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The golden wave (22)2021.11.03.
제대로 붙들린 루벤이 라이킨을 돌아보았다.
“안 그래도 인사드리려고 했습니다만.”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내 아내 덕에 백작위까지 꿰찼는데. 성의라도 표시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직 이혼 절차가 취소된 것도 아닌데도 라이킨은 소렐 이드리스를 당연히 ‘내 아내’라고 칭했다. 루벤은 아마 이들의 재결합은 순전히 이 남자의 의지 때문일 거라고 짐작했다. 소렐이 싫다 했어도 라이킨이 그녀를 붙잡고 놔주지 않았을 거다. 분명히 그랬을 거다.
“완전히 상속한 다음에나 숨을 돌릴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엄살은. 이제 다 왔지. 안 그러나?”
라이킨은 웃기지도 않는다는 표정으로 받아쳤다.
“장례식이 남아 있습니다만, 시신을 주실 생각은 없습니까? 빈 관을 놓기가 난감해서요.”
“있어야 주지.”
시신이라니, 그런 건 없었다. 살아 있는 루드밀라 프랑슈틸이라면 모를까.
“……루드밀라는 결국 그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했지.”
“슈토넨 후작이 소명절차를 밟지 말고 소송을 걸라더군요.”
“걸지 그랬나.”
“저는 루드밀라처럼 되고 싶지 않아서요.”
라이킨은 픽 웃었다.
“백작위 계승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절차였습니다만, 공작전하와 공비전하께 누를 끼쳐 죄송합니다.”
루벤 실베스터는 여태까지 방계로 눈치를 보고 살아온 세월만큼, 판단이 남달랐다. 필요한 만큼만 하고, 사과는 되도록 정중하게 한다. 그리고 날을 세워야 할 상대를 잘 분간한다. 그거면 된다.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면 좋겠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나는 비명횡사하고 싶지 않거든요. 속으로 생각하던 루벤은 느닷없이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돌로 만들어진 천장이 높은 건물은 모든 소리가 울렸고, 말을 하는 사람도 얼마 없어 발자국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그런 곳에서 약간 새어 나온 울음소리는 당연히 크게 들렸다.
“미안해애…….”
“아냐, 내가 더 미안해…….”
누구 목소리인지도 모르게 작은 아가씨들은 서로를 꼭 끌어안고 울먹이고 있었다. 사실 키가 큰 사비나에게 소렐이 거의 안기다시피 했지만, 어쨌든 보기 좋았다. 루벤은 픽 웃었다. 간만에 보는 소렐 이드리스가 너무 달라져 있어도 그마저 주춤거릴 지경이었는데, 저렇게 보니 또 영락없이 저 또래 아가씨들이다.
“다시 만났나 보군요. 잘됐습니다.”
“잘됐지.”
저 일에 원인제공을 제대로 한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그마한 소렐은 사비나를 끙끙거리고 안았다. 꼭 감은 눈에 눈물이 나고, 눈가와 뺨이 발그레해졌다. 아직은 순수할 시기다. 조금만 더 나이가 들었다면 다시 우정이 이어지지 않았을 가능성도 컸지만, 저 앳된 아가씨들은 그래도 서로가 마냥 좋았다.
‘저런 아가씨를 무슨 아내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아니지.’
소렐 이드리스는 꼬맹이라고 하기엔 다 큰 숙녀이긴 하고, 또 대마법사이기도 하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기백을 보니 이젠 완연하게 칼리에르 공비가 다 되었다.
‘뭐, 얼굴이 예쁘기도 하고……, 우는 거 보니 귀엽기도 하고……. 아까 기품도 있던데.’
그때 루벤의 시야가 가려졌다.
“해서, 새 에설론 백작께서는 평온하게 승계하는 데만 관심이 있으시겠지?”
두툼하고 거대한 남자의 몸이 체구가 작은 대마법사를 다 가려버렸다. 눈이 새파란 뱀파이어는 지나치게 감이 좋았다.
“일단은 그렇습니다.”
루벤은 흐트러지거나 당황하지 않고 태연히 대답하는 데 간신히 성공했다.
“‘일단은’ 말이지.”
혹자는 칼리에르 공이 유난도 그런 유난이 없다고 빈정댈지도 모르지만, 칼리에르 공과 마찬가지로 감이 좋은 이들은 알았다. 저 수려하게 잘생긴 주제에 돈까지 많은 뱀파이어는 남들이 그의 아내를 보는 눈빛이 자신과 비슷해지는 순간을 기가 막히게 눈치챘다.
“한 이삼백 년 정도는 조용히 있어야겠지요. 방계 출신이라고 상대해주는 이도 얼마 없을 겁니다.”
루벤은 일부러라도 이삼백 년이라고 아주 길게 말했다. 방계출신에, 불미스러운 사고로 끝난 에설론 백작위를 승계했으니 그가 가지고 있는 약점이 크다. 거기에 칼리에르 공을, 그것도 칼리에르 공비에 관한 일 때문에 적대할 수는 없었다. 칼리에르 공과 공비를 저울질한다면 당연히 칼리에르 공을 잡아야 했다. 어디 공비에게 다가갈 수나 있기나 한가. 그냥 무릇 사내들이 관심을 기울일 만큼 아름답고 기품이 있게 변했다 뿐이지, 목숨을 걸 가치는 없었다. 자존심이 상할 것도 없다. 이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니까.
“상대하지 않을 이도 얼마 없겠지. 요즘 많이들 죽어서.”
라이킨은 태연하게 말했다. 루벤은 안타깝게도 이 농담에는 전혀 웃지 못했다.
“어쨌든 미리 축하하네. 실베스터의 부유함이 마침내 작위까지 만났군. 작위 하나 정도 가질 때도 됐지.”
루벤은 문득 궁금해졌다. 칼리에르 공은, 루벤에게 작위가 돌아갈 것까지 이미 계산에 넣고 이 모든 일을 꾸민 걸까? 고대마법이 폭주해서 루드밀라가 죽었던 것도 전부 다 칼리에르 공의 계략인가?
‘아니, 아니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칼리에르 공이 미쳐 날뛰어가며 아내를 찾는 걸 지켜보기만 했던 지난 몇 달을 떠올린 루벤은 저도 모르게 했던 생각을 지웠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라이킨은 그런 생각을 저절로 하게 만들 정도로 무서운 구석이 있었다.
“축하한다는 말은 처음 듣는군요. 감사합니다.”
“처음이라고?”
“예, 아무래도 다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공이시니 말씀드리는 거지만, 루드밀라가 죽을 사람으로는 전혀 안 보였잖습니까.”
그랬다. 그녀는 생동감이 넘치고 욕망과 야망이 철철 흘러넘쳤다. 게다가 하도 라이킨이 가지고 있는 권력에 집착해서 가끔 실수하고 미련한 짓을 해서 그렇지, 나름 강한 뱀파이어였다.
“내 눈에는 죽을 사람으로 보였는데.”
그러나 라이킨은 무표정한 얼굴로 루벤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약혼이 깨졌다고 이백 년 가까운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관 안에 들어가 잠만 자댄 여자가 어떻게 오래 살 것 같이 보였을까?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극단적인 짓만 골라 하다간 더 큰 사고를 재촉하기 마련이다. 루드밀라는 빠르게 죽을 운명이었다.
“그렇습니까.”
루벤은 라이킨과는 길게 대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 결과가 나온 후에 보지. 장례식 준비 잘하게.”
하지만 이거 하나는 분명했다. 라이킨은 이미 소명 절차 이후의 결과가 어떨지 알고 있었다. 분명히 그의 입맛대로 될 것이다. 소렐 이드리스는 정당하게 자기방어를 했을 뿐이고, 루드밀라 아스테어 프랑슈틸, 전대 에설론 백작은 딱히 국익에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외국에 보낼 수는 없는 대마법사를 팔아넘기려고 한 범죄자로 끝날 거다.
‘범죄자의 작위라. 뭐, 어쨌든 작위는 작위지.’
귀족 중에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쪽을 찾는 게 더 빨랐다. 불명예라 해도, 어쨌든 작위는 남는다. 그 불명예는 돈이 씻어줄 것이다.
“말씀 다 끝나셨습니까, 공주님?”
루벤에게는 싸늘하게 하대를 하던 칼리에르 공이 다시 자신에게 달려온 제 아내에겐 끝도 없이 말을 높였다. 소렐은 얼른 눈물을 훔쳐내며 언제 울었냐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실까요?”
칼리에르 공이 움직일 때마다 이 건물을 지탱하는 무게중심이 함께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루벤은 그 무게가 자신에게서 멀어지자,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아, 제기랄.”
왕세자 라이오넬은 짜증을 냈다. 그는 소렐 이드리스가 모처럼 모습을 드러낸 소명 절차에 온갖 눈과 귀를 심어놨고, 그녀에게 접근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강력한 왕권에 소렐 이드리스가 가지고 있는 마법은 필수다. 마법까지 가지고 있다면 그 힘을 염원하는 인간이 아닌 이들까지 다스릴 수 있다.
“가디언이라고?”
그것도 그가 지금 당장 떼어내야 하는 칼리에르 공이 가디언이라고? 그가 바라는 마법이 온전하려면, 칼리에르 공이 칼리에르 공비 옆에 딱 붙어 있어야 한다는 뜻 아닌가.
“……귀천상혼이어도 기어이 결혼시킨 이유가 있었군.”
왕족은 왕족과 결혼을 해야 격이 맞는데 말이다. 왕세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 해서 그냥 포기해버리기엔 대마법사는 너무나 먹음직스럽다. 결국 원래대로 돌아가야 했다.
‘어떻게……, 결혼은 그쪽이랑 하고 연애는 이쪽이랑 하는 건 안 되나?’
그러면 베갯머리송사라도 가능할 텐데. 실제로 많은 귀족들이 결혼은 형식적으로 집안과 집안끼리 이득을 찾아 하고, 진정한 사랑은 정부를 따로 두지 않나.
‘아니면 이혼이나 하고 칼리에르 공을 대충 기사서임이나 시킨 다음에 형식적으로라도 왕비로 들어 앉히면……. 아니, 둘이 재결합할 상황이라잖아.’
왕세자는 어떻게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썩 마음에 드는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공비의 남성 취향이 어떻더라? * 소렐은 이 추운 날씨에 테라스에 서 있는 남편을 유리문 너머로 바라보았다. 그는 흡연을 하는 중이었는데, 눈이 가득 쌓인 바깥 풍경과 창백한 뱀파이어는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잘생겼어.’
그녀는 괜히 쿠션을 껴안았다.
‘진짜 잘생겼어.’
물론 아빠는 남자는 얼굴이 다가 아니니 절대 속지 말라고, 특히 ‘그놈’한테 속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결국 라이킨이 잘생겼다는 사실을 인정한 거나 다름없었다.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는 아주 잘생긴 미남자였다. 게다가 소렐도 이제 막 알기 시작한 거였지만, 그는 성적인 매력까지 대단한 사람이었다.
“헤헤…….”
소렐은 라이킨 앞에서는 절대 보여주지 않을 맹한 웃음을 흘리면서 무릎을 세워 쿠션과 함께 꼭 껴안았다. 물론 그가 다시 돌아온다면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그와 동등한 이야기를 현명하게 나누겠지만 사람이 매일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가끔은 잘난 남편을 몰래 훔쳐보면서 좋아하는 시간도 필요했다!
‘손도 엄청 커…….’
잠시 서서 눈을 내리깔고 있으면, 분명한 눈매와 그윽한 눈동자 색, 매끄럽게 떨어지는 코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그는 두텁고 단단하며 커다란 몸을 가지고 있었다. 소렐 정도야 한 팔로 휘두를 수 있었고 또 어마어마한 힘을 실제로 품고 있었지만, 소렐은 늘 도자기 인형을 다루듯 섬세하게 안고 아프지 않게 붙잡았다.
‘오면 꼭 안아달라고 해야지.’
소렐은 이미 서명해놓은 이혼소송 취하에 관련된 서류를 쳐다보았다. 이것만 변호사에게 보내면 된다. 그녀가 고용했던 변호사에게 라이킨이 수임료를 더 두둑하게 주고 끝내겠다는 걸 그녀가 뜯어말리고 직접 수임료를 따로 후하게 얹어줬다. 소렐이 그의 곁에 있어서 누가 되지 않는다면, 그대로 곁에 있고 싶었다. 아니, 사실은 라이킨에게 피해가 된다 해도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라이킨 역시 제발 그래달라고 늘 입버릇처럼 말하는 중이고.
‘……그런 일을 겪어서 다행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시야가 훨씬 넓어져서 다행이야.’
나중에 똑같은 상황이 또 왔을 때는 반드시 그녀가 라이킨을 지켜줄 거다. 꼭 그럴 거다. 이젠 그럴 수 있었다. 그럴 만한 지식도 있고, 자신도 있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생각하십니까?”
연기와 냄새를 다 빼고 들어오던 라이킨이 소렐을 보며 웃었다. 공주님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다 티가 난다. 천장을 보며 열심히 양 주먹을 꼭 쥐고 있으면 분명히 뭔가를 다짐한 거다.
“힘내서……, 다음에는 내가……, 라이킨을 지켜주려고…….”
얼굴이 빨개진 소렐이 횡설수설했다. 라이킨은 웃었다.
“대마법사께서 저를 지켜주신다니, 영광입니다.”
놀리는 게 아니라 진심이었다. 그는 열린 문으로 나가 잠시 손을 씻었다. 그사이 소렐은 서류를 정리하고 새로운 서류를 꺼낼까, 하다가 내려놓곤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쨍한 추위와 하얀 눈을 사랑했다. 하얀 토끼가 되어 눈 위를 폴짝폴짝 뛰어다니면 그것보다 더 즐거운 게 없었다.
“나가고 싶으십니까?”
손을 씻고 나온 라이킨은 아예 새 셔츠를 걸치고 나오며 소렐을 향해 말했다. 그녀는 어느새 소파에서 내려와서 창가에 코를 대고 있었다.
“라이킨, 라이킨.”
“예, 공주님.”
그는 한숨을 쉬었다. 공주님은 오늘도 그의 말을 들어주실 생각이 없으신가 보다.
“토끼가 되어서 눈밭을 뛰어다니면 무척 재미있어요.”
“세상에, 감기 드시겠네요.”
“그래서 나가지는 않으려고요.”
뜻밖의 말에 그는 소렐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그 좋아하는 눈도 가까이서 보지 못한다는 말에 부루퉁해질 줄 알았는데, 그녀는 그냥 웃고만 있었다.
“재미있긴 하지만, 이젠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아요.”
너무 갑자기 어른이 된 건 아닌가. 라이킨은 멈칫거렸다.
“다른 재미있는 것들도 많은데 저기까지 가서 놀자니 시간이 많이 걸리잖아요. 옷도 갈아입어야 하고, 눈도 털어내야 하고, 씻기도 해야 하고…….”
‘다른 재미있는 것들’이라고 할 때 소렐은 그녀의 곁에 쌓인 서류들을 들어 보였다.
“……그게 재미있으십니까?”
완전 재미있는데? 소렐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이런 게 적성에 맞는 것 같아요. 대마법사들은 다 학자이기도 해서 내가 돌연변이처럼 노는 걸 좋아하면 어쩌나, 하고 조금 걱정하긴 했는데 아니었어요.”
쌓인 일들을 해치우고, 머릿속에 있는 지식을 들여다보는 게 아주 재미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탁자로 손을 뻗었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소렐이 그렇다면야 그런 거지. 라이킨은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다. 많이 변하기 시작한 공주님의 일거수일투족에 일일이 놀라거나 말을 보탤 필요는 없다. 그는 그저 그녀가 선택하는 것이 무엇이든 즐겁게 지켜보고, 또 함께하면 그걸로 족했다.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칼리에르 공비가 약간 미소를 지으면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음, 그런데, 라이킨?”
“예, 공주님.”
“이따가 밤에, 아무도 안 볼 때 말이에요.”
라이킨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때 라이킨이랑 나랑 몰래 나가서 눈밭에서 노는 건 괜찮겠지요? 아무도 안 보면, 응?”
그는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안 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이젠 건강하신데.”
그리고 여전히 그의 귀여운 공주님이신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