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뱀 (8)2022.02.09.
페르난데스 7세가 발레시나스 공작을 특별히 신뢰하는 이유 중 하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남들은 ‘무슨 일’이 무엇인지 알아보려 하지만, 공작은 이미 그 일이 뭔지 다 파악을 하고 반쯤 해결해서 가져온다는 점이었다. 발레시나스 공작은 이번에도 그랬다.
“무슨 일이오, 공?”
왕의 물음에 공작은 아무 말 없이 재갈을 물린 흑마법사를 왕 앞에 꿇어 앉혔다. 히익, 하고 숨을 들이마시거나 질색을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났다.
“더러운 흑마법사가 아닌가?”
“이 숲에 어찌!”
이곳은 올센 왕국 중앙에 있는 깊은 숲이었다. 흑마법사만큼은 배척하는 올센 한복판에 나타난 검은 두건을 쓴 자를 보고 모두가 다 기함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숲을 동요시키고, 짐승들을 놀라게 한 게 누군가 추적해보니 이 흑마법사가 나왔습니다. 일부러인지, 깊숙한 곳에서 혼자 주문을 외우고 있었습니다.”
발레시나스 공작의 날카로운 눈이 좌중을 살폈다.
“주변에 발자국들이 많은 걸로 봐서는 분명히 돕는 이가 있었을 텐데, 가보니 이 자 혼자만 남아있었습니다. 현장은 보존해뒀습니다.”
“공이 막은 것이오?”
“마법은 마법으로서 대항해야 하지요, 폐하. 제가 한 게 아니라 대마법사가 한 것입니다.”
오블리앙 공이 뒤를 돌아보고, 약간 늦게 도착한 소렐 이드리스가 나와서 국왕에게 예를 표했다.
“오, 대마법사여.”
페르난데스 7세는 반색했다.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워대서 꼭 비극을 부르는 흑마법사를 보통 인간이 상대하긴 너무나 어려웠다. 이런 때 대마법사가 올센에 작위를 보유하고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국왕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안도감이 가득했다.
“폐하.”
“이게 어찌된 일인가?”
소렐은 잠시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약간의 정적 끝에 그녀가 대답했다.
“……역사의 반복이지요, 폐하.”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그 긴 역사 말이다.
“엘펜하임이 사라졌으니 흑마법사가 다시 활개 치는 시대가 왔습니다. 이들을 억제하고, 사람들이 악한 마법실험에 휘말려 죽어가는 것을 막는 건 제 의무입니다.”
판에 박힌, 귀족들과 정치를 하며 사용할 말이었지만 이젠 소렐이 본디 그런 사람인양 행동하며 쓸 말이었다.
“저 흑마법사가 노린 게 도대체 뭔가?”
페르난데스 7세는 이 상황이 조금 달갑지 않았다. 그도 실로 오랜만에 보는 흑마법사다. 아마 그의 곁에 선 왕세자는 난생처음 볼 것이다. 저 징그럽고 흉측한 존재들은 늘 누군가의 뒤통수를 노렸다. 여기에서 흑마법사가 노렸을 존재야 당연히 국왕과 왕세자였다. 국왕은 괜히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그건…….”
정확하게는 소렐의 남편이었다. 하지만 라이킨에게 바실리스크가 심겨져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곤란하다. 소렐이 잠깐 머뭇거리던 사이였다.
“꺄아아악!”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흑마법사가 뜻 모를 주문을 중얼대는 소리가 들렸다. 재갈이 좀 헐거웠나 보다. 사람들은 흑마법사의 입이 자유로워지자 혼비백산했지만, 발레시나스 공작은 침착하게 검을 다시 빼 들었다. 소렐 역시 당황하지 않고 국왕 앞을 가로막아 흑마법사와 마주할 뿐이었다.
“네 후손까지 전부 불에 타 죽을 거다, 감히 ‘대’마법사를 자칭하는 자여! 바닥을 긁어가며 자비를 빌어도 지옥불이 네년을 태워죽일 거다!”
주문과 함께 저주도 뒤섞였다. 그건 전부 소렐 이드리스를 향한 저주였다.
“네가 고대마법을 가져서 뭐라도 된 것 같지? 새파랗게 어린 것이 기고만장해서 우쭐대봤자 그 힘을 백 분의 일도 제대로 쓰지 못할걸! 감히 ‘그분’께서 나타나시는 것을 막다니! 뱀들의 저주가 네년의 가계에 흐를 것이다!”
라이킨은 당장 저 흑마법사의 입에 검을 꽂고 싶었으나 소렐이 그에게 ‘나서서는 안 된다’고 눈짓으로 경고하고 있었다. 어린 아가씨가 듣기엔 지나치게 지독한 말이었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저 그릇에 불과할 뿐! 네년의 집이 탐욕스럽게 가지고 있던 그 힘으로 교만하게 굴 뿐이지! ‘그분’께서 나타나신 뒤엔 그따위 힘도 소용없어!”
‘그분’이라. 소렐은 차분히 생각했다. 대마법사들은 사실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흑마법사들은 쓸데없이 ‘이름’에 집착했다. 죽은 사체의 일부분까지도 집착하는 이들답게 이름에도 의미를 부여하면, 그 또한 힘이 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저 흑마법사는 지금 바실리스크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있었다.
“마, 막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저 입을 막아야 주문을 외우지 못하지요!”
사람들이 새파랗게 질려서 웅성거렸지만 발레시나스 공작과 글래스턴 공작은 그저 대마법사만 바라볼 뿐이었다. 대마법사가 흑마법사를 상대한다. 그게 법칙이니, 대마법사가 흑마법사를 내버려두고 있다면 그들 역시 끼어들지 말아야 했다. 그리고 페르난데스 7세 역시 두 공작이 대마법사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곧장 상황을 이해했다. 국왕은 당장 손을 들었다. 좌중이 긴장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고요해졌다.
“죽을 것이다! 이드리스는 완전히 멸문당해 대가 끊길 것이다!”
흑마법사가 끼륵끼륵, 기분 나쁘게 웃는 소리만 추운 설원 위에 울려 퍼졌다.
“네년이 몸을 찢어가며 애새끼들을 낳아도, 전부 전장에서 짓밟혀 수치심과 모멸을 안고 스스로 죽을 것이다!”
라이킨의 미간이 점점 더 깊어졌다. 이젠 저 흑마법사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까지 저주하고 있었다. 너무 참혹해서 황급히 귀를 막는 이들도 여럿이다. 그 역시 소렐의 귀를 막아주고 싶었다. 공주님이 들으시기엔 너무 험한 말이니까. 하지만 공주님이자 대마법사는 표정 하나 없이 그 말을 다 듣고 있었다. 라이킨은 화가 났다. 지금 저주하고 있는 대상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의 소중한 자식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찢겨서! 잘려서 죽을 거다!”
저주를 하던 흑마법사가 헉헉거리며 숨을 골랐다. 어찌나 크게 소리를 질러댔는지, 땀이 뚝뚝 떨어질 지경이었다.
“……애쓰는구나.”
가만히 듣고 있던 소렐이 흑마법사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쓸모없는 노력을 수천 년간 해서, 이젠 그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어.”
그건 흑마법사가 뱉어낸 저주에 대한 지루한 감상이자 단정이었다.
“뱀들의 왕, 그 이름을 부를 수 있을 정도의 힘조차 없고.”
귀가 따갑다 못해 고막을 후벼 파는 흑마법사의 저주에 비해 소렐 이드리스의 목소리는 약간 앳되면서도 침착하고 조곤조곤했다.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할 정도의 학문조차 완성하지 못했지.”
대마법사의 눈이 점점 황금빛으로 뒤바뀌었다.
“기초에 충실하라고, 12대 대마법사가 조언해줬는데도 못 알아들었고.”
‘학문’이 되었다면 인정받았을 텐데, 흑마법사들은 기초조차 세우지 못하고 저마다의 사술을 먼저 내세우며 흩어졌다 모이길 반복했다.
“결국 그래서, 다시 고대마법을 탐내고.”
소렐이 방싯 웃었다. 라이킨은 그 웃음에 감탄했다. 우리 공주님, 여유롭기도 하시지.
“남의 것을 빼앗는 게 제일 쉬우니까, 그렇지?”
어쩌면 고대마법은, 아주 힘들게 계승된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흑마법사들은 그 ‘약점’ 때문에 고대마법을 빼앗는 꿈을 버리지 못하는지도 모르고.
“시간이 된 것 같은데.”
소렐은 주변을 둘러보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금 몇 시쯤 되었을까?
“다들 눈 감으세요. 폐하께서도 눈을 감으시지요.”
대마법사가 권하자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고 눈을 질끈 감기 시작하는 이들이 더러 있었다.
“그리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닙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권력자들이 그러하듯이 웬만한 이들은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았다. 소렐 역시 피하지 않았다.
“으아, 으, 아, 아아악!”
흑마법사들은 불리해졌을 때 꼬리를 자른다. 이런 때에는, 특히 뒤에서 은밀하게 공작을 펼칠 수가 없을 때에는 노출된 동료를 죽인다. 붙들려 왔던 흑마법사의 입에서 시커멓게 죽은피가 쏟아지더니, 급기야 그녀의 몸에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공주님, 위험합니다.”
보통 불이 아니라 마법으로 만들어낸 불이란 걸 알자마자 라이킨이 소렐을 뒤로 빼내려 했다. 불은 흑마법사를 삼키고 솟아올라 실제로 가장 가까이에 있던 소렐을 향해 혀를 날름대기 시작했다.
“괜찮다는 거 알잖아요.”
“알아도 지키고 싶은 게 남편 마음이라서요.”
소렐은 한숨을 쉬려다가 말고, 씩 웃기만 하는 남편의 안색을 살폈다. 그는 지금 서 있기도 힘들 거다. 뱀들의 왕 바실리스크와 말도 안 되는 전투를 벌여댔는데, 그것도 그의 몸을 전쟁터로 삼아 싸웠는데 멀쩡할 리가 없었다. 그는 그래도 웃어주고 있었다.
“나도요, 라이킨.”
새빨갛다 못해 푸르게 타오르는 불을 향해 소렐이 손을 뻗었다.
“나도 같은 마음이에요.”
대마법사의 손짓 한 번에 순식간에 불이 힘없이 꺼졌다.
“모처럼 즐거운 사냥대회인데, 불청객이 나타나서 분위기를 망쳤군요, 폐하.”
물끄러미 보고 있던 발레시나스 공작이 입을 열었다.
“흑마법사의 시신은 좀 더 조사해봐야겠지만, 아마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겁니다.”
페르난데스 7세는 불쾌하다는 듯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전형적인 흑마법사 수법이군.”
왕은 한숨을 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기억하고 계십니까.”
로렌스는 반색했다. 왕이 알고 있다면, 따로 설명하면서도 의심을 피해서 말을 꾸며내느라 골머리를 썩을 필요는 없겠다. 귀찮은 일 하나를 덜었다.
“기억하고 있소. 아주 어릴 때 한 번 보았고, 내 조부님에게 배웠지.”
아마 그때는 흑마법사들도 조금 활동을 하던 때였나 보다.
“수틀리면 저리 불을 붙여 죽는다는 것도 배웠고, 더러운 흑마법사들의 시신은 매장하지 말고 들판에 내버려 까마귀들이 쪼아 먹게 해야 한다는 것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소.”
페르난데스 7세는 쥐고 있던 검을 다시 한번 더 세게 움켜쥐었다.
“마침 우리는 바깥에 나와 있고, 시신을 버리기엔 최적의 장소가 아니오, 공?”
“예, 그렇군요.”
“내 증조부와 고조부께서 하시던 일을 내가 또 하게 되었군.”
중얼거린 왕은 발레시나스 공작에게 더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이젠 둘이서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함이다. 왕은 가까이 온 로렌스에게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대마법사나 공은 괜찮은 거요? 아무도 다친 사람은 없소?”
“예, 괜찮습니다, 폐하.”
“참 다행이오. ……도대체 시대가 발전이란 걸 하지 않아.”
페르난데스 7세는 평소에는 아주 유쾌한 성격이었지만, 큰일이 닥치면 한없이 꿍얼댄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흑마법사’들이 발전이란 걸 하지 않는 거지요, 폐하.”
물론 로렌스는 이런 왕들을 다루는데 이미 이골이 났다. 사실 꿍얼거리는 건 올센 왕국 왕들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가풍 같은 것이었다. 이 가문은 저 중얼대는 버릇 좀 고쳐야 한다. 혼자 중얼중얼, 꼬여서 꿍얼대다가 일을 그르치거나 망상하던 게 폭주해서 엉뚱한 곳을 짚어내는 일이 종종 있지 않나. 마치 지금의 왕세자처럼.
“……앞으로는 더 대마법사에게 의지해야겠군. 잘 부탁하오.”
“그럴 필요가 없도록, 아예 뿌리를 뽑아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게 쉽소? 여태까지 질기게 살아남은 놈들인데. 대대로 물려준다는 점에서는 어쩌면 우리 왕조보다 훨씬 더 성공한 놈들 아니오?”
왕은 이 와중에도 날카로운 농담을 잊지 않았다. 어쨌든 사냥대회가 망해서 기분이 나쁜 건 사실이다. 로렌스는 하지만 페르난데스 7세의 기분에는 많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뒤를 흘깃 바라보았다. 흑마법사의 반쯤 불탄 시신 앞에 선 소렐이 한껏 발돋움을 하고 라이킨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다행이다. 대마법사인 며느리가 아들을 살필 것이다.
‘그럼 슈토넨 후작, 이 위인은?’
한때 변경백으로 올센이 국경을 넓히는 데 큰 역할을 한 이는 어디에 계시는가? * 왕이 주최한 사냥대회에서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의 그릇에 바실리스크를 현신시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슈토넨 후작 아서 모드릭 헴피온은 말을 그대로 달려서 슈토넨으로 돌아갔다. 아마 흑마법사들은, 그래도 축하하고 있을 거다. 이히히히히히! 거 봐라.
“아, 벌써 오셨습니까?”
흑마법사들의 입이 슈토넨 후작을 맞이했다.
“다들 기쁜가 보군.”
“예. ‘그분’께서 그릇에 더 깊숙이 심겨지셨으니까요.”
“아, 그런가?”
“예.”
“이해가 안 되는데, 좀 더 설명해주게.”
“간단합니다. 더 흔들수록 그릇의 의식과 융화가 되는 거지요. 그대로 섞이면 당연히 ‘그분’께서 그릇의 의식을 삼키시고 그릇을 차지하시는 겁니다.”
슈토넨 후작은 조금 피곤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럼 앞으로 몇 번 더 칼리에르와 부딪쳐야 하는군.”
“귀찮아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더 좋으니까요.”
“그래, 그렇지.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결국 그 몸은 ‘그분’ 것이 될 테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렇군.”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또 있을 충돌을 대비하지.”
“현명하십니다.”
흑마법사들의 입이 빙글빙글 웃었다.
‘아무렴. 현명하지.’
슈토넨 후작은 미련 없이 흑마법사들이 앉아있는 지하에서 돌아섰다. 이히히히히히! 소위 말하는 ‘그분’의 강림을 축하하며 흑마법사들이 웃어대고 있었다. 슈토넨 후작의 뒤로 문이 굳게 닫혔고, 그는 지상으로 올라왔다. 그러곤 은밀히 명령을 내렸다.
“……오늘 중으로 귀중품은 전부 옮기고, 사람들도 내보내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해.”
그는 그가 약 오백 년간 살아온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밤에 사람이 있어선 안 된다. ……저 아래에는 알리지 말고.”
“예.”
“아, 그리고.”
슈토넨 후작은 돌아서려던 부하를 불렀다. 반드시 챙겨야 할 것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