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The golden wave (15)2021.10.09.
사악하고 사악한 것. 인간의 가장 밑바닥까지 후벼 파고, 가차 없이 생명을 수단과 방법으로 이용하는 것. 그런 것들에게 어디 한번 멋대로 해보라고 공간을 내어준 슈토넨 후작은 그들이 주문을 외워대는 꼴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새카만 어둠과 그림자들이 거의 없는 빛 사이에서 꾸물거린다. 그들은 먼 거리를 두고 사특한 힘을 동원해 누군가와 싸우고 있었다.
‘그래, 싸우고 있다는 게 중요하지.’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와 싸우고 있다는 게 중요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두 손을 놓은 채로, 그저 신념을 지켰다는 이유만으로 그 새파랗게 어린놈에게 죽을 수는 없었다. 지더라도 싸운다는 게 중요했다.
“크윽…….”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밀리나 보지? 뭐, 칼리에르 공 그놈에게 늘 밀리기만 해서 딱히 새롭지도 않았다. 그저 슈토넨 후작이 새로 들여놓은 이 오래되고 사악한 마녀와 마법사들처럼, 걷어차이고 돌을 맞으면서도 악착같이 살아남고 또 살아남을 뿐이다.
“가디언이 문제이군요.”
늘 슈토넨 후작에게 말하던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후작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무나 강력한 가디언을 붙여놨습니다.”
“그놈이 강력하긴 하지.”
대마법사가 계승자에게 가디언을 붙여놨다면 누구겠는가. 너무 뻔했기에 후작은 새삼스럽게 가디언이 누구냐고 확인하지도 않았다.
“강력하지만 노력하지 않는 가디언이었다면 좋았을걸.”
혀를 차며 아쉬워한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이 안 가는 목소리였다.
“왜, 노력까지 하나?”
“제 한 몸 바쳐가며 살려놓고 있군요. 그래도 최대한 하는 데까지 해보겠습니다.”
대마법사가 아프면 아플수록 좋지. 조금이라도 더. 그들은 언제나 그 ‘조금’, ‘약간’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대는 가련한 존재들이었다. * 온몸이 무거웠다. 소렐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무거웠지만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포근하고 기분이 좋았다. 끈적거리고 덥기만 해서 영 기분이 나빴는데, 적당히 따뜻하고 뽀송하기만 하다. 좋아서 더 파고들면, 이상하게도 응답해주듯 더 꼭꼭 감싸줬다.
‘……이불인가?’
점점 의식이 돌아오면서 소렐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불이 이렇게 기분 좋고 매끄러운가? 에벌린이 새 이불로 바꿔줬나? 아니, 그런 기억은 없는데. 소렐은 가만히 눈을 떴다. 처음 보는 이불이 눈앞에 있었다. 아예 침실이 바뀌었나? 잠이 덜 깬 그녀가 멍하니 생각하다가 문득, 눈앞에 보이는 게 꽤나 익숙하다는 걸 깨달았다. 토끼는 그대로 뒤로 튀어나갔다.
“왜요, 공주님…….”
잽싸게 튀어나가려고 했지만 그녀는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단단하게 안겨 있었기에 바로 실패했다. 그녀를 용케 잡아챈 라이킨이 꽉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눈도 제대로 뜨지 않았다.
“이, 이게 뭐……, 아…….”
그녀는 조금 뒤늦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했다. 그러고 보니 미리 이야기를 해뒀었지. 밤새 앓아서 목소리도 형편없었다. 그녀는 이제야 생각났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고개를 숙여 뺨을 쓱 내미는 라이킨이 조금 더 빨랐다.
“……때리십시오.”
“때리긴 뭘……, 기억 났어요…….”
라이킨은 피곤한 얼굴로 아직까지 눈을 감은 채 그냥 얼굴만 대주고 있었다. 소렐은 그의 까칠한 뺨을 살살 쓰다듬었다.
“때리시라니까.”
그는 픽 웃더니, 소렐의 손을 끌어다 입을 맞췄다. 여전히 감은 눈에 긴 속눈썹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소렐은 가까이서 보면 그가 무척 섬세하게 생긴 남자라는 걸 깨달았다.
“이거 놔줘요…….”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오른 그녀가 눈을 어디다 둘지 몰라 난감해하며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주무세요.”
라이킨은 허스키한 목소리를 그대로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어떡해. 소렐은 당장 움찔거리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의 목소리가 무척 간지럽게 느껴졌다.
“조금만 더요, 공주님.”
피곤이 가득한 목소리로, 분명히 바지도 안 입은 남자가 그녀를 꽉 안고 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미쳤나 봐! 소렐의 머리에서 토끼 귀가 펑하고 튀어나오고 말았지만, 라이킨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눈을 감은 채 그녀를 안고만 있었다. * 결국 날이 밝았다. 눈이 시뻘겋게 되도록 밤을 새워 주문을 외워대고, 가장 잔인하게 만들어냈다는 게 훤히 보이는 말라비틀어진 손이며 시커멓고 질척한 죽은 피를 뿌려댄 마법사들과 마녀들이 비틀거렸다. 그들은 밤새도록 대마법사를 두들겨대며, 대마법사를 온몸으로 감싸고 있는 가디언과 싸워댔다.
“오늘도 실패인가?”
슈토넨 후작의 물음에 가만히 보고 있던 이가 웃었다.
“부정적이시긴. 하룻밤 꼴딱 새워 대마법사가 앓게 했는데요.”
슈토넨 후작은 마녀인지 마법사인지 모를 존재가 제멋대로 떠들게 놔두었다.
“아프면 아플수록 회복하는 것이 더뎌지고, 가디언은 대마법사를 지키느라 정신이 없지요. 결국 누가 더 오래 버티느냐가 관건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앉아있던 마법사와 마녀들이 붉은 눈으로 슈토넨 후작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버티는 데 일가견이 있지요.”
엘펜하임도 질색하는 더럽고 사특한 존재들. 인간의 목숨을 걸고 사술을 사용하고, 그 사술을 키우고 키워내 마침내 고대마법과 반대되는 마법의 경지에까지 올린 이들이 히죽 웃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수많은 피가 흩뿌려진 건 당연하다. 어쩌면 저들이 뱀파이어보다 각 종족의 신체에 관해 더 자세히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하나 자세히 해체해본 경험이 풍부할 테니까.
“칼리에르가 움직이는 속도보다 더딘 거 아닌가?”
“참 부정적이십니다.”
마녀인가? 아니, 마법사인지도 모른다. 그 중성적인 위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 칼리에르는 한 번 더 속도를 늦췄고, 대마법사에게 또 묶였습니다. 어찌 됐든, 강제로 각성한 게 우리에겐 이득이었습니다.”
마법을 억지로 열어젖히면 안 될 일이었다. 사용하지 못하는 마법이 있으면 또 그런가 보다, 하고 기다려야 했다. 아주 천천히 느리게, 하나하나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되었을 거다. 가디언은 조급하게 굴지 않았고, 대마법사를 위해 차분히 환경을 조성했지만 그걸 루드밀라 아스테어 프랑슈틸이 엘펜하임과 함께 보기 좋게 망쳐버렸다. 더구나 그 후 모종의 일로, 대마법사는 가디언에게 더 의존하며 힘들어하고 있었다.
“자, 하루를 벌었군요.”
대마법사가 고대마법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다루는 때가 하루 더 멀어졌다.
“하나하나 쌓아가는 것도 나쁘진 않습니다. 더구나 우리처럼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은 더더욱.”
중성적인 목소리가 짧게 웃었다.
“뭐, 저쪽에서 고대마법을 함께 감당하고 있는 가디언도 가진 게 없다고 똑같이 느낄 겁니다. 그것이 위안이 되셨길.”
* 소렐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면 이마가 라이킨의 맨가슴에 닿는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그가 소렐의 뒤통수를 쓰다듬어준다. 일부러 하는 게 아니라, 잠결에도 하는 버릇이었다. 고개를 들면 깎아놓은 것처럼 잘생긴 얼굴이 눈을 감고 자고 있다. 소렐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열이 또 나나?”
라이킨은 희미하게 눈을 뜨고 소렐을 내려다보았다.
“왜 뜨겁지?”
그녀의 귀까지 확 달아올랐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너무 부끄럽고 수줍어서 어쩔 줄 몰랐다. 어떡하지? 튀어나온 토끼 귀가 들어갈 기미를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라이킨은 아침에도 잘생겼고, 그윽한 눈매는 너무 매력적이었다. 그는 그대로 커다란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모든 손놀림이 자연스럽기만 했다.
“공주님, 다시 빨개지셨습니다.”
물론 그는 아주 노련한 남자이기도 해서, 소렐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들여다보기도 했다.
“저만 긴장되는 게 아니라 다행이네요.”
라이킨은 피곤한 얼굴을 하고도 소년처럼 웃으며 안심했다. 그는 그래서 얄밉지 않았다.
“어젯밤에 열이 너무 심해서 제가 도와드린 것입니다.”
소렐은 잠옷을 다 입고 있었다. 그녀는 간신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아요. 그러라고 했잖아요.”
“불쾌하신 건 죄송합니다만.”
소렐은 다시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왜 열이 났는지, 그가 왜 벗고서 그녀를 안고 있는지 다 알았다. 대마법사이니 그 정도는 알았다.
“아, 불쾌하지 않으십니까?”
라이킨은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소렐을 내려다보았다.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그녀의 뺨을 괜히 콕콕 찔러보았다. 귀엽다. 귀여워 죽겠다.
“그럼 이대로 밤까지 쭉 있도록 하지요.”
소렐이 고개를 들었다.
“밤까지……?”
지금이 아침, 아니, 점심인가? 그런데 밤까지?
“예.”
“……밤에는 라이킨 방으로 돌아갈 거지요?”
“공주님, 보통 밤까지, 라는 건 말입니다.”
그는 아주 즐거운 얼굴로 소렐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주 어여쁘고 귀한 것을 바라보는 눈을 하고 있었다.
“성인이자 부부 사이에 당연히 통용되는 은밀하고도 즐거운 일을 통칭합, 아야.”
꼬집힌 라이킨은 아프지도 않으면서 덤덤하게 ‘아야’라고 말했다.
“놀리지 말아요.”
“공주님이야말로 제 진심을 놀리는 것으로 폄하하지 마십시오.”
아차. 소렐은 움찔거리며 라이킨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언제 웃었냐는 듯, 정색을 하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
다 갈라진 입술에서 나오던 사과는 그의 입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소렐이 그의 굵은 팔뚝을 팡팡 때릴 때까지 느긋하게 입을 맞춘 라이킨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앞으로 또 별 거 아닌 걸 가지고 제게 미안해하시면 바로 키스부터 하겠습니다.”
“……이젠 그냥 예고만 하는 거예요?”
이토록 천연덕스럽고 뻔뻔하게.
“예. 생각해보니 좋은 방법인 것 같아서. 키스하시고 싶으시면 계속 사과하시면 됩니다. 영 듣기가 싫군요.”
“아니, 그, 내가 생각해도 기분 나쁜 말을 했으니까…….”
라이킨은 그쯤에서 소렐의 말허리를 잘랐다.
“앞으로 하시지 마시라는 거지, 사과를 듣고 싶은 게 아니었습니다. 공주님은 말입니다.”
그는 소렐의 정수리에 턱을 얹었다. 튀어나와 있던 토끼 귀가 부드럽게 그의 뺨을 스쳤다. 우리 공주님. 오늘도 용감하게 싸우고 겨우 깨어난 공주님. 마음이 아프고 안쓰러워서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그는 표정을 절대로 소렐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새파란 시선은 천장을 노려보았으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사과하시면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나십니다. 그게 문제예요. 그러지만 않으셔도 저는 공주님이 미안하다고 하시면 그냥 괜찮다고만 말씀드릴 텐데 말입니다.”
막 깨어나서 그런지 라이킨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낮고 느렸다.
“한 걸음이 뭐야, 다섯 걸음에서 열 걸음은 더 물러나시지……. 나 속상하라고…….”
혼자 중얼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곧은 목에서 도드라진 울대뼈가 약간 움직였다. 라이킨은 어깨도 무척 넓고, 덩치도 상당한 편인 데다가 그 몸이 전부 다 단단하고 섬세한 근육으로 꽉 짜여서 소렐이 그 안에 폭 파묻힌 상태였다.
“왜 속상해요, 예의를 지키는 건데…….”
가까운 사이는 더 예의를 지키랬다.
“또 내가 실수할까 봐 조심하는 건데…….”
그녀의 말을 들으며 손을 뻗어 물잔을 가져온 라이킨은 그녀에게 물을 먹이며 말했다.
“당연히 속상하지요. 제가 공주님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데.”
소렐은 눈을 깜빡거렸다.
“사랑하는 사람이 멀어지는 걸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