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공비의 드레스 (10)2022.01.12.
“잘 해결되었습니까?”
이상해. 소렐은 당혹스러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공주님?”
분명히 아까까지는 멀쩡했다. 아무 문제도 없었고, ‘칼리에르 공비답게’ 일도 잘 해결하고 왔다.
“잘 해결했어요.”
그런데 고작, 라이킨이 이름 모르지만 지체가 높아 보이는 여성과 ‘웃으며’ 대화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확 상해버렸다. 유치한 욕심이다. 애나 할 법한 짓이다. ‘내 거니까 나하고만 놀아!’라는 심리와 똑같았다. 그에게 어울리는 칼리에르 공비는 하지 말아야 할 생각이 아닌가.
“……공주님?”
아차. 소렐은 얼른 그와 눈을 마주쳤다. 라이킨은 대단히 눈치가 빠르고, 심리를 잘 파악하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숨기고 싶어도 그의 눈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들키지 말자. 안 그래도 어린 아내라고 조심하고 있는데 정말로 어리고 유치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들키면, 부끄러워서 죽고 싶어질 것 같았다.
“잘 끝냈어요. 말을 알아듣더라고요. 보안국장님도 오셔서 도와주셨어요.”
그래서 소렐은 일부러 싹싹하고 밝은 태도로 말했다.
“협상도 잘될 거래요. 혼담은 아무래도 없었던 게 될 것 같아요.”
그러고선 라이킨을 바라보았다.
“……예.”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듣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게 다예요.”
“다입니까?”
“네.”
여기서 뭘 더 말하라고? 하지만 라이킨은 소렐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시리게 푸른 눈이다. 부디 그녀의 유치한 욕심 같은 건 꿰뚫어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
“또, 음……. 아, 외무차관님인가, 그분도 오셨어요.”
어떤 중요한 사람들이 와 있었는지 라이킨도 알아야겠지. 그걸 말하나 보다. 소렐은 열심히 기억을 더듬었지만, 사실 라이킨이 바란 건 그게 아니었다.
“……공주님, 잠시 이쪽으로 가실까요.”
그는 소렐을 안듯이 감싸고 그대로 연회장 바깥으로 나섰다. 차가운 밤공기가 발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뺨에 부딪쳤다. 하얀 눈이 왕궁의 정원을 근사하게 뒤덮었다. 이 추운 와중에도 밀어를 속삭이는 연인들은 연회장을 빠져나와 은밀한 곳에서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라이킨은 소렐의 어깨 위에 따뜻한 외투를 걸쳐주었다.
“조금 춥습니다.”
고개를 조그맣게 끄덕인 그녀는 조금 기뻤다.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나와서 단둘만 남았다는 사실이 기뻤다.
‘진짜 유치해.’
칼리에르 공비라면 아주 성숙하고 매끄러워야 할 거 아닌가. 마치 그녀가 좀 전에 버나딘 공주를 상대했을 때처럼 말이다. 그때는 스스로 으쓱할 정도로 잘해낸 것 같은데, 불과 몇 분 사이에 이렇게 유치한 애처럼 굴다니. 소렐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마음을 라이킨에게 들키기는 싫었다. 그가 그녀를 마냥 귀여워하지만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곳밖에 말씀을 드릴 곳이 없군요, 공주님.”
라이킨은 이 추운 곳에 소렐을 세워둬야 한다는 게 조금 짜증이 난다는 듯, 시끄러운 안쪽을 쳐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나는 춥지 않아요.”
소렐이 조그맣게 말하며 그의 손을 잡았다. 동시에 따뜻한 온기가 그의 온몸을 감쌌다. 대마법사는 추운 곳에서도 춥지 않게, 더운 곳에서 덥지 않게 지낼 줄 알았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이쯤이야 기본적인 마법인걸요.”
그녀는 약간 수줍어져서 중얼거렸다. 그런 다음에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아, 어떡해! 이거 꼭 통속소설에서 좋아하는 티 팍팍 내는 여주인공 같잖아! 부끄러워!’
라이킨 눈에는 훤히 다 보이겠지! 뭐, 상관없긴 하지만 라이킨이 워낙 여유 넘치고 연륜 있는 남자라 그녀가 하룻강아지로 보이는 게 걱정이었다. 그녀가 아는 사람 중 최고로 잘난 남자에게 잘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건 아무래도 안 되는 걸까.
“공주님. 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무슨 일이 있었냐고? 소렐은 다시 기억을 더듬었다.
“버나딘 공주가 불쾌해하긴 했어요. 아니, 많이 불쾌해했죠. 대놓고 ‘넌 나한테 안 돼’라고 한 거니까…….”
음, 그녀에겐 대단한 충격이었겠다. 여태까지 아무도 그런 소리를 안 했을 텐데, 외국에 와서 처음 보는 공비란 여자에게 그런 소리를 들었으니 얼마나 분할까.
“하지만 자신이 한 짓에는 책임을 져야죠. 멀쩡한 사람이 죽었단 말이에요. 샬롯 존슨 양의 이름을 끝까지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갑자기 화가 난 소렐이 씩씩대자 라이킨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예, 맞는 말씀입니다. 또요?”
“또?”
또 무슨 일이 있었지? 소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음……, 말한 게 다인데요. 딱히 라이킨이 신경 쓸 만한 중요한 일은 없었어요.”
“그렇습니까?”
“네.”
그는 고개를 숙였다. 미약하게 다른 냄새가 난다.
“공주님.”
“응?”
“왕세자와 만나셨습니까?”
으응? 소렐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뒤늦게 아, 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그러고 보니 오다가 만났어요. 저기 복도에서. ……근데 거기 왜 있었지?”
“왕세자는 중요한 사람 아닙니까.”
“라이킨 보려고 다시 오다가 만났는데 급해서 잊어버렸나 봐요. 그새 다 잊어버렸네.”
“아.”
이번에는 라이킨이 아, 하고 웃었다.
“잊어버리셨습니까?”
“네, 뭐 별로 중요하지는 않잖아요?”
소렐은 말해놓고 아차 싶어 어깨를 움츠렸다.
“그……, 물론 왕세자전하는 중요한 사람이긴 하고, 또 정치적인 상황에서는……, 음…….”
라이킨은 언제 미간을 좁혔냐는 듯, 미소를 지으며 소렐이 느리게 말하는 걸 다 들어주고 있었다.
“당연히 이번 일에도 알아야 할 존재이긴 하지만, 음……. 우리끼리만 하는 얘기인데요, 뭐, 굳이 이번 일에 대한 보고를 내가 해줘야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보고를 해줄 거고…….”
말하던 소렐은 왜 라이킨이 좀 더 가까이 몸을 숙이는지 몰랐다. 어쨌든 그가 웃는 걸 보니 더 열심히 말했다.
“그러니까 나는 할 일을 다 했으니까 굳이 왕세자전하를, 음……, 아주 중요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지 않나요?”
당당하게 말해놓고서 조금 눈치를 보았다.
“물론 나는 올센 국민이긴 하지만 대마법사는 나라 하나하나가 아니라 이 세상 전체를, 아주 크게 봐야 한단 말이에요.”
변명도 했다.
“예.”
라이킨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지요. 맞습니다. 왕세자는 딱히 중요한 사람이 아닙니다.”
“음, 그래도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요. 나한테는 중요하지 않지만 라이킨에게는 중요한 사람이니 다음부터는 꼬박꼬박 말할게요.”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 중요한 지위지요.”
그는 소렐의 어깨를 끌어당기며 중얼거렸다.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는 관심 없습니다.”
조금만 움직여도 누렇게 마른 잔디며 눈을 밟는 소리가 났다. 입을 벌려 말하면 하얀 김이 뿜어져 나온다. 하지만 곧 날은 따뜻해질 것이고, 다시 봄이 올 거다.
“공주님께서는 대마법사이시니, 더더욱 관심이 없으셔도 무방합니다. 그런 사소한 건 제가 알아서 하지요.”
그녀는 엘펜하임이 사라진 지금, 더 노골적으로 고대마법을 차지해 제 마음대로 사용하려고 하는 많은 이들과 싸우느라 바빴다.
“아니, 그래도요.”
소렐은 고개를 흔들었다. 라이킨은 그녀의 양 주먹이 꼭 쥐어지는 걸 확인하곤 웃었다. 공주님은 또 사소한 것에도 열심이시다.
“아버님도 저 때문에 엔버네스에서 몇 달이나 있으시면서 일하신 거잖아요. 원래는 그냥 집에 계시는 걸 좋아하시는 분이란 걸 알아요. 샤를렌도 그렇고요. 게다가 라이킨은 글래스턴 공작이잖아요. 칼리에르 공이기도 하고.”
영지를 따라가는 작위명이 아니라 가문 자체에 내려진 한 단계 높은 작위, 일종의 선제후다. 문제가 생길시 왕위 계승에도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대단한 가문. ‘군주’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도 있는 가문. 그 영예가 얼마나 어마어마한지는 소렐이 엔버네스에 올 때마다 실감했다.
“그러니까 나도 잘하고 싶어요. 모자란 아내가 되고 싶지 않아요. 물론 나도 라이킨은 있는 그대로 충분히 훌륭하고 멋있다고 생각하고, 라이킨도 내가 있는 그대로 부족하다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 알고 있지만요.”
“부족하지 않을뿐더러 제게 과분하십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소렐은 조금 수줍어하면서도 새침하게 말했다.
“나한테도 라이킨이 과분한 가디언이고 남편이라서, 그래서 더 잘하고 싶어요.”
“……오늘 제 생일입니까?”
“응? 아닌데, 왜요?”
“아니, 생일인 것 같아서요.”
공주님이 왕세자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까맣게 잊어버리시더니, 이젠 그가 과분한 남편이란다. 라이킨은 잠시 손으로 눈을 가렸다. 정신이 혼미했다. 이대로 행복하게 기절해버려서 공주님 앞에서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곧 죽어도 그럴 수는 없었다. 공주님 앞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잘나고 완벽한 남편이어야 하니까. 그는 간신히 손을 떼고 공주님을 바라보았다.
“제 평생 그렇게 귀한 말은 처음입니다.”
아버지는 다정한 사람이다. 아끼고 사랑한다는 건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편이긴 했다. 샤를렌도 좋은 동생이다. 하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서로를 적당히 혐오하고, 상대에게서 칭찬할 거리보다는 놀려먹을 거리를 더 많이 찾고, 다정한 말을 하면 서로 소름 돋아 하는 지극히 평범한 남매였다.
“진짜요? 어쩌지? 나는 그렇게 생각한 지 꽤 됐어요! 앞으로는 내가 많이 말해줄게요!”
소렐은 라이킨의 양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라이킨은 나한테 아주 소중한 사람이에요! 가디언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음…….”
아차, 목소리가 너무 컸나? 소렐은 주변을 살피다가 발돋움까지 해가며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그는 내내 그녀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았다. 지나치게 큰 키 때문에 소렐이 한껏 목을 젖히기도 전에 알아서 무릎을 조금 굽혀가며 그녀의 말을 들었다.
“아주, 아주 중요해요.”
“예.”
“언제나 항상 함께하고 싶어요. 특히 기쁠 때.”
“저도 그렇습니다.”
그는 이 감정이 무슨 뜻인지 안다고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같은 마음이구나. 소렐은 행복했다. 그도 그럴 것이다. 같은 마음이고, 같은 온도로 불타고 있었다.
“늘, 항상 그랬습니다. 아마 공주님을 처음 봤을 때부터 쭉…….”
커다란 손이 약간 떨렸다. 추워서 그러나? 소렐은 그의 손등을 감쌌지만, 곧 그가 그녀의 얼굴을 소중하게 감싸자 추위 때문이 아니란 걸 알았다. 라이킨은 언제나 긴장했다. 이 말을 할 때마다 항상 긴장했고, 최선을 다해 고백했다.
“쭉, 그렇게.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냥 이대로 푹 잠겨버리고 싶었다. 온기가 도는 부드러운 손과 애정을 담뿍 담은 눈에 잠겨, 둥둥 떠다니고 싶었다. 한참 음미하며 쏟아지는 사랑을 받고만 싶었지만 이젠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소렐도 간신히, 혼미한 정신을 붙잡아 가며 겨우 입을 열었다.
“나도요.”
아니, 이건 너무 묻어가는 것 같잖아!
“나도, 나도 라, 라이킨을…….”
목소리가 벌벌 떨렸다. 겁이 나서 떨리는 게 아니다. 환희로 떨리는 것이다. 마치 그의 손이 떨리고 있듯이.
“예.”
그리고 그는 똑같은 말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벌써 안다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공주님.”
“사랑, 으악!”
애써 노력해서 꺼내던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완성되기도 전에 비명으로 대체되었다. 갑자기 라이킨이 그녀를 휙 안아서 그의 등 뒤로 돌려세웠기 때문이다.
“왜, 왜요, 왜 그래요?”
“물러나세요, 공주님.”
소렐은 그제야 라이킨이 눈치챈 것이 뭔지 알았다. 새카만 뱀들이 그의 다리를 감고 기어오르고 있었다.
‘언제, 아니, 이 겨울에 뱀이라고?’
그녀는 대답 대신 손을 뻗었다. 몇 마리지? 어떻게 이런 게 있을 수 있을까. 뱀을 곧장 태워내던 그녀는 혼자 답을 얻어냈다.
‘아, 여긴 왕궁이지.’
삼엄한 경비가 펼쳐지고 있지만, 대마법사가 직접 지키는 곳은 아니다. 공작저와는 별개의 공간. 그래서 저런 뱀들이 이 겨울에도 스멀대며 와서 이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뱀만 대여섯 마리였다. 아주 가느다랗지만 보통 뱀이 아니다.
“괜찮아요, 라이킨?”
유일하게 그의 넋을 빼놓을 수 있는 존재에게 잠시 홀려 본분을 잊었던 그는 이를 갈았다.
“공주님, 물러나십시오.”
가디언은 괜찮지가 않았다. 뱀들은 제가 해야 할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재로 변했다.
“어서요.”
그녀를 돌아보는 눈에 살벌한 빛이 번뜩거린다. 이를 악문 가디언은 제 몸을 먼저 뒤로 물렸다.
“물러나셔야 합니다.”
두터운 옷을 파고든 뱀들은 이빨 자국을 잔뜩 남겨놓았다. 소렐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어디선가 사특한 것들이 낄낄대며 웃고 있었다. 아무리 멀리 있다 해도, 대마법사는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이를 빠득 갈면서 필사적으로 점점 멀어지고 있는 남편을 낚아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