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공비의 드레스 (9)2022.01.08.
“첩보원들끼리 의견이 분분했더군요. 드레스를 망치라는 명령 따위를 따르려고 엔버네스에 온 거냐, 이걸 해야 하냐, 말아야 하냐.”
칼리에르 집안의 뱀파이어들이 쓰는 말투가 소렐의 말에도 고스란히 나타났다. 덕분에 소렐은 분위기를 휘어잡는 중이었다. 더구나 그녀는 대마법사였기에 리페르게라에서 그녀를 우습게 볼 수 없다는 점도 제대로 한몫했다.
“아무래도 마찰이 있었나 봅니다. 그게 결국에는 매끄러운 명령 수행으로 이어지지 못해서, 애꿎은 의상실 조수 하나가 죽었더군요. 샬롯 존슨 양은 고작 스물넷밖에 안 된 아가씨였는데요. 드레스가 망가지는 걸 목격한 모양이에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가요, 공비? 그리고 그들이 리페르게라 소속인지 아닌지 어떻게…….”
“공주님, 저는 대마법사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선명한 리페르게라의 암호문 등을 증거로 확보했지요.”
소렐은 한참 협상에 열을 올리고 있을, 아니, 일방적으로 리페르게라 외교관들을 몰아붙이고 있을 협상장 쪽을 가리켰다.
“저곳에 있는 분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고요.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는, 협상 결과로 알 수 있겠지요.”
그때 그들이 앉아 있는 방문을 급히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벌써 알았나 보네요.”
소렐은 손짓을 했고, 누가 문을 열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문이 열렸다.
“공주님. 급한 일입니다.”
리페르게라의 외교관 하나가 얼굴을 굳힌 채 서 있었다.
“들어오세요. 안 그래도 그 일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까요.”
소렐이 방긋 웃으며 외교관을 안으로 초대했다.
“……잠시.”
버나딘 공주는 외교관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먼저 칼리에르 공비의 말을 듣겠다는 건가. 소렐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살인사건이 발생했는데 하필 상대가 칼리에르이니, 리페르게라의 첩보원들은 아주 현명했어요. 바로 사라졌지요. 하지만 제가 잡았고요.”
소렐은 창가에서 돌아서서 걸어와 버나딘 공주 앞에 마주 앉았다.
“공주님. 공주님께서 우리 올센의 왕세자전하와 결혼하신다면, 그것은 마땅히 축하해야 할 일이지만, 앞으로 내내 오늘 연회와 같은 일이 반복될 겁니다.”
칼리에르 공비이자 대마법사는 아주 상냥하게 말했다. 상냥하면서도 잔인하다고 버나딘 공주는 느꼈다.
“누가 그런 유치하고 한심한 명령을, 유능한 리페르게라 첩보국에 내렸는지는 몰라도…….”
달려왔던 리페르게라 외교관을 비롯한 모두의 얼굴 표정이 굳어버렸다. 그사이 외교관의 뒤를 이어 방 안으로 올센의 외무차관이 들어서서 조용히 시립했다.
“어쨌든 성공은 했으니 그 의지를 우습게 봐선 안 되겠지요. 앞으로 제 드레스뿐만 아니라 보석과 부채, 신발도 조심해야 할 거고요. 연회든 사냥 행사든 무도회든, 또 똑같은 일이 반복될 겁니다.”
버나딘 공주는 자신보다 서너 살은 어린 공비를 입을 꾹 다물고 쳐다보았다.
“공주님께서는 저를 계속 보셔야 할 거고요.”
사실 라이킨은 이 이상 더 심하게 말해도 좋다고 했다. 버나딘 공주가 눈물을 쏙 빼도록 콧대를 팍 꺾어놔도 좋다고 했다. 필요하다면 속성과외까지 시킬 기세였지만, 소렐은 여기까지만 했다. 그게 그녀의 천성에 맞았다.
“신문에서도 제 이야기를 계속 보셔야 할 겁니다. 저는 헬레인 공주이자 칼리에르 공비이고, 대마법사니까요.”
“꼭 협박처럼 들리는군요.”
“협박이라니, 제가 언제 공주님께 어떤 해를 끼치겠다고 말씀을 드렸나요? 저는 그러지 않았어요.”
소렐은 부드럽게 고개를 흔들었다. 첩보원들을 고작 드레스를 망치는 데 쓴 게 사실이냐고, 모두가 비상식적인 일이라 어이가 없어서 두 번 세 번 다시 확인하게 한 장본인이니 쉽게 말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저는 제가 헬레인 공주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올센의 보안국장 역시 방 안으로 들어와서 조용히 시립했다.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 있음으로서 소렐의 말에 무게를 실어주는 역할을 했다. 그들이 있다는 건 바꿔 말해 페르난데스 7세가 이 일을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말씀드린다는 뜻이지요.”
헬레인 토끼들의 예언 능력은 아주 유명했다. 방에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으나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넌 나를 계속, 평생 봐야 할 거야. 신문에서도, 무도회장에서도, 모든 행사에서도 화제에 오르고 계속 눈길을 끄는 어떤 존재가 평생 있을 거라는 뜻이었다.
“……헬레인에서는 참 시답지도 않은 것을 예언하는군요.”
버나딘 공주는 부채를 움켜쥐고 중얼거렸다.
“네. 리페르게라 첩보원들이 참 시답지도 않은 임무를 하다가 애꿎은 사람을 죽였듯이 말이죠.”
‘이야, 칼리에르 공비가 보통이 아닌데.’
보고 있던 올센 보안국장이 속으로 감탄했다. 공비는 부드럽게 웃는 낯으로 할 말은 다 했다. 정황상 첩보원들에게 칼리에르 공비의 드레스를 망치라는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내려, 온갖 화제를 자신이 다 가지고 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고 했던 버나딘 공주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얼마나 사랑받고 제멋대로 컸으면 첩보원들까지 마음대로 부리려고 할까. 어쨌든 공주는 공주고, 귀중한 존재였다. 그런 버나딘 공주를 상대로 저렇게까지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엄청난 권위를 지닌 대마법사 정도가 아니면 없었다.
“올센의 소중한 국민이 사망했습니다. 그에 대한 책임 여부는 제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 저기 협상장에서 결정되겠지요. 저는 충분한 증거와 예견한 앞날을 말씀드릴 뿐입니다.”
소렐은 버나딘 공주가 뭐라고 하기 전에 아무도 반박할 수 없는 하나를 덧붙였다.
“대마법사로서, 말입니다.”
그러니 그대로 왕세자와의 결혼은 깨지는 것이다.
“……꼭 날 위해서 말하는 것 같네요.”
자존심이 대단한 공주에게 지금만큼 평생 잊지 못할 치욕스러운 순간도 없을 거다. 그녀를 위해 조곤조곤 부드럽게 말해줬던 소렐은 빙긋 웃었다.
“그럼요. 공주님을 위해서 말씀드리는 거지요.”
물론 버나딘 공주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소렐은 진심이었다. 매번 신경 써야 하는 상대를 평생 보는 것만큼 피곤한 것도 어디 있겠나. 이 일로 올센에서 리페르게라를 상대로 온갖 비난을 퍼부어도 모자라지만, 소렐은 남의 드레스를 망치면서까지 강한 의지를 이루려고 했던 공주에게 최소한의 예의는 갖췄다. *
“보통은 예의를 갖추지 않습니다.”
올센 보안국장의 말에 소렐이 웃었다. 그들은 방에서 나와 다시 연회장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렇겠죠.”
특히 정치에서는 더더욱 그럴 거다.
“아니, 저희는 갖추지요. 관료이고, 앞으로도 계속 봐야 할 얼굴들이니까요. 하지만 공비전하께서는 굳이 예의를 갖추시지 않아도 될 만한 신분이십니다.”
그런가. 소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그렇게 하도록 할게요.”
“예, 감사합니다. ……그런데 공비전하?”
“네.”
“……정말로 그런 미래를 미리 보신 겁니까? 그러니까, 버나딘 공주가 왕세자비가 된다면 계속 공비전하를 신경 쓰는데, 절대로 이기지는 못하는 그런 미래 말입니다. 그냥 궁금해서 여쭤보는 겁니다.”
하지만 물어보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할 궁금증이기도 했다. 대마법사는 아주 심각한 얼굴로 보안국장을 쳐다보았다.
“전혀요.”
“아.”
“보통 제가 무섭게 눈을 뜨고 그렇다고 하면 정말로 그런 줄 아는 게 대마법사이자 헬레인 토끼의 권위지요. 편리하답니다.”
보안국장은 소렐이 빙긋 웃자, 따라서 씨익 웃었다.
“하지만 비밀이에요.”
“제 직업상 비밀을 지키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보안국장 역시 바쁜 몸인지라, 그쯤에서 사라졌다. 소렐에게는 딱히 호위가 붙지 않아도 괜찮았다.
‘아주 건강해졌어.’
그녀는 온몸에 충만한 마력을 만끽했다. 이게 다 라이킨 덕분이다. 그를 가디언으로 붙여준 부모님께도 저절로 감사가 나왔다. 덕분에 그녀는 강제로 각성을 하고도 온전히 대마법사로 살아가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거나 다름없었다. 추운 겨울밤이었지만, 복도를 걸어가는 소렐의 발걸음은 묵직한 드레스를 끌고도 나는 듯이 가볍기만 했다.
“안녕하세요, 왕세자전하.”
소렐은 저쪽 복도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가 말을 걸기도 전에 먼저 인사를 했다. 라이오넬은 그녀를 보고 입을 열려다가, 잠시 아무 말 없이 감탄했다.
“……과연 대마법사군요.”
“네.”
“내가 올 줄……, 이미 알고 있었겠지요?”
“그럼요.”
대마법사가 그렇다고 하면 다들 그런 줄 안다니까. 사실은 바로 이 앞에서 기척을 느끼고, 마법으로 누군지 확인했을 뿐인데 말이다.
“대단하군요.”
“과찬이십니다.”
“오랜만에 봅니다.”
“네. 그간 제가 일이 너무나 많았지요.”
“무사히 다시 보게 되어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소렐은 왕세자와의 간격을 침착하게 유지한 채, 그저 부드러운 미소만을 지었다. 아까 버나딘 공주에게 향했던 미소와 같았다. 라이오넬은 조금 수줍은 듯 고개를 숙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대가 가을 내내 보이지 않아서 많이 아쉬웠습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엔버네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사라져서 모두가 아쉬워한 건 물론이고, 나 역시 그랬습니다. 지난여름에 늑대사냥을 하러 갔다가 그대와 만나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그때 늑대는 제 남편이 다 잡았지요.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잘 정도였습니다.”
“그랬……, 그랬지요.”
왕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년엔 그런 늑대가 사람을 해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요.”
“그거야 누구나 다 바라는 일이지요.”
“네, 그럼.”
그녀는 그대로 그 자리를 뜨려고 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멈춰야 했다.
“대마법사와 가디언은 떼어낼 수 없는 관계라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제 경우에는 그렇지요, 전하.”
소렐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그대가 직접 선택한 건 아닐 거 아닙니까.”
“제 부모님이 결정하신 가디언이고, 저는 가디언이 필요한……, 일종의 체질인 거지요.”
그렇게 설명하는 게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 선택에 만족합니까?”
소렐은 잠시 왕세자를 쳐다보았다.
“나도 그렇고, 그대도 그렇고 결국 부모님이 짝지어주는 대로 억지로 끌려가야 하는 형편이군요.”
그는 좀 지치고 피로해 보였다.
“모든 귀족들이 대부분 다 그렇지요.”
“내 꿈은 연애결혼이었습니다.”
“그러시군요.”
그닥 궁금하지 않았다는 투였다.
“그대는 지금 상황에 만족합니까?”
“저는 좋답니다.”
대답이 망설임 없이 바로 튀어나왔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와서, 오히려 왕세자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공비 자리가?”
“아뇨. 저는 이미 공주인데요.”
망했어도 모든 왕실에서 대접받는 헬레인 왕가의 공주다. 소렐에겐 칼리에르 공비 자리가 그리 탐나는 자리는 아니었다. 그건 칼리에르 공마저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인정할 것이다. 그는 언제나 그들은 귀천상혼이라고 했으니까. 그렇게 그녀를 귀하게 대접해주는 사람도 없을 거다. 생각하니 또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라이킨도 그녀를 생각하면 이렇게 웃음이 날까? 그랬으면 좋겠다.
“그럼 뭐 때문에……?”
물어보는 왕세자의 표정이 약간 이상했다. 뭐가 그리 좋아서 실실 웃기까지 하냐는 거다. 아차. 소렐은 얼른 표정을 정리하긴 했지만, 사실 왕세자가 여기서 그녀를 붙잡고 있는 게 귀찮았다. 빨리 라이킨에게로 돌아가고 싶었다.
“잘생겨서요.”
이토록 노골적인 대답이라니. 소렐 이드리스는 자신의 취향과 욕망에 아주 솔직했다. 하긴 헬레인 토끼들이 다 그렇다는 얘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나, 왕세자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 잘생……, 칼리에르 공의 외모가 수려하기는 하지요…….”
“네. 그러면 전하, 즐거운 밤 보내시길 바랍니다. 리페르게라와의 협상은 아마 수월할 거예요.”
잘생긴 남편을 보러 가기 바쁜 칼리에르 공비가 인사를 하더니 부리나케 자리를 떴다. 왕세자는 공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거, 가능하긴 한 건가……?’
그럼 그거대로 곤란했다. 대마법사와 뱀파이어의 그토록 공고한 연합이라니. 이 나라의 왕권은 내내 저들의 눈치만 보고 존재해야 하는 건가. 모름지기 왕권이란 강력하게,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군림하며 지배해야 하는 게 아닌가. 왕세자가 서 있던 복도에 꽤 큰 한숨 소리가 들렸으나, 소렐은 신경도 쓰지 않고 부리나케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아.”
그러곤 연회장 입구에서 조금 주춤거렸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라이킨은 뜻밖에도 어느 숙녀와 즐겁게 대화하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 아니, 싫다니, 내가 미쳤나 봐.’
그냥 남편이 다른 사람과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소렐은 지금 느끼는 감정이 아주 유치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저렇게 웃으면서 말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게 다 라이킨이 잘생겨서 그렇다. 그는 죄가 없었다. 거기에 홀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문제일 뿐이다.
“아, 공주님.”
그녀가 왔다는 걸 바로 느낀 라이킨이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거봐. 바로 알았잖아. 소렐은 이 유치한 감정을 어떻게든 다스려보려고 애썼다. 라이킨에게 어울리지 않는 아내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오셨습니까.”
그녀를 믿고 혼자 버나딘 공주를 상대하겠다는 의견을 존중해준 남편이다. 그녀 혼자서 유치해지긴 싫었다. 소렐은 얼른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