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대마법사와 가디언 (4)2021.11.17.
슈토넨 후작은 뱀을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생긴 게 징그럽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저택에서 자꾸만 나가는 새카만 실뱀들을 보며 딱 한마디만 했을 뿐이다.
“이 겨울에 수고가 많군.”
저게 다 흑마법사들이 자리를 틀고 앉아서 주문을 밤낮으로 외워댄 결과였다. 그렇게 공을 들였으니 저렇게 많기라도 해야지. 하지만 겨울인 데다가 사람들에게 발견되면 살아남는 개체가 얼마 되지 않을 거다.
“그런데 저렇게 다 내보내도 되겠나?”
“그건 저희가 결정하는 게 아니랍니다.”
“아, 모든 게 다 ‘그분’ 뜻이군.”
“네. ‘그분’ 뜻이지요.”
뱀은 싫어하지만, 그의 집에 어떤 대단하고 사악하며, 또한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를 노리는 존재가 있다는 건 든든하다. 슈토넨 후작은 몇 달 만에 잠을 제대로 잘 잤다. 그렇다면야 뱀쯤이야 상관없었다. 어찌 보면 칼리에르 공의 뒤꿈치를 정확하게 물어버릴 수 있는 가장 좋은 형상 아닌가. 이미 뱀들은, 흑마법사와 사악한 힘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
“맙소사, 이 사악한 존재들이 이 안까지 감히 침입하다니……!”
놀라서 손을 파르르 떠는 나이 든 성기사를 보던 소렐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처음도 아닌데 왜 새삼스럽게……?”
정말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에 라이킨은 고개를 슬쩍 돌리며 웃음을 참았다.
“나도 한 번 왔고, 라이킨도 한 번 왔고, 둘이 같이 왔으니까 그러면 세 번짼데.”
그녀는 손가락을 꼽아보다가 또 고개를 한 번 더 갸웃거렸다. 세 번째라 그들이 마주한 인원은 확연히 줄어들었으나, 저항은 훨씬 더 거셌다. 엘펜하임을 지키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은 사람들만 남았기 때문이다.
“성소를 범한 이 죄인들!”
그리고 라이킨 식으로 표현하자면, 단단히 마음먹기보단 원래 좀 단단히 미친 사람들이기도 했다. 소렐은 ‘성소’라는 말에 깨진 봉인이 처참하게 나뒹굴고 있는 뒤쪽을 새삼스럽게 쳐다보았다.
“여기가 성소였어요?”
“엘펜하임에서는 그렇게 불렀지요.”
“세상에. 양심도 없어.”
여긴 그저 자신들의 치부이자 예언된 멸망을 애써 가리는 곳에 불과한데!
“그러게나 말입니다.”
신은 허락한 적도 없는데 신의 이름을 감히 대신한다며 날뛰어대는 위인들이 하는 짓은 천 년 내내 지루할 정도로 뻔했다. 라이킨은 그러면서도 수하들이 알아서 저 시끄러운 성기사를 처리하는 모습을 소렐이 보기 전에 그녀의 눈을 가렸다.
“……전부터 생각한 건데요.”
“예.”
“라이킨은 바깥에서도 스스럼없이 막 잡고 만지고 그러네요.”
그가 눈을 가린 대로 얌전히 서 있으면서, 다홍빛 입술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예. 공주님께서 싫어하시지 않는 선에서.”
“그럼 싫어하지 않는다고 하면 이것저것 다 하겠다는 거예요?”
“예, 그렇습니다.”
“세상에! 미쳤나 봐!”
“언젠 뭐 제정신이었다고요.”
아,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여기에서 저런 말을 듣고 있나. 뱀파이어들 중 막내인 제롬이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고개를 돌렸다.
“받는 돈을 생각해, 돈을.”
조슈아가 그의 어깨를 툭툭 치고 지나갔다. 아 참, 그렇지. 다달이 계좌에 입금되는 돈을 생각하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면서 저런 말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의지가 생겼다. 제롬은 다시 어깨를 쭉 폈다.
“마스터, 공비전하. 한번 둘러봤는데, 엘펜하임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값비싼 물건들은 다 옮겨졌고, 처리하기 까다로운 고문서들만 잔뜩 남았는데…….”
말하다 말고 조슈아는 뒤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우리가 가져가지 않으면 곧 털리겠습니다.”
하지만 뱀파이어들이 가져간다 해도 결국 뱀파이어들에게 털리는 거 아닌가. 소렐은 그 점을 지적해볼까, 하다가 관뒀다.
“다른 놈들이 가져가게 두느니 우리가 가져가는 게 낫지.”
소렐 역시 라이킨의 저 말에 무척 동의했기 때문이다. 엘펜하임은 그들의 적에 관한 문서와 정보라면 닥치는 대로 모았다. 그들의 보호하에 있기 원하는 마법사와 마녀들도 수많은 정보를 가지고 엘펜하임으로 들어왔다. 소렐 역시 라이킨과의 결합점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이 엘펜하임에 있다는 걸 알고 왔던 전적이 있기 때문에, 엘펜하임이 보유하고 있는 방대한 자료가 얼마나 소중한지도 잘 알았다.
“다 가져가지는 못할 거예요.”
소렐은 외할아버지가 남긴 예언을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엘펜하임, 이 거대한 곳은 결국 소리도 없이 사라질 거다. 엘펜하임을 세운 이들은 그들의 이름이 길이길이 남길 바랐지만, 그 염원은 대마법사와 헬레인 토끼의 원한에 비해 그리 크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런 봉인이 도대체 뭘 얼마나 봉인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소렐의 물음에 조슈아가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건 극비로 분류되어 있을 겁니다. 엘펜하임의 새 기사단장도 그런 서류부터 바로 빼돌렸을 테고요. 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부탁해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깨어진 봉인과 붉은 예언 아래 남아 있는 흔적을 살폈다. 보통 크기가 아니었다. 보통 힘도 아니다.
“……고대마법 정도의 위력 같아요.”
순식간에 라이킨의 얼굴도 무섭게 굳었다.
“그 정도입니까?”
소렐이 다시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칫거렸다.
“아니, 그보다 더 큰 것 같아요. 봉인하는 데 바친 대가가 어마어마한데요.”
“이런…….”
그는 답지 않게 난감해했다.
“……큰일이에요. 이건 더구나 엘펜하임이 한 봉인도 아니고, 그 안에 숨겨진 더 오래된, 훨씬 오래된 봉인이네요.”
“큰일이군요. 엘펜하임은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어서 이런 봉인을 비슷하게 흉내도 냈을 텐데.”
가장 성스러운 집단을 자처한 이들의 본모습이 떼강도라는 건 전 세계가 다 알았다. 그러니 자신들의 악명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더더욱 성기사답게 행동하는 데 집착했다. 사악한 주술을 쓰는 이들을 핍박해 죽이거나 회유해서 자신들의 편에 서게 했다. 그리고 실제로 성기사단다운 행동도 했다. 옛 마법사들이 하던 대로, 사악한 존재와 힘들을 봉인한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요. 아무래도 이게 제일 큰 봉인일 것 같다는 거예요. 이건 모른 채로 그냥 넘어갔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다른 작은 것들은 미치지도 못할 힘이에요. 힘인지, 존재인지…….”
그것마저 불분명하지만. 소렐의 눈에 황금색 빛이 새카만 빛과 섞여 일렁이고, 풀어놨던 머리카락이 다시 부유하며 춤을 추었다.
“아주 커다랗고 사악한 거예요.”
그녀는 허공을 보고, 손을 뻗어 힘을 잃은 봉인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영락없는 대마법사의 모습에 뱀파이어들은 잔뜩 긴장을 하면서도 경외감 섞인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빨은 날카롭고……, 턱은 아주 강해요.”
한때 엘펜하임은 1대 칼리에르 공도, 그리고 지금 칼리에르 공도 이렇게 봉인해두려고 안간힘을 썼다. 실제로 그렇게 봉인된 뱀파이어들도 분명히 있을 거다. 그러나 엘펜하임이 힘을 잃은 지금, 봉인된 존재와 힘들이 깨어나고 있었다. 몇몇은 봉인된 지 오래되어 이미 힘을 잃었거나 소멸되었겠지만, 봉인으로 간신히 눌러놓은 것에 불과해 지금부터 위력을 떨칠 위험한 것들도 있었다.
“저와 같은 존재입니까, 공주님?”
라이킨이 물었다. 적의 적은 동지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행방이 묘연한 뱀파이어들이 돌아올 가능성도 있었다. 새카맣다가 황금색으로 다시 빛나는 눈이 그를 휙 쳐다보았다.
“……비슷해요. 비슷하게 강해요, 아니, 어쩌면 더 오래되었……, 그래요, 훨씬 더 오래되었고 더 강할 수도…….”
소렐은 그러다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너무 사악해요. 사악한 존재들의 부름에 기뻐하면서 여길 떠났어요.”
라이킨은 거대한 엘펜하임을 둘러보았다.
“이런 존재가 여기에 얼마나 더 잠들어 있었는지 반드시 알아봐야겠습니다.”
* 소렐은 또 다른 봉인을 찾아 달려갔다. 앞을 가로막는 이들도 거의 없었지만, 만일 그렇게 용감한 이들이 있다 해도 금방 쓸려나갔다.
“몇 개 더 있는 것 같아요. 할아버지의 예언과 함께 봉인해뒀던 큰 힘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 해서 무시할 수는 없어요. 대부분 엘펜하임이 해둔 거라서 약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리던 소렐이 갑자기 라이킨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이게 다 느껴지는 거죠? 신기하네. 저번에 왔을 때는 전혀 몰랐는데.”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시면 안 되지요, 공주님. 그때는 강제로 각성을 하셔서 마력이고 뭐고 하나도 제어가 안 되시던 상황이었고, 지금은 저와 더 단단하고 깊이 연결되셨으니 안정이 되신 상태입니다.”
아직까지도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날뛰는 걸 보니, 앞으로도 더 안정시켜야겠지만 말이다.
“아…….”
“저와 함께 오래 계셔서 그렇지요. 참 다행이지요?”
그렇지? 그러니까 나와 떨어져선 안 되겠지? 그렇지? 빨리 그렇다고 대답해줘. 아주 노골적인 눈빛과 질문에 소렐은 눈을 깜빡깜빡하다가 다른 질문을 툭 했다.
“그런데 라이킨, 그 가위 어떻게 했어요?”
공주님을 그가 무슨 수로 이기나. 라이킨은 그녀가 무슨 질문을 하는지 다 훤히 알면서도 괜히 모르는 척했다.
“무슨 가위 말씀이십니까?”
소렐은 그를 좀 더 끌어당겼다. 그래. 이렇게 끌어당기고, 계속 못 알아들은 척할 거냐고 눈꼬리를 하늘 쪽으로 올린 채 그를 똑바로 보는 게 좋았다.
“그거, 결합점 자르던 거……, 여기에서 가져왔단 말이에요.”
몇 달을 자고 일어났더니 깜빡한 일투성이였다. 이제야 생각이 난 김에 라이킨에게 확인하려는데, 이 남자가 생각보다 훨씬 더 유들유들하게 군다.
“아, 그거 말입니까. 없습니다.”
그는 아주 담백하고 깔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없다고요.”
“집에?”
“설마요.”
우리 공주님, 저를 그렇게 모르십니까?
“세상에서?”
그의 미소가 더 깊어졌다.
“예.”
기가 막혀서. 소렐은 입을 딱 벌리고 라이킨을 쳐다보았다.
“그게 어떤 물건인진 알아요?”
마법에 대항할 물건이라 해서 타슈미트에서 난 은을 삼십 년간 특별한 공법으로 다듬어 온갖 정성과 마법사들의 손길을 다해 만든 성물이었다. 최소한 사백 년은 된 물건이고, 유서도 깊었다. 아, 사백 년 정도야 라이킨에겐 아무것도 아닌 시간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제겐 이혼장이나 다름없는 물건이었지요. 그래서 깨끗하게 처리했습니다.”
소렐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표정으로 라이킨을 올려보았다.
“예뻐서 가지고 있으려고 한 건데……!”
얼마나 예쁜 은가위였는데!
“아.”
라이킨은 잠시 멈칫거렸다.
“똑같은 모양으로 하나 만들어다 드리겠습니다.”
“됐어요, 필요 없어…….”
자그마한 공주님은 팩 돌아섰다.
“수틀리면 다 없애버리기만 해. 꼭 그러더라. 나름 기념으로 간직하고 있으려고 한 건데.”
“그게 왜 기념할 일입니까? 저는 공주님을 발견했을 때를 생각하기만 해도 끔찍한데.”
다리가 이상하게 비틀어져 있었다. 전장을 굴러다니던 그는 그게 보통 골절이 아니란 걸 알았다. 고통 또한 끔찍했을 테니 소렐은 그대로 기절해서 널브러져 있었다. 한동안 그 장면이 눈앞을 떠나지 않아 잠들 수도,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
“독립기념.”
하지만 소렐은 주먹을 꼭 쥐고 다부지고 고집스럽게 라이킨의 속을 뒤집었고, 그는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한숨만 조용히 쉬었다.
“두 번 독립하셨다간 절 아주 죽이시겠습니다. 그리고 그게 무슨 독립입니까, 가출이지.”
“내가 독립이라고 하면 독립인 거예요. 어쨌든 혼자 씩씩하고 용감하게 잘 다녔잖아.”
“공주님.”
아차. 소렐은 팔랑팔랑 걸어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라이킨을 돌아보았다. 그는 얼굴을 굳히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런 말씀은……, 그런 말씀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씩씩하고 용감하게 잘 다녔다면 그가 그토록 아파하지도 않았을 거다. 얼른 달려와서 그의 손을 잡아주는 소렐은 그를 아프게도 하고, 또 순식간에 낫게도 했다.
“저는 다시는…….”
“안 할게요. 안 할게.”
소렐은 고개를 흔들었다. 사실 혼자 다닌 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밤에 하늘을 올려다보면 별들도 아름다웠고, 가을을 맞이했던 세상은 너무나 풍성했다. 그게 그녀와는 하등 상관없는 이야기라 그저 서러웠을 뿐이다.
“……아주 나쁘지는 않았고 좋은 점도 있었다는 거예요. 너무 속상해하지만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를 위로하기 위해 방랑하던 것도 괜찮았던 점이 있다고 말하는 소렐은 아직도 라이킨을 다 파악하진 못했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가 남편 없이 지내는 건 아주 싫어하길 바랐다. 좋은 점이라곤 하나도 없어야 남편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