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대마법사와 가디언 (2)2021.11.10.
깨진 유리창을 통해 찬바람이 들어와 그들을 때렸다. 글래스턴의 겨울은 축축하고 기분이 나쁘다. 안개가 끼다가 얼어붙고, 눈은 쉴 새 없이 내렸으며, 진득하게 고여 또 빙판을 만들었다. 카메론 셀레스트는 이 도시의 겨울이 특히 싫었다. 갑자기 유리창이 깨졌으니 아무리 조용한 연구동이라 해도 곧 사람이 올 거다. 그러니 그전에 뭐라도 얻어내야 했다.
“네게 낙인이 찍혀 끌려 다니느니 차라리 죽겠어.”
곧 죽어도 전 에설론 백작 꼴은 나지 않겠다, 이거다. 실제로 에설론 백작을 보기 좋게 낚아 올릴 정도로 실력과 경험이 출중한 성기사는 너덜너덜한 꼴을 하고 폴리아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폴린.”
폴리아나는 그런 식으로 짜증나게 부르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네 마스터가 지금 한참 청소 중이지?”
그리고 카메론 셀레스트는 뱀파이어들의 추적을 피해 도망 중이었다. 글래스턴 공작이 바로 그의 목을 가지고 싶어 하는 이인데 공작의 영지로 온 건 한마디로 목을 내놓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카메론은 솔직히, 폴리아나를 겨눈 검을 내려놓으라고 부하에게 명하고 진솔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지금은 마음이 가는 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에겐 그 정도의 여유도 없었다.
“어. 너도 포함해서 청소 중이시지.”
그리고 폴리아나는 그에게 무척 화가 났다. 수십 년을 공들여 쌓은 우호적인 관계가 이렇게 파토 나는 건가. 딱히 잘한 건 없지만, 입맛이 씁쓸한 걸 보니 카메론은 역시나 개새끼였다.
“슈토넨 후작은 아직 살아 있던데.”
“네가 알 게 뭐야.”
성기사는 고개를 살짝 틀었다. 날카로운 검이 목에 드리워져 있으니 조심해야 했지만, 카메론은 그 검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하긴 폴리아나도 마찬가지였다.
“폴린, 슈토넨에 검은 두건을 쓴 더러운 것들이 있어.”
성기사들은 엘펜하임으로 들어온 정식 마법사와 마녀들은 환영했지만, 검은 두건을 쓴 흑마법사는 잡아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들은 뱀파이어에게도 배척받았고, 인간들에게는 당연히 그러했다. 폴리아나의 표정은 그렇다 해도 바뀌지 않았다.
“네 말을 어떻게 믿으라고.”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나중에 제안하고 싶은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하라고. 나는 분명히 말해줬어, 폴린.”
“이게 네 구명줄이야?”
카메론은 쓸데없이 자존심을 세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정보라면 쓸데없는데.”
카메론은 그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만나서 반가웠어, 폴린. 나중에 또 봐.”
나중은 무슨. 폴리아나는 카메론 셀레스트를 다시는 보지 않는 것이 평온한 삶이라는 걸 아주 잘 알았다. * 신성력은 빛을 잃었고, 마법은 쇠퇴했으며, 오직 인간의 과학만이 눈부시게 발전했다. 오랜 힘들과 존재들은 전부 잊히거나, 혹은 잃어버렸다. 가장 최초에 가까운 힘, 혹은 권세 중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건 고대마법뿐이었다. 그조차도 찬란하게 경외 받던 시기를 지나 온갖 위협을 다 받아가며 계승되었다. 그러니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이들은 남의 것을 빼앗거나, 혹은 잊힌 힘을 찾아 헤맸다. 특히 흑마법사, 주술사, 요술쟁이 등으로 불리며 박해를 받던 이들에겐 그 힘을 찾는 게 너무나 절실했다. 찾지 못한다면 오직 죽음뿐이다.
“가능한가?”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가 소렐 이드리스를 제 손으로 죽이는 거야 슈토넨 후작이 늘 바라던 일인데 말이다.
“오, 이제는 가능하지요, 이제는.”
대마법사가 어쨌든 각성을 한 상황에서도 흑마법사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어댔다. 슈토넨 후작은 새삼 엘펜하임이 사라진 게 아쉬웠다. 저 흑마법사들은 이제 잊힌 힘을 불러낼 것이다. 고대마법을 완전히 삼키기엔 역부족이라지만, 그래도 그에 비견할 만한 힘이 저 아래에서 조금씩 꿈틀거리고 있었다. * 글래스턴이든, 엔버네스든 칼리에르 공이 머무는 곳은 삼엄한 경비로 둘러싸여 오래된 위엄을 간직한 채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다 끝나셨습니까?”
공비에게 항상 정중하게 존대를 사용하는 공작이 소렐의 책상 근처를 얼쩡거렸다. 그는 무엇보다 아내와 일정 시간 이상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하는 남편이기도 했다. 책상 위에 영지에 관한 일부터 오래된 고문서, 마법에 대한 책까지 죄다 펼쳐놓고 읽어대던 소렐은 그를 보자마자 얼른 자신의 옆에 놓인 의자를 끌어와서 두드렸다.
“여기 앉아요!”
그녀는 칼리에르 공에게 ‘여기 와서 앉아봐라’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기껏해야 그의 아버지 정도다. 라이킨은 자신보다 한참 어린 아내의 말에 아주 착실히 앉았다. 소렐은 그가 가끔 이렇게 들러주면 무척 기뻐했다.
“있잖아요, 내가 듣기로는 소명 절차는 원만히 마무리될 거라고 하던데요.”
“예, 그렇습니다. 그렇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온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참 다행이에요. 더 큰 일이 벌어지면 어쩌나, 걱정했거든요.”
어지간히 신경을 쓴 모양인지, 소렐이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었습니다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라 긴장은 늦추지 않고 있었어요. 아참, 그리고 이제 우리 이혼 절차는 완전히 없던 게 되었고요.”
“예. 끔찍하게도 이혼남이 될 뻔했는데 정말 다행입니다.”
진지한 얼굴로 능청을 떨어대니 소렐이 기가 막히다는 듯 웃는다. 기나긴 가을은 아무것도 몰라서 속상하고 부끄럽기만 하던 공주님을 한 뼘 더 성장시켰다.
“결혼한 지 1년도 안 되어서 이혼이라니.”
그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계속 같이 살기로 했으니까 말인데요.”
“예.”
“나랑 약속 몇 가지만 해요, 공작님.”
푸른 눈이 뜻밖이라는 듯 소렐을 바라보았다.
“……무슨 약속을 해드릴까요?”
‘공작님’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보통 진지한 이야기가 아닌 모양인데. 라이킨은 반사적으로 또 긴장하기 시작했다. 소렐을 한 번 잃어버리고 나서 그는 모든 징조에 쓸데없이 예민해지고,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었다. 특히 소렐이 또 그를 두고 혼자 뭔가를 한다거나, 혹은 그에게서 흥미가 떨어진 기색을 보일까봐 늘 예민하게 살폈다. 대마법사의 강제각성은 라이킨에게도 깊은 후유증을 남겼다. 시도 때도 없이 불안하다.
“내가 아직 한참 어리다는 건 알아요.”
“공주님, 그 말씀은…….”
“아니, 끝까지 들어요.”
‘그런 말씀은 하실 필요가 없다’라고 하려던 라이킨은 곧장 입을 다물었다. 덩치 큰 남자가 그녀의 한마디, 손짓 한 번에 얌전히 따르는 게 무척 신기했다. 그녀는 가끔 저 멀리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남자가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는 것을 보곤 생긋 웃었다.
“라이킨은 나보다 훨씬 아는 것도 많고, 경험도 많으니까, 내가 가끔 너무 대책 없는 어린 애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사랑 같은 건 생각도 안 하고, 그냥 애 키우는 기분일 수도 있겠다……. 집 나와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돌아가자니 가출청소년이 집으로 돌아온 격이고, 계속 돌아다니자니 가출청소년이 계속 사고를 치는 것밖에 안 된다. 어느 쪽이든 속상하고 또 속상해서 눈물만 뚝뚝 흘렸다.
“그런데 그건 나만 생각하는 거잖아요. 나만의 생각이지, 라이킨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오해였다는 걸 알고, 남편이 눈물을 흘려가며 사랑한다고 수백 번씩 말하는 것도 들었다. 라이킨은 그녀를 대책 없는 어린 애로 보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저는 공주님을 ‘어린 애’로 보지 않습니다.”
소렐은 크고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요.”
“공주님도 절 파렴치한으로 생각하지는 않으시지요?”
“좀 뻔뻔하고, 의외로 서툰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기는 해요.”
“아, 벌써 들켰군요.”
사랑하는 공주님 앞에서는 완벽해보이고 싶었는데.
“그래서 조금……, 귀엽다고도 생각하고요. 이건 남들한테는 비밀이에요. 절대 말하지 않을 거예요.”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생명체에게 귀엽다는 말을 들으니 라이킨은 그냥 픽 웃어버렸다. 공주님께서 귀엽다고 하시니 영광이지.
“당분간 이혼당할 일은 없겠군요.”
당장 소렐의 이마에 빗금이 그어졌다.
“거기에 더해 은근히 뒤끝 있어요. 알아요?”
“이혼은 제 인생 최대의 위기였습니다. 제가 이혼당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처절하게 몸부림치고 있는지 아십니까?”
“알 게 뭐예요, 말을 좀 곱게 하고 필요한 때 바로 했어야지. 그러니까 내 말은, 이제부터 서로 숨기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푸른 눈은 그녀가 하는 말을 늘 진지하게 들어줬다.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어린 애 취급은 하지 않는다. 그가 공주님 대접을 해준다면, 말 그대로 왕실의 혈통과 위엄을 타고 난 귀한 공주님으로 대우해준다는 뜻이었다.
“나도 미심쩍거나 이상한 일이 있으면 곧바로 말할게요. 이건 싫고, 저건 좋다고 바로 말할게요. 그러니까 내가 어리거나, 혹은 감당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서 숨기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고 시선을 내렸다. 무릎 위에 손을 얹고 있다 보면, 어느새 길고 선이 굵은 손이 다가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아직 날 쫓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도 알아요.”
라이킨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라이킨 혼자서 다 감당하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나도 감당할 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가만히 듣던 그가 입을 열었다.
“뭐든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도 꼭 말해줘야 해요. 특히 위험한 일 같은 건, 반드시.”
라이킨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지요?”
“약속합니다. 약속했으니 안아도 됩니까?”
“아, 제발 좀…….”
소렐은 못 말리겠다는 듯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나 이미 탁자를 넘어온 라이킨은 그녀를 바로 들어다 무릎 위에 앉혀놓고 한껏 끌어안기만 했다. 습관처럼 그녀의 이마며 뺨, 눈두덩이 위에 키스가 뿌려졌다.
“……싫으신 거 아니잖습니까.”
부드러운 목소리에 웃음이 섞였다. 안고 있으면 부드러운 뺨이 목덜미에 닿고, 두 팔이 그의 몸통을 한껏 휘감았다.
“진지한 이야기를 했다고요.”
“저는 언제나 진지합니다.”
키스 한번 할 때도 무척 진지하다. 그는 늘 진심이었다. 라이킨은 소렐을 품에 안은 채 잠시 천장을 쳐다보다 중얼거렸다.
“공주님. 약속을 드렸으니 말입니다만, 안 좋은 소식이 계속 들립니다.”
글래스턴에서 폴리아나 그린이 카메론 셀레스트가 찾아왔다는 소식을 보내왔다. 다행히 피해는 없었지만, 현재 도망치고 있는 성기사가 영 찜찜한 말을 남겼다.
“공주님께서 엘펜하임을 잘 처리해주신 덕에 그쪽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만, 이제 엘펜하임이 견제하고 있던 이들이 나타나는군요.”
“누구……?”
소렐이 고개를 들었다.
“공주님께서 아주 싫어하시고, 또 성기사들이 잡아대던 이들이지요. 사술을 쓰고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치는 검은 두건을 쓴 자들.”
“아, 흑마법사…….”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이긴 했다. 그들의 공격을 많이 받았던 소렐은 저도 모르게 라이킨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공주님은 이미 그들과 마주쳤던 거다. 아주 오래전, 그녀의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라이킨은 굳이 캐묻지 않았다.
“예. 그래서 아무래도 가봐야겠습니다.”
“어딜……?”
“엘펜하임 본부요.”
참 산뜻한 대답이었다.
“어어……?”
소렐은 잠시 머리를 뒤로 빼고 라이킨을 바라보았다. 어딜 간다고? 엘펜하임에 간다고?
“마차 타고?”
“그러면 한참 걸리지요.”
가늠하는 듯한 눈이 소렐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그녀를 좀 더 끌어당겼다.
“그럼, 그럼 마법 써도 되겠네?”
엔버네스로 올라올 체력을 만들어야 한다고 꼼짝도 못 하게 하더니, 어느 날부터인가 방 밖으로 나가게도 하다가 덜컥 엔버네스에 올라와버렸다. 소명 절차도 거치고, 또 이혼 취하도 하다 보니 그녀는 침대 생활을 완전히 벗어난 채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주 건강해진 소렐은 잔뜩 신이 난 표정으로 라이킨에게 살짝 물었다.
“조심하시고, 무리가 되지 않은 선에서요, 공주님.”
그는 전제조건을 달았다.
“근데 엘펜하임에 가도 되는 거였어요?”
“그 질문을 먼저 하셨어야지요…….”
아이고, 우리 공주님. 라이킨은 고개를 슬쩍 흔들면서도 웃으며 소렐을 바라보았다. 잘 빗어준 머리카락은 얌전히 있고, 연신 고개를 갸웃거린다. 지금 그녀는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 처음 깨어났을 때는 닿는 것도 어색해하고 슬퍼해서 알게 모르게 상처를 많이 받았는데, 지금은 제자리인 양 앉아 있는 걸 보니 아주 뿌듯하고 기분이 좋았다. 라이킨은 손을 뻗어 소렐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