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뱀 (9)2022.02.16.
“이리 와요.”
소렐은 라이킨의 손목을 잡고 열심히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보다 한참 커다란 남자는 즐겁게 아내에게 끌려갔다. 소렐은 계속해서 걸어갔다. 글래스턴 공작저의 근엄하고 고상한 복도를 지나 안으로, 더 안으로 들어갔다. 점점 더 깊숙하게 들어간다.
“옷도 벗을까요?”
“농담하지 말고요.”
“진심인데.”
이 와중에 그러고 싶나! 바실리스크와 융화되더니 점점 더 뱀파이어의 본능에 가까운 모습이 나오는 건가? 아니, 어쩌면 저 남자는 원래 저랬는지도 모른다. 소렐은 고개를 흔들며 부부침실로 들어가서 라이킨을 앉혔다.
“나 좀 봐요.”
“보고 있습니다.”
“아니, 잠시만 가만히 앉아서 내 눈을 보라고요.”
대마법사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가디언은 얌전히 그 말에 따를 수밖에. 게다가 그건 라이킨에게 대단히 즐겁고 행복한 일이었다. 사랑하는 아내가 눈을 깜빡깜빡하면서 그를 빤히 봐주고 있다니, 그것보다 좋은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왜 웃어요?”
“좋아서요.”
“뭐가요?”
소렐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바실리스크와 싸우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는데, 도대체 뭐가 좋다는 건가?
“공주님이 봐주시는 게 좋아서.”
“아.”
그럼 그렇지. 그녀의 남편은 어쩔 수가 없다. 험한 일을 겪고도 좋다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소렐은 라이킨이 웃고 있는 사이, 그를 좀 더 세밀하게 살폈다. 로렌스와 샤를렌 두 사람과 정치적인 일까지 의논하는 게 길어졌다. 오늘이 가기 전에 라이킨의 상태를 더 살펴봐야 했다. 아니, 이미 면밀히 살폈지만 또 보려고 하는 건 순전히 걱정되기 때문이었다.
“왜요, 안 좋습니까?”
소렐의 표정이 또 복잡해지자 라이킨이 물었다. 그는 상태가 꽤나 좋았다. 소렐을 봐서 기분 좋고, 그리 피곤하지도 않았다. 아니, 차라리 힘이 넘쳐났다.
“아니, 좀 이상한데……, 어라?”
소렐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손을 뻗어서 그의 얼굴에 댔다. 라이킨은 눈을 감고 보드라운 손에 뺨을 비볐다.
“……어어? 어어어?”
점점 목소리가 커지더니, 이젠 아예 두 손으로 덥석 그의 얼굴을 잡는다.
“왜요, 더 잘생겨졌, 으읍…….”
작은 손으로 어찌나 쪼물딱대는지, 뭉그러지는 발음으로 열심히 말해보려던 라이킨은 그만 실패하고 말았다.
“어디 갔어요?”
“예에?”
“어디 갔냐고.”
대마법사의 눈이 가장 찬란하게 빛나며 번뜩거렸다.
“머리 하나, 어디 갔냐고.”
바실리스크의 머리는 다섯. 지금 보이는 머리는 넷. 그러면 다른 하나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거지? 라이킨이 상황을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소렐은 무섭게 눈을 부릅떴다.
“야.”
음성에 살기가 실렸다.
“너 머리 하나 어쨌어?”
그건 라이킨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그의 안에 들어간 바실리스크에게 하는 말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공주님께서 하문하시잖아.’
라이킨은 무의식 속에 깊숙이 묻어놨던 바실리스크를 찾아 걷어찼다. 감히 공주님께서 하문하시는데 대답을 않다니. 시건방진 뱀새끼다. 물론 바실리스크를 묻어놨는데 다시 꺼낸다면, 이놈과 한동안 또 혈투를 벌여야 할지도 모른다. 또는 피를 향한 강렬한 열망을 부추기는 걸 참아내며 입을 틀어막아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거야 감당하면 그만이다.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의 사전에, 절대로, 결코, 그 무엇도 감히 공주님의 말씀을 무시할 수 없었다.
“……대답을 안 하는데요.”
라이킨의 말 앞에는 ‘이 새끼가’라는 단어가 적당히 함축되어 있었다. 그는 소렐만큼 살기가 가득한 시선으로 스스로를, 아니, 바실리스크를 내려다보았다.
“잠시만요, 공주님.”
“왜요, 뭘 하려고?”
그는 빙긋 웃었다.
“이놈 멱살을 좀 잡아보겠습니다.”
감히 대답을 안 하다니, 그러면 억지로 끌고 와서 패대기를 쳐야지.
“아니, 잠시만요.”
함부로 자극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다. 라이킨은 소렐이 그의 손을 잡자 얼른 행동을 멈췄다. 눈부신 결합점들이 순식간에 나타나서 그들을 감쌌다.
“나한테 다 보여줄 수 있어요?”
조심스러운 물음에 라이킨은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았다. 그처럼 강력한 존재라면 당연히 달갑지 않을 마법이었다. 말 그대로 그의 의식 안을 한번 들여다보려고 하는 거니까.
“제 뇌를 헤집으셔도 좋다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언제나 좋습니다.”
“뇌를 헤집는 정도는 아니에요. 그냥 조금만 볼게요.”
“보시고 실망은 안 하셨으면 좋겠는데요.”
다른 이가 그의 속까지 낱낱이 들여다보려고 한다면 라이킨은 당장 상대를 죽였겠지만, 소렐은 아니었다.
“딱 바실리스크만 볼 거예요. 약속할게요.”
“예, 마음대로 하십시오.”
약속에 다짐을 거듭한 대마법사는 아주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다시 한번 잘생긴 얼굴을 양손으로 잡고, 바실리스크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라이킨의 깊숙한 의식을 열었다.
“헌데 공주님, 너무 무리하시는 것 아닙니까?”
무의식을 들여다본다는 건 아주 커다란 마법이다. 그들 사이에 일렁이는 결합점이 모처럼 파도만큼 쏟아져 나오는 것을 봐도 알 수 있었다. 사냥대회에서 힘을 쓴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마법을 힘들여 사용한단 말인가.
“나는 괜찮아요. 라이킨은 괜찮아요? 기분 나쁠 텐데.”
소렐이 내내 보지 않던 그의 무의식을 보고 있다. 낯선 감각에 라이킨은 마땅히 불쾌해야 했다. 그의 어머니, 끔찍하던 전장, 마비되던 감각, 그 후 지루하고 권태롭던 긴 세월까지 그녀가 다 보고 있었다.
“전혀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쩐지 새로운 자극으로 느껴졌다.
“그럼 좀 가만히 있어요.”
“가만히 있습니다만.”
소렐이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너무 좋아하잖아요.”
라이킨은 참을 수가 없어서 결국 웃었다.
“보이십니까?”
“당연히 보이죠. 좀 가만히 있어 봐요. 바실리스크 찾는 중이니까. 어디 있는 거야?”
분명히 느껴지는데, 소렐의 시선에 반응하는 남편의 감정과 생각이 너무 많아서 보이지 않았다.
“이 사이에 숨어 있는 게 분명해.”
“뱀은 숨는 데 능하지요.”
그늘이나 바위틈처럼 은밀한 곳에 숨어서 눈을 빛내고 있는 게 뱀의 습성이다.
“라이킨의 안에는 숨을 곳이 너무 많아요. 아, 정말!”
그는 그녀의 말 한마디마다 죄다 반응하고 있었다.
“딱 바실리스크만 본다고 했잖아요! 이런 식이면 내가 보지 말아야 할 것까지도 다 보게 된다고요! 그건 무척 실례인데……!”
안 좋은 기억과 감정까지 엿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라이킨은 완전히 무방비하게 자신을 다 열어서 보여주고 있었다. 물론 대마법사의 눈을 피할 수는 없다지만, 무의식마저 이토록 강하고 단단한 이가 이 정도로 문을 활짝 열어줘도 되는 건가?
“괜찮다니까요, 공주님. 아, 그런데 좀 보기 거북하신 것들이 있을 겁니다. 적당히 걸러주세요.”
그는 경쾌한 목소리로 말하며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순식간에 뭘 본 건지 소렐이 움찔거리면서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아, 라이킨, 잠깐만…….”
“나중에 찾을까요?”
은근한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잠깐 시간은 있으니까, 공주님…….”
그러면서도 애처롭게 애원했다. 소렐은 그래도 애써 버텼다.
“아니, 그래도 바실리스크는 찾아야 하는……, 하는데…….”
조금만 더 보면 보일 것도 같은데, 그런데 말이다.
“예, 나중에 찾아도 되지요. 어디 도망갈 놈은 아닐 겁니다. 그렇지요?”
속삭이는 목소리가, 숨결이 간지러울 지경이었다. 그가 뭘 원하는지, 그의 무의식을 들여다보고 있던 소렐은 너무나 잘 알았다. 눈앞에 다 보이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남편은 그녀를 너무 좋아했다!
“그, 그래도…….”
“아직 밤이잖습니까. 해가 뜨려면 멀었습니다.”
그녀는 대마법사고, 바실리스크의 머리 다섯 개 중 하나가 사라졌다는 건 큰 문제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머리가 어떻게 된 건지 봐야 하는데……. 소렐은 그만 눈을 감고 닿아오는 입술에 화답하기 시작하고 말았다.
“……공주님은 싫으실까요?”
은근한 목소리가 한참 만에 물었다. 무의식이 죄다 열려서 대마법사에게 낱낱이 읽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뱀파이어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보라고 열어주고, 더불어 그가 뭘 원하는지도 보였다.
“그건 아니지만…….”
얼굴이 발갛게 물든 소렐이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킨이 그녀를 들어 안는 순간, 결국 고함이 터져 나왔다. 내 앞에서 감히 뭘 하는 거야! 무의식을 훤하게 열어둬서 간신히 숨어 있던 바실리스크가 더 이상 참지 못한 것이다. 순식간에 부부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찾았다.”
“예, 찾았군요.”
똑같이 번뜩거리는 부부의 무서운 눈빛이 바실리스크에게 향했다. 아뿔싸, 속았다! 바실리스크는 당황했다. 분명히 그는 라이킨의 감정과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진 욕망까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뱀파이어가 도대체 바실리스크를 어떻게 속인 건가? 머리 넷 달린 짐승은 저도 모르게 형체 없는 의식을 꿈틀거리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는 지금 대마법사의 시선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숨을 곳도 찾지 못했다.
‘당황했군.’
라이킨은 놈을 비웃었다. 뱀들의 왕이라고 하면서 초라하게 실체도 없이 기생하고 있는 저 꼴을 보라. 얼마나 초라한가. 네놈은 수치심도 없나!
‘기생충 주제에 수치심도 따져?’
이거 새로운데. 라이킨은 하나하나 빈정거렸다. 덕분에 소렐은 드러난 바실리스크의 머리를 다시 한번 살필 수 있었다. 여전히 형체는 없고, 또 여전히 라이킨에게 자리 잡아 어떻게든 그를 차지하려고 머리를 굴리고 있는 사악한 고대의 존재.
“라이킨.”
“예, 공주님. 보실 만큼 보셨습니까?”
“네. 아직 바실리스크를 잡는 건 안 되겠어요.”
“저런.”
“남의 사정 듣는 것처럼 말하지 말아요.”
“예.”
남편은 온순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왜 대답을 안 하지?”
소렐의 중얼거림에 라이킨이 바실리스크를 걷어찼다.
‘하문하시잖아. 대답 안 해?’
사냥대회에서 싸워댔던 것처럼, 또 싸워도 상관없다는 시비였다. 건방진……, 네놈들은 실로 오만하다!
‘남의 몸에 붙어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는 기생충한테 듣고 싶은 소리는 아닌데.’
이 뱀파이어는 남의 아픈 곳을 찌르고 비틀고 소금을 끼얹어 박박 문대는데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그리고 바실리스크가 평소 반응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그의 공격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도 인지했다. 아까 낮에 싸워댄 게 바실리스크에게 타격을 주긴 했나 보다.
“아, 봤어요. 보여요, 라이킨. 그만 때려요.”
“제가 때리는 게 보이십니까? 제대로 먹혀듭니까?”
여태까지는 그냥 때린다는 생각만 했지, 그의 공격이 먹혀들 거라는 기대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네. 바실리스크도 열심히 반격은 하는데 힘들어 보이네요. 머리 하나가 뽑혀 나갔어요. 다행이네요.”
소렐은 한 번 더 쉭쉭 대는 바실리스크의 가련하지만, 위험한 모습을 살핀 뒤 라이킨의 무의식을 닫았다.
“이제 그만 볼게요. 보게 해줘서 고마워요.”
말끝마다 고마워요, 미안해요, 라고 예의바르게 말하는 것마저 사랑스러워서 라이킨은 참지 못하고 소렐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으, 나 사랑하는 거 너무 잘 알겠고요, 잠깐만요, 라이키인…….”
“이제 볼 것도 다 보셨는데 이대로 하던 거 마저 합시다. 그럼 되겠군요.”
되긴 뭐가 돼!
“머리가 뽑혔다고요! 그 얘기부터 해야죠!”
“예, 제가 아까 뽑았나 봅니다. 일단 침실로 가시지요. 늦었습니다.”
라이킨은 다시 소렐을 휙 안아 들었다.
“머리가 뽑힌 게 무슨 뜻이겠냐고요!”
“제가 바실리스크를 다 해결해낼 수 있다는 좋은 뜻 아닙니까. 좋은 일은 일단 기념하기로 하고, 우리 둘이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지요.”
소렐은 결국 가만히 안겨서 눈을 깜빡였다.
“……저기, 라이킨, 좀 변한 것 같아요…….”
“제가 말입니까?”
“아닌가……?”
예전엔 그래도 하나도 안 그렇지만 점잖은 척이라도 하려고 애썼던 것 같은데, 라이킨은 지금 야성을 날것 그대로 보이고 있었다. 아니면, 그냥 그녀가 너무 예뻐서 그를 자극한 것뿐일까? 사실 평소대로라면 후자일 가능성이 컸다. 또록또록 눈을 굴리면서 열심히 생각하던 대마법사는 금방 푹신한 소파에 등이 닿는 걸 느꼈다. 새파란 남자의 눈이 그녀만을 원한다고, 소리 없이 말하고 있었다.
‘아, 바실리스크의 머리 중 하나가 음욕을 담당한다고 했던가……?’
라이킨의 의식 안에서 뽑혀나간 바실리스크의 머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어떻게 되긴, 라이킨이 삼킨다고 했으니까 그 말대로 됐겠지.’
닿아오는 입술에 머릿속이 금방 흐릿해졌다. 그런 건 지금은 더 이상 중요한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