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대마법사와 가디언 (1)2021.11.06.
“……그런데 뭘 보고 계십니까?”
지금 보고 있는 건 서류가 아니라 다른 물건인 듯한데.
“아.”
소렐은 딱히 보고 있지도 않았던 초대장을 라이킨에게 줬다.
“엔버네스에 왔다고 하니까 여기저기에서 초대장이 와요. 소명 절차에서 ‘몸이 아직 안 좋다’라고 해놨으니 가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궁금해서 다 뜯어보고 있었어요.”
그리고 답장을 할 곳을 하나하나 추리고 있었다. 아, 저런 지루한 사교계 같으니. 언제나 똑같이 움직이고, 언제나 변할 생각이 없나 보다. 날이 추워졌으니 따뜻한 실내에서 무도회나 음악회를 열 거고, 이 추위를 뚫고 오페라를 관람하러 가거나 엔버네스에 온 유명한 무용수의 공연을 보러 가겠지. 그리고 부지런히 사교활동이나 하고 말이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훨씬 줄었네요. 처음에는 엄청 많이 왔는데.”
그녀에게 오는 초대장은 예전보다 많이 줄어들었다. 불미스러운 사건을 일으켜서 신문을 화려하게 장식했기 때문인 걸까? 그건 좀 곤란한걸. 어쨌든 칼리에르 공비인데 말이다. 소렐은 그녀가 조금 실추시킨 칼리에르 공비의 명예를 다시 끌어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초대장을 보내는 사람들은 전부 공주님께 저속한 호기심을 가졌다 해도 무방합니다. 그러니 답장도 하지 마십시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어요.”
그녀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 웃었다.
“하지만 모두가 다 그런 건 아니라고요. 슬슬 눈치 보고 있는 것뿐이지, 나랑 정말 친해지고 싶은 사람들도 있을 거예요.”
“……예. 공주님은 공주님이시니까요. 누가 대마법사와 친해지지 않고 싶겠습니까.”
그러면서도 라이킨은 건네받은 초대장을 망설임 없이 버리려고 했다.
“어어, 그건 왕세자전하께서 직접 보내신 거잖아요.”
소렐은 손짓으로 만류했다. 그걸 버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리고 초대장일 뿐만 아니라 안부도 물어본 편지예요. 답장은 내가 직접 쓸게요. 그런데 왜 ‘여태까지 보낸 편지에 답장이 없어서 걱정이다’라고 하셨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편지를 받은 적이 없는데.”
그 말에 뜻밖에도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응? 소렐은 고개를 들었다. 잠시 묵묵히 서 있던 라이킨이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슬쩍 눈을 피했다.
“……라이킨?”
그는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았다. 소렐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녀는 한 손을 허리에 얹고, 다른 손을 펼쳤다.
“내놔요.”
이미 모든 추론 끝에 결론을 내린 목소리였다.
“제가 공주님을 모시느라 정신이 없어서 말입니다.”
일단 변명부터 해보자.
“알겠으니까 내놔요.”
딱 부러지게 말하던 소렐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버렸어요?”
라이킨이 멈칫거리더니 겨우 대답했다.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소렐의 눈은 라이킨을 따라갔다. 그가 잠시 방을 나간 사이, 그녀는 괜히 왕세자가 보낸 편지를 한 번 더 보았다.
‘그렇게 싫구나. 아는 척도 하지 말아야겠다.’
사실 그녀는 이제 막 사교계에 데뷔한 데뷔탕트라 모르는 것투성이다. 왕세자의 신분이 신분인지라 소렐도 무례하게 굴기가 어렵고, 혹시 실수해서 라이킨이나 시아버지 로렌스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건 아닌가 싶어 주춤하게 되는 일이 많았다. 게다가 왕세자는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이자 차기 국왕이 아닌가. 소렐은 잘은 모르지만, 공비로서 정치가 돌아가는 것도 알아야 했다.
“그런데 꼭 왕세자전하랑 안 좋을 때 얽히네……. 예전에 무도회 때도 그렇고.”
라이킨과 처음으로 싸웠을 때를 떠올린 소렐이 한숨을 폭 쉬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거야 왕세자가 쓸데없는 짓을 하니까 그렇지요.”
쓸데없는 짓? 소렐은 다시 돌아온 라이킨을 쳐다보았다. 그는 빈손이었다.
“쓸데없, 아니, 편지는 어디 있어요?”
“다 태웠습니다.”
“네에?”
너무나 뻔뻔한 말에 소렐이 오히려 당황했다. 뭐라고?
“이제 보니 좀 후회가 되는군요. 우리 이혼이 유감이니 어쩌니 하면서 건방지게 써놨던 편지는 꼭 보관해놨다가 공주님을 보여드리는 건데.”
소렐은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그녀는 한참 라이킨을 쳐다보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기, 많이 불쾌했어요?”
“지금도 불쾌합니다.”
그녀는 한 번 더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라이킨에게 왕세자가 보낸 초대장을 다시 내밀었다.
“그럼 이것도 태워요.”
뜻밖의 말에 라이킨은 소렐을 쳐다보았다.
“……라이킨이 불쾌하다면 나도 싫어요. 실은 나도 폴리아나 그린 교수님이나, 라이킨이랑 예전에 약혼한 그……, 에설론 백작이 무척 싫었거든요.”
그러니까 라이킨이 똑같이 불쾌하고 싫다면 라이킨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게 맞았다.
“앞으로 왕세자전하랑 말도 하지 말라고 하면, 말도 안 할게요. 꼭 그렇게 할게요. 약속할게요.”
소렐은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며 말했다. 멍하니 그녀가 하는 말을 듣고 있던 라이킨이 갑자기 픽 웃었다.
“설마 왕세자가 관심 있다는 걸 모르셨습니까?”
“네? 아, 네. 사실은 잘 모르겠어요. 그분은 나한테 특별히 사심이 있으시거나 한 건 아닌 것 같던데……? 오히려 라이킨한테 관심이 많아 보이시던데요.”
“제가 글래스턴 공작이라서?”
라이킨은 손을 뻗어 기어이 소렐의 왼손 약지에 걸어놓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그와 같은 반지라는 걸 촉감으로 확인하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라앉았다.
“네, 그러니까 정치적으로 관심을 많이 가지는 거 아닐까요. 어쨌든 차기 왕이잖아요.”
엔버네스는 정치 중심지이다. 모든 기관이 늘 바쁘게 움직였고, 페르난데스 7세는 하루에도 전문가들과 각 부처 장관들을 수차례씩 만났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여도 신문은 늘 시끄럽고, 경제문제도 골치 아프다. 엔버네스에서 사교활동이 이루어지는 그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정치라는 걸, 이제 막 데뷔한 소렐도 알고 있었다. 그녀 역시 고대마법 때문에 떠돌면서 정치의 무서운 이면을 조금 배웠다. 이 나라가 그나마 엘펜하임과 친하지 않아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소명 절차부터 애를 먹었을 게 분명하다.
“아닙니다, 공주님.”
라이킨은 고개를 저었다.
“왕세자는 제가 아니라 공주님께 관심이 아주 많습니다.”
그 말에 소렐은 가만히 듣다가 어떠한 반론이나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구나. 앞으로는 조심할게요.”
“공주님께서 왜 조심하십니까, 조심하려면 그 개……, 죄송합니다, 왕세자가 조심해야지요.”
“그런데 나는 결혼을 했잖아요.”
“오, 공주님.”
라이킨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교계의 절반 이상은 결혼에 헌신하지 않습니다.”
소렐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으. 예상은 했지만 설마 했는데.”
“예. 세상에는 비상식적인 사람이 훨씬 많지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렐이 왕세자의 초대장을 더럽다는 듯 팩 집어던지는 것을 즐겁게 바라보았다. 소렐이 혼수상태였을 때, 혼자 왕세자의 편지를 불태워버리던 것보다 수백 배 더 즐거웠다.
“난 그냥 사람들이 상식적이었으면 좋겠는데 왜 죄다 이 모양일까요?”
예전의 소렐이었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만, 지금의 소렐은 이젠 슬슬 사람들의 더러운 생리까지 꿰뚫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믿어보려 노력하는 건, 그래도 희망을 걸고 싶어 하는 대마법사다운 천성 때문이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유감이지요.”
“으. 앞으론 또 만나도 상대하지 않을 거예요. 속이 너무 뻔하네. 내가 대마법사니까 더 이러는 거잖아요.”
“정확합니다.”
왕세자의 속까지 다 읽어낸 소렐은 한숨을 쉬며 팔짱을 꼈다. 그러다가 남편이 다가와서 그녀의 팔을 살살 어루만지자, 그에게만은 팔을 풀고 꼭 안았다.
“그렇구나, 권력욕이었구나.”
“뭐……, 그 뿐만은 아니지만 대충 그렇게 생각하시고 관심 끄시지요.”
예쁘기도 하고, 돈도 많은 헬레인 공주이기도 하고, 그러면서 친정은 없는데 대마법사이니 눈독 들이기 딱 좋지. 라이킨은 그의 말에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소렐에게 입을 맞추면서 차게 웃었다. * 오래도록 연락이 끊어졌다가 다시 만나도 딱히 어색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 글래스턴의 뱀파이어들 사이에서 상당한 위치에 선 폴리아나 그린 교수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안녕, 폴린.”
폴리아나는 곧장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문진을 집어 던졌다. 와장창, 하고 유리창이 깨졌다.
“이 추위에 무슨 짓이야, 찬바람 다 들어온다.”
말로는 태연하게 질색했지만, 폴리아나는 곧장 검을 빼 들었다.
“너야말로 무슨 짓이야,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 와?”
검 끝이 목에 닿았지만 키가 큰 카메론 셀레스트는 태연했다. 그는 예전보다 훨씬 수척한 얼굴에, 꼴이 말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기말고사 기간이잖아.”
누가 들으면 참 성실한 교수인 줄 알겠다. 폴리아나는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강의도 중간부터 때려치운 주제에 무슨…….”
“고의가 아니었는데 학장님이 화 많이 내실까?”
카메론은 난감하다는 듯 웃었다.
“엘펜하임으로 기어들어 갈 줄 알았는데 여긴 왜 왔어?”
“아까부터 자꾸 기어가고 어쩌고……, 사람 벌레 취급하는 데 소질 있네.”
말은 능글맞게 했지만 카메론 셀레스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폴리아나의 실력은 그가 가장 잘 알았다.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실수했다간 곧장 머리와 몸통이 분리될 거다. 눈치채지도 못하는 사이에 세상과 이별하는 거다.
“그러는 너는 날 바보 취급하고 있고. 어딜 감히 나타나?”
폴리아나가 아무리 사랑에 목숨을 거는 성격이라 해도, 이 상황에서 또 사랑만 찾고 허우적대는 바보는 아니었다. 지난 약 반년간 그녀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담금질했고, 위에서 맡기는 일을 군말 않고 해냈다. 엘펜하임 수뇌부가 몰살되고 대마법사가 여기저기 나타나는 난리 와중에도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그래서 폴리아나는 화가 났다.
“어찌 사나 궁금해서.”
그게 설마 목적은 아닐 거다. 폴리아나는 픽 웃었다. 그녀가 아는 카메론 셀레스트는 절대로 혼자 여기까지 왔을 리가 없다. 요는 결국 그녀가 일종의 기습을 당했다는 거다. 폴린의 목이 검이 와 닿았다. 그럼 그렇지. 카메론에게 일행이 있었다.
“난 쫓겨나서 딱히 아는 게 별로 없는데.”
폴리아나 그린은 좌천을 당한 셈이었다. 라이킨이 엔버네스에 있다면 그녀는 글래스턴에 있었고, 조용히 그녀의 공식 직업인 교수직에 헌신했다. 정치와 온갖 암살과는 거리가 먼 반년이었다. 그래서 폴리아나는 지금 말 그대로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어디서 사기를 쳐, 폴린?”
카메론은 픽 웃었다.
“살다 살다 네가 스스로 비하하는 소리도 다 듣네.”
“닥쳐. 내가 이 꼴이 난 이유 중 하나가 네가 하는 말을 대충 들어서도 있어. 넌 구경할 때 재미있었지?”
아, 일단 닥치라면 닥치자. 폴리아나는 뒤에서 그의 동료가 그녀에게 검을 드리우고 있어도 눈이 뒤집혀서 할 말을 다 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너 혼자 즐거웠더라고. 네가 지금 여기에서 나한테 낙인을 찍든 날 죽이든 일단 나도 너 한 대는 쳐야겠다.”
“아니, 폴린, 잠깐, 잠깐!”
폴리아나의 눈이 휙 돌아가고, 그녀가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카메론의 동료 역시 바로 그녀의 목을 날리려고 했다. 그러니 여기서 뜯어말릴 사람은 카메론 셀레스트밖에 없었다.
“진정해, 날 너무 오랜만에 봐서 아주 반가운 건 알겠는데…….”
“반가워? 아, 그래. 반갑지. 내가 죽기 전에 네 면상은 한번 보고 죽어야 하는데 이렇게 와줬으니 당연히 반갑지.”
폴리아나는 아주 여유롭고 태평한 어조로 진지하게 말하며 딱 한 번 검을 휘두를 것만 계산했다. 그녀의 목이 날아가도 카메론의 목은 똑같이 쳐내고 죽는 거다. 그리고 카메론은 폴리아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바로 알았다. 그는 눈을 약간 크게 뜨더니 웃었다.
“너 완전히 마음 정리를 했구나.”
그리고 폴리아나는 표정 없이 검을 움직이려고 했다. 이 여자가 지금 죽기 직전인데 미쳤나!
“폴린, 그만!”
카메론은 저도 모르게 외쳤다.
“사과해.”
“미안해.”
“정중하게.”
“무척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고 다시는 이 일과 관련해서 농담하지 않겠어. 맹세해.”
“좋아.”
“그러면 검을 내려주지 않겠어?”
“그건 싫어.”
완전히 벽이 따로 없었다. 사과는 들었으니 어쨌든 너도 죽고 나도 죽겠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