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The golden wave (16)2021.10.13.
나른한 목소리로 끝도 없이 말했다. 이 뱀파이어는 이래서 문제였다. 바짝 경계하면서 조금씩 조심스럽게 탐색하고, 코를 킁킁대며 냄새도 맡아보고, 귀를 바짝 세워 소리도 들어보고 해야 하는 토끼가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 감정을 마구 퍼부었다. 하긴, 이미 토끼는 그의 품에 폭 안겨 있지만 말이다.
“아픈 건 속상하고.”
쪽, 하고 이마에 입술이 와서 붙었다. 거의 자지 못한 라이킨은 피곤한 얼굴을 하고도 웃기만 했다.
“멀어지는 건 더 속상하고.”
이번엔 눈두덩이 위다. 소렐은 자꾸만 다가오는 입술에 움찔거리며 저도 모르게 물러나려고 했지만 라이킨이 그녀의 뒤통수를 받쳐서 막았다. 그는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그녀가 달아나는 걸 무척 싫어했다.
“우는 건 가슴 찢어지고.”
토끼가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도 가만히 있는 상태가 가장 좋다. 뱀파이어는 그 틈을 이용해 제 욕심을 잔뜩 채웠다.
“그런 거지요.”
코, 그다음에는 또 입술이었다. 라이킨은 아주 느리고도 소렐이 저항할 수 없을 만큼 묵직하게 키스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쓰다듬고,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그녀의 팔을 살짝 쥐고 엄지로 살살 쓸었다. 소렐의 머릿속에 있던 모든 게 완벽하게 휘발되었다. 말랑하고 부드러운 살이 살짝 떨어지면서, 라이킨의 부드러운 눈이 웃는 게 보였다.
“오늘도 사랑스럽고 예쁘십니다.”
열 때문에 땀에 젖어 엉망인 몰골인데도 그저 예뻤다. 소렐은 어쩔 줄을 모르고 눈썹을 좁힌 채 고개를 숙였다.
“또, 또 그 표정.”
라이킨은 소렐의 턱을 들어 올려 눈을 맞췄다.
“뭐가 또 그렇게 속상하십니까. 제가 공주님을 사랑하고 아끼는 게 그리 싫으십니까?”
“싫지 않아요!”
소렐이 조그만 목소리로 얼른 말하자 라이킨은 팔을 뻗더니 물 잔을 집어 왔다.
“그러시군요.”
그는 또 빙글 웃고 있었다. 어쩐지 속은 것 같다.
“싫으신 게 아니시군요.”
천 년을 산 뱀파이어 눈치에 뻔히 보였지만, 그래도 확답을 듣고 싶었다.
“자, 물 더 드세요.”
물잔을 들고 그냥 먹여주면 될 것 같은데, 그는 굳이 물을 입에 머금고 소렐에게 직접 먹였다.
“좀 더 드시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니 또 먹여준다. 싫지 않아서 꼴깍꼴깍 잘 받아먹은 뒤, 라이킨은 잔을 치우고 소렐을 들여다보았다. 눈을 깜빡깜빡하더니, 용기를 내서 그를 마주 본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녀를 향해 웃어주고 있는 남자를 마주 본다는 걸, 그는 잘 알았다. 하긴 그의 차림이 지금 꽤나 방만하긴 했다.
“밤새 고생하셨습니다.”
“라이킨이야말로 고생했어요.”
밤새워 함께 버티는 게 아주 곤한 일이었을 거다. 소렐은 새삼 미안하고 또 고마워서 그를 빤히 보다가 매끈한 뺨에 살짝 입을 맞추고 얼른 떨어졌다.
“고마워요.”
순식간에 피로가 다 풀렸다. 그는 눈까지 휘며 웃었다.
“이제 가서 쉬어요.”
“아.”
웃던 눈이 빠르게 식었다.
“일이 다 끝났으니 이제 내쫓으시는 겁니까?”
“아아니, 그게 아니고……!”
소렐은 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흔들다가 라이킨에게 제지당했다.
“어지러우십니다. 흔들지 마십시오.”
그녀의 이마에 손을 댄 그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나직하고 다정했다.
“……그렇게 날 놀리고 싶어요?”
“놀리다뇨. 공주님께서 축객령을 내리셨잖습니까.”
라이킨은 그래서 더 지금 소렐의 침대에서 빠져나갈 생각이 없었다. 그는 소렐의 뺨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열이 내렸다.
“식사를 들이라고 해야겠군요. 약은 어떨까요?”
“약은 평소 먹던 거면 충분해요. 어차피 마법 때문이었으니까.”
“헌데 공주님.”
소렐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남편을 쳐다보았다.
“여쭤볼 것이 있는데, 어젯밤 일은 어떻게 미리 예상하신 겁니까?”
긴 손가락이 땀에 젖어 늘어진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걷어냈다. 내내 껴안고 있었으니, 라이킨은 소렐을 아주 자연스럽게 만졌다.
“……그냥 알았어요.”
소렐은 그의 따뜻하고도 다정한 시선을 애써 마주하다가 결국 시선을 내렸다. 부끄러워서 계속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시선을 아래로 내리면 금방 조각조각 쪼개진 탄탄한 몸이 있어 더 난감하고 부끄러웠다.
“그냥…….”
그건 마법 때문이 아니었다. 중얼거리던 그녀는 몸을 좀 더 움직여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라이킨은 당연하다는 듯 그녀를 안고 등을 쓸어내렸다.
“외할아버지는 눈에 보였대요. 엄마는 그냥 알았다고 했어요. 꿈으로 보는 분도 계셨대요. 나는 엄마를 닮았나 봐요. 착각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아주 강하게 느껴졌어요. 그냥 알았어요.”
바로 이것 때문에 엘펜하임이 눈에 불을 켜고 펠릭스와 메리 헬레인을 죽이려고 했었다. 두 사람의 결실인 소렐 이드리스가 태어나기 전에 죽이려 했다. 고대마법을 계승하고, 헬레인 토끼의 예언 능력까지 계승한 대마법사는 얼마나 강력하겠는가.
“그러셨군요.”
라이킨은 덤덤하게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밤이 고되게 느껴지셨을 텐데 잘 견디셨습니다.”
“라이킨이 잘 버텨줄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요. ……이렇게 벗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도대체 볼 수가 없어서 차라리 그에게 안기는 게 낫겠다. 안기니 더 선명하게 느껴져서 부끄러웠지만, 뜨겁다 못해 탈 것 같은 얼굴을 그의 목덜미에 묻으면 그는 나지막하게 웃었다. 그가 좋은 게 좋았다.
“접촉을 많이 해야 공주님께서 밤을 잘 견디실 거 아닙니까. 공주님을 벗기는 파렴치한은 될 수가 없어서 제가 벗었습니다만.”
“참 신사다워요.”
그는 소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웃었다.
“공주님께서 잘 알아서 하셨지만, 앞으로도 이런 일은 그때그때 말씀해주십시오.”
“응…….”
소렐이 그의 어깨에 대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은 괜찮을 거예요. 짧은 시간이겠지만, 내가 건강해질 만큼 충분한 시간은 벌 수 있어요.”
그래놓곤 머뭇거리다가 한마디를 덧붙인다.
“물론 라이킨 기준으로는 전혀 건강하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그녀를 안은 단단한 몸이 들썩거리며 웃었다. 그는 그녀와 이마를 맞댔다. 열이 확실히 떨어졌다.
“예, 아마 그럴 겁니다. 저는 항상 공주님을 걱정하니까요.”
자, 이쯤에서 일어날까. 그는 슬쩍 이불을 자신 쪽으로 당기며 몸을 일으켰다. 소렐은 얼른 눈을 꼭 감았다.
“좀 나아지셨으니 다행이군요. 더 건강해지고 싶으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밤새 살‘만’ 맞대고 있었는데 열도 떨어졌고, 아침부터 물만 마시고 그와 오래 말을 할 정도로 기력이 생겼다. 그러니 가디언과 대마법사가 결합하면 어떻게 될까.
“저는 늘 환영입니다.”
순식간에 소렐의 얼굴이 불타올랐다.
“하지만 간밤에는 수행하는 수도사보다 더 금욕에 대해 수행하며 스스로를 다스렸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주님께서 불쾌하실 만한 일은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라이킨은 그녀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한번 말했다.
“덕분에 지금 좀 죽을 맛이라, 먼저 나가려고 하는데 괜찮으시겠지요?”
앗. 소렐은 얼른 양손으로 눈을 가렸다. 픽 웃은 라이킨은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춘 뒤 완전히 침대 밖으로 나가떨어져 있던 가운을 꿰어입었다.
“에벌린을 보내겠습니다.”
그는 소렐을 향해 돌아서지 않고, 그대로 뒤만 돌아보며 말했다. 여전히 눈을 가린 소렐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우리는 좀 더 가까워졌을까? 벌어졌던 사이보다 훨씬 더 가까워진 것 같긴 한데, 아직 지금 그의 모습을 뻔뻔하게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지진 못했나 보다. 하긴 지금은 그가 좀 난감한 상태이긴 했다. 그것도 훤한 아침이니 더더욱. 라이킨은 빙글빙글 웃으며 침실에서 나갔다. 누가 봐도 아내의 침실에서 밤을 보내고 흐뭇하게 나오는 남편이었다. 속사정은 좀 많이 다르긴 했지만.
“마스터.”
조슈아는 라이킨의 방만한 복장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다가왔다.
“냄새가 나지?”
“예, 뭐, 그쪽 아니면 어디겠습니까. 엘펜하임은 공비전하께서 날려버리셨고, 뱀파이어들이야 마스터께서 정리하고 계시는데, 남은 쪽이야 뻔하지요.”
더럽고 사특한 냄새가 난다. 엘펜하임에게 붙었던 마법사와 마녀들마저 경시하는 저 밑바닥, 어둠 속에 침잠한 이들이 스멀스멀 기어 오는 시궁창 냄새가 난다. 펠릭스 이드리스는 그들을 사람취급조차 하지 않았다. 라이킨의 추측이지만, 소렐을 어린 시절 납치했던 이들도 아마 그들일 것이다.
“공비전하께서 아무 이유 없이 계속 앓으시는 건 아니지요, 마스터?”
“감이 좋아, 조슈아.”
소렐이 앓는 게 수상하다는 걸 바로 알아차리다니. 안 그래도 오늘 에벌린이 잔뜩 차려준 부드럽고 따뜻한 모닝빵에 품질 좋고 고소한 버터를 펴 발라 먹고, 향긋한 커피와 신선한 과일로 기분 좋은 아침 식사를 한 조슈아는 그나마 좀 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스터께서는 수하들을 정말 인정사정없이 굴려대신다. 물론 그 대가로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의 훌륭한 식사와 막대한 봉급, 그리고 안락한 생활이 제공되긴 하지만 말이다.
“버러지 같은 흑마법사들이다.”
순식간에 싸늘해진 라이킨이 중얼거렸다. 이크. 조슈아는 마음속으로 조심히 경계 단계를 상향 조정했다. 마스터께서는 화를 낼 때 여러 단계를 거치시는데, 일단 저 표정이 전조증상이었다.
“좀 쉬시지요. 밤새 사특한 마법과 싸우시느라 힘드셨을 텐데.”
“쉬긴 뭘 쉬어.”
라이킨은 별 이상한 소리를 다한다는 표정으로 조슈아를 쳐다보았다.
“이건 전투 축에도 들지 않는다는 거 알잖아.”
그가 한 거라곤 사술인지 흑마법인지 때문에 끙끙 앓는 소렐을 데리고 버틴 것밖에 없었다. 검을 들고 싸운 것도 아니고, 사랑하는 공주님을 안고 한 침대에서 누워 있다가 일어난 거면 호사가 따로 없었다.
“그거 다행이군요.”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불쑥 덧붙였다.
“마스터께서는 변하신 게 별로 없으십니다.”
“갑자기 그런 말은 왜 해?”
“보통 결혼하면 많이 바뀐다고 해서 말입니다. 아, 물론 공비전하를 대하실 때나…….”
조슈아의 눈동자가 슬그머니 옆으로 굴러갔다. 마침 에벌린이 이쪽으로 오다가 라이킨의 손짓에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곤 그대로 소렐이 누워 있는 침실로 걸어갔다.
“공비전하를 찾아다니실 때는 못 보던 면을 보긴 했습니다만.”
“그냥 똑같아.”
라이킨은 건조하게 말했다.
“지켜야 할 게 늘어났고,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존재가 또 생긴 거고, 나는 여전히 욕심 사납고, 전쟁은 즐겁고.”
“그래서 전 대마법사께서 마스터를 가디언으로 붙이신 거지요?”
패배한 적 없는 전장의 악마, 무장 중의 무장, 지키고 수호하며 공격하는 데에는 탁월한 존재이니 당연히 가디언으로 붙일 수밖에.
“그놈은 한 게 없어. 헬레인 공주께서 날 붙이신 거지.”
라이킨은 며칠 전에 보았던 펠릭스 이드리스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길길이 날뛰어도, 마법을 전혀 사용하지 못하는 딸을 보며 어쩔 수 없이 라이킨을 묵인할 수밖에 없었을 거다. 천성적으로 그렇게 태어난 딸을 아무리 대마법사라 해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으니까.
“저는 그분과 마스터께서 함께 다니시던 때가 가끔 그립습니다.”
피비린내가 물씬 나는 삶이었다.
“딱히 합이 맞는 동료 사이는 아니었는데.”
라이킨의 말에 조슈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주 잘 맞으셨습니다. 그렇게 잘 맞으시니 마스터가 사위이신 게 마음에 안 드셨던 거겠지요.”
“잘 맞으면 좋지 않나?”
“전장에서 죽이 잘 맞아봤자 뭐하겠습니까. 적을 효과적으로 몰살하는 데 도가 튼 사위라니.”
“탁월한 선택이지.”
뱀파이어는 씩 웃었다. * 유감스럽게도 라이킨이 그렇게 흐뭇하게 웃을 수 있던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갑자기 깐깐하고 까탈스럽기로 이름난 소렐의 이혼 담당 변호사가 공작저로 편지를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정확하게는 소렐 앞으로 보내진 편지였다. 라이킨은 봉투칼을 휙 던졌다가 휙 받으면서 잠시 고민했다.
‘……뜯어봐?’
천 년 동안 별일을 다 겪고 배운 덕에 그는 이깟 편지봉투쯤이야 아주 자연스럽게 열고, 감쪽같이 되돌려놓는 데 능했다. 단단히 봉인된 서류도 순식간에 해체했다가 티 하나 나지 않게 다시 조립할 수 있는데, 변호사가 보낸 편지쯤이야.
‘……말아?’
이제 생일이 지나면 스물한 살이 될 아내를 붙잡기 위해선 간단히 양심부터 버린 라이킨에게 솔직히 이 얄팍한 봉투를 뜯어보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단지 ‘아내’의 사생활이라 지금 망설이는 것뿐이다. 더구나 이혼이잖나. 이 엄격하고 빈틈없는 변호사가 무슨 말을 했을지는 뻔한데, 라이킨은 이혼남이라는 딱지는 죽어도, 곧 죽어도, 어머니가 다시 살아 돌아온다 해도 싫었다.
‘……말아야지.’
그는 눈을 딱 감고 봉투칼을 내려놓았다. 더 이상 숨길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소렐이 이 편지를 읽는 동안 그녀의 곁을 지키고는 있을 거다. 라이킨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걸어갔다. 그녀는 그가 직접 불을 지펴준 벽난로 앞에 앉아 있었다.
“공주님 앞으로 편지가 왔습니다.”
라이킨은 소렐에게 편지봉투를 내밀었다. 그는 그대로 떠나지 않았다.
“……어, 음…….”
소렐은 편지를 보낸 사람을 확인하자마자 몹시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기, 자리 좀 피해줄래요……?”
어떻게든 눈을 부릅뜨고 내가 당신 남편이라고 최대한 존재감을 과시하겠다는 계획은 소렐의 가냘픈 목소리 앞에 곧장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예, 필요하시면 부르십시오.”
그는 어쩔 수 없이 바깥을 향해 돌아섰다.
“너무 멀리 가지는 말아요.”
“예, 공주님.”
그래서 남편은 문 앞에 풀썩 주저앉았다. 제기랄, 그의 서랍 안에는 그가 조슈아를 쪼아대며 겨우 주문한 약혼반지와 결혼반지가 아직까지 잠들어 있다. 그것만 다시 끼워줄 날을 노리고 있는데 정작 이 초라한 글래스턴 공작의 처지를 보라. 공주님께서는 그를 쥐고 흔들고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