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뱀 (9)2022.02.12.
오래 산다는 건 어찌 보면 저주라지만, 사실 모두가 바라고 꿈꾸는 것이기도 했다. 건강하게 장수하는 뱀파이어들을 보라. 그들은 온갖 권력을 다 끌어모으고, 정치까지 관여하지 않나. 물론, 사실 모든 뱀파이어들이 다 그런 건 아니다. 뱀파이어들도 실패했고, 실각했고, 암살당하고, 장수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올센 권력 정점에 서 있는 뱀파이어들은 암살을 하고, 실각시키고 그 자리에 오른 이들이다.
“왕이 뭐라고 하던가요?”
사냥대회가 엉망으로 끝나고, 수년 만에 보는 흑마법사에 모두가 두려움에 떨며 집으로 돌아갔다. 소렐은 잠시 왕궁에 들러 방비를 해준 뒤 집으로 돌아갔으나, 그사이 로렌스는 국왕을 알현했다. 라이킨은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물었다.
“너는 괜찮니?”
“저는 괜찮습니다.”
“우리가 참 나눌 말이 많구나.”
로렌스는 여태까지 가지 않고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던 샤를렌과도 눈이 마주쳤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안다, 알아. 모두 앉자. 쉬어야지.”
모두가 피곤했을 거다. 그리고 특히 라이킨의 상태도, 맞서 싸운 소렐의 상태도 걱정되었다.
“저 애의 몸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인 거니, 아가?”
아버지는 아들의 ‘괜찮다’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말해줬으면 좋겠구나.”
“일단 두 분이 흑마법사를 가장 좋은 때에 저지해주셨어요. 예상했던 대로 바실리스크의 의식을 더 강하게 하는 주문을 외우고 있었던 거고요.”
“그래.”
로렌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그 주문을 막고, 없던 것으로 되돌리고, 바실리스크의 의식을 약화시키려고 애썼어요. 바실리스크를 완전히 뿌리 뽑는 건,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어쩌면 완전히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소렐은 중얼거리다가 라이킨을 바라보았다. 그는 뱀파이어답게 창백한 안색을 하고 앉아 있었지만, 그래도 아주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라이킨이 애써줘서 너무 다행이에요.”
“잘 버텼다고?”
“아뇨, 발상을 전환했달까…….”
이미 이야기를 다 들은 눈치인 로렌스는 이번엔 샤를렌을 쳐다보았다.
“발상을 전환해서 바실리스크에게 먹히느니 지가 바실리스크를 먹기로 했대요.”
샤를렌은 표정으로 ‘저런 또라이 같으니’라고 덧붙였다.
“……뭐?”
아버지가 되묻자 그녀는 이번엔 다시 고개를 돌려 라이킨을 쳐다보며 ‘거봐, 아버지도 어이가 없으시다잖아’라는 표정을 지었다.
“……먹어?”
“예.”
라이킨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고, 소렐은 영 표정이 좋지 못했다.
“……바실리스크를, 먹어?”
아이고, 얘야, 그거 지지니까 먹는 거 아니란다. 다 큰 아들에게 먹을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까지 다시 가르쳐야 하나? 로렌스는 할 말을 잃고 라이킨을 쳐다보았다.
“그놈이 절 먹는다는데 어쩝니까. 얌전히 먹히느니 차라리 같이 먹어 치워줘야지.”
몸에 기생하고 있는 바실리스크마저 흡수한다는 정신 나간 생각은 도대체 누가 하는 건가, 했는데 이 집 큰아들이 했다. 로렌스는 아들에게서 눈을 떼고 할 말이 많아 보이지만 하지 않고 있는 소렐에게 물었다.
“그래도 괜찮은 거니? 몸에는 문제가 없어?”
로렌스는 자신이 가장 할 말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집에 오니 더한 게 있었다.
“……바실리스크는 실체가 없어요. 아마 예전 봉인 때 육체를 아예 잃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더 저를 공격하게 만들어서 라이킨의 몸도 차지하고, 고대마법도 차지하려는 것 같아요.”
소렐은 신중하게 판단했다.
“라이킨은 아직 괜찮은 것 같지만, 바실리스크와 융화가 상당히 많이 되었어요. 그게 걱정스러워요. 하지만 라이킨이 지금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고,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긴 한데 그게…….”
아주 심각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소렐은 화를 냈을 거다. 미쳤냐고, 대판 부부싸움을 벌였을 거다. 하지만 바실리스크를 깔끔하게 떼어낼 뾰족한 수를 아무리 뒤져도 찾지 못한 지금은 뭐라도 해야 했다. 방법을 찾지 못한 대마법사가 화를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속상해 죽겠는데 말은 못 하겠고, 그 복잡한 얼굴에 로렌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러곤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일단은 몸은 괜찮고, 정신은 라이킨, 그의 미친 아들이 맞다, 이거지.
“너무 저를 문제아 취급하시는데요, 아버지.”
“안 그러게 생겼어?”
갑자기 냅다 지른 고함에 소렐의 눈이 커졌다.
“내가 저러실 줄 알았지.”
샤를렌은 태연하게 중얼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지금이 전쟁터만 찾아다니면서 별짓 다 하고 돌아다닐 때인 줄 알아? 확실하지도 않은 방법을 왜 네 몸으로 실험해! 네가 혼자인 줄 알아? 결혼까지 한 놈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거냐!”
“걱정 끼쳐 죄송합니다만, 그냥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오시기 전까지 샤를렌은 ‘네가 또라이냐, 돌았냐’라며 연신 물어댔고, 소렐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 결국 다시 입을 다물었다. 라이킨은 왜 가족들이 이렇게 화를 내는지 알고 있었다. 특히 아버지와 샤를렌은 그가 인생은 포기한 채 전장을 휩쓸고 다니던 때를 본 사람들이다. 그러니 더 불안해한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대마법사를 믿었어야지! 왜 네가 나서! 더 큰일 나면 어쩌려고! 아직 네가 네 입으로 말하니 다행이지……!”
로렌스는 언성을 높이다가 등받이에 몸을 털썩 기댔다. 그는 피곤하고 늙은 얼굴을 문질렀다.
“……내가 제발 무모한 짓 좀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잖니. 제발. 물론 네가 알아서 잘 판단했겠지. 하지만 말이다, 나는…….”
소렐은 직감적으로 이 가족들 사이에 그녀가 모르는 어떤 일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라이킨이 무모한 행동을 해서 갈등을 크게 일으킨 적이 있었던 거다.
“아버지.”
가만히 혼이 나고 있던 라이킨은 말을 잇지 못하는 아버지의 무릎 위에 커다란 손을 올려놓았다.
“저는 살고 싶습니다.”
약간 미소를 지으며 다정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죽든 말든 상관없어서 별짓을 다하던 때와는 다릅니다. 절박하게 살고 싶습니다. 죽고 싶지 않아요.”
어떻게든 살아보려 발버둥 칠 거다.
“지금은 그때와 다릅니다, 아버지. 제가 아버지를 그렇게 닮았는데, 아내를 두고 죽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아내 대신 자식을 선택한 남자는 가까이 다가온 아들을 가만히 보다가 한숨을 쉬고 아들의 손을 붙잡아 토닥였다.
“살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물어뜯었더니 당황하더군요. 제대로 잡히지도 않았지만 저도 필사적으로 애썼습니다.”
라이킨은 싱긋 웃었다. 똑같은 호통을 들었던 때 아무런 표정도 없던 얼굴과는 전혀 달랐다.
“돌아와야지요, 아버지.”
부자는 서로를 끌어안았다.
“너는 다치면 안 된다.”
“그럼요, 아버지.”
“무슨 일이 있으면 꼭 말해야 해.”
어지간히 아버지 속을 썩이는 아들이었구나. 소렐은 알겠다는 표정으로 샤를렌을 건너다보았다.
“오빠가 전쟁터에서 별 미친 짓을 다 벌이고 다녀서 아버지가 맨날 쫓아다녔거든요. 뱀파이어여도 하지 말아야 할 짓은 다 골라서 했다니까요.”
시누이는 소곤소곤 해야 할 말을 시누이답게 죄다 전해줬다. 게다가 입 모양으로 ‘보통 속을 썩인 게 아니다’라고도 말했다. 로렌스는 그때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지경인지, 라이킨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소렐에게 재차 확인을 거친 후에야 겨우 넘어갔다.
“제가 계속 지켜보고 있어요. 다들 걱정하지 마세요.”
다부지게 말한 소렐은 아무래도 오늘 밤도 그냥 지새우면서 라이킨의 상태를 봐야 할 것 같다고 판단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 바실리스크를 똑같이 물어뜯어서 삼키겠다는 발상을 하냐’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로렌스가 워낙 언성을 높였기 때문에 소렐은 일단 가만히 있었다. 라이킨도 별생각 없이 저지른 일은 아닐 거고, 무엇보다 그녀의 곁에 있고 싶어서 한 짓이라잖나.
‘그게 가능할까?’
바실리스크를 흡수하는 게 가능할까? 머리 다섯 달린 뱀들의 왕이야 당연히 가능한 일이다. 그는 그런 식으로 여태까지 목숨을 부지해왔고, 수많은 마법사들도 거꾸러트렸다. 하지만 대마법사의 가디언이 바실리스크를 흡수하고도 아무런 부작용이 없을 거라곤 장담할 수 없었다.
“……이 일 뒤에 누가 있는지 우린 모두 알고 있지.”
소렐이 골똘히 생각에 잠긴 사이, 로렌스가 입을 열었다. 이젠 정치적인 문제로 화제가 넘어갔다.
“왕실 주최 행사에서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 이가 많지 않지.”
게다가 너무 뻔하게도, 철통같은 보안까지 하고 있는 곳은 슈토넨뿐이었다.
“왕에게 언질은 해두셨습니까?”
당연히 라이킨은 페르난데스 7세에게도 슈토넨 후작이 접근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쪽에서도 정치적으로 방비를 해둬야 하지 않겠나.
“해뒀다. 슈토넨 후작이 와서 특히 너를 걸고넘어질 거라고 했지.”
더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왕이 뭐라고 했습니까?”
“궁금한 모양이던데 더 물으시지는 않더구나.”
“일단 슈토넨 후작의 말을 들어본 다음에 결정하겠지요.”
페르난데스 7세의 속이 뻔했다. 아니, 모든 군주들의 속은 다 비슷비슷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샤를렌이 그때 끼어들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그걸 아버지께 물어봐야지 왜 나한테 물어봐?”
“오빠는 항상 우리 말 안 듣고 혼자 움직이잖아. 아, 이런 경우에는 공주님한테 물어봐야 하나? 공주님 생각은 어때요?”
아버지 말은 안 들어도 아내 말은 듣겠지. 저런 불효자 같으니. 샤를렌은 소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공주님은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아까부터 곰곰이 생각을 하며 듣고만 있었다.
“……오늘 흑마법사들이 한 일을, 흑마법사들은 성공했다고 생각할까요, 실패했다고 생각할까요?”
뱀파이어들은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이야기였다. 그 생각에 따라 저들이 행동할 테니 말이다.
“어쨌든 실패한 거잖아요?”
샤를렌이 가장 먼저 대답을 꺼냈다.
“지금 슈토넨 후작의 상황이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고, 흑마법사도 하나가 죽었고. 실패한 건데?”
로렌스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다고 볼 수는 없지. 아무나 사냥대회에서 이 정도 소동을 일으킬 수는 없어. 어쨌든 자신들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낸 거 아니냐.”
“예, 저도 그 말씀에 동의합니다, 아버지.”
라이킨마저 고개를 끄덕였다.
“바실리스크와 연결되어 있는 흑마법사들은 바실리스크가 주문으로 강대해진 것을 느꼈을 겁니다. 그리고 성공했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들은 의외로 소박하지 않습니까. 작은 것에도 만족하지요.”
“그래. 하지만 슈토넨 후작은 아니지.”
로렌스는 흑마법사들보다 슈토넨 후작을 더 잘 알았다. 적을 두고서는 무엇도 간과하지 않는 이 일가는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공주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모두가 질문을 처음 던졌던 이에게로 돌아갔다. 라이킨은 소렐의 생각이 가장 궁금하다는 눈치였다.
“……제가 심란한 만큼 그자들은 기뻐하고 있을 거예요.”
라이킨은 바실리스크를 물어뜯었고, 어쨌든 둘은 융화되었다. 이젠 누가 먹고, 누가 먹히느냐의 싸움이다. 소렐은 정말 자신이 없었다. 그저 남편을 위해, 또 대마법사의 책무를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대마법사가 가디언을 잃을 수는 없었다.
“명답이군요.”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 새벽이 밝아왔다. 어둠을 사랑하며 빛을 싫어한다고 주장하는 흑마법사들이 슬슬 깊은 잠에 빠져들 시간이었다. 슈토넨 후작의 저택에서 하녀들과 마부, 하인들이 소리 없이 빠져나갔다. 귀중한 물건들이 옮겨지고, 저택 주변에 기름이 둘러졌다. 후작에겐 시간이 없었다.
“불붙여.”
가차 없는 명령에 그 자체로도 훌륭한 자산이자 유서 깊은 기념물인 저택에 불이 붙었다. 불이란 건 소리 없이 타오른다. 방심하거나,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죽음을 목전까지 끌고 오는 실로 두려운 존재다. 슈토넨 후작은 기름을 잔뜩 먹은 건물이 불길에 휩싸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건물 안에는 기름이 빈틈없이 뿌려졌고, 또한 장작이 될 것들이 잔뜩 밀어 넣어졌다. 특히 불길은 지하로 연결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지켜보고 있도록 하지.”
공식적으로 슈토넨 후작은 ‘아직’ 사냥대회에서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그는 돌아와서 저택이 잿더미가 된 것을 보고 적당히 슬퍼할 예정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대피했고, 귀한 물건들도 다 빼돌렸지만, 지하에 몇 달째 머무르고 있던 이들은 건물이 무너져서 사체로 발견될 것이다. 사냥대회에서 실패했다는 게 얼마나 큰일인지 모르는 저 멍청이들에게 더 이상은 아무것도 제공하고 싶지 않았다. 그 정도로 기회를 줬다면 그만한 성과를 내야 할 것 아닌가.
‘저런 것들 때문에 발목이 잡힐 수는 없지.’
까딱하다간 반역 혐의까지 뒤집어쓰게 생겼다. 사냥대회에서 바실리스크를 완전히 불러내서 칼리에르 공을 집어삼키기라도 했어야지! 무능한 것들! 한참 타오르던 저택이 그때쯤 한 부분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묻혀라.’
아무도 빠져나오지 못한 채, 그대로 그의 죄의 증거들이 묻히고 타버리길. *
“……손 빠른 영감…….”
어딘가에서 다 보고 있는 눈들이 있기 마련이다. 여기저기 떠도는 기사신세로 전락한 카메론 셀레스트는 불길에 타오르는 슈토넨 후작저를 멀리서 망원경으로 바라보며 감탄했다. 역시 교활한 걸로 따지자면 뱀파이어들을 이겨낼 수가 없다. 그는 혀를 내두른 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설원을 빠져나갔다. 슈토넨은 후작이 꽉 잡고 있다. 같은 장소에서 지체했다간 들킨다. 서둘러 움직여야 했다. 그래야지 살아 나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