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대마법사와 가디언 (8)2021.12.01.
카메론 셀레스트, 그 교활한 작자는 또 모습을 감췄다. 폴리아나 그린이 백방으로 그의 자취를 수소문하는 중이지만, 꼬리를 밟히지 않고 있다. 하긴 썩어빠진 엘펜하임에서 홀로 희게 빛나던 유능한 자니까 당연한 일이긴 했다. 그가 괜히 글래스턴 지부장으로 재직하면서 칼리에르 공을 상대했던 게 아닐 테니까. 하지만 그가 남긴 전언은 무시하기엔 신경이 쓰인다.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물었다간 함정일 수도 있지.”
라이킨은 조용히 대꾸했다. ‘슈토넨에 검은 두건을 쓴 더러운 것들이 있다’, 라. 누가 봐도 지금 사악하고 더러운 힘에 공격받고 있는 소렐을 위해 라이킨더러 덥석 물라고 던진 미끼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바로 쳐들어가서 그 더러운 것들을 잡아낸다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조슈아가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독이 오를 대로 오른 상태일 텐데요. 우리 피해도 최악을 각오해야 합니다.”
게다가 슈토넨을 급습한다는 건 이래저래 골치 아팠다. 안 그래도 예민한 페르난데스 7세가 귀족들 사이에서 전쟁이 났다면 펄쩍 뛸 테고, 왕세자가 왕권 강화를 핑계로 소렐에게 더 접근하는 데 불을 지를 거다. 발레시나스 공작이 몇 달째 엔버네스에 눌러앉아 그 미묘한 긴장 상태를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데, 그걸 더 엎어버릴 수는 없었다. 솔직히 라이킨은 여태까지 지나치게 성질머리대로 날뛰어댔다. 죽어 나간 귀족 뱀파이어들의 머릿수만 헤아려도 엄청났다.
‘역사에 살육자로 기록되겠지. 아니, 이미 전장에서 죽일 만큼 죽여서 상관없나.’
라이킨은 생각이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는 창가에 서서 담배를 물고 있었다. 창문은 열려서 차가운 바람을 사정없이 실내에 흘려보냈지만, 상관없었다. 무슨 일이 있다면 바로 아래로 뛰어 내려가야 했다. 저 아래에서는 또 내린 눈에 소렐이 기뻐하며 토끼 모습으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실컷 일하고, 또 실컷 신나게 노신다.
“슈토넨에 흑마법사들까지 더하면, 자칫 잘못하다간 나라 안에서 커다란 소요를 일으키게 됩니다. 걷잡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일단 조슈아는 슈토넨을 들쑤시는 걸 반대했다. 라이킨은 소렐이 에벌린에게 방싯방싯 웃으며 또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걸 바라보았다. 심각한 문제를 의논하다가도 문득 바라보면 걱정이 사라지는 장면이었다. 소렐은 마음껏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또 성실하게 일도 했다.
“누가 언제 건드린댔나?”
“요즘 마스터의 행보가 워낙 공격적이셔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칼리에르 공이 대마법사인 공비와 함께 엘펜하임에 다시 나타났다는 것도 상당한 소동을 불러일으켰다.
“세관과 외교부장관이 공식서한을 보냈습니다. 타국을 방문할 때는 가급적 공식적인 경로를 이용해달라고요.”
“대마법사에게 그런 서한을 보내?”
“공비전하께 말고, 마스터께 말입니다, 마스터께. 대마법사는 예외지요.”
“부부는 한 몸이야.”
라이킨은 천연덕스럽게 말하며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엘펜하임에서 커다란 마법을 몇 번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렐이 도로 앓아눕거나 피를 토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까지도 살얼음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슈토넨을 한번 둘러보긴 해야겠어.”
원래 그 곳은 가장 마지막에 남겨두었던 곳이기도 했다. 가장 맛있는 건 나중에 먹고, 가장 까다로운 것도 수족을 하나하나 잘라가며 마지막에 해치워야 하는 법.
“시도는 해보겠습니다만, 많은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조슈아가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였다. 라이킨도 이유를 알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 기간 동안 슈토넨 전체를 지배해온 슈토넨 후작의 명성을 무시하기도 힘들었고, 그 지방은 어차피 후작의 손안에 있다. 게다가 흑마법사들이 정말로 있다면 그곳에서는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 거다.
“어쨌든 해보긴 해야지.”
그리고 어쩌면 전쟁을 준비해야겠다. 나라 안에서 작은 내전을 일으키고서 그걸 감쪽같이 수습을 해야 한다는 게 힘들긴 하겠지만, 슈토넨에 흑마법사들이 있다면 내전을 무릅쓰고서라도 그곳에 불을 질러야 했다. 라이킨은 담배를 비벼 껐다. 그는 적어도 제 아내가 안심하고 눈밭 위에서 놀 정도의 환경은 조성해주고 싶었다. 나중엔 저 눈밭 위에서 뛰어놀겠다고 나서는 토끼가 소렐뿐이겠는가.
“하지만 아무것도 안 나올 가능성도 있습니다.”
여태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는 폴리아나가 입을 열어서 예민한 사실을 지적했다.
“이미 흑마법사들이 슈토넨을 차지했다면, 우리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대마법사도 만능은 아니고, 뱀파이어들 역시 그렇다. 펠릭스 이드리스조차 조용히 은거하면서 소중한 딸을 지키려 애썼다. 소렐이 가디언이 필요한 마법사여서 그랬지만, 지금의 소렐 역시 아주 완전한 마법사는 아니었다.
“엄청난 출혈을 각오해야 합니다.”
폴리아나는 그 점만 지적한 뒤 입을 다물었다. 좌천을 당해 글래스턴에 처박힌 지도 한참 지났다. 그녀는 최대한 말과 행동을 조심했다. 제정신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했다.
“……카메론 셀레스트가 보이지 않는다고.”
“찾는 중입니다.”
“계속해서 찾아봐. 어딘가에 흑마법사들이 있는 건 분명하고, 공주님이 목표인 것도 분명한데 도대체 누구와 손을 잡았는지는 분명하지 않군.”
그 말에 조슈아가 고개를 들었다.
“설마 카메론 셀레스트가 흑마법사들과 손을 잡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 철저한 성기사는 동족들을 빼곤 모조리 경멸하는 놈이었다. 아무리 겉으로는 온화한 척 웃고 있어도 속은 시커멓다는 걸 뱀파이어들은 이미 꿰뚫어 보고 있었다.
“어떠한 가능성도 간과하지 말자는 얘기지.”
라이킨은 그렇게만 대답한 뒤 여전히 놀란 채인 수하들을 두고 창가에서 휙 뛰어내렸다. 간밤에 눈이 잔뜩 내렸다. 잠시 뿐일 테지만 글래스턴 공작저는 온통 하얗게 변했다. 안뜰 한 편에서는 가림막을 치고 거인의 사체를 부지런히 처리 중이었고,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새하얀 토끼가 간밤에 온 흰 눈을 기뻐하며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발이 시리지도 않으십니까?”
저리 좋으실까. 라이킨은 소렐에게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물었다. 하도 가벼워서 두텁게 쌓인 눈 위에 발자국이 남지 않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힘껏 뛰어서 기어코 제 흔적을 남긴 토끼가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곤 고개도 들었다.
“어, 라이킨이다…….”
“예, 접니다.”
“언제 왔지?”
소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왔지요.”
라이킨은 무릎을 접고 소렐을 바라보았다.
“그리 좋으십니까?”
“재미있어요!”
데굴데굴 눈밭 위를 구르며 깔깔 웃는 걸 보다가 라이킨은 이마를 감쌌다.
의자를 내 와서 뜨개질을 하고 있던 에벌린이 물었다.
“갑자기 왜 그러시나요, 교수님. 없던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기 시작했나요?”
“아, 뭐, 비슷한 겁니다…….”
저 어린 아가씨를 언제 키워서 어떻게 잡아먹나, 생각하니 조금 깜깜해진다. 물론 양심은 없었기 때문에 딱 거기까지였다.
“아쉽네요.”
저 양반이 그러면 그렇지.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은 다시 뜨개질거리로 시선을 돌렸다. 도톰하게 짜서 공주님의 무릎 담요나 어깨에 두르는 숄을 하나 해드릴까, 생각 중이다. 라이킨은 시선을 돌려 가림막 쪽을 보았다. 눈까지 오는 사이에 가림막을 치고 거인의 피부터 다 빼버리길 잘했다. 피 냄새가 조금이라도 심하게 났다면 소렐은 여기에서 놀지도 못했을 거다. 그 피는 따로 정제되는 중이다. 어쨌든 뱀파이어들은 피를 다루는 데는 탁월한 전문가였으니까.
“재미있으시다니 다행입니다만, 너무 오래 놀지는 마십시오.”
눈이 묻었다가 털에 붙은 채로 녹고, 또다시 얼어붙으면 그대로 감기에 걸릴 게 뻔했다. 라이킨은 소렐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곤 느긋하게 웃었다. 부하들과 이런저런 논의를 할 때는 한참 날이 서 있지만, 소렐이 코를 움찔대며 폴짝대는 걸 보면 당장 신경이 부드럽게 풀린다. 소렐은 안뜰을 한 바퀴 더 돌아서 제 발자국을 온통 다 찍어놓은 뒤, 몸을 꼿꼿하게 세우곤 그녀가 눈 위에 만들어놓은 근사한 작품을 감상했다. 동그란 뒷모습이 깨물어주고 싶게 귀엽다.
‘건드리면 화내시려나?’
그렇다면 뒤에서 그냥 보기라도 하는 수밖에. 라이킨은 그의 토끼가 휴, 하고 한숨을 쉬느라 잠시 작은 어깨며 가슴을 들썩이는 걸 보곤 그냥 안고 싶은 걸 또 참아야 했다. 그때 소렐이 뒤를 돌아보았다.
“라이킨.”
“예, 공주님.”
반사적으로 대답한 그는 갑자기 그를 향해 뛰어오는 토끼를 보곤 얼른 손을 뻗었다. 폴짝 뛰어선 그의 손안에 폭 들어왔다.
“털이 많이 젖으셨습니다.”
“그건 아는데, 으, 왜 그래요, 또…….”
이 남자는 원래도 소렐을 애지중지했지만, 그녀가 자그마한 토끼가 되면 그게 더 심해졌다. 소렐은 귀찮게 자꾸만 키스를 퍼붓는 남자를 앞발로 쭉 밀어냈다.
“나 이제 그만 놀고 들어갈 거예요!”
“예.”
입술이 눌린 남자는 그래도 성실히 대답했다.
“그러니까 그만해요!”
“한 번만…….”
“아휴, 정말!”
그러면서도 토끼는 새침하게 눈을 감았다. 그녀는 더 이상 토끼인 모습을 감추는 데 급급하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그녀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똑같이 미소를 지어주며 따뜻한 눈길로 봐주고 있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특히 그녀의 남편은 더 좋아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짜증이 나서 앞발로 팡팡 때려도 웃기만 했다. 라이킨은 소렐을 소중히 안고 연신 입술을 눌러가며 도로 따뜻한 안으로 들어왔다.
“생각보다는 적게 노셨습니다, 공주님.”
“라이킨이 신경 쓰잖아요. 자, 이제 그만해요. 나 다시 돌아갈 거란 말이에요. 할 일이 많아요. 바쁘다고요.”
밀어내는 앞발까지도 기어이 입을 맞춘 그는 소렐을 욕실 안에 내려놓았다.
“나, 나가요.”
“언제쯤 목욕시중을 들어드릴 수 있을까요?”
어차피 볼 거 다 본 사이인데. 예쁘게 휘는 뱀파이어의 눈을 보고 토끼는 캬악, 세모 입을 무섭게 벌렸다.
“내가, 내가 아무리 예쁘고 귀엽기로서니……!”
“예, 역시 잘 아시고 계시군요.”
“그래도 그렇지 그런 말을 대낮부터 어떻게……!”
세상에, 저 음탕한 공작님 좀 봐! 한량이 따로 없어! 어머!
“밤시중까지 들어드리는 게 제 소박한 꿈이라서 말입니다.”
라이킨은 또다시 달려든 토끼에게 팡팡 얻어맞고서도 하하하 소리 내어 웃기만 했다. 토끼의 심장 소리가 콩콩콩콩 내달리고 있었다.
“내가, 내가 노력 중이잖아요……!”
“예, 압니다.”
“그러니까 그런 말은 우리 둘이 있을 때만……!”
“지금은 우리 둘뿐인데요, 공주님.”
“이, 이따가 밤에, 밤에 해요.”
“밤에 밤시중을 들라고요?”
“나가욧!”
결국 귀여워 죽겠는 공주님이 빽 소리를 치고 나서야 라이킨은 웃으면서 욕실 문을 닫았다.
“어디 가지 말고 거기 있어요!”
“예, 예.”
“혼자 심심하다고요!”
“예, 여기 앉았습니다. 어디 안 갑니다.”
한참 꾸물대고, 더운물을 받은 욕조에 퐁당 들어가는 소리가 나더니 뒤늦게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거기 있어요……?”
라이킨은 광대뼈를 문질렀다. 하도 웃어서 아프다.
“당연히 있지요, 공주님. 누가 분부하셨는데 자리를 함부로 뜨겠습니까.”
“……저기, 그, 어제 가지고 온 거인 말이에요.”
“그렇게 소리 지르지 않으셔도 다 들립니다. 거인 말이지요.”
“그거 어떻게 처리하는 거예요?”
“잘라서 태웁니다. 지금은 해체하는 작업 중이지요.”
“밤새 피를 다 뺐다고 들었어요.”
물소리가 함께 들린다. 라이킨은 머리를 욕실 문에 느긋하게 기댔다.
“그 피들은 다 어디다 써요?”
“정제를 한 뒤에 마셔서 치우지요.”
“그냥 마실 수도 있잖아요?”
라이킨은 내 피는 그냥 마셨는데? 소렐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냥 마셔도 멀쩡할 사람은, 글쎄요. 아버지나 저밖에 없을 겁니다.”
“아, 안 좋구나.”
“예, 좋지 않습니다.”
“라이킨.”
“예, 공주님.”
모처럼 평온한 시간이다. 라이킨은 온몸을 이완시키며 눈을 감았다. 한동안 쉴 여유조차 가지지 못해서 그런지, 지금 이 순간이 무척 나른하고 여유롭게 느껴졌다. 그는 사실 늘 이러고 싶었다. 소렐과, 그의 아내와 함께 사소한 일상을 공유하고, 내일은 둘이서 함께 뭘 할까, 고민하고, 별 거 아닌 일을 가지고 투닥거리다가 화해하고 싶었다. 그러다 수백 년쯤 지나서 귀여운 아기토끼‘들’과 함께 벽난로 앞에서 복닥복닥 즐겁게 놀면 그걸로 끝내주는 인생일 거다.
“저기, 있잖아요.”
새파란 눈이 다시 드러났다. 공주님께서 뭐 때문에 또 머뭇거리시는 건가.
“예.”
그는 이어지는 침묵에 일단은 듣고 있다고 대답했다.
“말씀하십시오.”
“저기…….”
또 침묵한다. 공주님은 당돌하고, 또 필요할 때는 지나치게 재빠르다가도 가끔은 머뭇거리면서 한참을 고민한다. 그는 오랜 시간을 살아온 이답게 인내심이라는 덕목을 가지고 있어서,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라이킨은 마셨어요?”
“저는 딱히 마실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
또 왜 이야기가 흡혈로 가는 건가.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공주님은 그를 늘 당황시키는 말을 내놓곤 했다.
“그럼 내 피는 언제 마셔요?”
아. 붉은 혀가 입술을 싸악 핥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