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The golden wave (19)2021.10.23.
“공비전하.”
어딜 가든 소렐은 이 집에서는 그런 호칭으로 불렸다. 이 넓은 공작저의 주인은 그녀이기도 했고, 라이킨과 동등한 권한을 가졌다. 마침내 완전히 몸을 회복한 소렐은 그날 아침, 머리를 단정하게 빗고 침실에서 나왔다. 상당히 이른 시간이었지만 이미 저택사람들이 전부 분주하게 움직이고도 남은 시간이다. 그녀는 인사를 받으면서 천천히 오래된 저택 복도를 거닐었다. 이 저택 자체가 살아 있는 역사라고 봐도 무방했다.
‘물론 이제는 나도 살아 있는 역사나 다름없지.’
소렐은 하루에도 몇 번씩 눈앞에 아른거리는 오래된 지식들을 읽느라 정신이 없었다. 대마법사들이 겪었던 경험과 지혜를 배우려면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지만, 다행히 지혜는 이미 소렐의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공주님. 오늘은 어떠세요?”
에벌린이 그녀를 발견하고 다가와서 물었다.
“괜찮아요, 에벌린.”
그녀는 웃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앞으로는 걱정할 일이 없을 거예요.”
어쩐지 확신이 담겨 있는 말투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소렐 이드리스는 차분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는 커다란 대가를 치렀고, 그 대가만큼 값지고 귀중한 것을 얻어냈다. 에벌린은 미소 지었다.
“네, 공주님.”
대마법사가 저리 말했으니, 앞으로는 분명히 그 말대로 될 것이다.
“에벌린.”
“말씀하세요.”
“……이제부터는 내가 할 일을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그건 조심스럽지만 당당한 요구였다.
“물론 에벌린이 여태까지 얼마나 헌신하고 애써줬는지는 내가 가장 잘 알아요. 날 정말 잘 돌봐줬고요. 그걸 무시하는 건 아니고, 내가 할 일은 이제부터 내가 하겠다는 뜻일 뿐이에요.”
“오, 공주님.”
에벌린은 가장 행복한 말을 들었다는 듯 웃었다.
“제가 그 말을 얼마나 오래도록 기다렸는지 몰라요.”
주름이 지기 시작했으나 아직까지도 강건하고 탄탄한 손이 소렐의 손을 맞잡았다.
“공주님께서 잠들어 계시는 내내 그 말만을 기다렸답니다. 물론이지요, 공주님.”
탁월한 가정부이자 집을 관리하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문가가 눈가를 반짝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공주님. 그게 바로 제가 할 일이지요. 너무나 기쁘네요. 아주 기뻐요. 요 며칠 사이에 들은 말 중에 가장 기쁜 말이에요.”
“그렇게 말해줘서 나도 기뻐요. 사실은 조금 긴장했거든요.”
“긴장하실 일이 뭐가 있나요, 마땅히 공주님이 하실 일인데.”
“라이킨은 어디 있나요?”
“교수님에게도 말씀하시려고요? 지금 서재에서 밀린 일을 처리하고 계세요. 공주님께서 일어나실 때까지 기다리고 계시는 모양이던데. 가보세요, 어서 가보세요.”
손이 두툼하고 따뜻한 에벌린이 어서 가라며 소렐의 등을 다독였다.
“아주 기뻐하실 거예요. 어깨 펴고 가보세요.”
그럴까? 그래, 아마 그럴 것이다. 소렐은 이제 더 이상 반신반의하지 않았다. 그녀는 확신을 가지고 서재로 걸어갔다. 그리고 서재 문을 두드렸다. 그녀가 깨어나기도 전에 밀린 일들을 해놓는 라이킨은 아마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몸이 열 개 이상 되는 사람처럼 모든 일을 다 해놨다.
“공주님?”
이미 문 밖에 선 그녀의 기척을 느낀 그가 직접 다가와 문을 열어주었다.
“어, 좋은 아침이에요.”
“예,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은 아주 일찍 일어나셨군요.”
그야 중요한 날이니까. 어젯밤부터 꼭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일부러 일찍 일어난 거다.
“음, 들어가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라이킨은 이미 들어오라고 문에서 비켜 서 있었다. 그녀는 글래스턴 공작의 집무실로 들어갔다가, 책상 위에 가득 쌓인 서류들을 질린 얼굴로 쳐다보았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저 정도였단 말이야?
“이게 다 라이킨이 해야 할 일들이에요?”
“예, 그렇긴 하지만 그리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그는 소렐의 표정을 보며 웃었다. 하지만 그녀는 웃는 대신 서류더미 위에 손을 얹고 물었다.
“……내가 알면 안 되는 건 아니지요?”
“전혀요. 그런 건 이제 없기로 약속드렸잖습니까.”
더구나 이젠 점점 대마법사의 면모를 하나하나 갖춰가는 소렐에게 딱히 숨길 수 있는 일도 없었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그녀는 가장 위에 있던 서류를 한 움큼 집어서 팔락팔락 넘겨보았다.
“전부 급하지 않은 일입니다.”
전부 영지에 관한 일들이다. 법률적인 일들, 관리해야 하는 장부, 세금 관련한 회계사의 조언, 날아든 편지, 아직까지 겨울이건만 내년 예산과 결산에 관한 문제, 그리고 오는 봄을 준비하는 계획서도 많았다. 라이킨은 뱀파이어들의 수장이기도 하면서 한 영지를 다스리는 공작이기도 했다. 당연히 할 일이 많았다. 물론 그의 말대로 당장 처리해야 하는 급한 일은 아니기도 했다.
“그러게요…….”
누군가의 목숨이 오고 가는 일들보다는 덜 급한 일이다. 맞다. 소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라이킨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에벌린은 그가 기뻐할 거라고 했다. 소렐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라이킨을 기쁘게 하고 싶었다.
“내가 할 일이 분명히 있겠지요.”
그는 멍청하게 ‘공주님께서 하실 일이 뭐가 있을까요?’ 같은 질문 따위 하지 않았다. 그를 분명하게 쳐다보고 있는 까만 눈은 수천 년간 쌓인 지식을 물려받은 현자의 눈이다. 그녀가 지금 무슨 뜻으로 저런 말을 하는지, 뱀파이어는 곧바로 알아들었다.
‘스무 살인데 더 이상 스무 살이 아니시군.’
그는 잠시 말을 하지 않고 그 까만 눈을 마주했다. 이 아가씨를 언제 다 키우나 했는데, 그녀는 어느새 그와 마주할 정도로 혼자 쑥 자라서 돌아왔다. 눈 안만 들여다봐도 그와 맞먹을, 아니, 그를 능가할 지혜가 가득했다.
“아니, 내가 해야 할 일이 많을 거예요. 엄청 많네요.”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들을 돌아보며 소렐이 중얼거렸다.
“대마법사에겐 사소한 일이지요.”
농담을 하며 라이킨은 빙긋 웃었다. 그는 언뜻 보기엔 사소한 것에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여상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은 그저 평범한 아침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하긴 늘 여유가 넘치던 사람이긴 했다.
“하지만 칼리에르 공비에겐 늘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빙글빙글 웃기만 하던 눈이 멈칫거렸다. 숱 많은 속눈썹이 흔들리는 푸른 눈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견고하던 남자의 벽이 순식간에 깨졌다. 그 누구도 간파하지 못하는 위장이 전부 다 드러났다. 그는 떨리는 눈을 잠시 감았다. 그러곤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칼리에르 공이 늘 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냥 뒀다간 영지가 난장판이 될 테니, 최소한으로 일을 줄여도 어쨌든 할 일은 해야 했다.
“늘 해야 하는 일이지요.”
잠시 두 사람 사이에는 깊은 침묵이 감돌았다. 하지만 불편하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만일 수백 년을 떨어졌다가 다시 만난다 해도, 그들은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그…….”
라이킨이 떨리는 입술로 뭐라 말하려다가 다시 멈췄다. 궁금한 게 있으나 차마 못 물어보겠다. 아니, 대답을 다 알고 있다. 이미 소렐이 열에 앓기도 전부터 다 알고 있었다. 알았지만 대마법사이자 칼리에르 공비 앞에서는 그도 한없이 작아졌다.
“이혼소송은 전부 다 취하될 거예요. 그렇게 했어요.”
라이킨은 억눌렸던 숨을 간신히 뱉어냈다. 웃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고, 혹은 우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가 그럴 것 같아서 소렐은 꼭 직접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셨군요.”
그는 약간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쨌든 태연했다.
“마땅히 그래야 하기도 하고요.”
언제 깨어날지 몰라 애태워가며 곁을 지켜줬던 남편에게 당연히 해야 마땅한 일이다.
“무엇보다, 내가 그러고 싶었어요.”
그녀는 말하다가 입술을 조금 깨물었다.
“바로 했어야 했는데, 좀 늦었지만.”
“요새 정신이 없었지요.”
“맞아요. 정신이 없었어요.”
부부는 서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타닥타닥, 장작이 벽난로 안에서 타오르는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그래서 이젠 몸도 괜찮으니, 내가 해야 할 일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소렐은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들을 돌아보았다. 소렐이 해야 할 일까지 라이킨이 하고 있었으니,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물론 이런 건 처음이라 많이 배워야 하겠지만, 그래도…….”
“당연히 모두가 처음인 일은 배우면서 시작하는 겁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대마법사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서류를 골랐다. 대부분 ‘글래스턴 영지’에 관한 서류들이었다. 은행 일에 관한 서류나 라이킨이 따로 하는 학문적 연구에 관한 건 손대지 않고 슬쩍 밀어놓았다. 그건 어차피 그녀가 할 일이 아니었다.
“음, 뭘 먼저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좀 도와줄래요?”
“공주님은 굳이 배우지 않으셔도 바로 모든 일을 처리하실 수 있을 겁니다.”
라이킨은 어떤 서류든 원하는 대로 고르라는 손짓을 했다.
“……음, 나도 사실은 그렇게 생각해요. 머릿속에 있는 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고 있거든요.”
그녀는 활발하게 움직이는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라이킨한테 많은 도움이 되고 싶어요.”
그쯤에서 라이킨은 결국 그녀의 양 뺨을 감싸고 키스를 퍼부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의 온 마음이 전해졌다. 다급하게 파고들었다가 조심스럽게 어루만진다. 소렐도 그녀의 마음이 그에게 전해졌으면 했다. 그와의 차이를 어느 정도 따라잡았다고, 그러니 보호만 받지 않고 동등하게 곁에 서고 싶다고, 필요하다면 그녀 역시 그를 지킬 거라는 마음이 전해졌으면 좋겠다.
“……이미 도움이 되고 계시는데요.”
그는 이마를 맞대며 한숨을 쉬듯 중얼거렸다.
“아니,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소렐은 무섭게 정색했다.
“내내 누워 있기만 하고, 도움은 전혀 되지 않았잖아요. 이런 실무는 한 오백 년 정도 있다가 하라고 하려고 했어요?”
‘이런 실무’란 칼리에르 공비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글래스턴 영지를 비롯한 재산 전반과 투자 상황, 마땅히 관리하고 신경 써야 할 글래스턴 영지 안의 여러 가지 행사들과 산업을 돌보는 일들이다. 거기에 사교계에서 공비가 해야 할 일이 무궁무진했다.
“……저는 하기 싫으면 하지 않으면 된다는 주의라.”
소렐이 이런 일을 하기 싫다고 했으면 시킬 생각도 않았다는 뜻이었다. 서류를 품에 한 아름 안았다가 아예 허공에 띄운 그녀는 남편을 향해 돌아섰다.
“그건 안 될 일이에요. 해야 할 일은 마땅히 해야 한다고요. 나도 대마법사로서의 의무도 다 할 거예요. 공비역할도 마찬가지고요. 라이킨은 하기 싫은 것도 다 했잖아요.”
“저는 어쩔 수가 없는 성장배경이었고요. 공주님이나 나중에……, 한 오백 년 후에 생길 우리 아기들은 안 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억지로 하는 건 딱히 정서에 좋지 않습니다. 제가 바로 그 증거지요.”
“오백 년 후에 아기를 갖자고요?”
이건 또 무슨 소리람. 소렐의 눈이 커졌다.
“천 년 후에 가지는 것도 좋습니다.”
라이킨은 얼른 말을 고쳤다. 가족 계획이란 건 마땅히 아내가 결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소렐은 여전히 눈만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볼 뿐이다.
“……아기를 가지는 건 어쨌든 나중에 생각하시고…….”
물론 그가 좀 섣불리 말하기는 했다. 아니, 그래서 오백 년 후도 좋고 천 년 후도 좋다고 한 건데, 그것도 너무 이르게 느껴지나?
“아이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라이킨은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예…….”
그러곤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님을 닮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서…….”
“그랬구나.”
“예.”
소렐은 눈을 깜빡거리다가 책상 건너편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나는 라이킨이 가족을 더 이상 늘리는 건, 특히 아이는 결코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여자’처럼 가족을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니, 가족이 아니라 후계자지요.”
라이킨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식으로는 싫습니다. ……언젠가는 공작저에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 아이들이 아이답게 사랑받으면서 컸으면 좋겠다. 그는 가지지 못했던 어린 시절일 뿐만 아니라, 로렌스가 내내 조금만 더 빨리 알아차리고, 막지 못해 영영 잃어버렸다고 안타까워하는 귀중한 시기였다.
“그저 제 생각일 뿐입니다. 현실은 또 다르겠지요.”
“일단은 내가 공비 역할을 잘 한 후에요.”
소렐이 농담을 하며 웃었다.
“예. 그 후에. 언젠가는 함께 의논할 날이 오겠지요.”
아직까지는 그날이 무척 멀게 느껴졌다.
“그런데 공주님, 왜 갑자기 일을 돌보시겠다고 하신 겁니까?”
흑마법사들 때문에 경계도 삼엄히 하고 있고, 소렐은 슬슬 건강해진 몸을 잘 돌보고 대마법사로서 할 일을 찾아가는 중이다. 그런데 영지까지 돌보겠다고?
“글래스턴 공작전하가 내 남편이잖아요.”
라이킨은 픽 웃었다.
“예.”
“그러니까 나도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죠.”
“시집을 잘못 오신 것 같습니다. 와서 일을 해야 하다니.”
“잘 온 거죠. 여태까지 안 하고 있었는데도 별말도 안 했으니까.”
아무것도 안 하고 손을 놓고 있는 게 사교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걸 이젠 안다.
“나도 마냥 보호만 받고 놀고만 있지는 않을 거예요. 어쨌든 나도 결혼이란 걸 한 성인이고, 또 칼리에르 공비 작위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럼 뭔가. 라이킨은 다가와서 양손을 내미는 소렐에게 일단 손부터 내주었다.
“나도 남편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하려고요. 사실 공비 작위는 조금 관심이 덜 가고.”
“아. 작위는 별로 관심이 안 가시고?”
“응. 이미 날 때부터 공주라서요.”
라이킨은 그만 얼굴 근육이 다 구겨지도록 웃고 말았다.
“예, 공주님. 영광입니다.”
“그렇죠? 평생 영광으로 알도록 하세요.”
“예.”
도도하고 새침하게 말한 소렐은 그가 웃는 걸 보곤 같이 활짝 웃으며 그의 품에 폭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