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공비의 드레스 (5)2021.12.25.
소렐은 화덕 안에 남은 재를 긁어모아 꺼냈다. 아, 물론 부지깽이와 삽을 들고 한 게 아니라, 재들이 알아서 바깥으로 나왔다.
“자, 한번 순서대로 모여봐. 아니, 싸우지 말고.”
힘이 없어 팔랑팔랑 날리며 부서지는 재에게 말을 붙여가며 소렐이 손짓했다. 저 정도는 큰 마법이 아니니 얼마든지 혼자서도 결합점을 보이지 않고 할 수 있다. 부상을 당했지만 대마법사는 대마법사. 새카만 재들이 지들끼리 티격태격하면서도 결국 모양을 갖췄다. 하지만 완벽한 종이 모양은 만들지 못했다.
“상당히 많이 탔네요.”
여러 장의 종이에서 구할 수 있는 양은 고작 일부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래도 내용은 알아야겠다. 비밀 서랍에 단검을 숨긴 수상한 의상실 조수가 태워버릴 정도로 없애야 했던 문서의 내용이 뭔가. 라이킨은 새카맣던 재들이 하얗게 바뀌는 광경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으음……, 으음? 아니야. 잉크도 있어야지. 그래, 너.”
소렐은 마법을 무척 재미있게 사용했다. 예쁜 얼굴에 표정도 다양해서 지켜보는 게 즐거웠다. 덕분에 아내를 무척 사랑하는 남편은 좋기만 했다.
“흐음……. 너무 힘이 없으니까 힘을 좀 주고.”
모인 종이쪼가리가 축 늘어졌다가 좀 빳빳해졌다.
“좋아. 모습을 드러내봐.”
찢어지고 부서진 종이 위에 드문드문 검은 글씨가 나타났다. 소렐은 한참 글씨를 쳐다보다가 미간을 좁혔다.
“라이킨, 이게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어요…….”
여태까지 소렐의 얼굴만 바라보며 싱글싱글 웃던 라이킨이 가까이 와서 허공에 떠 있는 종이쪼가리들을 유심히 살폈다.
“아, 이건 암호입니다.”
“그래요?”
“예. 첩보원들끼리 사용하는 삼중암호인데…….”
라이킨은 빙긋 웃었다.
“어쨌든 우리의 올리비아 마이슨 양은 첩보원이 맞군요.”
“알고 있었어요?”
“의심은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때 갑자기 만들어진 신분으로 허공에서 뚝 떨어지는 사람들은 대부분 첩보원이거나, 아니면 숨겨야 하는 과거를 가진 사람이니까요. 범죄자라든가…….”
그렇구나! 소렐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뺨이 발그레해지기 시작했다. 추리소설에서나 보았던 일들이 현실이 되고 있었다!
“암호가 너무 부분만 있어요. 더 복구해보려고 해도 남은 재들이 없어서 불가능해요. 어쩌죠?”
“이 정도면 읽어낼 만합니다. 보관을 하고 있었으니 최근에 받은 연락이거나 아니면 아주 중요한 내용일 텐데……. 원래 이런 건 전부 다 태워버리는 게 원칙입니다.”
“라이킨은 이런 것도 잘 아네요. 아, 하긴 전쟁을 여러 번 겪었을 테니까…….”
혼자 신기해하고 혼자 결론을 내린 소렐은 이제 라이킨이 뭘 하려나, 하고 궁금해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왜요, 공주님? 왜 그렇게 예쁘게 절 쳐다보십니까?”
마주 보던 라이킨이 웃었다. 그녀는 숨만 쉬고 있어도 예쁘다.
“또 뭐 할 거예요?”
“이 암호를 해독해봐야지요. 눈에 더 보이는 게 있으십니까?”
손을 많이 댄 흔적을 더 따라가 보았지만 전부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물품들뿐이다. 소렐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가실까요. 할 일이 많겠습니다.”
라이킨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소한 의상실 간의 알력 다툼, 혹은 강도살인 사건에서 첩보원까지 튀어나왔다면 이건 더더욱 소렐을 겨냥하는 사건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의 걸음이 바빠졌다. 물론 대마법사는 첩보원이라는 말에 흥분해서 몹시 두근거리고 신나는 중이었다. *
“소식이 없군요.”
흑마법사들의 입이 중얼거렸지만 노회한 슈토넨 후작 아서 모드릭 헴피온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서두르지 말게. 서둘러봤자 좋을 거 하나 없어.”
이미 서둘렀다가 무슨 꼴이 났는지 처절하게 겪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아주 신중하게 움직여야 했다.
“표적이 계속 주거지를 바꾸고 있습니다.”
엘펜하임에서 글래스턴, 글래스턴에서 또 엔버네스로 이리저리 바뀌니 미리 보내놨던 실뱀들이 우왕좌왕하다가 길가에서 죽었다.
“당분간은 엔버네스에서 길게 머무를 모양이야. 리페르게라의 공주가 온다고 하니 엔버네스에서 이런저런 행사가 벌어질 거고.”
슈토넨 후작은 돌아서서 흑마법사들을 바라보았다.
“다행인 건 글래스턴보다는 엔버네스가 따뜻하니, 뱀이 죽을 확률이 좀 더 낮아진다는 거지.”
사실은 그뿐이었다. 고작 겨울에 돌아다니는 뱀에게 의존해야 할 처지가 되다니. 슈토넨 후작은 예전보다 훨씬 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강력하고 젊은 뱀파이어에게 완전히 밀려 포위당했으니 그가 느끼는 수치심과 절망감이 얼마나 크겠는가.
“방비는 철저히 해두고 있으니 일단은 잠시 힘을 비축하도록 하지.”
흑마법사들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이윽고 다시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시끄럽게 천장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포기하지 않을 모양이다. 새카만 실뱀들이 꿈틀거리며 계속해서 기어나갔다. 저 뱀들의 근원은 어디인가. 슈토넨 후작은 그 끔찍한 힘을 생각해보다가 그나마 절망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 미소 지었다. 부디 저 근원이 칼리에르 공의 목을 졸라버리길 바랐다. * 루겐버그 여사의 의상실에 유일하게 남은 조수가 되어버린 베티 스미스 양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망가진 칼리에르 공비의 드레스를 수선하랴, 루겐버그 여사를 달래랴, 필요한 천이며 보석을 주문하랴, 손님을 맞으랴, 그 와중에 가끔 들이닥치는 경찰들도 상대해야 했다. 어쨌든 이 의상실에서 울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고 침착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녀 한 사람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올리비아의 애인이요?”
로버트 베첼 경사의 질문에 베티 스미스 양은 피곤한 머리를 굴렸다.
“올리비아는 자기 얘기는 잘 하지 않았어요.”
그게 바로 수상하다는 증거다! 로버트 베첼 경사는 자신이 아주 잘 찍어낸 것 같아 어깨가 으쓱했다.
“샬롯은 남자한텐 관심이 없었고…….”
“원래 관심이 없다고 하는 사람이 뒤에서는 다른 짓을 하기 마련이지요.”
“아뇨. 정말 관심이 없었어요. 관심 없다는 데도 들러붙는 남자들 때문에 답답해서 미칠 지경일 정도로요.”
베티는 눈을 똑바로 뜨며 경사를 쳐다보았고, 경사는 괜히 움찔거렸다.
“아무튼 올리비아가 만나는 애인인지 오빠인지는 모르겠지만, 고향 사람이라고 파키스 남자가 몇 번 찾아온 건 봤어요.”
“누구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아십니까?”
“햇볕을 많이 봤는지 좀 탔어요. 몸을 쓰는 일을 하는 것 같고요. 키가 크고 체격이 단단하니 좋아요. 올리비아의 집 근처에 산다는 것 같던데……. 가끔 배달 같은 걸 부탁했거든요.”
중얼거리던 베티가 산처럼 쌓인 수첩 사이에서 연락처 하나를 끄집어냈다.
“아마 이쪽으로 가시면 그 남자에 대해서 아실 수 있을 거예요. 이쪽 근처로 배달을 몇 번 부탁했거든요. 이 근처 바에 올리비아가 자주 놀러 가기도 했고요.”
로버트 베첼 경사는 당장 베티 스미스 양이 준 연락처를 쥐고 그 근처를 수색해나갔다. 파키스 사람, 키가 크고 골격이 좋은 남자를 수소문했다. 물론 그는 유능한 경찰이라 엔버네스 경시청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고 곧장 그런 남자 몇몇을 찾아낼 수 있었고, 해가 질 때쯤에는 유력한 후보들의 집까지 알아내 하나하나 심문 조사를 시행했다. 그리고 마침내 진짜 올리비아 마이슨과 친분이 있는, 그리고 높은 확률로 애인일 남자의 집을 찾았다.
“아, 경사님.”
“……공작전하?”
베첼 경사는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경찰들이 급습해야 할 허름한 하숙방 앞에 서 있는 칼리에르 공이라니, 너무나 안 어울렸다. 더구나 열린 문 안에는 마침 칼리에르 공비도 보였다.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마침 이쪽은 우리가 정리를 하던 참입니다. 애석하게도 방의 주인은 증발한 지 오래인 것 같습니다.”
“아, 예에…….”
“그리고 이 문제는 아무래도 경시청에서 보안국으로 넘겨야 할 것 같군요.”
“예에?”
다른 건 몰라도 사건 관할이 넘어간다는 말에 베첼 경사는 일단 펄쩍 뛰었다. 내가 오늘 하루 종일 고생한 게 얼만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무슨 말은요.”
경사는 문 안에 있는 사람이 칼리에르 공비뿐만이 아니라는 걸 뒤늦게 눈치챘다.
“올리비아 마이슨 양이나 이 방의 주인은 파키스 출신이 아니라 밀입국한 외국인들입니다.”
베첼 경사의 야무진 승진에 대한 꿈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 로렌스 오블리앙 공은 불과 이틀 만에 며느리를 다시 보게 된 건 무척 반가웠지만, 그 며느리를 외무장관과 보안국장 앞에서 같이 보게 된 건 심히 유감이었다.
“요즘 다들 취미가 올센에 밀입국하기인가 봅니다.”
그리고 외무장관놈이 저리 투덜대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지난가을에 글래스턴에 엘펜하임 수뇌부가 스며들어 소렐을 납치해가려던 걸 운운하는 거다.
“엔버네스에 첩보원이 있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뭘 새삼스럽게.”
느긋하게 중얼거린 라이킨이 소렐의 곁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긴 다리를 뻗어 겹쳤고, 한 손으로는 아내의 손을 꽉 잡았다. 탁자 위에는 소렐이 복원한 암호문을 비롯한 서류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암호문이 더 늘어났다. 로버트 베첼 경사가 한발 늦게 도착한 올리비아 마이슨의 ‘지인’이 사는 곳에서 찾아낸 암호문들이다. 역시나 그들은 같은 파키스 출신이라는 그럴듯한 신분을 내세운 첩보원들이었다.
“다른 나라 첩보원이라면 또 몰라, 이건 문제지요.”
보안국장이 얼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그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다 동감하는 바였다. 보안국장은 피곤한 표정으로 외무장관을 건너보았다.
“리페르게라에서 사절이 언제 도착한다고요?”
“내일 국경을 넘을 예정이오.”
“코앞이군요.”
“신문에서 계속 떠들어대고 있는데, 국장은 못 들었소?”
안 그래도 공주를 맞이할 준비에 여념이 없던 외무장관도 신경이 날카롭게 서 있기는 매한가지라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저는 국내 사정보다 국외 사정에 더 관심이 많은지라. 할 일이 산더미입니다, 산더미.”
아이고. 눈 밑이 시커먼 보안국장은 어떻게 좀 해달라는 시선으로 로렌스 오블리앙 공을 바라보았지만, 오블리앙 공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긴 원래 저 어르신은 바로 말씀을 하시는 분이 아니다.
“연회는 사흘 후에 열리는데, 리페르게라 첩보원이라니!”
바로 이게 문제였다. 대마법사가 마법으로 복원하고, 또 다른 하숙집을 뒤져서 또 찾아낸 암호문들을 해석하자니 리페르게라 첩보국의 통지문이었다. 올리비아 마이슨과, 물론 똑같은 가명이겠지만 그녀와 같은 파키스 출신으로 위장한 빅터 워커, 두 사람이 모두 리페르게라 첩보원이었다. 우방이라 관계를 돈독하게 할 겸 공주를 보내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보고자 하는 나라에서 첩보원을 보낸 것도 모자라 강도살인을 일으키다니.
“뭐, 우리도 리페르게라에 첩보원을 보내놨지만, 적어도 서로 들키지 않는 게 상도덕이지요.”
보안국장은 도대체 언제 로렌스 오블리앙 공이 나서서 혼자 씩씩대는 외무장관을 가라앉힐지 궁금해졌다. 젊디젊은 칼리에르 공은 상대하기가 꽤나 까다로운 인사였고, 그가 지금 노골적으로 지키고 있는 칼리에르 공비는 대마법사다. 이래저래 보안국장에게는 불편한 자리였다.
“그것도 사절을 보내는 이런 때에는 더더욱 말입니다.”
어쨌든 국장은 할 말은 다 했다.
“정리하자면 지금 애꿎은 엔버네스 시민 하나가 죽었습니다. 리페르게라 첩보원 둘은 사라졌고요. 보안국장으로서 이건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될 사건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오는군요. 그런데 왜 하필…….”
보안국장은 씩 웃었다.
“칼리에르 공비전하의 드레스가 망가졌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