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The golden wave (17)2021.10.16.
소렐은 양 주먹을 입 위에 붙여놓고 편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가을 초입에 울면서 선임했던 변호사는 일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번에 보낸 편지에 현재 이혼 과정은 소렐의 부재로 인해 전면 일시정지가 된 상태라는 것과 함께 앞으로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사항과, 무엇보다 새로운 소식을 하나 덧붙였다. 달랑달랑, 소렐의 다리가 툭툭 흔들렸다. 그녀는 발이 닿지 않는 의자에 앉아 두어 달쯤 된 신문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칼리에르 공작부처, 파경! 공비가 이혼소송 제기해…… 원인은 공비가 엘펜하임 기사단 수뇌부를 살해했기 때문? 떠돌면서도 보았던 신문 기사들이다. 정확하게는 그녀가 저지른 일에 대해 모두가 충격이라며 떠들어댔다. 대마법사를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돌도 맞았다. 엘펜하임은 실제로 그녀를 계속 죽이려 했다. 하지만 라이킨은 괜찮단다. 그녀가 잘못한 게 아니니까. 소렐에게 그런 짓을 한 이들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웃으면서 확언했다.
“으음, 일이 커졌네…….”
푸우, 하고 양 주먹 위로 한숨이 쏟아졌다. 볼이 통통하게 부풀어 올랐다.
“결혼은 너무너무 중요한 거였어…….”
이혼장을 날리지 말걸 그랬나? 아주 열심히 생각하고, 충분히 고민한 다음에 결정한 일이긴 했지만, 이제 와서 보니 좀 후회가 되었다. 라이킨이 무척 상처받았을 거다.
“뭐, 어쩔 수 없지.”
소렐은 허리를 똑바로 세웠다. 이젠 변호사가 말한 대로, 소렐이 한 번 더 결정을 해야 할 시간이었다.
‘이혼은 할 수 없어. 내가 저지른 일이니까 수습해야 해.’
아빠는 이혼을 하든 말든 상관없다고 했다. 하지만 라이킨은 아닐 거고, 솔직히 그녀도 아니었다. 가끔 그 남자의 깎아 놓은 듯이 잘생긴 코를 꽉 잡고 비틀어주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지만, 그냥 그뿐이다.
‘너무 잘생겨서 그러나? 나 문제 있네!’
하긴 소렐은 여태까지 라이킨보다 잘생긴 남자는 본 적이 없었다. 그토록 균형 잡힌 몸매와 얼굴, 그리고 매력까지 조화를 이루는 남자는 없었다. 뱀파이어들이 잘생긴 편이긴 했지만, 루벤 실베스터는 그녀의 취향에서 약간 모자라달까? 아무튼 그랬다. 물론 라이킨에게는 아직 비밀이다. 그 뻔뻔한 남자는 분명히 입이 찢어질 거다.
“라이킨! 거기 있어요?”
바로 문이 열렸다.
“소리 지르지 않으셔도 다 듣습니다. 얼마 전에 피까지 토하셔놓고 목을 그리 쓰시면…….”
말을 하던 라이킨이 입을 다물었다.
“나 피 많이 안 토했어요.”
“기억하십니까?”
아니. 그건 아니다. 토끼는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우엑, 하셨습니다.”
“우엑…….”
“예, 그렇게.”
“근데 왜 말을 하다가 말아요?”
라이킨은 소렐을 복잡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잔소리만 하는 것 같아서.”
그래놓고 입을 다물더니 조금 있다가 말을 덧붙였다.
“안 그래도 나이가 많은데 잔소리까지 하면 남자로 안 보일 것 같아서.”
오. 소렐이 입술을 동그랗게 말았다. 눈도 동그랗고 크게 떴다. 그러더니 호오오오오, 하고 요상한 소리를 냈다. 아니, 소렐다운 소리였다. 라이킨은 어쩔 수 없이 웃었다.
“라이킨도 나이 신경 써요?”
뱀파이어로는 아주 창창하고 젊디젊은 나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신경 쓴다고? 벌써?
“나이 ‘차이’를 신경 쓴다고 여러 번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그래서 지금 그녀가 쥐고 있는 이혼 전문 변호사의 편지 때문에 심장이 추락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길 반복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못난 남편이다. 나이도 많은데, 한참 어린 아내의 마음 하나 헤아리지 못해서 이혼장까지 받다니.
“내가 어려서?”
그는 대답 대신 무거운 한숨을 쉬었고, 소렐은 그만 까르르 웃고 말았다.
“우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줄 알았어요!”
항상 여유가 넘치고 그녀를 쥐고 흔드는 매력을 스스로 잘 아는 줄 알았는데, 라이킨도 그녀 못지않게 초조한 구석이 있었나 보다.
“무척 신경 씁니다, 무척…….”
“나는 신경 안 쓰는데!”
“예?”
“우리 엄마가 아빠보다 훠얼씬 연상이잖아요.”
나이 차가 뭐 어때서? 소렐은 즐겁게 웃었다.
“그쪽은 육십 년 차이고. 우리는……. 아니, 말하지 말지요.”
천 년이라는 발음도 하기 싫어서 라이킨은 손을 저었다. 그러나 소렐은 가차 없었다.
“천 년이나 육십 년이나, 한번 차이 나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이 차이 나는 거죠.”
‘밑도 끝도 없이’. 단번에 두들겨 맞은 남자는 침묵했다.
“나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이미 정해진 나이를 바꿀 수도 없고.”
그렇게 말해놓고 방싯 웃는다. 그녀가 그렇다니 그런 거겠지.
“라이킨도 알고 있을 수 있겠지만요, 법원에서 더 이상 이혼 과정을 정지할 수는 없고, 이제 내가 이혼에 책임이 있으니 그걸 감안해서 재산을 분할하라고……, 아무튼 일이 그렇게 됐대요.”
“예. 그렇군요.”
그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공주님께서는 어떻게 하고 싶으신 건가?
“라이킨은 이혼할 생각 없지요오……?”
“전혀요. 그리고 이혼에 책임이 있는 사람이 공주님이라는 것도 인정할 수 없습니다. 곧 이의 제기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판사는 뭐 이런 놈의 이혼이 다 있냐고 머리를 쥐어뜯을 거다. 라이킨이 알 바가 아니었다.
“그게요, 문제가 있어요. 아마 그럴 수는 없을 거예요.”
소렐은 변호사가 보낸 편지를 집어 들었다.
“에설론 백작의 죽음에 대해 내가 책임지라고, 에설론 백작 측에서 소명하라는 요청을 법원에 보냈대요. 라이킨이 예상하던 대로였어요.”
라이킨은 빙긋 웃었다. 루벤 실베스터, 안 그래도 소렐에게 이야기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이 바쁜 와중에 저 개새끼가 감히. * 온전히 작위를 이어받으려면 먼저 해야 하는 일이 몇 가지 있다. 첫 번째는 전대 작위 소유자의 장례식이다. 죽은 이가 가지고 있던 작위가 후대에게 넘겨졌다는 사실이 장례식을 통해 여러 사람에게 각인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두 번째는, 만일 전대 작위 소유자의 사망에 여러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고 지나가야 했다. 그러지 못한다면 두고두고 말이 나온다.
“고작 소명이나 하라고 그랬나?”
슈토넨 후작, 아서 모드릭 헴피온은 아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로 툭 물었다. 루벤 실베스터, 이 마음에 차지 않는 ‘방계’이자 순수혈통도 아닌 뱀파이어가 에설론 백작위를 차지했다. 통탄할 사실이긴 하지만, 작위가 사촌이나 바다 건너 육촌에게 넘어가버려서 가문의 이름마저 휙휙 바뀌는 일도 있는 마당에 어쩔 수 없긴 했다.
“소명부터 시작하는 거지요.”
루벤 실베스터는 친절한 태도를 유지하며 온화하게 웃었다. 그가 에설론 백작위를 이어받자 당연히 순혈 뱀파이어들의 화합을 중시하는 슈토넨 후작이 아주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참견을 하고 나섰다. 참견이든, 텃세든, 어쨌든 루벤이 겪고 넘어가야 할 일이었다. 애초에 에설론 백작위는 순혈 뱀파이어들의 유서 깊은 작위 중 하나였으니까.
‘뭐, 글래스턴 공작위나 발레시나스 공작위는 안 그런가?’
결국 다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에게로 돌아갈 작위인데 말이다. 강력한 순혈이지만, 당장 헬레인과 이드리스의 피를 이은 대마법사과 결혼해서 이혼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이상한 뱀파이어 말이다.
‘다 그런 식으로 피가 섞이면서 순혈들의 시대가 지나가는 거지.’
물론 루벤은 앞으로 수천 년은 더 살 슈토넨 후작에게 그의 생각을 일절 내보이지 않았다. 그저 공손하면서도 반드시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할 뿐이었다.
“어쨌든 법적으로 정확한 사망원인을 조사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니, 국왕폐하께서도 무시하시지는 못할 겁니다.”
“좀 더 강력하게 나갔으면 훨씬 더 나았을 거야. 어쨌든 이 말도 안 되는 죽음에 책임질 사람이 누구 하나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웃기고 있네. 루벤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노인네는 매일 ‘강력한 수단’, 혹은 ‘강경한 입장’이라는 단어만 주워섬기면서 이 시대의 보수 중 보수를 스스로 대표한다.
‘자기 일 아니라고 큰소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 죽은 얼굴로 칩거만 하고, 장례식만 다닌다고 하던 노인네가 웬일로 멀쩡한 얼굴로 튀어나왔다.
“하지만 전대 에설론 백작이 밀입국한 엘펜하임 기사단 수뇌부와 함께 발견되지 않았습니까. 엄연히 범죄입니다. 게다가 살아남은 로체 집안의 증인도 있다 하니, 괜히 들쑤셨다가 오히려 에설론 백작위에 범죄자나 반역자 낙인이 찍히는 건 곤란합니다.”
루벤은 조곤조곤 빠르게 말하면서 슈토넨 후작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았다. 그가 뭐라 하기 전에 말을 다 해버려야지 말문이 막힌 후작이 더 이상 떠들지 않는다. 사실 후작이 떠드는 건 일종의 수법이었다. 툭툭 말을 던지면서 상대방을 탐색하고, 뒤흔드는 못된 수법이다. 루벤은 그 수법에 말려들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는 루드밀라가 아니다.
“반역자라니, 너무 갔네.”
슈토넨 후작은 엄살을 피워댔다. 어째 충격에서 다 회복한 모양이다. 살길이라도 찾은 건가?
“아무리 그래도 어쨌든 피해자가 아닌가.”
“저는 아주 신중히 하고 싶습니다. 소명 절차를 밟다가 어떤 미심쩍은 부분이 더 나온다면, 그때 더 의문을 제기해도 늦지 않습니다.”
사실 슈토넨 후작은 방계가 차지해버린 에설론 백작위에 반역자 낙인이 찍혀도 좋았다. 그는 엄연히 루드밀라에게 뒤통수를 맞아서 다 된 협정서가 몽땅 망가진 걸 두 눈 뜨고 그냥 바라만 보아야 했다. 그만큼 분노도 컸고, 이 나이에 시건방진 어린 뱀파이어에게 당했다는 참을 수 없는 치욕까지 얻었다.
“칼리에르는 조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슈토넨 후작은 분명하게 말하는 루벤 실베스터를 보며 심술궂게 생각했다.
‘저놈 말고 더 가까운 친척은 없었나?’
그러니까 에설론 백작위를 물려받아 슈토넨 후작의 입맛대로 굴, 제대로 된 순혈이자 좀 덜 뻣뻣한 놈이 없었을까?
“젊은 사람이 벌써부터 그렇게 겁이 많으면 쓰나.”
“아시다시피 제가 백작위를 물려받은 일이 참 공교롭게 되어,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기분입니다. 뭐든 조심히, 몸을 낮출 겁니다.”
겉으로 듣기엔 나무랄 데 없는 말이었다. 동시에 슈토넨 후작의 말이 전혀 안 통하는 대답이기도 했다. 칼리에르가 겨누고 있는 칼끝이 자신의 목에 닿고 있다는 걸 아는 슈토넨 후작에겐 시간 낭비나 다름없었다.
‘고작 소명 따위나 요청했다고 좋아할 수는 없지.’
전부 다 칼리에르 공의 멱살을 잡고 저 대마법사는 위험한 인물이자 학살자이니 어서 죽이라고 소리를 질러도 모자랄 판인데, 칼리에르 공의 영향력은 소름 끼칠 만큼 대단했다. 모두가 침묵하고 있었다. 어쩌면 관심이 없는지도 모른다. 신문을 떠들썩하게 도배하던 이혼에 대한 온갖 루머는 시일이 좀 지나자 금방 시들해졌다. 좋다. 그렇단 말이지.
‘소명 과정에서 대마법사가 쓰러져봤자 소용이 없지. 그건 소용이 없어.’
흑마법사들도 소명 과정에 대마법사와 가디언이 나와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 자체로도 그들에게 타격을 주는 거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래서 슈토넨 후작은 에설론 백작저를 한 번 더 돌아본 뒤 그대로 떠났다. 까악까악, 까마귀가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앉아 시끄럽게 울어대고 있었다. * 지금 라이킨이 아무리 간병인 역할을 하느라 정신없다고 해도, 그의 본질은 전쟁을 하는 군인이자 암살자, 그리고 정치가였다. 그는 조용히 앉아서 들어오는 보고를 듣고, 잠시 침묵하다가 누군가의 삶을 뒤집었다.
“슈토넨 후작이 여기저기 쑤시고 다닙니다.”
“루벤 실베스터와 접촉했습니다.”
“법원에서는 소명절차를 밟으라고 할 거랍니다.”
“흑마법사들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저번 습격에 이어 또 다른 습격을 할 걸로 예상됩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들려왔지만, 신경이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진 것 같던 그는 의외로 재떨이를 던지거나 욕을 해대지는 않았다. 그저 침묵하며 묵묵히 모든 보고들을 다 들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뒤 간단히 푸념만 해댔을 뿐이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있는데 사방에서 건드려대는군.”
정말 하고 싶은 건 하루 종일 소렐에게만 집중하는 일이었지만, 엄청난 짓을 저지른 대마법사가 그의 공작저에 있는 이상 세상의 시선이 공작저로 모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들을 가지고 짜증을 내서 괜히 소렐을 돌볼 힘만 빼는 건 바보짓이다. 그는 그저 협정서에서 어제 죽은 이름을 찾아 그 위에 줄을 그었다.
“……소명절차면, 공비전하께서 법원에 출두하셔야 합니다.”
그는 조슈아의 조심스러운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실까요?”
괜찮을까, 라. 라이킨은 고개를 들어 위쪽 부부침실 쪽을 쳐다보았다. 그도 그곳에서 먹고 자고 모든 걸 다 하고 있은 지 오래이니, 엄연히 부부침실이 맞았다.
“글쎄.”
“요즘도 많이 힘들어하십니까?”
라이킨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글쎄, 그걸 모르겠군.”
얌전히 환자 취급을 받는 게 지루해 죽겠고, 머릿속의 지식들을 뒤지면서 혼자 행복해하는 것도 같고, 그러면서도 라이킨을 힐끔힐끔 보다가 배시시 웃는 걸 보면 이혼은 취하할 것도 같고, 지금 그가 자리를 잠시 비우면 거 잔머리를 도록도록 굴려서 딴 짓을 몰래 하는 게 분명하다. 자, 딴짓이라고 하니 슬슬 잡으러 가야겠지. 겸사겸사 할 말도 있고 말이다. 라이킨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부침실로 향했다.
“……공주님?”
문을 두드렸는데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그러니까, 작고 몸놀림이 재빠른 것이 후다닥 움직이는 소리가. 이럴 줄 알았지. 라이킨은 천장을 보며 다섯을 셌다. 그러곤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다.
“공주님, 접니다. 들어가겠습니다.”
그는 기다리지 않고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푸른 눈이 느긋하게 널따란 침실을 살폈다. 아주 넓긴 했지만, 하루 종일 이곳에만 있으려니 소렐이 갑갑해 할 만도 한 방에는 점점 소렐의 흔적이 많아졌다. 약간 구겨진 분홍색 담요, 라이킨이 직접 잡아 와 신경 써서 손질해서 바친 여우 모피, 머리빗, 머리 리본과 통속소설, 신문과 고전소설, 수사학 서적 등이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늘 그렇듯이 전혀 비슷하지 않은 내용의 책들을 다 집어 들어 한 군데에 쌓아놓으며, 라이킨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계속 훔쳐보는 시선에 결국 입을 열었다.
“……왜 거기 계십니까?”
소렐은 늘 있어야 하는 의자나 침대가 아닌, 드레스룸으로 향하는 문과 벽장 사이 구석에 조그맣게 웅크리고 있었다. 눈만 쏙 빼고 있다가 라이킨이 말하자마자 얼른 숨는다. 검은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게 아니라, 새하얀 토끼 귀가 저 아래에서 팍 숨는 걸 보니 아예 토끼 모습으로 변한 게 틀림없었다.
“……어, 어쩌다 보니…….”
뻔했다. 걷지 말라고 했는데도 살금살금 걸어보다가 저 멀리까지 갔는데, 라이킨이 문을 두드리니 마법을 써서 침대 위에 태연하게 앉아 있을 생각도 못 할 정도로 당황해서 우왕좌왕하다가 제 딴에는 숨는다고 숨은 거겠지.
“아. ‘어쩌다 보니’ 거기까지 가시게 되셨군요.”
라이킨은 무심히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켜 작은 토끼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또 화들짝 놀라서 숨는다.
“공주님.”
그는 무표정하게 사고를 친 공주님을 불렀다.
“무슨 마법을 쓰셨습니까?”
어떻게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