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뱀 (5)2022.01.29.
바실리스크, 그것도 머리가 다섯인 바실리스크를 죽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든 적은 일단 상대 전력부터 파악한 후에 작전을 세우고서 처리하는 게 정석이다. 하지만 로렌스 오블리앙, 발레시나스 공작은 상대가 도대체 어떤 전력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파악할 수가 없어서 골머리를 앓았다.
“파악이 되지 않는다면 파악을 해야지, 그게 무슨 소린가!”
“슈토넨은 현재 삼엄하게 경계가…….”
“경계는 우리도 하고 있어!”
점잖고 온화하기로 유명한 발레시나스 공작이 그렇게 큰소리를 내는 건 또 처음이었다. 수천 년이 넘도록 충심으로 그를 섬기던 뱀파이어들마저 당황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식이 위험하다는데 멀쩡한 부모가 어디 있을까.
“우리가 뚫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 이거야!”
고함을 지른 로렌스는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가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한숨을 쉬었다. 아들의 안에 뱀이 도사리고 있다. 아들은 애써 가족들을 안심시키려고 하기만 할 뿐이다. 그 애는 어릴 때부터 강제로 그런 역할을 해야 했기 때문에 지금도 습관처럼, 착한 아이처럼 굴고 있다. 아버지 속은 그래서 미어졌다. 더 일찍 손을 썼어야 했는데.
“……그 와중에 슈토넨 후작은 왜 엔버네스에 온 거지?”
“국왕폐하를 알현했다고 합니다.”
그거야 엔버네스에 오면 원로인 후작이 늘 하는 일이기도 했다.
“또?”
“그전에는 왕세자전하와 우연히 마주쳤다고 합니다.”
“골고루 다 만났군.”
로렌스 오블리앙은 유난히 날카로워 보였다. 그는 자지도, 먹지도 않았고, 밤낮으로 아들을 살리는 일에만 골몰했다. 그건 이 집 식구라면 누구나 다 마찬가지였다. 소렐은 먼지를 가득 뒤집어쓰고 닥치는 대로 고문헌을 조사하고 있었고, 샤를렌도 모든 일을 중단하고 아버지를 도왔다. 라이킨은 평정을 유지하며 평소대로 행동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러면 폐하께서 날 또 부르시겠군.”
모든 권력을 가진 이들은 기본적으로 의심이란 걸 한다. 그 의심의 깊이가 보통 사람보다 훨씬 깊을 뿐이다. 인간의 왕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고군분투할 수밖에 없었다. 정작 인간의 숫자가 훨씬 많아서, 이미 수백 년간 이어진 왕권인데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의심한다. 페르난데스 7세는 어디부터 어디까지, 또 얼마나 의심할 것인가. 그는 노련하고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뱀파이어 두 사람을 양쪽에 놓고 저울질을 하고 있을 터였다. 로렌스는 파이프를 물었다. * 슈토넨 후작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슈토넨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물 샐 틈 없이 방비를 하고 있다는 것만 봐도 그가 그 지역에서 오래도록 국경을 지켜왔던 변경백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하긴 로렌스 오블리앙 공만큼 오래 산 뱀파이어가 어디 만만하겠는가. 그는 뱀파이어 보수파의 우두머리였고, 지금 라이킨이 정리를 좀 했다지만 여전히 보수파는 존재했다. 라이킨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는 소렐도 그 사실을 알았다. 시아버지만을 믿기엔 만만치 않은 상대다.
‘하긴 흑마법사들을 여태까지 철저하게 숨기고 있는 사람이니까…….’
흑마법사들이 이렇게까지 보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라이킨의 수하들이 훑지 못한 곳이 딱 한 군데, 슈토넨밖에 없으니 지금 그들이 그곳에 있을 거라고 보는 게 타당했다. 게다가 더 결정적인 건, 소렐이 슈토넨을 감싸고 있는 수상한 기운을 감지하고 있다는 거였다. 라이킨에게 몰리고 있던 와중에도 흑마법사들과 함께 손을 잡고 어떻게든 반격을 하는 슈토넨 후작을 경계해야 했다.
“……웬 사냥?”
그녀는 그 와중에도 칼리에르 공비로서 충실히 업무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지금 바실리스크와 하루 종일 싸우는 중이다. 라이킨은 결코 내색하지 않았고, 평소처럼 쾌활하면서도 정중하고 여유로운 모습을 잃지 않았지만 소렐은 알고 있었다. 대마법사가 되면 차라리 모르는 게 뭔지 꼽는 게 더 빨랐다.
“이 겨울에, 사냥?”
소렐은 왕실에서 여는 대규모 사냥대회가 있을 거라는 기사를 읽다가 쌓인 초대장을 뒤적거렸다. 아직까지 초대장은 발송되지 않은 모양이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도 소렐은 빠르게 초대장을 분류해서 대충 답장을 보낼 것만 골라놓았다.
“뭐가요, 공주님?”
라이킨이 그녀의 혼잣말에 반응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무척 조심하고 있으면서도 눈앞에 소렐이 보이면 참지 못하겠다는 듯 당연히 다가와 손을 뻗어 안고 입을 맞췄다.
“이거. 겨울에 무슨 사냥일까요?”
그녀는 얼른 그의 뺨에도 마주 입을 맞춰주며 신문을 보여줬다.
“아. 연례행사입니다. 공주님께서는 처음 가보시겠군요.”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한동안 가만히 기사를 훑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꼭 안다 못해 자신의 얼굴에 갖다 붙인 상태였다. 소렐은 그게 좋아서 자꾸만 그에게 기댔다. 라이킨에게서는 서늘하고 기분 좋은 냄새가 난다. 그녀를 당연하다는 듯이 단단히 품에 안는 것도 좋았다. 그도 그녀가 그의 목덜미에 기대 배시시 웃는 걸 무척 좋아할 것이다.
“……아무래도 빠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응? 빠지지 않고 당연히 참석해야죠. 당분간은 엔버네스에서 지내기로 했는데, 글래스턴 공작님이 이런 중요한 왕실 행사에 안 나가시면 어떡해요?”
소렐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지만, 라이킨은 신문을 내려놓고 그녀의 허리만 감싸 안을 뿐이다.
“귀찮은 건 안 해도 됩니다.”
“사냥이 귀찮아요?”
아내의 어깨 위에 얼굴을 묻은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어쩔 수 없이 나가야 한다는 상황이 귀찮습니다.”
“그쵸. 지금은 정치적으로도 열심히 얼굴을 내보여야 하고, 입지도 굳혀야 하니까요.”
“이미 입지는 천 년 동안 굳힐 만큼 굳혔는데 말입니다.”
라이킨은 한숨을 쉬었다.
“인간은 너무 빨리 죽습니다. 새로운 왕에게는 적당히 눈도장을 찍어야 하니 그 또한 귀찮군요.”
“나한테는 눈도장 제대로 찍었으니까 나로 위안을 삼는 게 어때요? 게다가 나는 아주 오래 살 거거든요.”
씩씩한 토끼의 말에 라이킨의 웃음이 터졌다. 머릿속에서 가끔 음습한 불청객이 짜증나게 떠들어대는 와중에도 소렐은 그를 웃게 했다. 희망을 주었다.
“저와 얼마나 오래 살아주실 겁니까?”
서늘한 입술에 호선이 그려졌다. 그대로 대답하기 위한 입술을 제외하고 그는 쉴 새 없이 소렐에게 입을 맞췄다. 이렇게 예쁜데 가만히 둘 수가 있어야지. 깜빡거리는 눈가에도, 말랑한 뺨에도, 부드러운 머리카락 끝에도 죄다 키스가 떨어졌다.
“라이킨이 지금 아버님만큼 나이가 들어도 곁에 있을 거예요. 아, 그건 당연한 거지. 음…….”
“오래 사세요, 공주님.”
그가 눈을 휘어가며 웃었다.
“오래오래 살아서, 제가 지겨워져도 그래도 함께 있어주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서 지루하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그건 내가 할 말인데.”
소렐이 그에게 기대며 키득거렸다. 그들은 마치 바실리스크를 상대할 일은 없을 것처럼 굴고 있었다.
“저는 공주님께 질릴 리가 없습니다.”
“뭐 때문에 그렇게 확신하는데요?”
그녀는 소리 내어 웃어가며 책상 위에 놓인 초대장을 밀어놓고, 편지들을 꺼내왔다. 어찌나 칼리에르 공비이자 대마법사의 조언을 구하는 편지들이 많은지, 그중에서 시답잖은 것들을 분류해내고 빼버리는 것도 일이었다. 하지만 라이킨은 그녀의 손에서 편지들도 초대장과 함께 쭉 밀어냈다.
“이런 것에는 마음 쓰지 마십시오. 대마법사의 조언을 너무나 쉽게 얻는다면 나중에는 공주님만 골치 아파지실 테니까요. 그리고……, 저는 공주님을 항상 일찍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소렐의 손을 잡고 하나하나 만져보았다.
“정말 다행이지요. 더 일찍 만났다면 좋았을 거라고도 생각합니다. 공주님의 모든 걸 놓치고 싶지 않아서요.”
대마법사가 된 후에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었지만, 만일 그랬다면 몹시 서운할 뻔했다. 소렐이 대마법사가 되기 전, 호기심이 가득한 때도 보았고 그 후의 여러 가지 모습을 함께해서 무척 기뻤다.
“저와 함께 사시는 게 늘 즐거울 수는 없겠지만, 지금 이 상황처럼요. 하지만 제가 항상 노력하겠습니다.”
당신이 즐거울 수 있도록, 또 행복할 수 있도록.
“그러니 기대해주세요.”
“이미 기대하고 있어요!”
그녀는 라이킨의 팔을 끌어안았다. 꼭 지켜줘야지. 꼭 몸 안에 있는 바실리스크를 빼내줘야지. 반드시 그렇게 해주고, 행복하게 같이 살 거다. 죽지 않을 거야. 절대로.
“아무튼 올겨울도 참 바쁘겠군요. 겨울 사냥은 맹수들 개체 수를 줄이는 데 필요한 일이지만, 솔직히 다들 즐기는 운동 종목이지요.”
라이킨은 한숨을 쉬며 신문을 밀어놓았다. 아무리 치워내도 소렐의 책상은 여전히 복잡하다. 그게 꼭 그녀가 감당해야 할, 그리고 그가 지금 참아내고 있는 문제 같았다.
“그래요? 그럼 기대를 많이 해야겠네요.”
“어째서?”
“라이킨이 제일 많이 잡을 거잖아요.”
당연하다는 듯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는 얼굴에 당해낼 수가 없었다.
“이런, 제가 열심히 노력해야겠군요.”
공주님께서 기대하신다니, 그 기대에 부응해야지. 낚아채. 목을 꺾어. 마셔. 라이킨은 활짝 웃는 아내에게 마주 미소를 보여주며, 몸 안 깊숙한 곳에서 속삭이는 목소리는 그대로 매장해버렸다. 목이 타들어간다. * 귀족들은 전부 합법적인 살인 무기를 저마다 손질하기 시작했다. 장전하고 발사하는 데 오래 걸리는 사냥총보다는 활을 선호하는 이들도 아직 많았다. 가죽을 손질하기 위한 단도도 번쩍번쩍했고, 혈통 좋은 말들도 전부 나설 준비를 마쳤다. 모두가 두터운 옷과 반질반질한 안장을 자랑하며 나섰다. 바야흐로 겨울에 민가에 내려오는 맹수들을 잡기 딱 좋은 시기가 도래했다!
“……말이 거창하긴 한데.”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엔버네스 공식행사에 나타나 멋들어진 사냥복을 맵시 있게 입어 눈길을 끌고 있는 샤를렌은 사냥총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결국 민가 핑계대고 여기까지 나와서 사냥이나 즐기겠다, 이거 아니냐고.”
이곳은 엔버네스에서도 상당히 떨어진, 말하자면 왕의 별궁이 있는 곳이다. 소렐은 고삐를 쥐고 아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아직까지 늑대나 멧돼지, 심하면 호랑이까지도 나오는 모양이던데요.”
“그중에는 수인도 있어요. 티를 안 내서 그렇지. 동물인 척 흉내 내고 민가를 습격하기 좋거든.”
“아하.”
소렐은 무슨 말인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건 사소한 일이고.”
샤를렌의 푸른 눈이 왕, 왕과 함께 말하고 있는 아버지, 어쩐지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것 같은 젊은 왕세자, 저 멀리 끄트머리에 있는 슈토넨 후작, 여러 유력 귀족들과 새로 귀족이 되어 이런 자리에는 꼭 참석하는 새 에설론 백작 등을 거쳐 오빠와 소렐에게로 돌아왔다. 이들이 정기행사에 참여한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이젠 모든 가족이 다 나왔네요.”
“아, 대마법사까지 되었겠다, 소명 절차도 끝났고, 이젠 당당해도 되는데 뭐 어떻소?”
“참 드문 일 아닙니까. 저렇게 다 나오는 게…….”
“앞으로는 종종 보게 될 일이겠지요!”
당연히 사람들의 주목도 끌고 있었다.
“자, 공주님. 옷 단단히 여며요. 추우니까.”
언론을 상대하는 노련한 변호사답게 들을 말들은 다 듣고 있던 샤를렌이 무심코 말하다가, 이미 소렐의 옷깃을 정리해주고 있던 오빠를 발견하곤 눈을 가늘게 떴다.
“하긴 내가 말해 뭐해…….”
“샤를렌도 따뜻하게 하고 다녀요.”
“나야 걱정하지 말아요, 공주님.”
샤를렌은 고개를 흔들곤 이쪽으로 말을 몰아오는 아버지에게 슬쩍 물었다.
“왕이 뭐래요?”
“왕다운 짓을 하고 있지. 슬쩍 떠보면서도 결코 본심은 말하지 않아. 그건 그렇고 오늘 다들 참 따뜻하게 잘 입었구나. 잘했다, 잘했어.”
아버지는 늘 아이들의 옷차림을 신경 썼다. 이 겨울에 사냥을 다니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안 되니까. 물론 샤를렌은 다 큰 지 오래인 성인이라, 중요한 말에만 대답할 뿐이다.
“슈토넨 후작한테 무슨 소리를 들은 게 분명하네요.”
“응. 맞아. 왕이 자꾸 날 쳐다보고 있거든.”
라이킨이 빙긋 웃으면서 대꾸했다.
“의심 가득한 시선인데?”
“조심해, 오빠. 심상치가 않아.”
순식간에 밀어닥친 사냥대회라. 샤를렌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말을 몰아 앞서 나갔다. 페르난데스 7세의 시선이 여전히 칼리에르 일가가 있는 곳을 안 그런 척하면서도 배회하고 있었다.
‘왕국에 두 명의 다른 후계자가 있군요, 폐하.’
슈토넨 후작은 오랜만에 원로의 소견을 드린다며 그런 말을 흘려 넣었다. 하나는 여태까지 큰일 없이 잘해내고 있는 왕세자고, 하나는 헬레인 왕가의 후계자인 칼리에르 공비다.
‘주의하시지요.’
헬레인 공주가 엘펜하임에 대해 정당한 복수를 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리고 엘펜하임은 무너졌고, 옛 헬레인 왕궁은 누구나 차지해도 좋을 지경으로 비어있었다.
‘칼리에르 일가가 보통 무기입니까.’
왕조를 세워도 좋을 정도로 강력한 일가였다. 혼자 글래스턴 ‘공국’을 다스린 지도 오래다. 하긴 올센이 전대 칼리에르 공이 없었다면 이 정도로 성장하지도 못했을 거다. 하지만 그런 그들이 다른 나라로 빠져나간다면, 올센의 국토 중 알짜배기가 뚝 잘려 나갈 거다. 게다가 나중에는 발레시나스, 그 따뜻한 곡창지대까지 빼앗기겠지.
‘허나, 추측은 말 그대로 추측일 뿐이지.’
여태까지 발레시나스와 글래스턴은 최선을 다해 올센에 충성을 바쳐왔다. 뱀파이어들도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는 최상의 환경을 만들었고, 그를 위해서 올센 수호에도 온몸을 바쳤다. 당장 저기 있는 칼리에르 공도 천 년을 내리 올센을 지켜온 이가 아니던가.
‘섣부른 의심은 금물이야. 까딱하다간 오른팔과 왼팔을 다 잃을 수 있어.’
본래 통치자가 하는 게 의심이 아니던가. 페르난데스 7세는 칼리에르 일가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그는 천 년의 역사와, 올센에게 바쳐진 충성을 무시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그저 지켜만 볼 뿐이다. 사냥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