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뱀 (7)2022.02.05.
루벤 실베스터, 새 에설론 백작은 곧 죽어도 왕세자보다는 더 많이 사냥할 생각이 없었다. 일단 사냥에는 그렇게 큰 흥미가 없었거니와, 왕세자가 쓸데없이 의욕이 가득하다는 걸 진즉 눈치챘기 때문이다.
‘젊어서 그러나? 혈기가 왕성해.’
어떻게든 사냥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겠다는 왕세자를 상대로 경쟁심을 불태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루벤은 그저 설렁설렁, 젊은 귀족들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데 집중했다. 새로운 에설론 백작이라는 낯선 존재를 어서 엔버네스에 언제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을 신사로 보이게 해야 했다. 사냥이 한창이었다. 누군가는 장전이 짜증 난다며 사냥총을 그냥 두고 활을 들었고, 누군가는 오늘 고기로 잔치를 벌이겠다며 호언장담을 하다가 오히려 사나운 멧돼지에게 쫓겨서 웃음을 선사하기도 했다.
“……응?”
어느 순간, 루벤이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러십니까, 에설론 백작?”
그리고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갑자기 말들이 사납게 날뛰었다. 컹컹, 사냥개가 짖어댔다. 쏴아아아, 바람이 불더니 푸드덕대며 새들이 일제히 날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범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걸 모든 육감을 가진 이들이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이 녀석들이 왜 이래……!”
힘겹게 말을 진정시키며 귀족들이 투덜거렸다. 분명히 무슨 일이 일어났지만 빽빽한 나무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 뱀파이어와 수인들은 어느 한 지점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그 지점의 끝에는 소렐 이드리스가 바실리스크와 대치하고 있었다. 괴로워하는 라이킨의 그림자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거대해져서 해마저 가렸다. 머리 다섯 개가 달린 뱀의 그림자다.
“소렐!”
다급히 도착한 로렌스는 그 그림자를 보자마자 소렐에게로 손을 뻗었다.
“물러나라, 돌이 될지도 몰라! 위험해!”
“저는 괜찮아요.”
바실리스크를 노려보며 소렐이 똑똑하게 말했다. 그 즉시 로렌스는 며느리에게서 손을 뗐다. 그는 ‘괜찮다’고 말하는 대마법사를 신뢰했기 때문이다.
“샤를렌과 아버님은 조금 더 물러나세요.”
그때 막 도착해서 다급히 다가온 샤를렌을 챙겨 물러난 로렌스는 검부터 붙잡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남편을 향해 손을 뻗은 소렐의 눈이 황금빛으로 바뀌고, 그녀의 손그림자가 바실리스크의 머리 중 하나를 홱 움켜쥐자 로렌스는 도로 검을 넣었다. 음, 저 정도의 기백이라면 어쩌면 그가 직접 나서지 않아도 며느리 선에서 정리되겠다.
“내 남편한테 무슨 짓이야, 이 사악한 뱀 같으니……!”
그녀는 이를 갈며 바실리스크의 목을 죄었다.
“아마 저게…….”
보고 있던 샤를렌이 중얼거렸다.
“응, 그래.”
로렌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저게 소렐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욕일 거다. 어쨌든 저 착한 공주님은 정말 무시무시하게 화가 나있었고, 그 기백은 수천 년을 산 로렌스마저 움찔 거릴 정도로 대단했다. 로렌스는 모처럼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보고 느끼는 대마법사의 엄청난 기운이다.
“삽으로 찍어버리기 전에 안 떨어져?”
게다가 참고로 이번 대마법사는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건강한 시골생활을 즐긴 경험이 있는 몸이다. 뱀을 때려잡는 거야 당연히 여러 번 구경해봤다. 파직파직, 불꽃이 튀며 바실리스크와 대마법사의 그림자가 부딪쳤다. 나는 이미 심겨져서 떨쳐낼 수가 없을 거다, 대마법사. 바실리스크는 조용히 선언했다. 너무나 좋은 그릇이군. 그만큼 라이킨이 강력한 뱀파이어이기도 했다. 뱀들의 왕이 차지한다 해도 무너지지 않을 그릇이야. 바실리스크는 군침을 뚝뚝 떨어트리며 대마법사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 그릇에 완벽하게 안착하려면, 대마법사를 삼켜 힘을 얻어야 했다. 이미 뱀은 어느 정도 적응했다. 막을 수 있었다면 진작 막았겠지, 무능한 마법사여.
“아버님, 샤를렌, 제가 길을 보여드릴 테니까 가서 잡으세요. 이 근처 어딘가에 흑마법사가 있어요. 바실리스크의 힘을 일부러 키우고 있으니, 반드시 막으셔야 해요!”
소렐이 손을 뻗자 갑자기 튀어나온 황금색 토끼가 샤를렌과 로렌스에게 따라오라는 듯 허공에서 폴짝거렸다.
“여긴 저한테 맡기시고요!”
“가자, 샤를렌!”
이렇게 가도 되나? 샤를렌은 불안하게 뒤를 돌아보았지만, 며느리의 말에 따라 두말 않고 움직이는 아버지를 믿고 가기로 했다. 소렐은 멀어지는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바실리스크에게 집중했다. 바실리스크의 말이 맞긴 했다. 떼어낼 수 있었다면 진작 떼어냈겠지. 완전히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이미 처음부터 알았다. 그녀는 지금 바실리스크의 영향력을 최대한 축소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날 막는 건 불가능해. 이 자의 모든 욕망의 근원이 바로 너니까.
“내가 우리 남편한테 세상에서 가장 예쁜 사람이긴 하지!”
바실리스크는 순간 말문이 막혔는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대마법사의 공격이 워낙 거세서 대답할 틈이 없기도 했다. 하지만 뱀은 본디 그 혀가 가장 위험한 법. 뱀들의 왕은 지금 가장 커다란 무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이 강력한 자의 욕망은 너도 끊을 수 없어. 그러니 내게 가장 맞는 그릇이 아닌가. 그때 소렐의 눈이 밝게 빛났다. 그녀는 생각해뒀던 가설에 대한 답을 얻어, 씩 웃었다.
“너, 저번 봉인 때 이미 육신을 잃었구나. 그러니까 내 남편한테 기생하는 거고.”
사나운 헬레인 토끼를 함부로 건드리면 곤란하다. 거침없이 적군을 상대로 창을 내지르고, 빠르게 공격하던 토끼들의 기백이 소렐의 무시무시한 얼굴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그거 재미있는데.”
바닥을 긁는 것 같던 바실리스크의 목소리 대신 라이킨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들렸다. 진땀을 뚝뚝 떨어트리며 어떻게든 대마법사의 마법에 순응하려 애쓰는 뱀파이어가 고개를 들었다.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의 입귀가 사납게 비틀렸다.
“그렇다면 내가 고맙게 삼켜줘야지.”
* ‘무슨 일’이 발생했다는 건 웬만한 사람들이 다 알았다. 아주 둔하거나, 사냥에 완전히 정신이 팔린 이들을 제외하면 동물들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고 다 알았다. 그리고 그 ‘일’은 좋은 쪽보다는 안 좋은 쪽에 가까웠다.
“뭐야, 지진인가?”
“혹시 모르니 국왕폐하, 대피를!”
“하늘은 맑은데?”
“조심해요, 짐승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별 거 아닌 일이라고 치부하기엔 짐승들이 울부짖으며 달려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맹수가 포효하는 소리는 멀리서 들어도 오싹했다. 무슨 일이기에 저 짐승들이 한꺼번에 이리도 난리를 친단 말인가. 저마다 시끄럽게 한마디씩 올리는 말에 페르난데스 7세는 먼 하늘을 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폐하!”
“동요하지 말고 가만히 있게.”
페르난데스 7세는 만류하는 이들에게 장갑을 낀 손을 들어보였다.
“거리가 멀지 않은가.”
국왕은 어렴풋이 이 사냥대회에 참여한 발레시나스 공작과 대마법사를 떠올렸다. 그들이 이런 일에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모두가 주춤거리며 긴장한 채 국왕의 시선을 따라 먼 곳을 바라보았다. 페르난데스 7세가 예상했던 대로, 발레시나스 공작은 그 먼 곳에서 빠르게 말을 달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설마 저 작은 토끼가 공주님의 토끼 모습과 똑같은 건 아니겠지?’
샤를렌은 아버지를 따라 달려가면서 생각했다. 그들을 안내하는 황금빛 토끼는 황금색 궤적을 흘려가며 폴짝폴짝 뛰어갔는데, 크기가 유난히 작았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저렇게 작은 아기 토끼가 올케의 토끼모습이라면 맹세코 돌아가서 오빠놈의 등짝을 한 대 더 후려칠 테다. 토끼는 아주 작았지만, 무척 재빨랐다. 혹시 뱀파이어들이 잘 쫓아오나, 한참 달려가다가 한 번 뒤를 돌아봐서 확인까지 했다.
“활을 챙겨라!”
로렌스는 딸에게 외치며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자그마한 토끼는 계속해서 뛰어갔고, 마침내 새카맣게 선 나무들과 눈길 끝에 앉은 흑마법사에게로 그들을 인도한 뒤 바로 사라졌다.
“날 엄호해라!”
“네!”
하지만 엄호하기엔, 샤를렌이 할 일이 없었다. 흑마법사를 지키고 있었던 게 분명한 이들은 눈길 위에 흔적만 남긴 채 사라졌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사라졌네. 하긴 왕이 있는 자리에서 더 크게 일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는 건가?’ 샤를렌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고, 쥐고 있던 날카로운 검도 더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는 아버지가 흑마법사에게 덤벼드는 사이, 주변을 경계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잠복하고 있다가 공격하기 좋았기 때문이다. 또한 주변에 남은 흔적들을 샅샅이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상당히 인원이 많았는데?’
그러나 지금은 주문을 필사적으로 외우고 있는 흑마법사 하나만 남아있다. 저런, 전혀 믿지 못할 동맹이었나 보다. 샤를렌은 아버지가 흑마법사를 제압하는 것을 보곤 말안장에 달린 주머니에서 끈을 꺼내 건넸다.
“괜찮으시겠어요?”
“그럼, 괜찮다마다.”
로렌스는 곧장 생포한 흑마법사에게 재갈을 물리며 별 거 아니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주문을 못 외우게 하면 흑마법사 정도야 간단하다.
“이미 내뺀 것 같아요.”
“그렇구나. 근처에서 느껴지는 건 없니?”
“전혀요. 증거가 될 만한 건 죄다 챙겼나 보네요.”
“이쪽이 증거 아닌가?”
아버지가 가리키는 흑마법사를 본 샤를렌은 고개를 애매하게 저었다.
“글쎄요……. 써먹긴 어려운 증거죠. 동료들을 배신할 리가 없잖아요.”
“그것참 유감이구나.”
샤를렌 역시 그러했다.
“오빠는 괜찮아졌겠죠?”
주문을 외우는 흑마법사를 막았으니, 이제 남은 건 소렐과 라이킨에게 달렸다. * 대마법사는 전대 대마법사들이 보고 들은 것에 대한 기록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별 기상천외한 이야기들을 알았고,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제 몸에 들어온 바실리스크마저 삼켜버리겠다고 말하고, 또 그걸 실제로 시도하는 미친 사람을 보곤 놀랄 수밖에 없었다.
“뭐, 뭘 삼켜요?”
기가 막힌 소렐이 바실리스크를 잠재우다 말고 되물었지만, 라이킨은 이미 제 몸을 잠식하려는 바실리스크와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언뜻 어른거리는 뱀의 커다란 몸통이 뱀파이어의 희고 단단한 송곳니에 찢겨나갔다.
“라이킨, 뭐하는……!”
하지만 소렐은 말을 다 완성하지 못했다. 지금 말을 할 때가 아니었다. 그저 몰아치는 흑마법사의 주문을 막고, 그 주문에 자극을 받아 남편을 삼키려는 바실리스크를 억제해야 했다. 그녀의 눈에 황금빛이 깃들고, 라이킨과 연결된 결합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커다란 마법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하나가 아니야.’
주문을 외우는 이가 하나가 아니다. 여럿의 염원이 담긴 주문이다. 뱀들의 왕은 벌써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래. 하지만, 그게 그래서 뭐 어쨌다고?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야! 겁먹지 마!’
그녀는 대마법사였고, 남편마저 저렇게 애를 쓰고 있는데 그깟 숫자에 밀려날 수 없었다. 눈이 휘날리고, 그녀의 머리카락도 정신없이 휘날렸다. 미친놈. 바실리스크는 자신의 위엄을 드러내는 말 외에는 딱히 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이번만은 참을 수가 없었던지 라이킨에게 욕을 해댔다.
“삼킬 상대의 습성은 잘 알아보고 덤볐어야지.”
새파란 눈이 광기에 젖어 빛을 발했다. 라이킨은 씩 웃으며 바실리스크를 닥치는 대로 물어뜯었다. 형태도 잘 보이지 않고, 의식에 숨어서 기생하는 기생충을 흡혈한다는 건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는 천 년 내리 말도 안 되는 일을 지나치게 많이 겪어왔고, 무엇보다 진창에서 악귀처럼 싸우는 건 자신이 있었다. 활이 없다면 창을 던졌고, 창이 부러졌다면 검을 빼들었고, 검을 잃으면 단검을 들었고, 단검마저 잃었다면 맨주먹으로 싸웠다. 주먹을 내지르고 걷어차고, 머리로 들이받고 이로 물어뜯었다. 소위 개싸움에는 이력이 났다. 뭐든 잡아 뜯을 거다.
“라이킨, 주문이 약해졌어요! 정신 잃으면 안 돼요!”
더구나 지금이 바로 그의 척박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였다. 권태마저 잊고 한참 사랑하는 아내와 알콩달콩 신혼 중인데, 여기에서 한낱 뱀에게 몸을 빼앗기라고? 라이킨은 죽지도 않을 거다. 몸을 빼앗기지도 않을 거다. 무조건 소렐과 함께 인간의 세대가 수천 번 지날 동안 살다가 그녀가 죽고 나서 장례식까지 치러주고 죽을 거다.
“정신을……, 잃을 리가요.”
눈앞이 흐릿해지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지만 정신을 잃을 리가 없었다. 그녀가 하지 말라면 그는 하지 않았다. 목소리만 들어도 몽롱하던 의식이 흔들렸고, 그 명령에는 결코 저항할 수가 없었다. 라이킨은 그저 그가 악귀처럼 싸우는 몰골이 소렐 눈에 아주 처참해보이지만 않길 바랄 뿐이었다. 네가 하는 짓은 소용이 없다. 불가능하다. 저 여자를 당장 먹어. 물어뜯어.
“물어보지 않았으니까 닥쳐.”
닥치고 얌전히 소화나 되시지. 라이킨은 흑마법사의 주문이 끊어지자 기세가 약해진 바실리스크를 상대로 쉬지 않고 욕을 해댔다. 혈투를 벌였지만 바실리스크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뱀들의 왕을 그가 삼키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지금 불가능할 뿐이지, 앞으로는 또 모르는 일 아닌가. 라이킨은 한숨을 쉬며 잠시 눈 위에 주저앉았다. 당장 소렐이 다가와서 양손을 뻗었다.
“괜찮아요? 응?”
“예, 괜찮습니다.”
바실리스크는 잠시 그의 의식 저편으로 떠밀려갔을 뿐이다. 하지만 어쨌든 급한 불은 껐다. 소렐은 그의 대답을 믿는 대신 마법으로 그의 상태를 확인한 후에 한숨을 쉬었다.
“일어날 수 있겠어요?”
“물론입니다.”
그는 손을 뻗어주는 소렐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일어났다.
“자, 그럼 가보실까요, 공주님?”
감히 사냥대회에서 그를 공격한 놈을 잡아다 추궁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