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공비의 드레스 (4)2021.12.22.
“어쨌든 다행이지. 둘 다 무사히 건강하게 만나니 참 기쁘고, 또 고맙구나.”
실로 고마운 일이었다. 하마터면 겨우 본 며느리를 잃고 아들이 폐인이 되어 살아가는 꼴을 볼 뻔했다. 다 늙어서 그런 꼴까지 보고 싶지는 않았던 로렌스는 소렐에게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했다.
“잘 결정해줘서 고맙다. 아니었으면 큰일을 치를 뻔했어.”
“아니, 아니에요. 제가 잘못한 일을 바로잡은 것뿐이고, 그사이에 아프기만 해서…….”
“그래도 돌아왔잖니.”
로렌스는 식기를 내려놓고 소렐을 쳐다보았다.
“나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이혼남으로 만들지 않아줘서 고맙고.”
그게 중요했다. 소렐은 이혼남이라는 단어가 재미있는지 웃어버렸다.
“든든히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하도록 해요. 라이킨은 뼈가 아주 튼튼해서 상관없지만 아가는 다 아물지 않았다면서?”
“저도 다 아문 것 같아요. 이젠 엔버네스에도 여러 번 올 수 있고, 마법도 어느 정도 사용할 수 있는걸요. 물론 라이킨이 옆에서 많이 도와줘야 하지만요.”
식탁 위에서 흘러가는 말을 들으며 라이킨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 다음에는 샤를렌도 불러야겠다. 다시 이 가족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때론 아버지나 샤를렌을 초대해서 함께 식사를 하고, 카드놀이나 체스를 두며 신문을 읽는 고맙게 평온한 일상 말이다. 아, 물론 그 일상이 아주 평온하고, 또 ‘평범’한 것은 아니다. 애초에 이 집안사람들은 평범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드레스가 망가졌다고? 속상했겠구나. 내가 하나 사줄까?”
“고쳐서 입기로 했어요! 루겐버그 부인, 그러니까 의상실 주인이 더 예쁘게 만들어준다고 약속했고요. 저번에 주셨던 블루 사파이어도 꼭 달 거예요.”
“마음 상하지 않았다면 다행이다. 요즘 원체 세상이 험해서 별 희한한 일이 다 일어나는구나. 조금만 더 일찍 갔다간 네가 다칠 뻔했겠다.”
이미 엔버네스 시내에 슬금슬금 퍼진 이야기를 로렌스 오블리앙 공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 일 말입니다만, 아버지.”
로렌스는 고개를 들어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냥 평범한 강도사건이 아닌 것 같습니다.”
“네가 의뢰한 곳에서 일어난 사건이 평범할 리가 있나.”
십중팔구는 소렐을 노린 범행이다. 겉으로 보기엔 소렐이 아직까지도 불안정하고, 바늘 들어갈 틈도 없어 보이는 글래스턴 공작에 비해 훨씬 여리고 약해 보이니 소렐이 더 만만한 먹잇감이겠지.
“그 의상실에서 실종된 사람이 하나 있는데, 현재 용의자로 몰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실종되었으니 당연히 용의선상에 올랐겠지.”
“그런데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더군요.”
로렌스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이름, 나이, 전부 다 갑자기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그것참 신기하구나.”
“엔버네스에는 약 4년 전에 나타났다고 하더군요.”
“그전 기록은?”
라이킨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가짜 신분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가짜 신분이라니! 요즘 부쩍 추리소설을 더 많이 읽기 시작한 소렐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가짜 신분을 쓸 일이 뭐가 있을까? 그것도 4년씩이나.”
“알아보는 중입니다. 하지만 실종자 주변이나 지난 행적이 지나치게 평범하군요.”
“‘지나치게’?”
“예. ‘지나치게’.”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치게 평범하다는 건, 다시 말해 수상한 냄새가 난다는 뜻이었다.
“뭐, 그리 새삼스러울 건 없지. 엔버네스에는 온갖 나라에서 온 스파이들로 우글대니 말이다. 어느 나라 수도든 다 그렇지. 각자 사연을 감추고 갑자기 등장한 사람들도 많고. 모습을 감추기엔 이런 대도시가 딱이지.”
흐음. 로렌스는 잘 익힌 송아지고기의 풍미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향긋한 허브도 일품이다. 나중에 떠나기 전에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에게 특별히 따로 칭찬을 해둬야겠다.
“실종되었다면 찾아보거라. 살아 있든, 아니면 죽어 있든 뭐라도 나오겠지.”
“예, 아버지.”
“그런데 거기 죽은 사람이 있다 하지 않았니?”
“예.”
의상실 조수 샬롯 존슨 양이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칼에 찔렸습니다.”
“솜씨는?”
“정확하게 급소를 노렸습니다.”
“전문가구나. 그래서 나를 불렀고.”
“예, 그렇습니다.”
전문가의 솜씨로 깔끔하게 죽은 시신, 사라진 이의 수상한 신분, 무엇하나 이상하지 않은 게 없어 루겐버그 여사가 게거품을 물고 뒤로 넘어가는 것도 당연했다.
“의상실은?”
“저도 여러 번 점검한 곳입니다. 루겐버그 여사는 신분이 확실합니다. 하지만 그 조수들에게서 문제가 일어날 줄은 몰랐습니다.”
“네가 놓치는 부분이 있긴 하구나.”
“앞으로는 없을 겁니다.”
라이킨은 간결하고 확고하게 대답했다. 소렐은 고기에 곁들인 구운 아스파라거스와 가지, 그리고 에벌린이 특별히 따로 놔준 당근을 쿡 찔러 먹으면서 부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예전에는 영 관심이 없을 이야기였지만, 각성을 하고 소명 절차에까지 불려 다니면서 이젠 남편을 위해서라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걸 알았다.
“……물론 내가 너희 두 사람을 엔버네스로 부른 거다만.”
리페르게라에서 공주를 포함한 사절이 온다. 그리고 소명 절차까지 마친 소렐이 사교계로 돌아오기엔 딱 좋은 무대이기도 했다. 더불어 왕세자도 차단하고 말이다.
“우리 소렐은 공주님이기도 하고, 대마법사이기도 하지만 칼리에르 공비이지.”
그 지위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가 어마어마하다. 소렐은 로렌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금방 알아들었다.
“나는 어쨌든 이번 리페르게라 사절단 행사로, 가을의 일을 일단락했으면 좋겠구나.”
사람들이 수군대는 건 평생 따라붙겠지만 언제까지 글래스턴에 처박혀 있을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이 일은 나도 한번 알아보도록 하마. 소렐이 돌아오는데 시끄러운 일이 있어서는 안 되지, 안 돼.”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듯, 로렌스는 엄숙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 다음 날, 엔버네스 경시청의 로버트 베첼 경사는 어쩐지 이 사건을 높은 곳에서 주시하고 있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상관들이 그런 말을 흘렸기 때문이다.
‘칼리에르 공비가 연관되어서 그렇겠지, 아마……?’
자, 마음을 가다듬자. 높으신 분들이 주시하는 사건은 까다롭고, 잘못하면 모가지가 날아가지만, 바꿔 생각해보면 이게 바로 출세의 발판이 아니겠는가! 아직 젊은 축에 속하는 로버트 베첼은 기왕이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또 꿈을 키워보기로 했다.
“경사님, 실종된 용의자에게 애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숙집 주인을 한 번 더 심문해보니 흘리듯이 말했습니다.”
로버트 베첼 경사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 중요한 정보를 왜 이제야 말하는 거지? 당장 그 애인부터 찾아.”
“예.”
그럼 죽은 샬롯 존슨에 실종된 올리비아 마이슨까지 여자는 둘, 올리비아 마이슨의 애인이라면 아마 남자일 거다. 여자 둘에 남자 하나, 그리고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은 강도사건에 살인만 일어났다면 이건 치정이 아닐까?
‘의외로 쉽게 풀릴 수 있겠군.’
경사는 진급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아 걸음이 아주 가벼워졌다. * 경시청의 유능한 로버트 베첼 경사가 실종된 올리비아 마이슨 양의 애인을 찾아다니는 동안, 칼리에르 공은 권력을 남용했다.
“공주님께서 오시기엔 심히 누추한 자리이긴 합니다만.”
그는 그렇게 간단히 올리비아 마이슨 양의 하숙집, 아니, 용의자의 근거지를 평했다. 경찰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는 범죄자의 집에 공주님을 모시고 올 일은 아니었다.
“좁긴 해도 이 정도면 아늑한데요. 커튼도 예쁘고요.”
“그래봤자 용의자의 집이지요.”
“라이킨은 정말로 올리비아 마이슨 양이 불쌍한 샬롯 존슨 양을 살해했다고 생각해요?”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는 않습니다만, 적어도 실종된 이 방의 주인이 공주님의 드레스를 망치는 데 한몫했을 거라는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아, 그래서 평이 박했구나. 소렐은 싸구려 하숙집을 둘러보았다. 젊은 사람들이 사는 동네, 흔한 하숙집이다. 도심에 있는 의상실, 음식점, 백화점, 혹은 공장 등에 취업한 시골 청년들이 모여서 사는 곳이었다. 라이킨은 베첼 경사에게 특별히 부탁해 이곳으로 소렐을 데리고 왔다.
“한번 둘러보시지요. 하숙집 주인 말로는 마이슨 양이 언제나 성실하게 꼬박꼬박 하숙비를 밀리지 않고 냈다고 하더군요.”
성실하게 출퇴근하고, 루겐버그 여사도 올리비아 마이슨 양에 대해 특별히 나쁜 평을 하지는 않았다. 소렐은 여자 혼자서 사는 방의 빤한 침대, 난방용이자 간단한 요리를 할 수 있는 화덕, 벽장과 작은 책상을 물끄러미 보았다.
“……나는 대학에 가면 이런 방에서 살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셨군요.”
라이킨은 소렐의 눈에 황금빛이 돌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 사귄 친구들을 초대하고, 열심히 공부를 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뭐 때문에 이런 데서 산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소설에서는 이런 방이 많이 나오니까.”
장갑을 낀 손을 뻗어 책상을 만져보던 소렐이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마이슨 양이 이곳에 들렀다가 간 것 같아요.”
“그렇지요?”
“흔적들이……, 보여요.”
대마법사의 눈썰미를 피해갈 수는 없다. 소렐은 가구들과 함께 깔개가 깔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어쨌든 이런 곳에서 산다면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항상 상상과는 다른 현실인가 봐요. 나는 대학에 가지도 않았고, 갑자기 남편이 생겨서 커다란 저택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부디 현실이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당연히 좋죠! 나는 좁은 방은 사실 싫어요.”
소렐이 강하게 말하면서 벽장문을 매만지다가 화덕으로 고개를 돌렸다.
“화덕에서 뭘 태웠어요.”
라이킨은 곧장 다가가서 화덕을 열었다.
“재뿐이군요.”
“청소하지 않았다면 괜찮아요. 재라도 대충 끼워 맞춰볼 수는 있으니까.”
확신이 서린 단호한 말투에 뱀파이어는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그리 말씀하시니 참 든든합니다. 공주님을 모시고 오길 잘했군요.”
“솔직히 라이킨이 날 안 데리고 가면 쫓아가려고 했어요. 집에 있어야 한다는 건 이해하지만 좀이 쑤신단 말이에요.”
그러니 적당히 바깥 공기를 마시고, 기분전환을 하고, 힘을 얻어서 또 싸울 수 있었다. 소렐은 종알대면서도 열심히 살핀 뒤 벽장을 똑똑 두드려보았다.
“응, 그래요. 여기예요. 여기 흔적이 아주 많아요.”
“흔적이요?”
라이킨의 물음에 대답 대신 소렐은 실제로 보여주었다. 그는 벽장 쪽에 즐비한 손자국이 황금색으로 번쩍거리는 것을 보았다. 유난히 벽장을 많이 더듬은 그 손자국들은 잠시 번쩍거리다가 곧 사라졌다.
“……그렇군요.”
“열어도 될까요?”
“예. 하지만 조심하십시오. 직접 손으로 여시는 건 안 됩니다.”
소렐은 그래서 마법으로 열었다. 삐그덕 소리를 내며 열린 벽장은 겉으로 보기엔 평범했다.
“……전부 다 그대로 있군요. 옷도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걸려 있는 옷들 중에 빠진 건 없어 보였다. 라이킨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소렐은 벽장 안을 좀 더 보다가 다시 한번, 손자국 흔적들을 읽었다.
“서랍입니까?”
라이킨이 손을 뻗었다.
“조심해요.”
혹시 뭐가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소렐은 이상하게도 바짝 긴장하고 있었고, 라이킨은 그런 그녀가 꽤 감이 좋다고 생각했다.
“이런 건 자주 봤습니다. 걱정하지 마시지요.”
라이킨은 서랍을 일단 열었다. 안은 그저 평범한 리넨 손수건과 속옷 따위가 즐비할 뿐이다. 그는 서랍들을 다 열었다가, 다시 서랍 안을 더듬었다. 그러곤 몇 번 뭔가를 누르더니 새로 서랍을 닫았다가 쑥 열었다.
“……비었군요.”
새로운 서랍이 튀어나왔지만 다른 소지품이 가득하던 서랍과는 달리 텅 빈 상태였다.
“이 안에 뭐가 있었는지 아시겠습니까?”
“……쇠붙이가 있었어요.”
“칼?”
“네. 아마 단검.”
소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종이 몇 장도 있었는데 그건…….”
중얼거리던 그녀가 고개를 화덕으로 돌렸다.
“저기로 간 것 같네요.”
남은 게 하나도 없다. 라이킨은 지나치게 깔끔한 방을 바라보았다. 아마 중요한 건 없애기도 쉽게 만들었을 거다. 바로 이런 때를 대비해서.
“할게요.”
소렐은 이미 화덕 앞으로 가 있었다.
“조심하세요.”
라이킨이 주의를 주자 소렐은 손을 뻗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화덕 안에 불도 없는걸요.”
“……그래도.”
이미 그가 먼저 열어서 아무런 장치도 되어 있지 않다는 걸 확인했지만, 그래도.
“진짜 괜찮다니까.”
그는 항상 걱정만 한다. 아니, 그녀가 잠시 떠났을 때 생겨난 불안증이 틀림없다. 소렐은 사실 그녀 역시 그를 무척 걱정하고 있다는 건 깨닫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