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The golden wave (20)2021.10.27.
다시 한번 온 나라의 눈과 귀가 법원으로 쏠렸다. 지난가을,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대마법사가 겨울이 되고 나서야 다시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가을에 그녀가 저질렀던 일에 대한 소명 때문이다. 이 일을 요청한 에설론 백작위 계승자도 나타날 것이고, 여러 증인도 함께할 예정이었다. 무엇보다 글래스턴 공작부처가 함께 나타날지, 아니면 대마법사 혼자서 나타날지에 대한 관심도가 가장 뜨거웠다. 기자들은 법원 출입구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서서 마차를 기다렸다.
“저기 온다!”
마차들이 줄을 지어 나타났다. 젊은 뱀파이어인 에설론 백작위 계승자 루벤 실베스터가 내렸다. 그는 덤덤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갔다. 약간 창백한 안색인 증인, 사비나 로체 양도 내렸고, 엘펜하임 기사단 수뇌부의 시신을 확인하고 조사한 경찰과 검시의도 줄줄이 뒤이어 나타났다. 모두가 기자들이 외쳐대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전부 법원 안으로 들어갔다. 이 일을 보고 그림을 그려 싣는 삽화가들의 손이 가장 바쁘게 움직였을 때는 당연히 글래스턴 공작의 마차가 들어섰을 때였다.
“공주님, 조심히…….”
법원의 질서를 담당하는 경찰들이 기자들 앞을 삼엄히 지키고 있었고, 기자들 역시 예의는 지켜야 했다. 매끄러운 광택이 도는 긴 코트로 몸을 폭 감싼 대마법사가 남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여전히 체구가 작아서 남편에게 완전히 가려졌지만, 그렇다고 아주 안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에설론 백작을 죽였다는 혐의를 받고 있지만, 소렐 이드리스는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발밑 조심하십시오. 눈이 내려서 많이 미끄럽습니다.”
라이킨은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부터 계속 소렐에게 걱정할 거 없다고 말하고, 그 또한 모든 걸 준비했지만 실전은 연습과 다르다. 그는 이 순간에도 소렐이 긴장하고 두려워할까 봐 걱정이었다.
“고마워요. 라이킨도 조심해요.”
하지만 소렐은 차분하고 또렷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황금색이 도로 숨고, 다시 까맣게 된 눈이다. 예전과 같은 눈이었지만 확연히 달랐다. 자신이 대마법사이며, 또한 칼리에르 공비이기도 하다고 스스로 선언한 소렐의 존재감은 어마어마했다. 이젠 그가 막연히 지켜주기만 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라이킨은 어쩐지 마음이 조금은 놓였다.
“들어가시지요.”
그는 꿋꿋하게 잘하고 있는 소렐을 감싸 안다시피 하며 법원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일은 여기에서 종결할 것이다. 소렐이 한 일은 정당방위이며, 에설론 백작 루드밀라 아스테어 프랑슈틸에 대한 살인 혐의로 재판이 벌어지게 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 그저 소명 절차에 불과한 일이었지만, 이 소명 절차에도 글래스턴 공작은 재판 못지않게 아낌없이 돈을 쏟아부었다. 최고의 변호사군단을 선임했고, 온갖 증명자료를 갖추었다. 그는 여기에서 소렐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다면 뭐든 더 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뭐든’ 말이다.
“시작할까요?”
판사의 말에 속기사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기가 나와서 에설론 백작, 그러니까 죽은 루드밀라 아스테어 프랑슈틸이 어디에서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 그리고 함께 발견된 다른 시신들의 신분이 어땠는지 지루하게 읊어댔다. 다음에는 그 시신들을 검시한 검시의가 와서 증언했다.
“골절과 타박상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또한 발견된 모든 시신들은 같은 시각에 동시에 죽었습니다. 그런 일이 가능한 건 마법뿐입니다.”
이 일을 어쨌든 형식적으로라도 수사한 수사관도 증언했다.
“엘펜하임 기사단이 글래스턴 근처에서 발견되었다는 건 심각한 불법침입 행위입니다. 엘펜하임 기사단은 걸핏하면 남의 국경을 넘어서 갈취를 일삼았다는 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또한 소렐 이드리스는 그 피해자이기도 했다.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럼 엘펜하임과 에설론 백작의 연관관계가 뭐냐는, 모두가 다 알고도 법적으로 다시 소명해야 하는 단계가 남았다. 라이킨은 솔직히 카메론 셀레스트, 그 쥐새끼 같은 놈을 어떻게든 찾아내려고 했다. 감쪽같이 사라져서 아직까지도 발견되지 않고 있는 그놈을 잡아다 적당히 손을 본 뒤 이곳에 세웠어야 했다. 그놈이 에설론 백작과의 관계만 불면 끝나는 일인데 우리 공주님을 기어이 이곳까지 오시게 하다니.
“이미 다 아는 사이였어요.”
몇 개월 만에 소렐을 본 사비나 로체는 증인석에서 파리한 얼굴이 되어 증언했다. 안 좋은 기억을 다시 떠올리려니, 그녀의 표정이 바뀌었다.
“말을 하는데, 서로 그곳에서 이미 만나기로 했다는 걸 다 알고 있더라고요.”
칼리에르 공비의 친구이자 공비를 제외한 유일한 생존자인 사비나의 증언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떨어질 수도 있었지만, 그렇다 해서 무시할 수도 없었다.
“소렐의 머리카락을 잡고 뺨도 때렸어요. 한 번만 때린 거 아니에요.”
사비나는 판사가 잘 다독이자 조금씩 더 증언을 더했다.
“소렐을 엘펜하임 기사단장에게 넘겨주겠다고 했어요. 그 사람들더러 데리고 가라고요. 자꾸만 소렐 머리채를 잡고 놓지 않았어요. 너무 아프겠다고 생각했어요.”
라이킨은 사비나가 그때 있었던 일을 정확하고 자세하게 증언하는 사이, 코트 자락 사이에서 소렐의 손을 찾아 쥐었다. 작은 손은 그에게 대답하듯 그의 손가락 사이를 얽어 깍지 꼈다. 늘 그가 하던 일인데 소렐이 먼저 해서 라이킨은 이 와중에도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끌어내려야 했다.
“그리고……, 소렐에게 협정서를 보여줬어요. 글래스턴 공작전하가 소렐을 배신한 거라고 거짓말도 했고요.”
사비나의 진술에 판사가 고개를 들었다.
“협정서가 뭡니까?”
소렐이 가지고 갔던 에설론 백작의 협정서가 증거로 올랐다. 내용을 쭉 읽어본 판사는 라이킨을 증언대로 불러들였다.
“여기에 왜 서명을 했습니까?”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하도 못살게 굴어서.”
사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적’들의 이름을 한 번에 다 알아내기 위함이었지만, 라이킨은 증언대에서만큼은 신중하게 대답했다.
“그 협정서에 서명한 이들이 매일같이 찾아오고, 하도 들쑤셔대며 위협적으로 굴기에 어느 정도 협조하는 시늉이라도 했습니다. 결국 일이 이렇게 되었지만.”
겉으로 보기엔 그는 무척이나 무능력한 남편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라이킨의 발언을 확인할 길이 없다는 거다. 협정서에 서명한 이들 중, 남은 이는 거의 없었다. 거의 다 실종되었거나 아니면 갑작스럽게 죽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서명한 날짜 이후로 벌어진 일들이었다. 천연덕스럽게 무능한 남편을 연기하고 있는 저 수려한 남자가 모든 일의 배후라는 건 애도 알아차릴 일이었지만 라이킨은 내내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공은 엘펜하임으로 공비를 넘기는 데 동의했습니까?”
아내를 팔아치워서 생체실험을 당하도록 내버려뒀냐고? 물론 그렇게 반문했다간 판사는 묻는 말에 대답하라며 정색할 거다. 하지만 그 질문을 받은 칼리에르 공의 눈은 무섭게 번뜩이고 있었다. 그는 차분히 대답했다.
“그 일은 내가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만일 동의했다면, 내내 아내를 찾아다니고 보호하지 않았을 겁니다.”
기자들은 방청석에 앉아서, 시종일관 여유롭기만 한 칼리에르 공을 ‘배부른 야수’라고 표현했다. 그들 중에는 슈토넨 후작의 지원을 받는 이도 있어서, 뱀파이어 귀족들이 상당수 실종된 것과 칼리에르 공이 연관되어 있는 게 분명하지만, 아무도 물증을 찾지 못했다는 의혹 역시 보도되었다.
“잠깐, 대마법사가 어째서 ‘보호’가 필요하다는 겁니까?”
“필요합니다.”
라이킨은 묵직하게 눌러 말했다.
“이 ‘사고’는, 죽은 에설론 백작이 일부러 내 아내를 납치해서 학대하고, 고문하지만 않았어도 벌어지지 않았을 일입니다. 고대마법을 위협해서 반강제로 마법을 열어젖혔으니, 당연히 계승자에게 타격이 갑니다.”
판사는 안경 너머로 라이킨을 응시했다. 저 화려한 뱀파이어는 이 일을 ‘사고’라고 말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소렐에게는 죄가 없다는 뜻이다. 누가 봐도 아내를 철저하게 보호하겠다는 의지가 흘러넘쳤다.
“덕분에 현재 칼리에르 공비는 무척 몸이 약해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같은 침대 위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토끼로 변해서 남편이 혼자 허벅지를 찌르게 하고 있지! 새삼 생각해보니 다시 열이 치받아서 라이킨은 루드밀라를 살려두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모든 일의 원흉이 아닌가.
“오늘 출석을 하느라 상당히 무리했습니다. 강제로 고대마법이 열렸으니, 후유증이 상당합니다.”
물론 이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소렐은 완전히 회복했다. 그녀의 저 형형한 눈빛을 보라. 대마법사가 돌아왔다는 게 느껴질 만큼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에설론 백작이 고대마법을 ‘강제로’ 열었다고 계속 말하고 있군요, 공.”
“예.”
“그러니까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말 그대로…….”
라이킨은 느릿하게 말을 끌었다. 그는 이 사건의 핵심을 다 쥐고 있었고, 그의 입맛대로 사건을 구성해서 이 자리에 올렸다. 사람들은, 심지어 판사조차 그가 꾸며낸 대로 사건을 볼 수밖에 없었다. 슈토넨 후작을 비롯한 협정서에 서명한 뱀파이어들이나, 그들의 유족은 분통이 터질 지경이지만 그건 라이킨이 알 바가 아니었다.
“가만히 뒀으면 자연스러운 순서에 따라 아무런 부작용 없이 고대마법을 잘 사용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하고 충격을 심하게 줘서 심각한 부작용이 따랐다는 겁니다.”
“공은 고대마법에 대해 잘 압니까?”
라이킨은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펠릭스 이드리스와 메리 헬레인, 그리고 그가 약속한 고대마법의 수호자 계약서를 꺼냈다. 펠릭스의 유언장이자 소렐과의 혼인서약서이기도 했다. 소렐의 서명까지 얽혀 여전히 붉게 빛나는 그것을 판사부터 방청객까지 모두가 다 신기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바라보았다.
“전대 대마법사에게 귀에 못이 박이도록 직접 배웠습니다. 나는 마법을 사용할 줄은 모르지만, 그 마법을 어떻게 지키는지는 잘 압니다. 그리고 지킬 의무와 권리 또한 나에게 있습니다.”
칼리에르 공은 기본적으로 자신만만하고 귀족답게 고상한 태도를 잃지 않았으나, 그 기저에는 분명하고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분노가 깔려 있었다. 사람들을 두렵게 하는 그 분노를 판사가 한 번은 지적을 했다. 딱 한 번.
“공교롭게도 이 협정서에 대하여 증언을 할 증인들이 상당수 실종되었거나 사망했습니다. 공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유감입니다만, 협정서 그 자체는 증거로 대부분 다 남아 있으니 문제가 될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딱히 유감도 아니라는 표정으로 유감이라고 말한 라이킨은 앉아 있는 소렐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지금 혼자 앉아 있다. 그게 조금 마음에 걸렸다. 물론 그의 공주님은 아주 씩씩하고 용감하다는 걸 잘 알았지만, 그래도 그는 언제나 걱정할 거다. 그건 도저히 끊어낼 수 없는 습관이자 본능이었다.
“실종이나 사망사건은 이 일과 별개의 사건이 아닙니까.”
그는 딱 잘라서 뱀파이어들의 실종과 사망을 여기에서 의논할 일은 아니라고 못 박았다. 지금 소렐이 정확한 조사보고와 소명절차를 거치는 게 제일 중요했다. 라이킨은 어젯밤까지도 품에 꼭 끼고 앉아서 어딜 가든 그가 직접 안아다 데려다준 소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면 고대마법을 지금 칼리에르 공비가 잘 감당하지 못한다는 겁니까?”
설마, 그럴 리가. 여기 있는 사람들조차 은연중에 대마법사의 존재감에 움찔거리고 있다.
“제출한 계약서를 다시 보면,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그가 하는 말은 모두 막힘없이 매끄럽게 나왔다.
“만일 공비가 감당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건 내가 감당합니다.”
라이킨이 결합점에 제 피를 묻혀가면서 소렐과의 결합을 필사적으로 유지했기에 고대마법은 그에게도 아주 약간의 권한을 주었다. 최초로 대마법사가 어딜 가든 결합점을 잡아당겨 쫓아갈 수 있는 가디언이다. 그리고 그는 웬만해선 죽지 않는 튼튼한 신체를 가졌다. 그러니 당연히 몸으로 버티면 그만이었다. *
“고대마법이 강제로 열어젖혀지면, 가디언이 할 일이 많아지지요.”
흑마법사들이 주문을 외워대는 소리를 뒤로 하고 슈토넨 후작은 어둑한 비밀을 들었다.
“고대마법은 생물이기도 하답니다. 자기 의지가 있어요. 그래서 대마법사와 함께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가디언을 더 붙들 겁니다.”
검은 두건을 둘러쓴 이들이 여태까지 살아남은 건 더 큰 마법, 더 강력한 힘을 향한 강렬한 의지 덕분이었다. 그들은 그만큼 그들이 원하는 것에 대한 정보가 많았다.
“그만큼 가디언……, 수호하는 이와 대마법사는 더 긴밀히 연결된다는 거지요.”
“그 깊어진 연결을 이용하겠다?”
슈토넨 후작의 목소리가 석연치 않았다. 그는 아주 보수적인 사람인지라, 감정을 일부러 비틀어 꼬집고, 사람을 이유 없이 괴롭게 하여 피눈물을 흘리게 하는 건 불편했기 때문이다.
“강렬한 슬픔, 집착, 잃은 것에 대한 한, 이 모든 게 좋은 재료가 됩니다.”
‘……오래는 못 갈 동맹이군.’
저들은 고대마법을 원하고, 슈토넨 후작은 고대마법이 뱀파이어에게 위협이 되지 않길 바란다. 언젠간 어긋날 목적이었기에 이 동맹은 임시적인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일단 이것 외에는 방법이 없으니, 잠시나마 동행할 수밖에. 후작은 문득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의 강렬한 한이 무엇일지, 떠올리려다가 관뒀다.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
“만일 공비가 감당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건 내가 감당합니다.”
소렐은 그 말이 사람들에게 들으란 듯이 하는 게 아니라, 라이킨이 그녀에게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이란 걸 깨달았다. 그녀를 흔들림 없이 바라보고 있는 남자는 그 말이 제발 소렐에게 닿길 바라고 있었다. 소렐은 그에게 어떤 흠도 아니고, 모자라 보여서 골치 아픈 엉터리 마법사도 아니었다.
“대마법사에게 가디언이 있었던 경우도 꽤 있었으니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에설론 백작이 저지른 일로 내가 할 일이 늘었습니다.”
‘그건 전혀 귀찮은 일이 아닙니다, 공주님. 결코 오해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라이킨은 법원에 오기 전,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며 또 무슨 말이 오고 갈지 상세히 설명해줬다. 그리고 그가 무슨 대답을 할지도 다 말해줬다. 오해하지 않는다며 소렐이 고개를 흔들었지만, 라이킨은 소렐의 귀에 거슬릴 말을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는 게 아주 싫은 모양이었다.
‘……좋은 사람이고, 참 좋은 남편이야.’
소렐은 그렇게 생각했다. ‘협정서에 서명한 뱀파이어들의 대다수가 실종, 혹은 사망했다’라는 대목에서 라이킨이 좋은 ‘사람’ 축에 속하는 건 아니지만, 좋은 남편인 건 확실했다. 몇 달 전, 라이킨이 너무 보고 싶어서 몰래 찾아왔다가 몹시 상처받고 떠났을 때는 상상도 못 하던 일이었다. 그때는 정말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소렐은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고 라이킨은 그녀의 곁을 여전히 지키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도 부끄럽지 않게 제대로 된 대마법사가 되어야지.’
“그리고 국가 전체 차원에서 보면, 대마법사가 엘펜하임으로 넘어가게 둬선 안 될 일이란 걸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 모두가 공감하시겠지요. 애국자가 아니라면 상관없는 문제이긴 하겠습니다만.”
라이킨은 서늘한 눈으로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런 식으로 아내를 나라의 소중한 자원취급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는 지금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