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대마법사와 가디언 (3)2021.11.13.
“그 위험한 곳을 간다는데, 거길 가도 괜찮냐고 먼저 물어보셨어야지, 마법 써도 되냐는 말씀을 먼저 하십니까?”
기가 막히다는 투에 소렐의 까만 눈이 슬그머니 달아났다.
“그야 뭐, 나는 이미 한 번 가봤으니까…….”
“아, 가보셨다고.”
“별로……, 아무 일도 없었고…….”
이걸 도대체 어디서부터 다시 이야기해야 하나. 라이킨은 골치가 아파왔다. 가족계획은 아무래도 기존 예정보다 한 오백 년 후로 더 미뤄야겠다. 그는 토끼 같은 아내에 토끼 같은 자식들까지 다 쫓아다니면서 마음을 졸이기엔 이미 졸일 마음도 새카맣게 다 타버린 사람이었다.
“운이 아주 좋으셨다고 제가 말씀드렸지요?”
“그랬……지요.”
“제가 미칠 뻔했다고도 말씀드렸지요? 공주님, 절 보세요.”
여기저기 또로로록, 도로록 굴러다니는 시선마저 그가 도로 붙잡아왔다. 소렐은 미안하면 고개를 푹 숙이지만,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으면 시선을 데굴데굴 굴렸다.
“급습인 데다가 그놈들이 대마법사라면 경기를 일으키고, 또 공주님께서 수뇌부를 완전히 날려버리신 상황이라 그나마 나았던 겁니다. 그때는 그래도 엘펜하임에 사람이 있었어요.”
“응, 많았어요……. 막 쫓아 나오더라.”
소렐은 그때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 보세요. 그때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공주님을 잡겠다고 온 사람들에게 안 좋은 일을 겪으셨으면서, 그 사람들의 본부로 아무렇지도 않게 혼자 가셨어요. 제가 얼마나…….”
라이킨은 한숨을 쉬면서도 소렐의 뺨을 가장 사랑스럽다는 듯 어루만졌다. 나름 볼살이 통통했는데, 이번에 크게 앓고 나서는 젖살이 쪽 빠졌다. 토끼 모습도 자라더니, 지금 모습도 다 자라나 보다. 곧 공작저도 그녀가 휘두를 것 같아, 기대감이 커졌다. 아니, 이미 휘두르고 있나.
“도대체 어디로 가실지 모르겠어서 절 공주님께 더 묶어둔 겁니다.”
결합점에 잔뜩 토해낸 피를 묻혀, 그의 일부가 스미게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소렐이 가는 곳 어디든 쫓아가야겠다.
“그러니 이번엔……, 웬만한 일은 제가 해결할 테니, 공주님께서는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공주님께서 다 하시려고 하시면 안 됩니다.”
라이킨은 신신당부했다.
“물론 크게 걱정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공주님도 얼추 많이 회복되셨고, 무엇보다 큰 마법을 사용하시면 사용하실수록…….”
“라이킨이 대신 감당해주는 부분도 많아지니까. 나 그거 알아요.”
그의 말을 잡아챈 소렐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다가 시무룩하게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이고야.”
라이킨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안았다.
“우리 공주님께서 왜 또 속이 상하셨을까.”
그는 무척 안심이 되는 부분인데, 소렐은 그 부분이 속상한 모양이다.
“나 혼자 해야 하는데 라이킨이 대신하니까…….”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아버님이 그 부분에 관해서도 분명히 공주님께 언질을 하셨을 텐데요.”
가디언이 있는 대마법사는 어쩔 수 없다. 그렇게 해서라도 한 사람 몫을 해내면 그걸로 그만이었다. 그걸 펠릭스 이드리스는 인형을 가지고 노는 어린 딸에게 정확히 표현했다.
‘잘 부려먹어라.’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글래스턴 공작을 부려먹어…….”
아, 펠릭스가 딸에게 아주 철저히 부려먹으라고 했군.
“부려먹으셔야지요, 귀한 공주님이신데. 원래 그런 겁니다.”
엄마는 아주 든든한 기사님이라고 했고, 아빠는 딱 부려먹기 좋은 돈 많은 시종이라고 했다.
“……엄마가 좀 더 오래 사셨으면 좋았을 텐데.”
헬레인 토끼치고는 짧게 산 거라고, 아빠는 스치듯이 중얼거렸다.
“내가 아주 멋있는 기사님을 만날 거라고 했으니까……, 엄마도 보고 가셨으면 좋았는데. 아빠는 좀 정서에 안 좋은 교육을 했어요. 기사님이라고 하면 낭만적이고 멋있잖아. 기대도 되고. 근데 부려먹을 수 있는 돈 많은 놈이라고……. 그게 뭐야, 사위한테.”
“사위라고 할 때마다 펄쩍 뛰었으니까 그렇지요.”
결혼이나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토끼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없었지만, 펠릭스가 화내는 건 재미있어서 깐족대며 대마법사의 울화통을 터지게 만들었던 라이킨은 약간 반성하며 소렐을 꼭 안았다.
“엘펜하임에 다 같이 가요.”
여기에서 ‘다 같이’라는 건 조슈아를 비롯한 라이킨의 부하들까지도 포함이다.
“봐서요, 공주님.”
“나는 괜찮은데.”
“그 말씀은 전혀 괜찮지 않으실 때도 열심히 하셔서 제가 영 믿음이 가지 않습니다.”
“라이킨은 내 말을 듣는 게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는 걸 믿잖아요.”
소렐은 입을 뚜 하고 내밀며 부루퉁하게 중얼거렸다. 공비와 대마법사라는 지위에 맞게 어른스럽게 행동하려고 하는 듯하다가도 꼭 소렐다운 모습이 나온다. 라이킨은 그게 너무나 좋았다.
“라이킨이 엘펜하임까지 가자고 하는 거 보니까 대충 다 나은 거네요, 뭐…….”
힐끗힐끗 그를 보면서 하고 싶은 말은 쫑알쫑알 다 하고, 그러면서도 얌전히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 걸 보니까 몸도 마음도 다 나은 게 맞다. 라이킨은 슬그머니 웃었다. 저 모습을 보지 못해 마음을 졸이고, 에벌린과 함께 난리를 쳐가며 밤을 새워 고생했던 날이 깨끗하게 지워졌다. 소렐이 나았다. 그는 갑작스레 그녀를 끌어당겨 입을 맞춰댔다.
“어어, 자꾸…….”
“공주님만 참으신 줄 아십니까.”
낮게 깔린 목소리에 소렐은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저도 자제하느라 혼났습니다. 아픈 사람 앞에서 뭘 어떻게 할 수도 없고.”
“할 건 했으면서.”
키스도 하고 안기도 하고. 툭 튀어나온 입술이 한마디도 안 졌다.
“아무래도 할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지요.”
그러니 기를 쓰고 낫게 할 수밖에. 아픈 환자가 감당해야 하는 모든 짐까지 대신 짊어지고서라도 낫게 할 수밖에.
“빨리 엘펜하임에라도 가야겠네요. 머릿속에 든 게 그런 것밖에 없어.”
“제가 원래 그렇습니다.”
싫으신가? 싫으셔도 할 수 없는데. 라이킨은 조금 머뭇거리는 소렐을 살폈다.
“나도……, 나도 조금 라이킨 닮아가는 것 같아요.”
싫을 리가. 그의 품 안에서 꺄악 하는 비명소리가 나다가 다시 묻혔다.
“근데 우리 엘펜하임에 가서 뭐해요?”
“좀 확인할 게 있습니다.”
“……나도 뭐 좀 확인하러 거기 갔는데.”
“예. 오래된 문서를 뒤지려면 무조건 엘펜하임에 가야지요.”
결국 라이킨도 같은 목적이라는 얘기였다.
“힘이라면 그저 미쳐버리는 놈들이라, 안 좋은 것이든 좋은 것이든, 정보란 정보는 죄다 물어다 놨습니다. 사실 그중의 대부분은 헬레인 왕조의 서고를 털어낸 정보들이지요.”
다른 건 몰라도 귀한 서책들과 자료들이 통째로 넘어갔다는 것에 대해서는 펠릭스 이드리스도 무척 가슴 아파했다.
“그걸 좀 가지러 가볼까, 합니다.”
소렐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뭘 확인해볼 거예요?”
“미리 아시면 재미없지요.”
말을 안 해주겠다고? 토끼 공주님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게 누가 혼자 엘펜하임으로 가시랍니까. 함께 가주셨으면 되었을 것을.”
“이것 봐! 정말 뒤끝 길다니까!”
“예. 제가 그렇습니다.”
그는 소렐을 안고 아예 푹신한 소파에 누워버렸다.
“공주님께서 절 두고 가시면 섭섭해서 뒤끝 길게 남고, 질투도 심하고, 변태이기도 하고, 뭐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쩝니까. 이젠 이혼도 취하하셨는데.”
“엄청 좋아하네요.”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가, 했더니 결국 이혼소송 취하 때문이다. 내내 눈이 예쁘게 휘어져서 웃는 걸 보던 소렐이 참나, 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 몇 달 전, 대마법사가 갑자기 나타나서 닥치는 대로 다 재워버렸던 엘펜하임 기사단 본부는 이젠 동네북 수준으로 전락했다. 잠깐 임무를 위해 출타했던 수뇌부가 그대로 시신이 되어버리고, 대마법사가 들이닥쳐서 들쑤시고 간 뒤에 곧장 칼리에르 공, 그들이 증오하는 뱀파이어까지 들이닥쳤다. 아무도 뚫을 수 없던 철옹성이 그대로 뚫렸다. 새로 만들어진 수뇌부는 아주 조금씩 무너지고 있던 엘펜하임이 갑자기 폭삭 무너지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저번에 왔을 때보다 사람이 훨씬 없는 것 같아요.”
높은 천장과 대리석 바닥에 소렐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한가하게 걷고 있었다. 지금 막 서른 명 가까이 되는 뱀파이어들과 함께 엘펜하임으로 이동마법을 사용한 그녀의 손을 라이킨이 꼭 잡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황금색 결합점이 흘러내렸다.
“예. 그런 걸 보러 온 겁니다.”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으아악, 하고 비명을 지르던 수도사 하나가 달아나다가 뱀파이어들에게 잡힌 참이었다.
“사람들이 몰려오면 내가 먼저 다 재워버리면 될까요?”
“아뇨, 공주님께서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화사하게 웃은 공작님은 공주님이 수도사 쪽은 보지 못하게 한 뒤 한가롭게 걸어갔다. 그는 평소에 즐겨 입던 셔츠와 바지 차림이 아닌, 언제라도 싸울 수 있는 간편하고도 튼튼한 차림이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전장에서 그와 함께한 검도 여차하면 바로 뽑혀 나올 상태였다.
“그래도 엄청나게 몰려올 텐데.”
“저번보다는 훨씬 적을 겁니다. 어차피 이젠 남아 있는 이도 얼마 없으니까요.”
툭하면 대마법사가 오거나 뱀파이어가 찾아오고, 헬레인 왕조에게서 빼앗았던 수많은 유산도 알고 보니 가짜고, 그 유산을 바탕으로 간신히 이룩했던 부도 더 이상은 소용이 없었다. 엘펜하임에 적을 두었던 이들이 도망치기 시작한 지도 제법 되었다.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갔다는 말이에요? 세상에…….”
“누가 침몰하는 배에 계속 있고 싶어 하겠습니까.”
라이킨은 단조롭게 말하며 소렐을 데리고 걸어갔다. 높이 선 기둥들을 지나, 반질반질한 바닥을 밟고 기사들이 한때 자랑스럽게 전시해놓았던 전시대를 스쳐 지나갔다. 흉물스럽게 녹아내린 가짜 티아라들은 끔찍한 몰골이었으나 치울 여유조차 없었던 모양이다. 소렐은 잠시 그 티아라들을 바라보았다.
“뭔가 느껴지십니까?”
“아주 정교한 마법의 흔적이요.”
아빠의 솜씨다. 미소를 지은 소렐은 타박타박 티아라가 들어 있는 유리상자 쪽으로 걸어갔다. 저 먼 곳에서 뱀파이어들을 발견하고 작은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그들이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그 정도로 엘펜하임은 고요했다. 차라리 버려졌다는 게 맞겠다.
“이렇게 날짜를 확실하게 정해서 딱 녹여버리는 건데……, 이게 가능한가? 어떻게 날짜를 알았지……? 아, 엄마가 알려줬나?”
반쯤 녹아내린 티아라를 유심히 보며 중얼중얼하는 소렐은 무섭게 집중하고 있었다. 라이킨은 아빠가 걸어둔 마법을 읽어내기 위해 애쓰는 아내를 슬쩍 미소 지으며 바라보았다.
“근데 어떻게 이렇게 오래 마법이 유지된 거지? 아, 이걸 아빠한테 물어볼 걸 그랬나.”
소렐은 고개를 휙 들어서 라이킨을 보았다.
“아버님이 하신 겁니까?”
“이렇게 정확한 위치를 잡아서 언제 몇 날 몇 시에 봉인을 유지하고 있는 물건의 실체를 보이고, 또 녹게 한다는 게 쉬운 게 아니거든요. 하긴 뭐, 우리 아빠는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지’라고 하시겠지만.”
“스스로 뛰어나다는 걸 아주 잘 아는 마법사였지요.”
그야말로 대마법사라는 호칭이 딱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라이킨은 고개를 돌려 더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어쩌면 이 상황까지도 예감했는지도 모릅니다.”
봉인이 다 깨져서 새빨간 예언이 다 드러났다. 헬레인 왕조의 마지막 왕, 레너드 3세가 자신의 육신을 바친 예언이라 했다.
“……말 그대로네요. 아무도 엘펜하임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겠어요.”
소렐은 을씨년스러운 주변과 예언을 번갈아보며 중얼거렸다.
“성기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결말이었지요. 그들은 야망과 허세가 가득했으니까요.”
라이킨은 예언을 덮고 있다가 완전히 깨져버린 거대한 돌을 향해 다가갔다. 진흙이며 별의 별 공법으로 뒤덮어보려 했다가 끝내 쪼개진 돌은 치우기엔 너무나 컸다. 그는 손을 뻗어보았다가 다시 거뒀다.
“그래서 예언도, 다른 삿된 것도 함께 뒤덮으려 했나 봅니다.”
그는 이른바 성스러운 힘이 깃든 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건 예언만 봉인한 돌이 아니군요.”
완전히 깨져버려 처참히 나뒹굴고 있는 돌이 새하얗기만 하다. 예전엔 성스럽게 흰 빛이 돌았겠지만, 지금은 완전히 죽어버린 색이다. 소렐은 손을 뻗어보았다. 뱀파이어는 어떻게 해서든 밀어내던 돌이 대마법사의 손 앞에서는 그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소렐의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
“……예언으로 한 번 누르고, 그 위에 성력까지 덮은 거예요. 이 아래……, 아니, 도대체 무슨 더러운 것을 봉인하려고 한 거죠?”
아주 사악하고 오래된, 새카만 것. 그 흔적을 발견한 새로운 대마법사의 뒷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
“에그머니!”
슈토넨 후작의 저택에서 일을 하던 하녀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왜 그러니, 베티?”
비명소리에 바깥에서 일을 하던 정원사가 고개를 들었다.
“아저, 아저씨, 저기, 배, 배앰……!”
새카만 실뱀 한 마리가 빨랫줄 아래를 스르륵 기어가더니 돌담 틈 사이로 잽싸게 사라졌다.
“또 나타났단 말이야?”
“아휴, 심장이 떨려서 살 수가 없어요!”
베티는 울상을 지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요즘 뱀이 너무 많이 나타나는 것 같아요……. 도로시도 큰 주방 창가에서 설거지를 하다가 창밖으로 기어가는 뱀을 봤대요. 꼭 저렇게 까맣고 가느다란 뱀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이거야 원, 나도 정원에서 하도 여러 마리를 봐서 어떻게 할지 난감하다.”
“잡긴 잡으셨어요?”
나이만큼 경력이 긴 정원사는 잠시 입술을 말고 고민했다.
“그게, 여태까지 봤던 뱀들보다 훨씬 잽싸고 빠른 놈들이라 하나도 잡지 못했어.”
“참 이상해요. 이 추운 겨울에 무슨 뱀이람.”
“그러게나 말이다. 여긴 남쪽 지방도 아닌데 말이야.”
이미 여기저기에서 뱀이 출몰할 거라는 언질을 받았던 정원사는 그가 아는 자연법칙을 거슬러도 한참 거슬러버린 이 현상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그저 난감하기만 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굳게 서 있는 오래된 저택 건물을 쳐다보았다. 공교롭게도 그가 쳐다보고 있는 건물 깊숙한 곳에서 자꾸만 새카만 실뱀들이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