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대마법사와 가디언 (6)2021.11.24.
오직 전쟁을 위해서 만들어진 존재가 움직이는 건 짧은 대마법사이자 헬레인 토끼의 생애에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는 단단하고 커다랬으며, 동시에 믿기지 않을 정도로 민첩했다. 소렐은 라이킨이 박아놨던 깃대를 쑥 뽑는 걸 놀란 눈으로 보았다. 잔인한 장면이었으나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해서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대단한 힘이 필요한 게 분명한 일을 라이킨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했다.
“보실 필요 없습니다, 공비전하.”
조슈아가 뒤늦게 아차 싶어 소렐의 앞을 막았으나 그녀는 오히려 그를 밀어냈다. 피가 튀었고, 거인이 끔찍한 소리를 내며 비틀거렸으나 라이킨은 거인의 다른 눈에도 깃대를 박아놓고는 아주 유연하고 멀쩡하게 버텼다. 소렐은 저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오려고 했으나, 동시에 비명을 지를 수 없었다.
“조심해, 기둥 무너진다!”
“공비전하를 엄호해!”
거인이 균형을 잃으면서 기둥을 툭 치자 당장 단단한 기둥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파편이 튀고 위협적인 돌조각이 떨어진다. 뱀파이어들은 무기를 치켜세웠으나 그들에게 닿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조슈아는 급히 소렐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에 또 황금색이 감돌며 머리카락이 날리기 시작했다. 대마법사가 뱀파이어들을 보호하기 위해 마법을 쓰고 나섰다.
‘아, 이거 마스터께서 한마디 하시겠군.’
하지만 말리기도 전에 소렐이 먼저 손을 쓴 거라고 변명은 할 수 있겠다. 아니, 관두자. 생각해보니 그랬다간 재떨이가 날아올 것 같다.
“어, 어떻게…….”
소렐이 말을 더듬으며 불안하게 조슈아를 잡아끌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라이킨을 방해하지 않으면……, 서, 지킬 수 있어요?”
그녀는 간신히 물었다. 라이킨은 몸부림치는 거인에게 들러붙어 있었고, 그 거인은 이쪽 건물을 거의 무너뜨리려는 중이었다.
“……그건 좀…….”
조슈아도 지금 상황에서는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라이킨이 거인에게서 떨어져 나오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거인은 비명을 질러가며 눈에 들러붙은 라이킨을 떼어내려고 몸부림쳤다. 쿵! 거인이 결국 주저앉자 또다시 지축이 흔들렸다. 뱀파이어들은 서로를 붙잡고, 무엇보다 공비전하가 데구르르 굴러가는 일은 없도록 필사적으로 애썼다. 소렐은 조마조마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싱긋 웃으면서 가버리더니 저렇게 위험한 짓을 하려고 했던 건가. 저러다 거인의 손에 스치기라도 하면 어쩌지? 떨어지는 돌에 머리를 맞으면 어쩌지?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쿵! 소렐은 거인과 마찬가지로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제대로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고, 사실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그녀는 건물이 무너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붙들었다. 무슨 마법을 어떻게 펼쳤는지도 모르겠다. 황금색 결합점이 거인 쪽으로 성난 파도처럼 몰려가고, 축 늘어진 거인의 몸 사이에서 훤칠한 남자가 피를 뒤집어쓴 채 그 결합점을 받으며 일어났다.
“아, 이런.”
라이킨은 손을 툭툭 털다가 결합점을 보곤 소렐을 건너보았다. 놀란 게 역력한 얼굴이 하얗게 바랬다. 분명히 말해놓고 갔는데 충분하지 않았던 건가.
“멀쩡하신데요.”
조슈아는 허탈할 지경이라는 투로 중얼거렸다. 라이킨의 눈부신 금발에 황금색 결합점이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저, 전에도…….”
“예, 전에도 이러셨던 적이 종종 있었습니다. 사실 빈번한 일이라 저희는 굳이 나서지 않았습니다만.”
소렐은 그제야 뱀파이어들이 꿈쩍도 안 하고 그녀의 곁만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뱀파이어들을 둘러보자, 그들은 조금 난감하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나섰다간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거든요.”
언제나 그랬다. 라이킨은 머리를 툭툭 털었다. 다행히 얼굴에는 피가 묻지 않았다. 검은 옷에 피가 묻어서 문제이긴 하지만, 어쨌든 소렐에게 보여주는 얼굴은 깨끗하니 다행이다. 그는 덤덤한 얼굴로 소렐이 떠받치고 있는 천장과 기둥을 살폈다.
“공주님, 괜찮으니 그만하세요.”
그가 큰 목소리로 소렐을 제지했다. 하지만 거인이 쓰러지면서 어마어마한 충격을 주었다. 이대로 그녀가 손을 떼도 괜찮을까?
“마법을 사용하셨잖습니까. 그것도 아주 잘.”
자세히는 모르지만 소렐은 분명히 잘했을 거라는 자부심과 믿음이 묻어나는 말이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절대로 라이킨이 다치지 않고 뱀파이어들도 다치지 않도록 지반부터 건물 전체를 꽉 잡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절 믿으세요.”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괜찮습니다. 멀쩡해요.”
그제야 소렐은 온몸에 힘을 꽉 주고 있다가 서서히, 그와 눈을 마주치며 아주 천천히 힘을 풀었다. 엘펜하임 기사단 본부 전체를 감싸고 있던 마법과 함께 결합점도 사라졌다.
“앉으세요, 공비전하.”
조슈아를 비롯한 뱀파이어들이 소렐을 서둘러 앉히고 쉬게 했다. 크게 놀랐다지만, 건물 전체를 감쌀 정도로 대단한 마법을 사용하다니. 역시 대마법사였다. 하지만 라이킨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소렐의 시선이 가려지자마자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조슈아가 그에게 다가갔다.
“공주님 눈도 안 가려드리고 뭐했어?”
“가려드리려고 했는데 치우시던데요.”
나는 잘못 없습니다. 조슈아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좀 더 말을 잘해놓고 갔어야 했나.”
설명이 부족했을 수도 있겠다. 정말 괜찮다고 더 다정하게 웃으면서 어르고 달랜 뒤 갔어야 했다. 하지만 그럴 시간까지는 없었다. 거인이 더 날뛰면 그때는 정말로 건물이 무너졌을 테니까. 더 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서둘러 움직이는 게 언제나 중요했다.
“그 정도면 잘하고 가신 거 아닙니까? 설명까지 다 해주시고.”
대번에 라이킨의 이마가 더 패였다.
“공주님이 너희랑 같아?”
공주님은 민간인이다. 뱀파이어들은 전장에서 구를 대로 구른 군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니면 첩보원, 혹은 암살자였다. 전장에서 무슨 놈의 설명인가. 일단 하라는 대로 해야 하는 엄격한 규율과 통제만 있을 뿐이다. 그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공주님께는 사근사근하게 설명을, 그것도 납득이 되실 때까지 조곤조곤 해드려야 한다고 하니 조슈아만 기가 막힐 수밖에.
‘옘병이라고 하더니 진짜로 옘병이야.’
하지만 그는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대신 거인 쪽으로 눈을 돌렸다. 두 눈을 잃고 치명상을 입은 거인은 완전히 숨이 끊어졌다.
“오랜만에 게르곤을 보는군요.”
라이킨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멸족된 줄 알았는데 이렇게 살아 있었나요.”
“죽이기엔 역부족이고, 그나마 봉인이나 해놨던 모양이지.”
“그냥 죽이는 게 차라리 나았을 텐데.”
조슈아는 거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포악한 성정에 사람을 잡아먹는 거인이다. 마주치면 동족을 수도 없이 잃어가며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다.
“그러기엔 출혈이 지나치게 컸나 보지.”
“덕분에 우리가 골치 아파졌군요. 끌어내서 불을 지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이걸 어떻게 끌어내서 불을 지르나. 그냥 여기서 태워야지.”
“실내에서 태우자고요?”
제정신인가. 조슈아가 라이킨을 쳐다보았다.
“딱히 여기가 어떻게 되든 관심이 없어서.”
그렇다고 해서 그냥 두자니 나중에 흑마법사들, 그 시체 좋아하는 치들이 분명히 와서 거인의 잔해를 가져다 야료를 부릴 거다. 해서 이런 봉인된 사악한 힘들을 쓰러트렸다 해도 그 잔해까지 철저히 불태워 없애는 게 철칙이었다.
“공비전하, 가시면 안 됩니다.”
“공비전하.”
조심스럽게 불러대는 말소리에 두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오늘 라이킨이 꼭꼭 싸매서 따뜻하게 입혀놓은 공주님이 뱀파이어들의 만류를 뒤로 하고 참혹한 시신을 향해 통통 걸어오고 있었다.
“공주님.”
그녀는 거대한 거인을 보며 흠칫거렸지만, 그래도 다부지게 입을 꾹 다물고 라이킨과의 거리를 좁혔다.
“딱히 보실 만한 게 아닙니다.”
“이미 볼 만큼 봤어요.”
참혹한 시체를 보는 건 처음이라 그녀는 자꾸 움찔거렸지만 그래도 가까이 와서 라이킨을 잡았다. 그는 난감하다는 듯 몸을 뒤로 물렸다.
“피가 묻었습니다.”
“괜찮아요.”
안 묻은 부분을 잡았잖아. 소렐은 그를 올려다보다, 다시 거인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죽었어요?”
조심스러운 물음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처리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계속 여기에 서 있는 걸 보면 문제가 끝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시신을 처리하는 게 문제입니다.”
“아.”
소렐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 방비가 예전과 같지 않으니까요.”
“아. 무슨 말인지 알아요.”
거인의 피, 뼈, 가죽, 혀, 귀, 이런 것들을 잘라다 사특한 짓을 벌일 이들이 저 바깥에 득실댔다.
“여기서 태우는 게 난감하네요.”
“역시 공비전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조슈아는 거 보란 듯이 라이킨을 쳐다보았다.
“실내에서 태우는 건 말도 안 돼요. 이 정도면 몇 날 며칠을 태워야 할 텐데.”
라이킨은 자그마한 소렐의 머리 너머로 조슈아의 시선을 싸늘하게 맞받아쳤다. 그러다가 아래에서 꼬물꼬물 올라오는 손가락 두 개를 발견했다.
“둘 중 하나 골라요.”
뭘 고르라는 건가?
“하나는 내가 지금 여기에서 완전히 없애는 거.”
“안 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집으로 돌아갈 때 내가 이 시신도…….”
소렐은 거인의 얼굴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가 으, 몸서리를 치면서 고개를 돌렸다. 라이킨은 발을 움직여서 소렐이 보지 못하도록 몸으로 아예 가렸다.
“같이 가져가는 거.”
“……그런 일을 하시라고 모시고 온 건 아니었습니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할 거고, 자꾸 그런 식으로 못 하게 하면 또 독립할 거예요.”
내가 못 할 줄 알아? 공주님은 허리에 손을 척 얹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곤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혼자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후자가 좋겠어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라이킨을 쳐다보던 시선이 쓰러진 거인에게로 다시 향했다.
“……이 거인은 나를 노렸어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한테 달려오고 있었고, 그걸 피할 수도 없었어요.”
그녀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면서 아주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실제로 심각한 일이기도 했다.
“거인들이 종종 이러나요?”
“본디 아주 악한 종족이긴 합니다만, 그렇진 않습니다. 교활하고 비열하기도 해서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으면 알아서 몸을 사리지요.”
배가 고파서 사람을 잡아먹기도 하고, 또 유희로 사람을 잔혹하게 가지고 놀아서 문제이긴 했지만, 대마법사를 향해 뭐에 사로잡힌 것처럼 무작정 달려들지는 않았다.
“그리고 대마법사라면 아주 질색을 하지요.”
펠릭스 이드리스와 거인들이 얼마나 싸워댔나. 라이킨은 옛일을 떠올렸다.
“정말 이상한 게 맞네요. 조사해봐야겠어요. 뭐, 아마 뻔하겠지만요.”
조슈아는 소렐이 하는 말을 아주 심각하게 듣고 있었다. 글래스턴 공작저에 스며들었던 사악한 마녀들과 마법사들, 앓아누웠던 공비전하, 그리고 혼자 모든 걸 묵묵히 감내하는 중인 그녀의 가디언이자 뱀파이어들의 마스터. 이 충실한 비서이자 뱀파이어는 공비전하께서 하시는 말씀을 하나하나 전부 다 기억해뒀다.
“그러니까 뭐라 하지 말고 내 말대로 하는 거예요. 나도 그 외에는 절대로 마법을 사용하지 않을게요. 약속해요.”
대마법사는 교활하다. 늘 교활했다.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걸어 놓고 대뜸 생글생글 웃는다. 온갖 협상을 다 해보면서 한 번도 원하는 것을 놓친 적도 없고, 밑지는 짓을 해본 적은 더더욱 없는 뱀파이어에게 그게 통할 거라고 생각하나 보다.
“……지금부터는 전부 다 제게 맡기시고, 집으로 돌아갈 때만 마법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솔직히, 너무 잘 통했다.
“그럼요.”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는 순식간에 지나치게 쉬운 남자가 되어버렸다. 하긴 쉬운 남자가 되지 않으면 그가 어쩌겠는가. 말을 안 들어주면 당장 ‘독립’이라고 쓰고 ‘가출’이라 읽는 짓을 감행하시겠다고 깜찍한 협박까지 하시는데.
“알겠습니다.”
“좋아요.”
그는 손을 뻗어 또 제멋대로 춤을 춰대는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려다가 아차 싶어 손을 다시 내렸다.
“왜 그래요?”
만져주나 보다, 하고 기다리고 있던 소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이 지저분합니다.”
“깨끗한데?”
“혹시 몰라서요.”
“괜찮아요.”
그녀는 조그맣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피가 묻었어도 괜찮아요.”
순간 단단하고 차가운 남자의 표정이 약간 무너지는 것 같았다. 빈틈이 벌어지더니, 참지 못하고 그녀를 끌어당겨 이마에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