주 느리게 찾아왔다.
“어머니, 그 여자의 지시 때문에 그 여자가 죽기 전에 한 번 왔군요. 그리 재미는 없는 곳입니다. 많이 바뀌었을 테니, 좋은 안내원은 못 됩니다. 양해해주십시오.”
“괜찮아요. 나는 그냥…….”
소렐은 잘 입은 외투 자락을 여미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뽀얀 입김이 퍼지다가 사라졌다.
“그렇게 많은 일을 거쳐서, 결국 나랑 만나서 라이킨이 행복하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솔직히, 너무 기뻐요.”
이 사람이 나 때문에 정말 많이 행복하구나. 그녀는 어제 그의 의식을 깊숙한 곳까지 들여다보며 알았다. 그는 실로 그녀를 사랑했다. 그런 사랑은 아무나 받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소렐은 우쭐하기보다는, 그를 기쁘게 해주고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날 만나서 라이킨이 그 정도로 바뀐 건지는 몰랐어요. 정말 재미없는 삶을 살았던데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고, 라이킨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서 안도했다.
“예. 아주 재미없고, 너무 심심했습니다.”
그의 삶을 악몽으로 몰아넣었던 여자가 죽고 나니, 그는 동생을 필사적으로 지킬 필요도 없었고, 수많은 의무를 억지로 이행할 필요도 없었다. 한마디로 할 일이 없었다. 펠릭스가 있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쯤에 헬레인 왕국이 무너지고서 대마법사도 자취를 감쳤다. 기나긴 시간을 그저 학문만을 탐구하며 무료하게 보냈다. 학문이라도 연구하지 않는다면 그는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것도, 또 할 일도 없었다. 로렌스가 늘 아들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볼 지경이었다.
“공주님께 가야 하던 날이 수년 만에 글래스턴을 벗어나던 날이었으니, 제가 얼마나 지루하게 지냈는지 아시겠지요.”
까딱했다간 더 위험해질 뻔한, 아슬아슬한 권태였다. 그 권태가 얼마나 깊었는지 이젠 이해하는 사람이 생겼다.
“나랑 있으면 심심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자신 있게 말했다.
“예.”
그도 부정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온 것만 봐도 앞으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상도 되지 않습니다.”
슈토넨에 오다니. 고대마법의 계승자를 찾으러 글래스턴 대학 연구실을 떠날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음, 그런데 우리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거 맞죠?”
“예. 왜 그러십니까?”
“아니, 이쯤이면 흑마법사들의 지저분한 사술이 느껴지고, 라이킨도 뭘 느껴야 하는데…….”
라이킨은 소렐을 돌아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바실리스크와 관련해서는 별다른 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만…….”
“다른 게 느껴지죠?”
“예. 공주님께서도 저와 같은 것을 느끼고 계시는군요.”
그는 여차하면 검을 뽑을 준비를 했다. 슈토넨은 참 재미있는 곳이었다. 흑마법사들이 도사리는 줄 알고 딱 둘만 단출하게 와서 은밀하게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하려고 했더니, 흑마법사들이나 뱀파이어는커녕…….
“성기사라니.”
라이킨은 씩 웃으며 검을 바로 꺼내 겨눴다.
“아, 제기랄, 빌어먹을.”
카메론 셀레스트는 욕을 줄줄이 했고,
“성기사라는 직업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언사네요.”
소렐은 침착하게 지적했다. 카메론을 따라온 성기사가 둘이나 더 있었지만, 소렐과 라이킨은 전혀 긴장한 기색이 아니었다. 어쨌든 검은 이쪽에서 먼저 꺼내 겨눴고, 게다가 엘펜하임을 완전히 날려버린 대마법사까지 있었다.
“성기사까지 슈토넨에 있다니, 라이킨은 어떻게 생각해요?”
일부러 그들이 접근할 때까지 기척과 모습을 잠깐 감췄던 소렐이 물었다.
“슈토넨 후작을 감옥에 처넣을 구실이 점점 많아져서 좋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그래요.”
칼리에르 공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이 좋다면야 그녀도 좋았다.
“이제 와서 슈토넨 후작을 법적으로 어떻게 해보겠다고? 이미 늦었어.”
물론 카메론 셀레스트는 그 와중에도 침착하게 대화에 끼어들 만큼 배짱이 있는 사람이었다.
“시끄러워요. 지난가을에 보고 이제 겨우 다시 봤는데, 나한테 할 말이 그것밖에 없어요?”
당장 소렐의 눈에 황금빛이 돌면서 그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카메론 셀레스트는 그 어려 보이기만 하던 공비의 입에서 ‘시끄럽다’라는 막말이 나오자 바로 그녀에게 그런 영향을 미쳤을 이를 쳐다보았다.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는 웃고 있었다. 아주 뿌듯하다는 듯이. 잘하는 짓이다.
“그때 일이 안 좋게 끝나 유감이군요.”
덕분에 엘펜하임이 쫄딱 망했으니 할 말이 뭐가 있겠는가. 카메론 셀레스트는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고 해도 할 말은 다 하는 사람이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소렐은 그 건방진 말을 듣더니 남편을 쳐다보았다.
“일단 저쪽부터 잡아갈까요?”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해도 그렇게 말할 남자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카메론은 기가 찼다. 저 오만한 남자가 한참 어린 토끼를 가지고 놀 거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저 동작과 시선, 그리고 공손한 말투를 보자니 어쩐지 짜증이 났다. 옘병.
“뭐,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
카메론 셀레스트는 순순히 양손을 들어 보였다. 뒤에 있는 그의 부하들이 당황한 게 느껴졌지만, 어쩌겠는가. 상대는 대마법사다. 그것도 원한이 있는 대마법사. 적으로 결코 만들어선 안 될 부류였지만, 엘펜하임은 이미 오래전부터 대마법사의 적이었다.
“그런데 슈토넨 후작의 저택 쪽으로 가는 건 별로 추천하지 않아. 거긴 지금 죄다 불에 타서 아무것도 남지 않았거든.”
소렐은 멈칫거렸고, 라이킨의 눈이 가늘어져서는 카메론을 뜯어보기 시작했다.
“불에 타요?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왜 후작저가 불에 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보통 그런 저택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히 유서 깊은 전통과 가문의 역사를 상징했다. 수백 년간 대대로 물려지거나, 아니면 뱀파이어가 수백 년간 살아 있는 역사로 만들기도 했다. 어쨌든 오래되었으나 잘 관리된 저택은 귀족들의 자부심 그 자체다. 더구나 영지 한가운데에 있는 본가는 더더욱 그랬다.
“전부 다 싹 불탔지. 당신들이 찾으려는 흑마법사는 유감스럽게도 없어.”
이쪽도 이판사판이다. 카메론 셀레스트는 여태까지 어떻게든 살아남아왔고, 또 앞으로도 살아남아야 했다. 그는 생존자였고, 끝내 생존자로서 수명을 다 채운 후에 죽을 작정이었다. 성기사답지 않게 치졸하고 비열했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었다. 후일도 살아야 도모할 수 있는 법이다. 죽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그리고 참고로 가까이 다가가는 건 추천하지 않아.”
그는 씩 웃었다.
“성기사로서 말하는데, 방비를 상당히 하고 가야 해.”
* 그까짓 방비야 하면 그만이다. 성기사들이야 자기들끼리 무슨 방법이 있다지만, 소렐은 대마법사 그 자체라 사악한 사술로부터 남편쯤은 가뿐하게 지킬 수 있었다. 게다가 덤으로 성기사들도 끌고 갈 수 있었다. 그쯤에야 아무것도 아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말해요. 뭐가 이상하게 느껴져도 꼭 말하고. 아니, 말 안 해도 되니까 나한테 표시만 해요.”
거대한 남자의 손을 꼭 잡고 몇 번이나 당부하는 자그마한 아가씨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헛웃음이 나올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커다란 눈에 어찌나 걱정이 가득한지, 누가 보면 저 훤칠한 남자가 무슨 죽을병이라도 앓고 있는 줄 알겠다.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주님.”
라이킨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꼭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흑마법사들의 본거지로 추정되니까 그런 거예요. 알았지요?”
“예.”
바실리스크과 연결되어 있는 흑마법사들과 라이킨이 가까이 있어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다. 소렐은 몹시 걱정이 되어서 연신 확인했다.
“정말 괜찮습니다.”
그를 자극하는 건 흑마법사의 주문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자그마하고 볼이 발그레한 여자였다. 바실리스크의 머리를 하나 뜯어낸 후에는 더더욱 그랬다.
“응, 그래요. 알았어요.”
소렐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 시선을 돌렸다. 새파란 눈에 박힌 까만 동공이 뱀처럼 가늘어지는 걸 봤기 때문이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슈토넨 후작저를 바라보았다. 일단 카메론 셀레스트의 말은 맞았다.
“새카맣게 탔네…….”
소렐은 후작저가 멀쩡하던 때 방문한 적은 없었지만, 분명히 위풍당당한 대저택이었을 거다. 상당히 튼튼하게 지은 저택이어서, 완전히 우르르 무너지지는 않았고 골조가 튼튼하게 서 있었다. 하지만 새카맣게 불탔다.
“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지.”
카메론 셀레스트는 씩 웃었다.
“누가 후작저를 불태웠는지 봤거든.”
“누가 불태웠는데?”
라이킨이 물었다.
“그건 우릴 놔준다면 말해주지.”
“됐어, 그럼.”
라이킨은 바로 고개를 돌렸다. 이젠 갑자기 궁금하지 않아졌다.
“내려가 볼까요, 공주님?”
“그래도 될까요?”
“주변에 사람은 없어 보이는데, 좀 더 접근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소렐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고 곰곰이 생각했고, 라이킨은 차분히 기다렸다.
“……슈토넨에서 슈토넨 후작저가 불탔는데 이렇게 조용할 수가 있나요?”
“없지요.”
라이킨이 생각하고 있던 걸 소렐이 물었기에 그는 씩 웃었다. 역시나 그들은 합이 척척 잘 맞는 부부였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다 들여다보이는 카메론 셀레스트의 표정이 점점 썩어들어갔다. 이딴 꼴을 보려고 슈토넨을 개처럼 기어 다니며 고생한 게 아니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