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뱀 (4)2022.01.26.
전부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지지부진한 진척 상황에 슈토넨 후작에겐 미루고 미뤄뒀던 불안감이 드디어 다시 엄습했다. 도대체 한 게 뭐가 있는가?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에게 조그만 상처를 낸 것 정도? 발레시나스 공작이 전부 다 장악한 엔버네스 정치가에 그가 더 발을 들이기도 어려웠다.
‘……내 실책이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내내 칼리에르 공에게 밀려나기만 했고, 수많은 반격조차 다 실패했다. 마지막 수를 생각해봐도 뾰족한 게 없는데, 그가 차선으로 선택한 동맹인지 밥만 축내는 식객인지 모를 것들은 아직까지도 신나서 들떠 있었다. 아무런 효과도 없는데 말이다. 그들은 또 모이더니, 이번에는 돌바닥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뭘 하는 건가?”
“뭘 하는 거긴요.”
흑마법사들의 입이 슈토넨 후작을 돌아보았다.
“우리가 칼리에르 공에게 ‘그분’을 심었잖습니까.”
“별로 효과가 없는 것 같던데.”
“성미가 급하시긴. 뭐든 긍정적으로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슈토넨 후작이 서늘한 시선으로 흑마법사들을 바라보았다.
“예. 그분께서 하실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 도와야겠지요. 아무래도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으신 분인지라. 몸의 중심부로 파고들어 뇌를 파먹고 심장을 중독시켜야 합니다.”
“벌써 되었어야 하지 않나?”
“그렇게 쉬웠으면 우리가 나서기도 전에 후작께서 벌써 처리를 하시고도 남았겠지요.”
흑마법사들의 입은 그 와중에도 할 말은 다 했다.
“즐거워 보이는군.”
“당연히 즐겁다마다요. 잘만 하면 강력한 뱀파이어를 숙주로 삼킬 수 있게 된 겁니다.”
발상의 전환이라더니,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허면 ‘그분’도 더 쉽게 모습을 보이실 수 있겠지요.”
슈토넨 후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때는 대마법사도 막을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후작은 더 이상 이들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저 말을 도대체 몇 번이나 듣는 것인가. 그리고 만일 저들이 말한 대로 된다면, 대마법사조차 막을 수 없는 힘을 누가 막는다는 거지? 슈토넨 후작은 슬슬 자신의 선택에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후회는 언제나 늦는 법이다. * 샤를렌은 연신 콜록거리며 오빠를 쳐다보았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표정으로 아내를 보는 오빠의 표정으로 미루어 보건대, 부부간에 상호합의가 안 된 이야기다. 하긴 저 말을 오빠가 그냥 찬성할 리가 없지.
“……공주님.”
라이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 뭘 잡겠다고 하시는 겁니까.”
그의 목소리가 무섭게 낮아졌다.
“머리 다섯 달린 바실리스크.”
로렌스가 대신 대답했다.
“잡지 않으면 네가 그놈에게 먹힌다.”
아버지는 아들을 그냥 둘 수가 없으니, 솔직히 며느리 말에 찬성이었다. 아들이 보통 뱀파이어던가. 그가 아직까지도 잊지 못하는 여자가 기어이 만들어낸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뱀파이어다. 물론 그렇게 만들어낸 아들이 기껏 대마법사의 가디언 노릇을 하고 있다니 아내가 안다면 뒤로 넘어갈 일이지만, 로렌스는 그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 나쁜 일은 아들이 잘못되는 거다.
“분명히 옛 마법사가 목숨을 바쳐서 봉인한 놈이라고 하셨잖습니까.”
라이킨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소렐을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안 됩니다.”
라이킨은 소렐에게 정색을 해 보였다. 아버지와 샤를렌이 보고 있는 자리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얼마나 더 말을 해야 그녀가 그의 마음을 이해해줄 건가?
“공주님께 안 된다는 말을 하는 건 정말 싫지만, 그래도 안 됩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예요.”
“나는 대마법사로서 말하는 거예요.”
소렐은 그렇게 말하곤 다홍색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안 그래도 가라앉은 분위기가 더 심각해졌다. 샤를렌은 미간을 좁히며 잠깐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 오빠, 잠깐만. 공주님이 무슨 방법이 있으니까 잡겠다고 했겠지. 안 그래?”
분명히 무슨 방법이 있으니까 선뜻 잡겠다고 나선 걸 거다.
“……그런 건 아직 없고요.”
소렐은 고개를 저었다. 그 어마어마한 고대의 존재를 어떻게 잡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반드시 잡아야 해요. 그게 대마법사가 마땅히 할 일이지요.”
눈을 부릅뜬 라이킨은 말을 더 하지도 못했다. 그녀의 말에 동의하는 게 아니라, 할 말을 잃었기 때문이다. 머리가 순식간에 터져나갈 것 같았다. 어떻게 저 말을 저렇게 쉽게 하는가. 목숨을 걸고라도 그의 목을 휘감은 뱀을 떼어내겠다고? 차라리 뱀을 달고 있는 남편과 오래 살 궁리라도 해주시지. 어떻게 저런 말을 저렇게 쉽게 할 수 있지? 어떻게? 그녀가 없으면 그는 어떻게 살라고?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알겠구나.”
로렌스가 무겁게 중얼거렸다.
“언제나 대마법사들은 그랬지.”
해야 할 일을 찾고, 겨우 계승자를 찾아 고대마법을 물려주고, 그리고 제 한 몸을 기꺼이 희생했다. 강력한 힘을 가진 자들의 숙명이기도 했다.
“하지만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지는 말자. 우리 함께 대책을 강구해봐야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로렌스는 이미 소렐이 뭔가를 각오했다는 걸 알았다. 언제부터 저런 생각을 했을까? 아마 라이킨이 뱀에게 물렸을 때 이미 결심한 일인지도 모른다. 아들의 푸른 눈은 마구 흔들리고 있었지만, 소렐의 까만 눈은 전혀 흔들리지 않고 반듯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지금 바실리스크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게 몹시 신경 쓰여요.”
그건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봉인이 풀렸다면 바로 모습을 드러내서 강제로 봉인되었던 세월만큼 미쳐 날뛸 텐데, 왜 조용할까? 대마법사는 점점 더 안 좋은 결론이 나오는 게 두려웠다.
‘……어쩌면 정말 라이킨의 육신이 필요해서 이런 일을 벌인 건지도 몰라.’
“그래, 생각을 해봐야겠다.”
로렌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실리스크가 어떻더라. 기억을 더듬을 것도 없었다. 꼬리를 한 번 휘두르면 산을 파괴하고, 강줄기를 바꾸는 무시무시한 뱀은 쉽게 잊기 힘든 법이다.
“그런데, 소렐?”
소렐이 고개를 들었다.
“모든 대마법사들이 그래야 한다지만 너는 특별하잖니. 저 녀석이 없으면 조금 곤란하지 않아?”
로렌스가 가리키는 건 다름 아닌 아들이었다.
“곤란해요. 너무 곤란해요.”
그녀는 또렷하게 말했다. 남편이 눈이 벌겋게 물들어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잘 알았다.
“그래서 더 문제예요. 가디언이 바실리스크에게 잠식당한다면…….”
“고대마법도 위험하지.”
로렌스는 말을 받으며 탄식했다. 라이킨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제기랄. 속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저들이 이것 또한 노렸구나.”
얻어걸린 거다. 소렐은 그렇게 생각했다. 대마법사와 가디언의 사이가 이토록 긴밀하기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지만, 흑마법사들은 라이킨이 일부 결합점까지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은 몰랐을 거다. 그렇게 가까운 사이니, 독을 뿜어대는 뱀들의 왕이 라이킨의 의식까지 차지한다면 결과는 재앙이다. 흑마법사들에게는 얻어걸린 행운이나 다름없었다.
“쉬운 게 없지.”
라이킨은 아버지마저 부정하지 않자 고개를 숙였다. 그가 위험하면 소렐도 위험해지는 게 당연하니, 어떻게 하지 말라고 반대하겠는가. 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무엇 하나 쉬운 게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어. 자, 자세를 반듯하게 하렴. 따뜻한 음식을 먹고 몸을 덥힌 뒤 다들 머리를 맞대어보자. 아무리 골치 아픈 일이라도 힘이 나야 해치울 수 있는 법이야.”
* 카메론 셀레스트는 엘펜하임이 없이도 멀쩡하게 돌아가는 세상을 목격했다. 그만 본 것이 아니라 겨우 도망쳐 나오거나, 다른 곳에 파견 나갔다가 용케 화를 면한 성기사들도 보았다. 엘펜하임은 이미 썩은 기둥에 간신히 걸쳐져 유지만 되고 있던 단체라는 걸 확실하게 알았다. 딱히 알고 싶지 않았던 일이기도 했다.
“이젠 어떻게 할까요?”
모두가 결국 우두머리를 쳐다보기 마련이다. 그리고 지금 엘펜하임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공교롭게도 글래스턴 지부장을 지냈던 카메론밖에 없었다.
“……몸을 낮추고 어둠 속으로 들어가 목숨부터 부지해야지.”
그는 여러 성기사에게 여러 번 말했던 말을 다시 한번 반복했다.
“그런 뒤에 어떻게 살지, 각자 알아서 선택해.”
모두가 혼란스러울 거다. 어떻게 지금 이 상황에서 바로 마음을 결정할까. 하긴 이미 마음을 결정한 이들은 모두 떠났다. 살아 있는 게 분명한데도 모습이 보이지 않는 이들은 이름을 지우고 떠난 거다. 엘펜하임은 이미 침몰했다.
“일단은 사는 것만 생각해라. 이 시기에는 살아남는 것도 힘들어.”
명망 있는 교수 직함으로 어떻게든 외국에 가서 잘 살 수도 있겠지만, 카메론은 기꺼이 가장 밑바닥을 전전하며 검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사실은 그도 뭘 할지 정확하고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없었다. 그렇다고 대마법사에게 복수를 외치는 얼간이는 아니다. 이토록 참혹하게 패배하고 본부를 지킬 힘도 없는데 복수는 무슨.
‘목숨을 부지하고 몸을 추슬러야지.’
뭐든 그다음이다. *
“결국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유능한 인재가 슈토넨에서 전부 사라졌다. 조슈아의 보고에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족들에게는 예의를 갖춰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보상해주고, 유족이 없는 쪽은……, 우리 가족 석실에 장례를 치르지.”
“예, 마스터.”
그 후에도 길고 긴 보고와 지시가 이어졌다. 소렐 역시 지금 고문서를 들여다보고, 영지 일을 처리하느라 바빴다.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도 없기에 밀려드는 초대장과 행사들도 문제였다.
“……그러면 이렇게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조슈아가 보고를 마치고 지시사항을 한 아름 안은 채 나갔다. 지금 모든 뱀파이어들의 신경은 슈토넨으로 향하고 있었다. 감시의 눈길이 더 사나워지고, 슈토넨에서 꼭꼭 감추고 있는 게 뭔지 알아내려고 혈안이 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걸 지휘하는 건 결국 라이킨이었다.
“……아.”
그는 침착하게 중얼거리며 눈을 지그시 눌러 감았다. 목이 바싹 말랐다. 이 서재에 살짝 남은 유일한 향을 게걸스럽게 들이마셨다. 눈을 다시 뜬 뱀파이어의 눈동자가 먹이를 찾아 차게 빛났다. 사냥감의 흔적을 찾아 욕망을 세우는 포식자의 본능이 으르렁거렸다. 새빨갛게 뚝뚝 떨어지는 피, 뽀얀 살결을 따라 흘러내리는 피, 그 피로 목구멍을 가득 적시고 싶었다. 어서 가서 마셔. 그의 몸 안에 들어온 독이 원하는 건 아주 분명했다. 라이킨에게 가장 깊숙하게 이어진 여자에게서 피를 남김없이 다 빨아 마시라는 파괴적인 욕구를 자꾸만 자극하고 있었다. 새파란 눈에 살기가 돌았다.
‘건방지게.’
감히 남의 몸에 파고들어 기생하는 버러지 주제에. 라이킨은 그의 뇌를 잠식하려고 하는 욕구를 찍어 눌렀다. 마치 적의 목을 그대로 잡아채서 흙바닥에 처박듯이 그렇게 눌러 내렸다. 어딜 감히 그를 조종하여 소중한 대마법사를 해치려 든단 말인가. 다른 건 몰라도 그를 이용해서 소렐을 다치게 한다는 건 용납할 수가 없었다. 라이킨의 길고 강인한 목에 힘줄이 솟았다. 집어 삼켜 버려. 어차피 너도 못 참겠잖아? 한 번만으로는 성에 차지도 않잖아. 뱀은 그가 뭘 참고 있는지 다 안다는 듯이 웃었다. 나보다 더 욕심 사나우면서. 라이킨은 사납게 웃었다. 그건 맞는 말이다. 겨우 한 번은 너무 감질나지 않아? 맛있었잖아. 더구나 소렐은 더 주겠다고 그를 끌어당겼다.
‘닥쳐.’
라이킨은 이를 사려 물면서 속삭이는 살인욕구를 억지로 떼어냈다. 하지만 뱀이 지적한 대로 그 역시 본능적으로 욕심이 사나운 사람이라, 자신의 욕구까지 함께 거세해야 했다. 물론 그 욕구가 잠시 참는 것만으로 완전히 식을 리가 없었다. 그는 당장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자고, 아침에 눈을 떴다. 그녀와 공유하는 일상 하나하나가 이젠 자극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너무나……, 죽이고 싶었다. 맛있지. 몸서리칠 만큼 황홀한 감각을 되새기라며 뱀이 속살거렸다. 혀를 타고 넘어가던 매끄러운 느낌, 풍미, 뇌를 터트릴 것 같던 그 맛. 거기에 더해서 손에 감겨드는 부드러운 감촉과 따뜻한 체온, 기꺼이 그에게 목숨을 내주겠다고 말하며 웃던 모습까지. 목숨이라니. 쾅! 서재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뭔가가 부서졌다. 순식간에 두터운 나무로 공들여 만든 커다란 책상이 반파되었다. 다시 라이킨이 눈을 떴을 때 그의 눈 안에는 서늘한 살기만이 가득했다. 닥치라고 했는데도 닥치지 않았다면 구석으로 몰아넣어 목을 조르는 수밖에. 건방지다. 심히 건방졌다. 남의 몸에 기어 들어와서 기생하는 것밖에 안 되는 놈이 감히 뱀들의 왕이라는 칭호 따위를 가지고 있는 것도 시건방진 일이고, 감히 소렐을 떠올리게 하는 것조차 건방진 일이다. 그런 와중에 계속 라이킨을 자극하는 것조차 주제넘은 일이 아닌가.
“라이킨?”
바깥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나이가 되어서, 그보다 어린 아내가 죽음을 각오하게 할 수는 없었다. 책상을 쥐는 손에 힘줄이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