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공비의 드레스 (3)2021.12.18.
가을부터 엔버네스에서 버티고 앉아 정치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한 발레시나스 공작, 로렌스 오블리앙 공은 수백 년간 침묵만 하고 있던 과거와는 달리 불과 몇 달 만에 엔버네스를 휘어잡았다. 도대체 무슨 수완이 있어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페르난데스 7세는 무슨 일만 터졌다 하면 부리나케 발레시나스 공작을 호출해댔고, 공작이 모르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뭐, 여태까지 의지할 만한 원로가 없었던 건 사실이지요.”
어떤 이는 이렇게 평했다. 비어 있던 ‘어른’의 자리를 발레시나스 공작이 차지했으니 당연한 거 아니냐는 평가였다.
“발레시나스 공작은 살아 있는 건국신화나 다름없는 분 아닙니까. 말 그대로 신화입니다, 신화.”
페르난데스 7세의 까마득한 선조 대부터 살아 있던 이고, 그동안 올센의 흥망성쇠를 다 지켜봤던 뱀파이어이니 당연한 일이라 평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발레시나스 공작은 겨울에 들어서면서 엔버네스 정치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조용히 은거하는 것처럼 표면에 나서지 않고 있지만, 눈을 시퍼렇게 뜨고 앉아 모든 걸 보고 있었다. 엔버네스 북동쪽에 자리한 발레시나스 공작저에 서신이 한 통 전달되었다.
“공작합하.”
발레시나스 공작을 모시는 싸늘한 뱀파이어들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모처럼 편안한 복장으로 안경을 끼고 즐겁게 독서를 하던 로렌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앞에 은쟁반이 내밀어졌다.
“글래스턴 공작저에서 왔습니다.”
로렌스는 은쟁반 위에 있는 얄팍한 봉투를 바라보다가, 책을 내려놓고 봉투를 집어 들었다. 저희가 갈까요, 아니면 오시겠습니까? 아무런 인사나 보내는 이의 서명도 없이 딱 한 줄만 적혀 있는 쪽지였다. 그래도 봉투에 집어넣어서 보낸 게 용하다고 칭찬을 해줘야 하나.
“고얀 놈. 애비를 오라 가라 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로렌스 오블리앙 공은 웃고 있었다. ‘제’가 갈까요, 가 아닌 ‘저희’가 갈까요, 였기 때문이다. 그는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
“외출하실 겁니까?”
“글래스턴 공작저로.”
로렌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타이를 골랐다.
“……가려면 내가 가야지.”
나이가 들면 혼잣말이 많아진다. 충직한 집사는 그래서 공작의 말에 하나하나 대답하지 않았다.
“내내 아프다가 이제 좀 괜찮아진 모양인데……, 그, 꽃을 좀 준비하게.”
“예.”
“화사한 것으로. 큰 게 좋겠어. 저녁은 게서 먹고 오도록 하지. 그리고 쥘 브루앙에 연락해서 가장 커다랗고 비싼 초콜릿 상자를 준비해달라고 하게.”
“예, 주인님.”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 타이보다는 크라밧이 나으려나? 멋쟁이 발레시나스 공작은 커프스도 보며 중얼거렸다.
“아가가 잘 먹고 있나 모르겠어. 가서 살펴볼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오늘도 바쁘겠다. * 공주님은 긴장을 하면 양손을 꼼지락거리고, 괜히 이리 걸어갔다 저리 걸어갔다 움직이길 반복한다.
“이리 오세요, 공주님. 앉아 계시지요.”
다쳤던 다리로 또 혹시 잘못되면 어쩌나, 괜히 걱정된 라이킨이 자리를 권했다. 그럼 일단은 앉고서도 또 꼼지락대는 거다.
“그……, 사과를 드려야겠지요?”
소렐이 망설이다가 물었다.
“뭘 말입니까?”
“걱정을 끼쳐드리고……, 이혼장을 써서 죄송하다고…….”
“공주님께서도 이젠 사교계에 익숙해지셨군요.”
이혼을 하려고 하는 게 엄청난 불명예라는 걸 잘 알고 있는 거다. 라이킨은 웃었다.
“걱정을 끼친 건 사과하셔야겠지만, 이혼장은 죄송하다고 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이미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라이킨이 먼저 했다고? 소렐은 고개를 들었다.
“부부는 한 몸이니 제가 한 사과로 된 일입니다.”
“화 많이 내셨어요? 많이 혼났어요? 나 때문에 어떡해.”
남편이 혼난 게 미안해서 소렐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화내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도 화내지 않으실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는 빙그레 웃었다. 그 모습이 꼭 로렌스와 닮았다.
“아버지에겐 자식들이 가장 중요하지, 그깟 명예가 중요하신 분이 아닙니다. 공주님께서 무사히 깨어나셨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아주 기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물론 엘펜하임에 다시 가려고 하셨다는 소식은 아주 못마땅해 하셨겠지만.”
“으음……, 무사히 다녀왔고, 또 라이킨이랑 같이 다녀왔으니까 괜찮겠지요……?”
라이킨은 잠시 생각했다.
“아마도.”
“대답이 너무 불확실한데요.”
“제가 지금 확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위험한 일을 무모하게 하는 건 무척 못마땅하게 생각하시기 때문에.”
소렐은 또록또록 눈동자를 굴렸다.
“……음, 나는 대마법사니까 엘펜하임에 가는 건 그렇게 위험하지 않았어요, 그렇지요?”
“그 거인이 위험하지 않은 존재는 아니지요, 공주님.”
“……우리 거인 이야기는 아버님한테 하지 말도록 해요.”
“저도 일단 그러고는 있는데, 그래도 글래스턴에서 내내 뭘 태웠다는 건 아실 겁니다.”
눈만 동그랗게 뜬 채 그를 보고 있는 소렐의 심정이 바로 그의 심정이었다.
“아버지의 눈을 피하기란 어렵지요.”
부부가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우리 아빠는 내가 어떻게 말릴 수 있는데…….”
하지만 로렌스는 잠자코 야단을 맞아야 할 것 같은 무서운 대상이기도 했다. 소렐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대단한 기운을 떠올렸다. 발레시나스 공작은 보통 뱀파이어가 아니었고, 존재 자체가 무기인 남편도 존경과 예의를 표하는 아버지이자 어른이기도 했다.
“공주님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니까요.”
미리 저기 구석에 가서 손이라도 들고 있어야 하나, 하고 자리를 보는 소렐에게 라이킨이 웃어보였다.
“아마 제가 더 혼날 겁니다.”
마침 그때 공작저 문이 열리고, 흑마가 끄는 마차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그러니까요. 라이킨이 당연히 더 혼나죠. 그러니까 내가 뭐라도 해야 할 거 아니에요.”
“아, 제가 혼나는 건 당연한 겁니까?”
“네.”
장인어른에게도 깨지고, 아버지에게도 깨지게 생긴 그는 그냥 피식 웃었다. 혼나라면 혼나야지 뭐 어떻게 하겠나. 마차가 당도하고, 현관문이 활짝 열렸다.
“아버…….”
“아, 안녕하세요!”
아버지를 맞이하려던 라이킨의 목소리가 묻힐 만큼 쨍하니 큰 목소리가 현관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생각보다 엄청나게 컸던 목소리에 모두가 당황하고, 외친 사람도 당황했다.
“아, 어, 으음…….”
이래서야 든든한 대마법사가 아닌 것 같다. 소렐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지나치게 긴장한 나머지 목소리가 커진 거다.
“그래, 잘 있었니?”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로렌스가 자상하게 웃고 있었다. 역시 라이킨은 아버지를 닮은 게 맞다. 웃음이 똑같았다.
“몰라보게 컸구나. 이젠 아가라고 부르지도 못하겠어. 밥은 잘 먹고 있니? 저 녀석이 잘 챙겨줘?”
이 집에서 언제나 눈총을 받는 건 저기 서 있는 아들이지 소렐이 아니었다. *
“음, 그래서 라이킨이 항상 머리를 빗겨줘야 해요.”
“저런. 보통 성가신 일이 아니구나.”
“모자로 눌러놓지도 못하고요, 리본은 휙 풀어버리고, 아무리 단단하게 묶어놔도 소용이 없어서 성가시긴 해요.”
식기가 달그락거리면서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모처럼 불을 환하게 밝힌 엔버네스의 글래스턴 공작저 식당에서 만찬이 진행되었다. 식탁 가운데에는 소렐이 받은 커다란 꽃이 꽂혀서 만찬 분위기를 더 화사하게 했다.
“안 그래도 머리카락 때문에 더 소문이 요란하게 났죠.”
늘 조용한 대화가 오고 가고, 어색하지 않고 편안한 침묵만 감돌던 식사 자리에 혼자 재잘거리는 존재가 하나 생겼다. 붙임성도 좋고 하고 싶은 말도 그만큼 많은 소렐이 그동안 겪었던 일들을 전부 다 풀어놓았다. 라이킨이 처음 듣는 이야기도 있었다.
“사람들은 익숙하지 않은 것을 두려워하지.”
“네……. 돌도 던지더라고요. 이해해요.”
“다치진 않았어?”
“하나도 안 다쳤어요! 저 그런 거 잘 피할 수 있어요. 보이지 않게 얇은 막 같은 걸 만드는 건데, 그렇게 하면 다 튕겨내요.”
듣는 사람은 속상해 죽겠는데 말하는 사람은 그래도 그 정도는 잘한다며 헤헤 웃는다. 그러니 속상해하지 말라는 뜻이란 걸 모두가 알았다.
“어떻게 지냈어? 잠은 어디에서 잤니?”
“그냥, 잘 ……잘 잤어요.”
사실 그대로 이야기하면 아버님이 속상해 하실까봐 소렐은 대충 얼버무렸다.
“길에서 잤다는 얘길 들었다만.”
아, 이미 알고 계시는구나.
“그게, 생각하시는 그런 노숙이 아니에요! 진짜 괜찮고 따뜻해요! 마법 하나면 다 되니까, 밤에 나무 위에서 자면 별도 많이 보이고 낭만적이었어요!”
공주님은 당황하면 목소리가 높아진다. 전혀 아니라고 손을 내젓고 고개도 도리도리 흔들었다.
“따뜻했어? 그때 점점 추워지던 때였는데.”
“네, 그리고 입고 다니던 망토를 잘 덮고 잤어요.”
“바닥이 불편했겠다.”
“마법으로 떠 있었어요. 괜찮아요.”
“들짐승은 만나지 않았고?”
소렐을 제외하면, 이 부자는 전부 전쟁이란 걸 몸소 겪어보고 풍천노숙도 질릴 만큼 한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바깥에서 잘 때 뭐가 위험한지 잘 알았다.
“음, 그건 좀 그렇더라고요. 늑대가 툭툭 찔러보고 간 적도 있었고, 곰도 만났어요. 맹수들은 그게 다고 너구리나 여우, 다람쥐는 기본이죠. 그래도…….”
그녀는 가만히 생각했다.
“그래도 사람보다는 위험하지 않아요.”
“많은 걸 배웠구나. 가끔은 나가는 것도 좋은 공부란다. 극단적이지만, 제 한 몸을 지킬 수 있는 수단만 있다면 괜찮은 공부 방법이지.”
소렐의 표정이 밝아지려는 찰나, 로렌스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자주 하는 건 별로 좋지 못해요. 특히 몸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또 하지는 않을 거예요!”
우물쭈물하다가 얼른 대답하자 로렌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생각했어요. 집에 돌아왔다니 내가 참 기뻤단다.”
에벌린이 준비한 만찬 음식은 모두 맛도 훌륭하고, 신선한 재료를 쓴 데다가 영양을 골고루 갖췄다. 로렌스는 소렐이 평소에도 질 좋은 음식을 잘 먹고 있겠구나, 하고 짐작했다. 환자에게 영양은 가장 중요하다.
“더 일찍 찾아오고 싶었지만 안정이 가장 중요하지. 그래서 방문을 미뤘단다.”
“엔버네스에서 무척 바쁘셨다고 들었어요.”
“그럼. 바쁘지요. 그래도 가족 얼굴 한번 못 봐서야 되겠니?”
그렇게 묻는 로렌스의 눈초리가 라이킨에게로 날아갔다. 잠자코 식사를 하고 있던 라이킨이 고개를 들었다.
“……제가 왜요, 아버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가 꼭 며느리를 못 보시게 막은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만.”
“그게 사실이지.”
로렌스는 불퉁하게 말했다.
“글래스턴에 한번 내려올 수는 있었다.”
“예, 압니다. 일부러 안 내려오신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눈치가 보여서 내가 가겠다고 말을 할 수가 있어야지. 늙으면 다 민폐야. 자식한테 폐 끼치지 않으려고 조심해야 해.”
아주 나이가 든 노인 같은 말에 소렐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언제든 오셔도 좋아요. 저는 저한테 화가 나셨을까 봐 감히 뵈러 가지 못한 거예요.”
“내가 왜 너한테 화가 나겠니? 전혀 그러지 않았어요. 그러지 않았어.”
로렌스는 고개를 느리게 흔들었다.
“납치까지 당하고 고생을 했는데, 그저 무사히 돌아올 뿐이었지.”
따뜻하고 정다운 말이었다.
“내가 무척 걱정을 했어요. 우리 모두가 다 걱정했는데, 바로 얼굴을 보지 못해 조금 서운했을 뿐이란다.”
“결국 그게 진심이시잖아요, 아버지. 공주님은 한동안 몹시 아프셨다고요.”
“그래, 안단다. 네가 좀 더 일찍 붙잡았다면 더 좋을 뻔했지. 혹은 아프지 않았을 수도 있고.”
“이 집에서 내 편은 아무도 없군.”
라이킨은 두 손을 들고 중얼거렸다.
“저요! 저는 라이킨 편이에요! 라이킨은 최선을 다했어요! 정말 열심히 쫓아와서 아주 많이 다쳤는걸요.”
소렐이 웃으면서 손을 번쩍 들었다. 그녀가 남편의 편을 가장 먼저 들어줘야지, 또 누가 들어주겠는가.
“뼈가 많이 부러졌대요, 아버님. 라이킨도 애썼어요. 피도 토했고요.”
그건 무척 큰일이지요, 그렇지요! 소렐이 눈을 크게 뜨면서 열심히 말했다.
“아주 빨리 나았겠지?”
“아주 멀쩡합니다.”
“그래, 뭐 별 거 아니구나.”
히익, 토끼의 눈이 더 커졌다. 그게 별 거 아니라니!
“별 거 아닌 거 아닌데……, 별 거 맞아요.”
소렐은 열심히 강조해보았다. 아들이 그렇게 다쳤다는데 어떻게 별 일이 아닐 수가 있겠는가.
“저 애가 여태 겪은 부상 중에 그리 심각한 수준까지 가지는 않았는걸. 어쨌든 의식은 있었잖니? 그러니 별 거 아니란다.”
뱀파이어들의 기준은 인간보다 훨씬 어마어마한가 보다.
“그래도 다친 건 다친 건데…….”
소렐은 어깨를 늘어뜨렸고, 라이킨은 그녀를 보며 웃었다. 열심히 편을 들었지만 별 효과가 없어서 풀이 죽었나 보다.
“아버지가 놀리시는 겁니다, 공주님.”
아, 그런가? 소렐은 웃고 있는 로렌스의 표정을 후다닥 확인했다. 그렇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