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The golden wave (21)2021.10.30.
“그러면 공비가 나와서 진술을 시작하지요.”
라이킨에게 고대마법과 가디언, 그리고 대마법사와의 관계를 상세하게 물은 판사가 드디어 소렐을 불러냈다.
‘아주 지루하실 겁니다. 공주님께서는 그저 솔직하게만 대답하시면 되겠지만요.’
전보다는 좀 더 말라서 커다란 눈밖에 안 보이는 소렐은 전혀 엘펜하임 기사단 전원과 에설론 백작을 죽인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말랐다는 사실은 속상해 죽을 지경이지만, 그게 지금 상황에서는 무척 필요한 연극적 장치라는 걸 잘 아는 라이킨은 착잡한 얼굴로 질문에 대답하는 소렐을 지켜보았다.
“아뇨, 일부러 의도하지는 않았어요.”
힘든 과정이다. 판사와 조사관들은 노골적으로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댔고, 그건 라이킨이 아무리 사전 작업을 해놓는다 해도 막을 수 없었다. 라이킨은 이 자리에서 그저 소렐을 위해 버티고 서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냥, 머리카락이 너무 아프고 힘들었어요. ……수치스럽고, 무엇보다 너무 무서웠어요.”
소렐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때 일을 떠올리는 건 썩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냥 저한테 손을 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멀리 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자꾸 잡고, 끌어당기고, 무서운 말을 하고 아프게 해서…….”
‘그’ 칼리에르 공비가 피해자가 되었다는 건 기자들에게 좋은 먹잇감이다. 아픈 곳을 후벼 파서 더 자극적인 기사를 찾아낼 수 있었다. 공비가 얼마나 혹독하게 당했는지 훨씬 더 자세하게 쓰면 쓸수록 신문 판매부수가 올라간다. 하지만 라이킨은 그걸 가만히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엘펜하임에게 넘겨지면 어떻게 될 줄 알았습니까?”
때론 저런 병신 같은 질문까지 나온다. 라이킨은 용케 미간을 구기지 않았다. 하지만 저딴 질문을 던진 인간이 누구인지는 확실하게 기억해뒀다.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건 잘 알았어요.”
소렐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다시는요.”
잠시 침묵이 돌았다.
“……그래서, 일부러 마법을 사용한 겁니까?”
“아뇨. 저는 그때 ‘일부러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어요. 그냥 저리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끌고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요. ……그뿐이에요.”
안전하게 계승되고 있던 고대마법이, 계승자가 위험에 처했을 때 튀어나온 것뿐이다.
“너무 무서웠던 것뿐이에요.”
소렐의 작은 체구와 사랑스러운 외모는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동정심을 자아내기도 했다. 저렇게 작은 공주님이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하다니!
어차피 엘펜하임 기사단 수뇌부가 글래스턴까지 잠입했고, 그 자리에 에설론 백작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에설론 백작이 해선 안 될 선을 넘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잠시 쉬도록 하지요.”
길고 지루한 공방이 이어진다. 슈토넨 후작의 입김이 들어간 귀족 측 법률가는 이게 어떻게 처벌을 하지 말아야 할 일이냐고 목소리를 높이며 소렐을 물어 뜯어댔다. 이미 마지막 살생부에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 걸 알아서 하는 발악인가 보다. 라이킨은 그 위인의 목을 특별히 비틀어버리기로 작정하고 머릿속에서 치워버렸다.
“공주님.”
“내가 실수한 거 아니에요?”
그녀를 챙기러 온 라이킨에게 소렐이 조그맣게 속삭여 물었다. 사실 대마법사의 지혜로 미루어보았을 때 그녀가 실수를 한 건 없어 보였지만, 혹시 모르니 확인차 질문한 거였다.
“전혀요. 잘하셨습니다. 아주 잘하셨어요.”
소명절차는 대단히 길고 지루하다. 라이킨은 소렐이 그저 지치지만 않길 바랄 뿐이었다.
“잠시 나가서 쉴까요?”
그녀는 라이킨의 손을 잡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는 그 와중에도 그녀를 앉혀놓고 입에 초콜릿이며, 달고 힘이 나는 간식을 넣어주었다. 소렐은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나 별로 힘들지 않아요. 이젠 멀쩡한데요.”
“예, 하지만 여기에선 아프신 걸로 하셔야 합니다.”
그렇다면야. 그녀는 그가 권하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소명절차가 끝나는 대로 해야 할 일들이 많아요. 영지에도 일이 쌓였더라고요.”
삐약거리던 목소리에 어느새 차분한 기품이 깃들었다. 그건 대마법사의 지식으로만 되는 일이 아니다. 큰 시련을 겪은 만큼 성숙해지고, 커다란 그릇이 되어 더 많은 책임과 의무를 얹어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저런, 제가 공주님께서 걱정하지 않으실 만큼 처리해둔 줄 알았습니다만.”
“나 때문에 공작전하께서 많이 바쁘셨던 모양이더라고요. 내가 기꺼이 책임지기로 했어요.”
그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이는 말에 라이킨은 픽 웃었다.
“영광입니다.”
길고 지루한 법정 대기시간. 천장은 쓸데없이 높아서 사람들의 속삭이는 소리마저 울리고, 두꺼운 서류가방을 든 법조인들이 여기저기 걸어 다닌다. 라이킨은 이 따분한 공간에 앉아서도 어쩐지 새로운 미래가 기대되기 시작했다. 돌아온 칼리에르 공비는 아주 현명하게 모든 일을 해결할 거다. 분명히 그럴 거다. * 소명 과정은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길게 이어졌다. 예상은 했지만, 라이킨은 이혼소송을 취하하러 가지 못해 짜증이 난 상태였다. 지금 그는 법원에서 떠다니는 중인 그들의 이혼소송을 ‘직접’ ‘자신의 손으로’ 없애버리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소렐이 그냥 변호사에게 연락했으니 곧 취하될 거라고 했지만, 라이킨은 그걸 굳이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 했다. 소렐의 생각에는 그냥 좀 쓸데없는 짓에 불과했으나, 남편이 하고 싶다는데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제 인생에 이혼이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공주님.”
이 남자는 소명 과정 중간에도 분명하게 강조했다.
“안다고요. 알아요. 근데 내가 저기 루벤 실베스터 씨한테 사과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남편의 말은 대충 흘려듣는데 슬슬 익숙해지기 시작한 소렐이 멀리 앉아 있는 루벤을 보며 소곤거렸다.
“공주님께서 뭘 잘못하셨다고 사과까지 하십니까?”
“아니, 그래도……. 가까운 친척을 잃었으니까…….”
사실 루드밀라에게 내내 성기사의 낙인이 찍힌 채 살아서 괴로워하라는 저주를 내린 소렐은 루벤에게 괜히 미안했다. 아, 당연히 루드밀라에겐 미안하지 않았다! 그녀만 생각하면 또 화가 나서 토끼 귀가 튀어나올 지경이다. 하지만 이 소명 과정을 요청한 루벤 실베스터는 아무 죄가 없지 않나.
“에설론 백작위가 방계로 가게 되어서 좋아 죽을 지경일 텐데 뭘 사과까지 하십니까.”
라이킨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럼 소명 과정이 끝난 다음에나 편지 같은 것으로 형식적인 사과를 전하는 게 낫겠어요. 지금 하면 오히려 소명 과정을 유리한 쪽으로 끌고 나가려 한다고 오해만 살 수도 있겠네요.”
“거기까지 바로 생각하셨습니까. 맞습니다.”
라이킨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못했다고 인정하시는 게 될 수도 있고요.”
“예, 그러니…….”
“응. 그래요.”
소렐은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에서 봤던 얼굴을 이런 곳에서 다시 마주하게 되니, 새삼스러워서 잠깐 사과라도 할까, 생각했지만 바로 접었다. 학교라. 소렐은 잠시 즐거웠던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 문턱을 떠올려보았다. 즐겁긴 했지만, 이젠 아쉽지 않았다.
‘학교에 안 가면 큰일나는 줄 알았는데.’
그리고 해보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이젠 미련이 사라졌다. 그녀는 가디언이자 헬레인 공주의 수호기사와 함께 고대마법을 연구하고 또 지켜내야 했다. 게다가 칼리에르 공비가 해야 할 의무도 있으니 앞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거다. 또, ‘라이킨과 함께 즐거울 거다’.
“한두 해 정도…….”
라이킨은 미래를 예상하며 말을 흐렸다.
“한두 해 정도는 몸을 회복하시면서 고대마법에 집중하시다가, 그 후에 다시 사교활동을 시작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래야 해요?”
“‘공주님께서 원하신다면’ 말입니다.”
그가 하는 모든 말의 전제는 바로 그거였다. ‘공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소렐은 괜히 그녀에게 말도 걸지 못하고 있는 사비나 로체도 쳐다보았다.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지 고민하는 건 사비나나 소렐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비나한테는 말 걸어도 괜찮겠지요?”
소명 과정에서 문제가 생길 여지가 없냐는 질문에 라이킨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끝나고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렇구나. 소렐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비나가 화를 낼지도 모르겠어요.”
“어째서요?”
“내가 일방적으로 화내고 갔으니까…….”
안 그래도 저 또래 아가씨들에게 우정이란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던 루드밀라가 그 점을 이용했다. 물론 라이킨은 소명 과정 전체를 주무르는 와중에 적당히 숨길 건 숨기면서 그가 사비나를 일부러 소렐의 친구로 심었다는 것과, 루드밀라가 그것을 이용했다는 사실은 빼버렸다.
“원인 제공은 제가 했으니 제가 잘못한 거지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공주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원인 제공자는 소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로체 양과 다시 가까이 지내실 생각이십니까?”
소렐은 말간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왜요, 이번엔 안 되는 건가요?”
“제가 어떻게 공주님의 인맥에 간섭하겠습니까.”
“했으면서.”
“다시는 안 하기로 약속드렸지요.”
아무리 걱정이 된다 해도 소렐에게 눈과 귀를 붙이는 짓은 더 이상 안 할 거다. 차라리 깨지고 굴러서 집에 와 우는 그녀를 안아주고 위로해주는 게 그가 할 일이란 걸 깨달았다.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친구는 나 혼자 하는 게 아니라 서로 함께하는 거니까…….”
“만나서 뭐라고 하시려고요?”
“……그냥, 잘 지냈냐고……. 화부터 내서 미안하다고…….”
하지만 옛날처럼 아무 의심 없이 순수하게 사비나를 볼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소렐은 엔버네스의 살벌한 사교계에서 순수한 우정을 찾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란 걸 이미 알았다.
“자, 시작합시다.”
휴식시간이 끝나고 판사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글래스턴 공비 소렐 이드리스가 에설론 백작 루드밀라 아스테어 프랑슈틸을 살해한 과정에 대한 긴 소명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긴장하지 마시고, 그간 있었던 일을 솔직하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라이킨은 소렐을 다독이며 다시 증언대로 보냈다. 아, 그는 또 멀리서 그녀를 그저 지켜만 보고 있어야 했다. * 루벤 실베스터는 슈토넨 후작이 이 소명 과정으로 원하는 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루벤은 그저 안전하게 에설론 백작위를 승계하고 싶을 뿐이었다. 엘펜하임 기사단 잔당들도 다 망한 마당에 이 소명 과정에 관심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는 엘펜하임 기사단 수뇌부가 불법입국을 해서 죽어 나간 것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침입자들을 신경 써서 뭐하게?
“어째서 글래스턴 공작에게 이혼을 요청한 겁니까?”
예민한 질문이자, 모든 기자들이 궁금해하는 질문이 소렐에게 날아들었다.
“……저 혼자 모든 걸 책임지고 싶었습니다.”
거 보라지. 루벤은 속으로 웃었다. 사람들은 저런 대답에나 관심이 있지, 루드밀라의 죽음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소문에는 왕세자까지 이 소명 과정에 눈과 귀를 심어놨을 정도로 관심이 지대하다고 하던데, 왕세자가 설마 루드밀라에게 관심이 있어서 그러겠나. 전부 다 저 어리고 예쁜 대마법사이자 공비에게 관심이 있는 것뿐이지. 그나저나 칼리에르 공 없이는 불안정한 대마법사라면, 왕세자가 아쉽게 됐다.
“남편의 명예가 저로 인해 실추되는 건 일어나선 안 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진심으로 싫었다. 그뿐이었다. 소렐은 내내 묻는 말에만 대답하고,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았다. 그 후 소명 과정은 남편을 위해서 이혼해주려던 대마법사와 그런 아내를 전국을 뒤집어가며 찾아댄 남편의 이야기로 끝났다. 정말 그뿐이었다. 루벤 실베스터는 이 과정에서 얻을 건 에설론 백작위 하나뿐이었고, 그걸로 만족했다.
“결과는 추후에 공시하도록 하겠습니다.”
판사는 기나긴 절차를 마무리 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하루 종일 입씨름을 벌여댔던 법률가들도 지친 기색으로 떠났다. 기자들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취재를 벌였지만, 라이킨은 오늘 그들의 배를 충분히 불려주었으므로 더 이상 먹이를 던져줄 생각은 없었다.
“공주님, 가실까요.”
“네.”
이렇게 끝나나? 소렐은 기자들과 방청객들에게서 멀어졌다. 라이킨은 아예 그녀의 뒤에 서서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못하도록 온몸으로 가렸다. 소렐은 오늘 쓸데없는 시선에 충분히 노출되었다. 이제 다시 안락한 공작저로 돌아가 쉴 시간이었다. 그들은 뒤쪽으로 나왔다. 이 과정에 관련 있는 사람들은 전부 뒤쪽으로 퇴장했다.
“자, 이제 가보세요.”
라이킨은 소렐의 등을 살짝 밀었다.
“저는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뭘?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소렐은 저 멀리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사비나를 발견했다.
“만일 싫으시다면 이대로 저와 함께 가시지요.”
라이킨은 웃으면서 기다려주었다. 소렐은 입술을 말고 고민했다. 그러다가 라이킨을 쳐다보았다.
“……내가 라이킨도 용서해줬는데 사비나를 용서해주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돼요.”
토끼 공주님은 순식간에 남편을 제대로 걷어차 버리곤 통통 튀다시피 하며 사비나에게로 다가갔다. 뒤늦게 라이킨은 픽 웃었다. 우리 공주님은 항상 맞는 말씀만 하시지.
“자네는 나 좀 보지.”
어딜 도망가려고. 그는 웃으면서도 이쪽으로 오고 있던 루벤 실베스터를 불러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