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뱀 (3)2022.01.22.
샤를렌은 머리를 짚었다.
“고대생물이라니, 그런 건 우리 어릴 때나 좀 있었던 거 아니야?”
“펠릭스가 거의 다 때려잡았지.”
라이킨은 손을 깍지 끼고 무릎 위에 팔꿈치를 세웠다.
“하지만 바실리스크는…….”
“바실리스크는 펠릭스 이전의 마법사들이 상대하던 것이다.”
침묵하던 로렌스가 아들의 말에 끼어들었다. 그의 표정이 대단히 복잡했다.
“너희가 태어나기도 전이지. 까마득한 고대의 이야기인데 그게 엘펜하임에 잠들어 있을 줄이야. 그놈들이 바실리스크를 봉인할 정도로 대단한 힘을 가졌는……, 아니, 아니지. 거기가 원래 헬레인 왕궁 옛 터이니…….”
로렌스는 한숨처럼 담배연기를 내뱉었다.
“선한 사람들이 많고, 용맹한 전사들이 노래를 부르며 진군하던 때의 이야기로구나.”
“네.”
소렐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이 생동하고 누구에게나 깃들던 시절이죠. 제가 지키는 이 마법이 완성되던 때예요.”
말 그대로 ‘고대’였다.
“……헬레인 왕조가 엘펜하임에게 그리 되어버린 것에는 많은 설이 존재하지.”
로렌스의 말에 라이킨이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는 알고 계십니까?”
“나이를 나 정도로 먹었으면 그 정도는 마땅히 눈치챈단다. 그리 부유하고 그리 강대했던 나라가 어떻게 그런 날강도들에게 당했겠니. 크게 타격을 입었던 때가 있다는 거지.”
조심스럽게 들어온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이 차 수레를 끌고 와서 찻잔과 찻주전자를 내려놓았다. 타닥타닥 벽난로가 장작을 태우며 기분 좋은 소리를 냈고, 차가운 창가에 드리워진 커튼은 글래스턴 공작저의 유서 깊은 역사만큼 두껍다. 앉아 있는 이들이 살아온 세월은 그보다 더 길었고, 가장 어린 사람마저 그들보다 더 오래된 지식과 힘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하기 어렵다 못해 불가능한 존재가 나타났다는 걸 깨달았다.
“대충 끼워 맞춰지는구나. 헬레인 왕궁은 신성한 곳이었지. 그래서 더 엘펜하임이 노렸던 거고. 그래……. 그런 자리라면 바실리스크를 봉인해둘 수 있었을 거야.”
지상에 바실리스크를 봉인할 수 있는 자리가 별로 없었다. 그 정도로 사악한 존재가 봉인되었다면 분명히 대지가 썩고, 식물이 말라죽으며,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일 거다. 로렌스는 중얼거리다가 문득 소렐에게로 고개를 돌리더니, 파이프를 내려놓았다.
“헬레인 왕가에 경의를 표하마. 수많은 희생이 따랐을 텐데도 왕궁자리까지 내줘가며 반드시 사라져야 할 존재를 봉인했구나.”
“어쩌면, 어쩌면 엘펜하임이 외할아버지의 예언과 함께 봉인했을 수도 있잖아요?”
소렐은 약간 남아 있는 가능성을 무시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로렌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놈들은 그럴 능력이 없어. 일부러 바실리스크가 봉인된 자리에 예언을 함께 봉해버렸다면 또 모를까.”
발레시나스 공작은 이미 와해된 엘펜하임 기사단에 대해 가차 없이 평가했다.
“머리가 다섯이나 되는 바실리스크가 나타났다간 꽁지를 말고 도망가겠지.”
듣고 있던 샤를렌이 미간을 좁혔다.
“봉인밖에 안 되나요? 죽이는 건?”
그 말에 소렐에게로 시선이 모아졌다.
“……아마 봉인을 한 마법사도 대단히 큰 대가를 치렀을 거예요. 최선이 봉인이었을 거고요.”
그녀는 바실리스크의 독을 품고 있는 남편을 보다가 고개를 숙여 자신의 양손을 바라보았다. 이 손으로 할 수 있는 치료방법이 뭐가 있을까.
“강력한 마법사가 목숨을 바쳐서 봉인을 했을 가능성이 커요. 하지만 세월이 많이 지나기도 했고, 또 이번에 봉인이 깨진 충격에 함께 풀려났을 거고…….”
그래서 라이킨의 몸을 차지해서 대마법사를 건드리려는 거고. 다시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았다.
“그러면 완전히 봉인이 풀린 바실리스크가 흑마법사들의 손에 들어갔다는 얘기예요?”
샤를렌의 목소리가 떨렸다.
“정확하게는 바실리스크를 흑마법사들이 모시고 숭배하는 거지.”
독에 당했으면서도 혼자 침착한 라이킨이 대답했다. 그는 때때로 격한 충동에 시달리면서도 겉으로는 아주 멀쩡하고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엘펜하임이 망한 덕분에 그놈들만 신났군. ……바실리스크라.”
로렌스는 고개를 끄덕여주다가 그만 한숨을 쉬고 말았다.
“내가 너무 안일했다.”
“그건 아니고요.”
라이킨이 펄쩍 뛰며 바로 잘랐다.
“아버지는 하실 만큼 하셨습니다.”
“아니, 아니야. 이런 짓을 흑마법사들끼리만 했을 리가 없어. 그놈들은 누구나 다 돌을 던져서 쫓아내는 놈들이야. 도망치기 바쁜데 바실리스크라고?”
로렌스가 코웃음을 쳤다.
“누군가가 그놈들의 뒷배를 봐준 거지. 안 그러냐?”
“카메론 셀레스트가 나타나서 흑마법사가 슈토넨 변경백과 손을 잡았다고 하더군요.”
“확인은?”
“아직 하는 중입니다.”
“중간보고는?”
라이킨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로 마음에 들 만한 보고는 없다는 뜻이었다.
“별 이상 없는 것 같다는 보고 하나, 수상한데 안으로 더 뚫을 수가 없어서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보고 둘입니다.”
“내가 나섰어야 했어.”
“아버지. 이미 계속 일하셨잖습니까. 이 일은 저와 공주님이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
“자식이 바실리스크에 물렸는데 가만히 있을 부모가 어디 있어?”
아마 ‘그 여자’, 아버지 인생의 단 하나뿐인 여자는 가만히 있었을 수도 있겠다. 이 또한 주어진 시험이니 알아서 해결해보라고 등을 떠밀었겠지. 시답잖은 생각이 잠시 라이킨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기나긴 학대 기간 동안 무의식중에 심겨진 냉소적인 사고방식이었다.
“바실리스크는 대마법사들의 영역이었다. 뱀파이어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어. 나는 머리 하나짜리 바실리스크를 보았지만, 말 그대로 ‘본 것’뿐이다. 이 일은 소렐이 하자는 대로 해야 해.”
로렌스는 침음을 흘렸다.
“우리에겐 아무런 선택권이 없어. 모든 건 대마법사가 결정한다. 특히 고대 생물은 더더욱.”
더더욱 대마법사의 영역이다.
“……흑마법사들이 가만히 있지 않겠지.”
“네.”
소렐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억제하지 않으면, 언제 바실리스크에게 라이킨이 잠식될지 모르니…….”
그 사악한 존재에게 완전히 종속된 뱀파이어 병기가 된 남편과 마주할 수는 없었다. 결코 그럴 수는 없었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로렌스가 조용히 물었다.
“어떻게 할 거니?”
일가가 모두 대마법사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네가 하자는 대로 따르도록 하마.”
“잡아 죽여야죠.”
흑마법사를? 샤를렌은 소렐을 바라보았다.
“바실리스크를요.”
대마법사의 살벌한 결론에 차를 마시다 말고 사레가 들린 샤를렌의 괴로운 기침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남편이 당했기에 분노한 대마법사의 눈만 이글거릴 뿐이었다. 죽일 거다. 그래야만 했다. 설령 그녀가 무슨 대가를 치른다 해도.
* 슈토넨 후작은 마차 안에 앉아서 신문을 훑어보았다. 리페르게라와의 협상이 아주 만족스럽게 진행되었다는 소식이다. 버나딘 공주 이야기는 쑥 들어갔다.
‘거봐. 내가 아직 이르다고 했잖은가.’
며칠 내내 엔버네스의 글래스턴 공작저에서는 아무런 기미가 없었다. 흑마법사들은 곧 대마법사나 글래스턴 공작, 둘 중 하나가 죽었다는 소식이 나올 거라고 기대하고 있지만 슈토넨 후작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죽었으면 벌써 무슨 난리가 났지.’
피에 미친 뱀파이어가 날뛰든가, 아니면 대마법사가 눈이 뒤집혀서 폭주하든가, 아니면 하다못해 발레시나스 공작이라도 나섰어야 했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없이 조용하다. 그렇다면 반은 실패라고 봐야 했다.
‘혹은 반은 성공이든가.’
어쨌든, 그를 죽이려고 하는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가 주춤하는 사이에 그가 움직여야 했다. 슈토넨 후작은 마차에서 내렸다.
“어서 오십시오. 이쪽으로 드시지요.”
후작 역시도 잔뼈가 굵은 귀족이다. 오래도록 국경을 지키다가 국경이 더 멀리 가버리는 바람에 변경백 호칭이 유명무실하게 되었지만, 변경백이라는 칭호가 어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칭호던가. 그는 아주 천천히 왕궁을 거닐었다. 불과 사흘 전, 글래스턴 공작이 이곳에서 다섯 마리 뱀에게 공격을 받았다.
“……아, 슈토넨 후작?”
그리고 젊은 왕세자가 자주 드나드는 공간이기도 했다. 한가롭게 걸어가던 슈토넨 후작의 인생에 이 꼬맹이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왕세자 중 하나일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왕세자 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반갑습니다. 요새 통 보이지 않아서 걱정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래도 이 꼬맹이는 제법 매끄럽고 섬세하며, 예의도 바르다. 그에 더해 야망도 있었다. 이미 신문만 읽어도 야망을 알 수 있었다. 버나딘 공주와의 혼담을 접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또 다른 혼처를 물색할 거다.
“저도 가끔은 엔버네스에 와야지요.”
모든 왕들이 왕세자 시절일 적에는 어떻게든 힘을 더 다지려고 애쓴다. 부모의 정치를 고스란히 따라가는 이는 없다. 누구든 다 전대 왕을 뛰어넘고 싶어 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실권을 잡는 순간 그게 힘들다는 걸 알고 적당히 타협을 한다. 혹은 자신의 이상을 밀어붙이다가 실패하거나.
“리페르게라에서 온 사절들은 무사히 잘 돌아갔답니까?”
“예, 잘 돌아갔다고 합니다.”
우방과의 결혼을 통해 좀 더 연합을 공고히 하려던 계획은 물 건너가고 말았다. 슈토넨 후작은 그 일에 발레시나스 공작이 개입했을 거라는데 전 재산을 걸 수 있었다.
“리페르게라 공주를 전하의 배필로 거론하는 이들이 많던데, 이번에 좀 고민이 크셨겠습니다.”
“뭐, 제가 정하는 결혼은 아니지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
“한 나라의 왕세자가 아무하고나 결혼을 진행할 수 있겠습니까. 다 후작을 비롯한 어른들께서 정하시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 젊은 왕세자 역시 할 수 있는 것보다는 할 수 없는 게 더 많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하고 끝도 없이 좌절하는 중인가 보다.
“원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슈토넨 후작은 허허 웃으며 물었다.
“글쎄요. 누구든 이 나라 왕비 자리에 적합한 이라면 저는 좋습니다.”
왕세자는 매끄럽게 빠져나갔다. 슈토넨 후작이 슬쩍 찔러보는 이유가 뭔지, 왕세자는 모르지 않았다.
‘발레시나스 공작을 견제하겠다, 이거지? 그럼 난 빼달라고.’
뱀파이어들은 뱀파이어들끼리 치고받고 싸워야 그에게 이득이 아닌가. 칼리에르 공비 상대로 단단히 착각하고 잘못 짚었던 왕세자는 더 이상 그런 실수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잘생겨서요!’
해맑게 웃던 공비를 생각하자니 자신의 옛 생각과 계획들이 치가 떨릴 정도로 멍청하게 느껴져서 짜증이 났다. 왕세자는 빙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