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대마법사와 가디언 (10)2021.12.08.
“뭐하고 있었어요?”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물어보았다.
“아시면서 뭘 또 물어보십니까.”
“하긴 내가 예쁘긴 하지…….”
아침에 일어나서 한참 보고 있을 만큼 예쁘긴 하지. 옹알옹알 하는 말에 라이킨이 피식 웃었다. 그의 손이 기분 좋게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소렐은 여전히 눈을 뜨지 못했다.
“오늘은 뭐 할 거예요?”
“사체가 남김없이 잘 타나 확인해보고……, 남은 흔적에서 사악한 기운이 여전히 느껴지는지 공주님께서 확인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소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슈토넨 후작 주변 일을 좀 탐문해보고…….”
예전이었다면 이런 말은 절대로 하지 않았겠지만, 라이킨 역시 그동안 겪은 일로 새롭게 배운 점이 많았다. 천 년이 지나도 사람은 여전히 배워야 할 게 많은가 보다. 서로 숨기는 일은 없도록 하기로 약속했으니, 그는 그 약속을 충실히 지켰다.
“거기가 그렇게 수상하다면서요.”
“예. 후작저에 흑마법사들이 숨어 있다는 첩보가 있었으니까요. 사실인지 확인만 해보려고 합니다.”
소렐이 그 말에 실눈을 뜨고 라이킨을 올려보았다.
“가능해요?”
“별 기대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무사히 돌아오기만 해도 다행이지요.”
“만약에 안 돌아온다면?”
“그럼 더 파봐야지요.”
소렐의 어깨가 솟았다가 다시 축 늘어졌다.
“별로 좋은 이야기는 아니지요?”
“……좋은 이야기가 아니긴 하지만, 칼리에르 공비라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이야기잖아요. 할 일이 참 많구나, 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그녀의 동그랗고 좁은 어깨를 살짝 잡고 문지르고,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그가 늘 함께 있겠다는 뜻이었다. 그는 가끔 몸으로 말했고, 소렐은 그가 하는 행동과 몸짓, 그리고 손짓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공주님께서 지나치게 신경 쓰실 정도는 아닙니다.”
“또 그 소리.”
소렐은 라이킨의 품에서 벗어나 발딱 일어났다. 라이킨은 한 박자 늦게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 말은 안 하기로 했잖아요. 뭐든 같이하자고.”
덩치도 큰 남자가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다 말씀드리는 거 아닙니까.”
“방금 그 말은 일부러 내가 신경을 덜 쓰고, 안심하게 하려고 하는 말이었어요. 불필요한 말이에요.”
저보다 한참 작은 아내가 순식간에 눈을 뜨고 쫑알대는 걸 보던 라이킨의 입가에 슬며시 웃음이 번졌다.
“알겠어요?”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정말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나중에 보고를 들은 다음에 신경을 쓰셔도 늦지 않습니다.”
“그건 알겠어요.”
소렐도 남편을 따라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
“또?”
다정하게 묻는 얼굴이 다가왔다. 저 남자는 왜 아침에도 저렇게 빛이 나는 걸까. 소렐은 괜히 얼굴이 붉어져서 시선을 돌렸다.
“또 오늘 할 일 뭐 있냐고…….”
“공주님 드레스룸을 좀 확인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응? 왜요?”
그는 손을 뻗어 탁자 위에 놓인 편지를 소렐에게 건넸다.
“곧 엔버네스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서요.”
으응?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긴 편지를 읽어 내리던 공주님의 눈빛이 점점 변했다. 아, 라이킨은 저 눈빛을 지독하게 사랑했다. 멍하다가도 빛이 들어오고, 그 누구도 감히 거스를 수 없을 만큼 강한 눈빛에 분명한 의지까지 담긴다. 그는 느긋하게 기대서 까만 눈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라이킨.”
“예, 공주님.”
그래서 언제나 소렐이 그를 똑바로 부르면, 그는 가장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대답했다.
“요즘 최신 유행이 뭔지 알아야겠어요!”
“물론입니다.”
“잔뜩 살 거예요!”
“그러시다니 기쁘군요.”
아침에 일어나자 결연히 선언을 한 공주님은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려 데구르르 구르듯 욕실로 향했다.
“공주님!”
그녀의 뒤에서 절박한 외침이 들려오자, 바쁘게 뛰어가던 소렐이 돌아보았다.
“저한테 키스는 해주시고 가셔야죠…….”
“이따 씻고 나서!”
“지금 해주셔야지.”
“부끄러워요!”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는 표정으로 당당히 외친 그녀가 욕실 문을 탁 닫고, 혼자 남은 남편은 욕실 문을 가만히 보다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이제야 드디어 제대로 평온하고 안락하며 완벽한 아침을 맞이한 기분이다.
* 한겨울, 사교계는 모피를 뒤집어쓰고 종종걸음을 치는 신사 숙녀들이 훈훈하게 불을 지핀 방에 모여 정신없이 춤을 추듯 뱅글뱅글 돌아간다. 사교계가 시작할 때쯤 대충 눈이 맞은 남녀가 어느새 청첩장을 발송할 때도 되었다. 그러던 중 리페르게라의 공주가 이 나라를 방문한다는 건 불쏘시개로 뜨거운 장작더미를 들쑤시는 거나 다름없었다. 공주가 방문하니 당연히 무도회가 열릴 거고, 모두가 무도회는 환영이다! 당장 유명한 의상실의 문턱이 닳아빠질 지경이었다.
“솔직히 공주님께서 가지 않으시겠다면 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만.”
칼리에르 공작부처의 대소사는 순전히 공비가 정한다는 철칙을 가지고 있던 라이킨이 느릿한 어투로 중얼거렸다.
“라이킨은 내가 싫다고 하면 뭐든 안 할 거잖아요.”
“평온한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 마땅히 아내의 말씀을 잘 들어야지요.”
피, 누가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가 아니랄까 봐 말은 매끄럽게 잘해. 소렐은 혀를 쏙 빼물고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을 쳐다보았다. 부인은 아주 조심스럽게 소렐의 티아라 컬렉션을 꺼내던 참이었다.
“교수님 말씀이 맞지요.”
티아라뿐인가. 헬레인 왕조의 유서 깊은 보석들까지 다 나왔다. 아무리 망한 왕조라 해도 그 부와 명예는 엄청났다. 그게 고스란히 메리에게서 소렐에게까지 물려졌다. 더구나 지금 그들이 머물고 있는 글래스턴 공작저는 시내에 있는 타운하우스에 비해 훨씬 크고 넓어서 방대한 컬렉션을 잔뜩 보관하기 좋았다.
“아내의 말은 잘 들어야 하는 거예요. 자, 이제 한번 골라볼까요?”
에벌린이 손뼉을 딱 쳤을 때, 마침 폴리아나 그린이 정기보고를 위해 공작저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녀는 추위에 털이 달린 코트로 온몸을 꽁꽁 싸매고 있었다. 글래스턴은 습한 추위로 유명한 곳이다.
“아, 안녕하세요.”
그녀는 정원사와 눈이 마주치자 인사를 건넸다. 정원사 역시 모자를 벗어 인사했다. 그러다가 들고 있던 삽으로 갑자기 흙을 거칠게 찍어버렸다.
“아니, 이 겨울에 웬 뱀이야……?”
중얼거리는 말에 폴리아나가 걸음을 멈췄다.
“뱀이요?”
“예, 뱀이네요. 요 며칠 좀 따뜻했다고 기어 나온 건가?”
“어디요?”
정원사는 땅을 가리켰다. 그쪽으로 걸어가 아래를 확인한 폴리아나의 눈매가 매섭게 굳었다. 그녀는 삽으로 두 동강이 난 새카만 실뱀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번쩍 들고 주변을 살폈다. 싸늘한 겨울 하늘과 기괴하게 하늘로 가지를 뻗고 선 오래된 고목들, 쇠창살처럼 뾰족하게 선 담장 장식과 그 너머를 빠르게 훑었다. 어딘가에, 그래, 어딘가에 그들을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별일이네요. 이 겨울에 뱀이 나오다니.”
“가끔 계절을 착각하고 나오다가 얼어 죽는 놈들이 있지요.”
폴리아나는 그 시선이 자신의 소속을 잃고 떠돌고 있는 성기사의 시선일 거라고 확신했다. * 갑자기 열리는 이 성대한 왕실 행사에 참석할 사람들은 아주 많았다. 어쨌든 한자리한다는 사람들은 다 나와야 했고, 나올 이유가 있는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기를 쓰고 초대장을 얻었다. 그동안 엔버네스 정치 흐름을 주시하며 때때로 개입을 하던 발레시나스 공작을 비롯해 그의 아들 부부가 참석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 막 전대 에설론 백작의 장례식을 치르고 있는 새 에설론 백작 역시 엔버네스로 올라갈 예정이었다.
“리페르게라에서 공주를 사절로 보내다니, 의외로군요. 허면 국혼일까요?”
에설론 백작의 장례식에서 죽은 에설론 백작을 기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뱀파이어였고, 백 년이 넘도록 사유지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고 잠만 잤으며, 때문에 교류하는 이가 거의 없었다. 마땅히 와야 할 뱀파이어 귀족들도 ‘이상하게’ 전부 죽었다. 그래도 근처 영지에서 사는 귀족들이 이해관계 때문에라도 참석한 뒤, 장례식은 뒷전이고 새로 시작할 행사 이야기를 해댔다.
“그럴 가능성이 크지요.”
사실 루벤 실베스터도 형식뿐인 장례식에는 관심이 없어서 조문객들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를 보탰다.
“하긴 왕세자전하께서도 이제 결혼을 하실 때가 되었지요. 사실 조금 늦은 감도 있어요.”
“아주 기대가 됩니다.”
딱 한마디만 했던 루벤은 다시 입을 다물고 기대가 된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은 그냥 듣기만 했다. 조문객들에게 와주셔서 감사하다 인사를 할 뿐이다. 그러고선 장례식마다 방문하는 슈토넨 후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먼 길을 오셨습니다.”
“그래도 와야지.”
후작은 시신도 없어서 비어 있는 관을 응시했다. 그래도 좀 똑똑하니 쓸 만할 줄 알았는데, 혼자 욕심에 어두워서 엘펜하임에 대마법사를 팔아먹겠다는 거창한 사망계획을 짜고 죽다니. 자업자득이다.
“어르신이 보시기에 한심한 몰골 아닙니까.”
새파랗게 젊은 뱀파이어 여럿이 먼저 죽다니. 루벤은 겉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 루드밀라가 떠들어대던 것을 그 역시 들었기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협정서는 이제 칼리에르 공의 살생부가 되었다.
“가는 데 순서가 어디 있나.”
슈토넨 후작은 말을 아꼈다. 저번에 봤을 때보다는 얼굴이 괜찮다. 그사이에 살아남을 구멍이라도 찾은 모양이지? 루벤은 그가 백작위를 받을 예정이 되기 전까지는 그가 방계라며 하인과 같은 신분으로 취급하던 후작이 저런 신세가 되어서 꽤나 통쾌했다. 어쨌든 루벤은 해냈다. 긴 시간 동안 인내하고 모욕을 감수하며 버틴 뒤 작위를 손에 넣었다. 이젠 아무도 그를 무시할 수 없다.
“하긴 그렇지요.”
“자네도 조심하게.”
이건 경고인가? 루벤은 알 수 없었으나 어쨌든 싱글싱글 웃었다.
“예, 후작님. 후작님도 항상 건강 조심하십시오.”
장례식을 치렀으니 그는 이제 명실상부한 에설론 백작이었고, 더 이상 방계도 아니었다. 이젠 실베스터가 에설론 백작위를 계승할 것이다.
“자네도 엔버네스로 올라가는가?”
“저는 신인 아닙니까. 여기저기 얼굴도장도 찍고, 폐하도 알현해야지요.”
갓 작위를 물려받은 이들은 할 일이 많았다. 여기저기 다니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게 정상이고, 루벤 또한 그럴 예정이었다.
“후작님께서는 엔버네스로 오실 예정이십니까?”
“다 늙은 사람이 끼어서 뭐하게? 발레시나스 공작 그치는 아직까지도 거기서 주책을 부리고 있는 모양이지만 나는 안 가.”
루벤은 슈토넨 후작이 발레시나스 공작에 대해 뭐라 하는 심술궂은 표정을 보곤 생각했다. 발레시나스 공작은 오늘 장례식의 주인공이 사망한 날 직후부터 오랜 침묵을 깨고 엔버네스로 상경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고, 솔직히 페르난데스 7세도 이 전설적인 정치가에게 많은 의지를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걸 저리 비난하는 걸 보면, 슈토넨 후작은 아직 살 만한가 보다.
‘이거 실망인데.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가 그 정도로 목을 조이지는 않았다는 건가.’
아니면 저 늙고 교활한 여우 같은 뱀파이어가 활로를 새로 찾았을 수도 있다. 어쨌든 슈토넨 후작은 지금 아주 죽을 정도는 아닌가 보다. 루벤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엔버네스에서 사교계 활동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는 어쨌든 후계를 정하고 겨우 얻어낸 작위를 대대손손 물려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줄을 잘 타야 한다.
“그래도 오셔서 가끔은 바람도 쐬시지요.”
“이미 충분히 쐬었지. 이번 겨울에는 유난히 외출이 잦았어.”
유난히 장례식이 잦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슈토넨 후작은 빈 관을 물끄러미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 엔버네스 기차역의 역무원들은 또다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일등석에서 몇 차례씩 수많은 짐들이 내려섰다. 짐꾼들은 값비싼 여행 가방을 수레에 싣고 호텔이나 타운하우스까지 달려갔고, 어쩌다가 아주 쟁쟁한 작위를 가진 귀족을 만나 저택까지 짐을 실어주면 그날은 일당을 넘치게 버는 날이었다.
“리페르게라에서 사절이 온다고 하니 덩달아 붐비는군!”
“귀족들이야 바쁘지. 원래 바빴던 우리는 짜증이 나고.”
통근할 때 엔버네스 기차역을 정기적으로 이용하는 신사들이 투덜거렸다. 그들은 널찍한 벤치에 앉아 저마다 파이프를 하나씩 물고, 신문을 펼쳐 들고서 기차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오, 저길 봐.”
마침 요란한 소리를 내며 멈춰 선 기차 쪽을 신사 하나가 가리켰다. 증기가 자욱하게 뿜어져 나오는 시커먼 기차에서 누군가가 내리고 있었다.
“드디어 나타났군.”
“누군데?”
“누구긴, 자네는 여태까지 신문을 뭐로 봤나? 글래스턴 공작부처 아니야?”
“아, 그래애?”
수군대는 소리는 기차의 시끄러운 엔진 소리에 묻혔으나, 사람들은 일제히 부채며 모자, 신문 사이로 눈을 드러내고 지금 막 글래스턴발 기차에서 내린 금발의 신사를 쳐다보았다. 그는 엔버네스의 제일가는 멋쟁이신사도 보고 서러워할 만큼 날렵하면서도 그리 가벼워 보이지 않는 완벽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마침 지팡이를 쥐지 않은 다른 손을 기차에서 막 내리는 숙녀에게 내밀던 참이다.
“어, 고마워요.”
칼리에르 공비는 아직도 그가 손을 내밀어 부축해주거나 도와주면 어색해하면서도 수줍게 웃었다. 그게 좋아서 라이킨은 손을 더 적극적으로 내밀었다.
“이젠 기차여행을 하셔도 될 만큼 많이 회복하셔서 다행입니다.”
작은 손이 그의 손안에 쏙 감겨들었다. 라이킨은 소렐이 조심조심 기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왔다. 화사한 모자를 쓴 얼굴에 혈색이 꽤 좋다.
“추우니 조심하십시오.”
“네.”
“피곤하진 않으시고요?”
소렐은 웃었다. 그는 늘 그녀를 귀하게 여기고, 불면 날아갈까, 만지면 깨질까, 가장 소중하게 대했다. 그게 단순히 물건 취급이 아니라는 건, 이제 소렐이 가장 잘 알았다.
“괜찮아요.”
“그럼 가시지요. 엔버네스에서 가장 비싼 의상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