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공비의 드레스 (7)2022.01.01.
자라면서 4개 국어를 배웠던 리페르게라의 버나딘 공주는 올센의 수도, 엔버네스로 향하는 기차에 앉아 산더미처럼 쌓인 올센의 신문을 집어 들었다. 대륙 안팎으로 널리 쓰이는 올센어에도 능통했던 그녀는 지금 올센의 왕세자 라이오넬과의 물밑 혼담이 조금씩 오고 가고 있는 상황이다. 아마 이번 방문이 끝나면 혼담이 본격적으로 진행될 거다. 그녀는 정치면과 사회, 경제면을 열심히 훑어본 후 사교란으로 건너갔다. 칼리에르 공비의 드레스를 망친 범인은 오리무중! 다가오는 리페르게라 버나딘 공주의 방문……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을 귀부인 5인! 칼리에르 공비, 새 연회에서 어떤 티아라를 선보일 것인가? 버나딘 공주의 리페르게라 최신 유행 여행복 차림을 알아보자. 오늘도 사교란은 시끌시끌하다.
“신문은 이게 전부인가요?”
그녀는 매끄러운 올센 어로, 국경에서 그녀를 맞아 동승한 외무차관에게 물었다.
“예, 신문은 이게 전부입니다.”
“그렇군요.”
버나딘 공주는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다음 신문을 집어 들었다. 전부 비슷한 기사, 비슷한 가십이다. 오늘의 화제며 기삿거리란 어차피 거기서 거기니까. * 올센은 참 특이한 나라였다. 엘펜하임과 딱히 사이도 좋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흑마법사들에게 친화적이지도 않았다. 올센은 뱀파이어들이 많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고, 또 뱀파이어 귀족들도 많은 나라였다. 수인들도 뱀파이어들의 비호 하에 모습을 당당히 드러내며 살았다. 오래 사는 뱀파이어를 가까이하는 인간이 다스리는 나라. 그곳이 올센이었다.
‘뱀파이어를 어떻게 이기라고!’
올센에서의 가명은 빅터 워커, 사실은 리페르게라 출신 첩보원인 이가 속으로 고함을 질러댔다. 그랬다. 그를 추적하는 이는 올센 보안국도 아니고, 그냥 노련한 전문가인 인간도 아니었고, 자그마치 뱀파이어였다. 뱀파이어의 체력, 속도, 근력을 이길 수 있는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아, 올센의 모든 화제를 주름잡고 있는 그 대마법사라는 여자만 가능할 거다. 하지만 그 여자도 엄밀히 말하자면 수인 혼혈이잖나.
“그쪽이야!”
척척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이거 여기서 끝을 내야 하나? 첩보원은 달려가며 생각했다. 그는 의상실 점원으로 취직한 동료, 올리비아 마이슨이라는 가명을 쓴 여자와 지난 4년간 엔버네스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치명적인 실수를 했고, 이제 곧 붙잡히게 될 예정이었다. 올센 보안국도 아니고 그냥 뱀파이어에게.
“잡았어!”
“재갈부터 물려!”
자살하기 전에 일단 결박부터 하고, 재갈까지 물린 뱀파이어들은 아주 손이 빨랐다. 몸을 수색하고 숨겨둔 무기며 독약을 빼앗는 데 채 3분도 걸리지 않았다.
“좋아. 이대로 배송해.”
“알겠습니다.”
흡혈당해 죽지 않을까, 희게 질렸던 첩보원은 얻어맞고는 기절해버렸다. * 버나딘 공주가 엔버네스에 도착했다. 그녀를 마중 나간 건 올센의 둘째 왕자였고, 적당히 외교적 급이 맞는 인사이기도 했다. 그 말인즉슨, 소렐이 완성된 드레스를 입어야 할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얘기였다.
“베티, 거기 핀을 더 줘.”
루겐버그 여사는 핏줄이 선 눈으로 드레스만 보고 있었다. 그녀는 평소 우아하고 기품 있으면서도 개성을 살려 입던 옷은 다 버리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붙이고, 가죽 앞치마를 입은 채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 조금 쉬시는 게 좋지 않겠어요?”
“무슨 소리야, 이걸 다 완성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쉴 수 없어! 샬롯에게 부끄럽지는 말아야지!”
베티는 루겐버그 여사에게 핀을 더 가져다주고, 함께 바늘을 움직였다. 이 의상실을 루겐버그 여사 다음으로 오래 지켰던 샬롯 존슨 양은, 칼리에르 공비의 드레스 때문에 변을 당했다. 루겐버그 여사는 그녀를 생각해서라도 이 드레스를 이번 연회 최고의 드레스로 길이 꼽히도록 만들 작정이었다.
‘좋은 소식이 있었으면 좋겠네.’
베티는 반짝거리는 드레스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다행스럽게도 좋은 소식은 아주 가까이 있었다. * 붙들린 첩보원이 정신이 들자마자 마주한 건 뜻밖에도 앳된 얼굴의 숙녀였다. 첩보원답게 신문을 자주 봤던 그는 그 예쁘장한 여자가 유명한 헬레인 공주라는 걸 바로 알아보았다. 그리고 알아보자마자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그래봤자 꽉 묶이고, 재갈도 물려 있어 옴짝달싹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대, 대마법사!’
대마법사는 새카만 눈으로 첩보원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어떤 표정도 없었다. 그저 가만히 관찰할 뿐이다.
‘내 생각을 읽는 건가?’
그렇다면 부지런히 사소한 생각이나, 저 어린 대마법사가 기절할 정도로 끔찍한 생각을 해야 했다. 절대로 머릿속을 읽혀서는 안 된다! 그랬다간 리페르게라의 소중한 정보들이 전부 다 올센에 까발려지는 거다. 제기랄!
‘결코 안 되지!’
그래서 첩보원은 곱게 자란 어린 아가씨가 아주 기함할 만한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아주 저속하다고 할 법한 그런 상상 말이다.
“……흠.”
하지만 눈앞에 있는 대마법사는 슬쩍 웃을 뿐이다.
‘……웃어?’
혹시 생각을 읽는 게 아니라 무의식을 읽는 건가?
“내 드레스는 당신이 망쳤군요.”
그건 사실이었다.
“샬롯 존슨 양이 당신을 봐서 죽인 거고요.”
그것도 사실이긴 했다.
“알겠습니다.”
대마법사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 방을 나갔다. 그러곤 다음 방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올리비아 마이슨이라는 가명을 쓰고 4년간 루겐버그 여사의 의상실에서 일하며 상류층의 이런저런 동태를 엿보아 리페르게라로 보냈던 첩보원이 앉아 있었다. 이리저리 흔들리던 남자 첩보원의 눈과는 달리, 이 여인의 눈빛은 아주 단호했다. 수차례 자살 시도를 하려던 걸 뱀파이어들이 전부 다 막느라 애를 좀 먹었다고 했다.
“아시겠지만 샬롯 존슨 양은 시체로 발견되었어요.”
소렐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리고 두 분은 각각 따로 밀항을 시도하다가 잡혀 왔지요.”
그 ‘두 분’이란 게 자신과 동료라는 걸, 여자는 잘 알았다.
“보통은 일이 발생했으니 둘이 함께 움직여서 서둘러 빠져나갈 텐데, 그게 아니었네요. 둘이 의견이 참 안 맞았나 봐요.”
마법사의 말에 귀를 기울여선 안 된다. 무슨 사악한 주문을 쓸지 모르기 때문이다. 대마법사는 흑마법사들과 적대하는 자라지만, 그 정체가 베일에 싸여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첩보원들도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샬롯 존슨 양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지요?”
확신을 담은 질문에, 첩보원은 할 말이 없었다.
“드레스를 망치고 싶지도 않았지요?”
붙잡혀서 이송되는 중에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알겠어요. 대답해줘서 고마워요.”
예상했던 대답을 얻어낸 대마법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아하게 걸어 나갔다. * 리페르게라의 버나딘 엘리자베타 유제니 공주는 왕족의 의무를 아주 훌륭하게 수행하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예법은 흠잡을 데가 없었고, 유창한 올센어는 보는 이로 하여금 호감을 샀다. 리페르게라 식의 의상이 버나딘 공주의 안목과 함께 어우러져 아름답다는 평도 얻었다. 리페르게라는 올센과의 동맹이 중요한 상황이었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올센은 부유하고, 드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영토와 부를 모두 수호하는 강력한 힘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리페르게라의 공주가 올센의 차기 왕비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동맹이 될 것이다.
“분위기가 어떤가요?”
그녀는 정치적인 감각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다. 그랬기에 이 결혼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공주가 계속해서 화제에 올라야 결혼을 굳히는 게 가능하다는 것도 잘 알았다. 어쨌든 전부 버나딘 공주에게 달려 있었다. 무조건 호감을 사야 했고, 그리고 그녀의 성격상 그녀가 가장 돋보이지 않으면 참을 수도 없었다.
“나쁘지 않습니다.”
“나쁘지 않다는 걸로는 안 됩니다.”
버나딘 공주는 자신을 수행하는 리페르게라 관료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외교고, 우리는 최고의 성과를 얻어야 해요. 그저 그런 정도로는 난 만족할 수 없어요. 속속들이 다 알아내세요.”
그 ‘알아내라’라는 게 리페르게라의 첩보원들을 활용하라는 뜻이라, 관료는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공주님, 올센 안으로 들어온 이상 더 이상은 첩보원들과 접촉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공식 사절이고, 그들은 그늘 안에서 소리 없이 암약하는 존재들입니다. 우리와 접촉했다간 그들의 정체가 드러날 겁니다.”
“여태까지 있었던 모든 외교적 공무에서 그 누구도 첩보원들과 접촉한 적이 없던 것처럼 말하네요, 경.”
관료는 입을 다물었다. 버나딘 공주가 정확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안전하게 움직이고 싶어요. 우리 첩보원들의 실력을 믿습니다. 들키지 않고도 훌륭하게 명령을 수행할 수 있을 거예요.”
“……예.”
“엔버네스 분위기가 어떤지, 그리고 사교모임에서 누가 가장 뜨거운 화제인지 알아내세요. 내가 아니라면 문제가 뭔지 알고 고쳐야지요.”
버나딘 공주는 그렇게만 말하고 입술을 앙다물었다. 외교전 역시 총칼만 들지 않았지 전쟁이다. 그녀는 외교관들이 올센의 외교관들과 치열하게 협상을 벌이는 사이, 바깥에 나가 방긋방긋 웃으면서 분위기를 주도해야 했다.
“알겠습니다, 공주님.”
그러니 악착같이 정보를 긁어모아야 했다. 그녀는 지금 수행원들에게 둘러싸여 진짜 올센의 상류층이 나누는 알짜배기 정보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지. 버나딘 공주는 절대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녀는 탁자를 가득 메운 신문을 내려다보았다. 칼리에르 공비 드레스 사건, 아직까지 범인은 오리무중 이젠 중심에서 한 귀퉁이로 슬쩍 밀려난 기사 제목이 보였다. 엔버네스에 도착한 버나딘 공주와 리페르게라 사절단을 위한 연회가 곧 열릴 것이다. *
“공주님?”
현재 올센에 있는 공주는 모두 다섯이었다. 현 국왕의 여동생 이레네 공주와, 국왕의 두 딸, 그리고 헬레인 공주 소렐 이드리스와 리페르게라에서 온 버나딘 공주까지 총 다섯. 그들이 모두 다 참석하는 화려한 연회가 오늘 밤 열린다.
“여기에 계셨습니까?”
글래스턴 공작저의 부부침실 곁, 화려한 드레스룸 한구석에 앉아 있는 아내를 발견한 라이킨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루겐버그 부인이 완성된 드레스를 보냈더라고요.”
“예, 저도 봤습니다. 내용물은 보지 않았습니다만, 마음에 드십니까?”
소렐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곤, 그녀의 곁에 무릎을 접고 앉은 남편의 뺨에 입을 맞췄다.
“선물 고마워요.”
“중간에 문제가 크게 생겨서 죄송합니다.”
“마음에 들고 너무 예쁘던데 문제는 무슨……. 입어야 할 때까지만 도착하면 됐고, 내 마음에 들기만 하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훌륭한 선물이에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 아내가, 우리 공주님이 제일 좋은 드레스를 입어야 한다는 라이킨의 의지가 팍팍 느껴지는 드레스였다. 그런 게 앞으로도 대여섯 벌이 더 올 거라는 예정에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루겐버그 여사에게 커다란 꽃다발을 보내 감사와 위로를 표한 참이었다. 어쨌든 루겐버그 여사가 이번에 가장 마음고생을 많이 했을 테니 말이다.
“오늘은 별로 재미가 없을지도 모르겠어요.”
“모든 연회가 다 그렇지요. 다녀와서 저와 함께 재미있게 노실까요?”
“어떻게 노는 게 재미있게 노는 건데요?”
“그건 함께 연구해보도록 하지요.”
“와인이 많던데.”
저어기 아래 와인 저장고에 있는 걸 내가 봤지요. 소렐은 아래층을 가리키며 눈으로 말했고, 라이킨은 몹시 곤란해졌다.
“……조금만 드세요, 공주님. 제가 수습할 수 있을 정도만.”
“수습 못 할 정도가 어느 정도인데요?”
맹랑한 토끼의 도발에 뱀파이어가 그녀를 가만 보다가 픽 웃었다.
“그건 공주님께 달렸지요. 맨정신으로도 하실 수 있는 일이면 수습 가능한 일 아니겠습니까.”
“난 라이킨이랑은 뭐든 맨정신으로 할 수 있는데.”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이미 같은 침대 쓰고 있는데 뭘 새삼스럽게 그런담. 이거 쓰고 가야지.”
혼자 쫑알거린 소렐은 가장 커다란 헬레인 티아라를 집어 들었다.
“웬만하면 내가 주빈 생각해서 좀 작은 거 쓰려고 했는데 안 되겠단 말이에요. 큰 거 쓰고 가서 만날 거야.”
여전히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소렐은 손을 뻗어 남편의 무릎을 잡고 흔들었다.
“내 말 듣고 있…….”
그녀의 질문이 삼켜졌다. 정신없이 훑어 내리고 침범하는 입맞춤에 소렐은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격렬한 호흡 사이에서 라이킨이 느릿하게 물었다.
“연회, 가지 말까요?”
“루겐버그 여사가 서운해할 텐데.”
“드레스야 제 앞에서만 입어주시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러려고 주문한 거죠?”
“예.”
“그러면 안 돼요.”
안 된다고 눈을 감고 고개를 살랑살랑 흔드는 아내가 너무 예뻐서, 라이킨은 앓는 소리를 내다가 일단 다시 키스부터 했다. 해가 슬슬 서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