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The golden wave (13)2021.10.02.
“돌아온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슈토넨 후작 아서 모드릭 헴피온은 그 보고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무거운 손을 내저어 나가보라고 했을 뿐이다. 살 만큼 살았지만, 살아온 만큼의 세월을 더 살 수 있는 뱀파이어는 부쩍 늙어가고 있었다. 그는 완고한 주름을 얼굴에 깊게 새기며 입을 꾹 다물고 어두운 서재에 박혔다.
“……내가 실패할 거라고 했잖아.”
그는 아무도 없는 서재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그래놓고 자신 있게 손을 잡자고 온 건가?”
“우리의 형제와 자매들도 사라졌습니다. 왜 다 사라졌겠습니까?”
놀랍게도 허공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잡다한 장난질에 휩쓸리지 않는 늙은 뱀파이어는 그 말소리는 대충 무시했다. 그는 아직까지 살날이 많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곱씹기만 했다. 하지만 죽음이 지척에 있었다. 스탕달, 델루테, 람페드리온, 니아얄, 사라진 이름들이 계속 쌓였다. 어둠 속에 있는 하얀 뱀파이어의 손은 정확하게 슈토넨 후작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지막은 당신이라고 겨냥했다.
“마법이겠지.”
슈토넨 후작은 대충 웅얼거렸다. 그의 휘하에 있는 뱀파이어들이 최정예를 가려 뽑아 글래스턴 공작저를 습격했지만, 또 실패했다. 알게 뭔가. 그에게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데. 흐릿한 안개 사이로, 혹은 싸늘한 밤바람이 차가운 눈을 몰고 오다가 순식간에 그를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할 거다. 아무도 모르게 시신마저 사라질 거다. 공포는 잠마저 앗아갔다.
“네, 마법이지요.”
남자인지, 여자인지 불분명한 목소리가 노래하듯 말했다. 그 목소리는 전율하고 있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 쥐어짜낸 공격 정도는 되어야지 마법이 튀어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늙은 뱀파이어는 자신이 도대체 뭘 잘못했는지, 어쩌다 이런 상황에 내몰렸는지, 죽음을 피할 방법은 없는지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을 이리저리 굴려가며 생각만 하고 있었다.
“대마법사가 아직까지도 공작저에서 몇 달째 나오지 않고 있고, 그동안 마법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니까요.”
목소리는 다시 슈토넨 후작을 일깨웠다.
“거대한, 거대한 마법의 흐름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사라졌지요. 가을 내내, 지금까지도 조용했습니다. 마법사가 마법을 쓸 상황이 아니었던 거지요.”
“당신들에게는 썼다며.”
“우리가 공작저 안뜰까지 침입했습니다. 거의 다 왔다는 겁니다. 대마법사가 마법을 잘 사용했다면 안뜰까지 가지도 못했을 겁니다. 펠릭스 이드리스를 떠올려보세요. 그가 어디 그런 걸 허용하던가요?”
“몰라, 이젠 기억나지 않아.”
슈토넨 후작은 귀찮은 파리를 쫓듯 손을 내저었다.
“정신 차려요, 이 늙은이야. 이대로 추하게 앉아서 글래스턴 공작 손에 죽을 겁니까?”
후작의 흐리멍텅하던 눈에 빛이 번쩍거렸다.
“그러는 너희는 실패한 주제에 무슨 말이 그렇게 많지?”
“우리는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목소리는 아까부터 들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가능성을 확인한 거지요.”
“대마법사가 마법을 못 부린다고?”
“아주 절박한 때가 아니면 못 부린다는 뜻이 뭐겠습니까? 불안정하다는 거지요!”
그것도 모르냐며 목소리가 답답하다는 듯 슈토넨 후작을 후려쳤다.
“그 가을, 마력이 춤추던 때 대단한 타격을 입은 것입니다.”
춤추다 못해 하늘로 올라갈 것 같던 날이 하루 있었다. 마법사와 마녀들이 감히 무서워서 가까이 가지도 못하던 때가 있었다. 그 이후로 대마법사는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은 채 고요히 침묵했다. 오늘까지는, 말이다. 대마법사에게서 빈틈을 확인했다. 슈토넨 후작은 그 빈틈으로도 충분히 상황을 움직일 능력이 있었다. * 한참 울고 얼굴이 퉁퉁 부은 소렐은 지쳐 잠들었다. 간신히 자기 전에 라이킨이 물이라도 먹여놨으니 다행이다. 그는 푹 젖어버린 셔츠 자락을 내려다보다 그냥 침실에서 걸어 나왔다.
“……뭐야, 그게?”
습관처럼 아주 커다란 컵에 커피를 가득 붓고 있던 샤를렌이 오빠의 몰골을 보며 물었다.
“언제 왔어?”
“지금 막. 옷이 왜 그래?”
“공주님이 우셔서.”
“저런.”
샤를렌은 커피를 마시며 유감을 표했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 중간보고지. 뭐, 겉으론 별 건 없지만.”
여전히 습격자들이 설쳐대고 있고, 소렐은 깨어났으며, 글래스턴 공작저에서 커다란 마법이 한 번 발생했지만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만드는 게 그녀의 일이었다. 기자들이 냄새를 맡지 못하게 손을 쓰고, 소렐의 변호사가 아주 성실히 진행하려는 이혼을 최소한 진행은 되지 못하는 것도 샤를렌이 애쓰는 일 중 하나였다.
“이혼이 제일 문제야. 지금 그쪽 변호사가 공주님을 설득하고 있는 모양인데, 아예 취소하겠다는 선언이 없는 한 하던 일은 계속할 거래. 아주 변호사 정신이 투철한 사람이지.”
원래 그런 성격인 변호사라, 샤를렌이 소렐의 변호사가 그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탄식을 했었다. 우리 공주님, 변호사 선임마저 참 탁월하시지.
“공주님은 이혼에 대해 아무런 말도 안 해? 오빠가 설득 안 해봤어?”
“그걸 생각하실 겨를이 없…….”
라이킨은 중얼거리다가 말을 멈췄다. 샤를렌은 미묘한 표정으로 오빠를 쳐다보았다.
“아니, 말씀을 안…….”
어쩐지 이혼이라는 문제만 나오면 토끼가 고집스럽게 그를 노려볼 것 같은 기분이다. 라이킨은 말을 완성하는 대신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알았어, 됐어.”
한마디로 빌어먹을, 뭐 그 쯤 되는 건가. 샤를렌은 폭삭 젖은 셔츠를 입고 있는 오빠에게 담배를 내밀고, 그녀도 하나 물었다.
“우리 집안에서 졸지에 이혼남이 나올 줄은 몰랐네.”
“아직 이혼 안 당했어. 미리 결론짓지 마.”
라이킨은 이혼남이라는 말에 질색하며 펄쩍 뛰었다.
“공주님이 깨어난 지 꽤 됐다며? 그런데 아직까지도 이혼에 대해 아무런 말도 없다면 그건 그냥 진행하겠다는 거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 내가 계속 설득할 거야.”
“설득은 무슨, 퍽이나…….”
설득이 아니라 매달리겠지. 샤를렌은 고개를 흔들었다. 매달려서 안 되면 쫓아다닐 거고, 소렐의 동정심이나 죄책감이라도 사서 질기게 붙어 있을 거다.
“어쨌든 새 에설론 백작이 프랑슈틸 가문의 끝에 완전히 제대로 못질을 할 건가 봐. 빈 관이라도 그냥 장례식을 치르겠으니, 소명 절차를 밟을 것 같다는데?”
라이킨은 심술궂게 웃었다.
“루벤 실베스터가 원래 야망이 컸지.”
“내버려둘 거야?”
“지금은 내가 따로 손을 쓸 여유가 없어.”
그가 없이는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소렐 때문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루드밀라 아스테어 프랑슈틸이 저지른 짓에 대한 대가로 그녀의 모든 것을 철저히 빼앗아다 소렐에게 바치겠다고 맹세한 라이킨은 일단은 내버려두는 중이었다.
“왕세자가 대마법사와 어떻게든 만나고 싶어 안달이 났거든.”
“아직도 그런다고?”
샤를렌은 놀라서 오빠를 쳐다본 뒤, 고개를 흔들었다.
“고집이 엄청난데. 안 그래도 이혼 과정도 계속 염탐하고 있더니. 왕실에서 공주님을 허락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만일 라이킨과 이혼한다 쳐도 이혼 경력이 남는다. 게다가 망한 왕조의 후손이다. 반대할 만한 사유가 분명한 조건이었다.
“대마법사니까.”
라이킨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엄청난 전력이자, 그 존재만으로도 왕실에 힘을 보태고 지지를 얻어줄 대마법사니까. 그래서 역대 대마법사들이 그토록 권력과 얽히는 걸 기피해왔다.
“그래도 그보다 더한 스캔들이 없을걸. 칼리에르 공비였다가 왕세자비, 나아가 왕비까지 된다고? 우와.”
샤를렌은 그 엄청난 발상에 감탄했다.
“누가 왕세자비야, 누가.”
라이킨은 순수하게 바뀌는 호칭에 짜증을 냈다.
“지금 귀찮아서 반역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있는데 자꾸 들쑤시지 마.”
“귀찮기는. 공주님이 싫어할까 봐 안 하는 거면서.”
살생을 극도로 싫어하는 소렐이 반역이라면 화들짝 놀랄 게 뻔했다. 그녀는 그저 흑마법사들의 주문을 느끼지 않고 평범하고 조용하게 사는 게 소원인 사람이니까. 그 소원에 자신은 들어가 있지 않아서 울적해진 라이킨은 줄담배만 피워댔다.
“엔버네스 일은 당분간 아버지께 맡겨야지.”
그저 그렇게만 중얼거릴 뿐이다. 그 이상 움직일 일은 생각하기도 싫은 게 분명했다.
“내가 보기에 오빠는 딱 한량이야. 앉아서 하고 싶은 연구나 좀 하고, 공주님만 딱 끼고 사는 게 적성에 맞는데.”
그런 사람이 전장을 굴렀으니 맞지 않은 옷을 억지로 입고 살아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샤를렌은 자신을 지키느라 고군분투하던 오빠가, 또다시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려고 애쓰고 있는 걸 안쓰럽게 생각했다.
“천 년 내리 날 지켜주더니 이젠 공주님을 지키잖아.”
“……너 뭐 잘못 먹었냐?”
라이킨은 그런 말을 지 입으로 하다니 쟤가 뭘 잘못 먹었나 보다, 하는 표정을 짓다가 샤를렌에게 한 대 맞았다.
“사람이 기껏 고맙다고 말해주니까…….”
“네가 언제 고맙다고 했어?”
“됐어, 그만해. 진짜 짜증난다.”
짜증을 내는 여동생을 보며 오빠는 픽픽 웃어댔다. 한동안 복도에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싸늘한 허공에 연기가 퍼졌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이게 천성이야.”
라이킨이 사라지는 연기를 보며 중얼거렸다.
“뭐 하나 쥐면 어떻게든 그거라도 가지려고 노력하는 건 아주 어릴 때부터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가진 게 없는데 천한 주제에 눈은 높아서, 귀한 공주님을 잡고 싶어 어쩔 줄을 몰랐다.
“진짜 궁금한 게 있는 데 이번에는 헛소리하지 말고 똑바로 대답해라, 오빠.”
“또 뭐.”
퉁명스러운 대꾸에도 불구하고 샤를렌이 물었다.
“어떻게 공주님을 그렇게 쫓아다니게 된 거야?”
“원래부터 쫓아다녔잖아.”
“아니, 내 말은……. 어떻게 그렇게 마음으로……, 그러니까 사랑하게 되었냐고. 아, 내가 말해놓고 내가 소름이 다 돋네.”
오빠놈의 연애사를 궁금해 하다니, 징그러워. 샤를렌은 질색이면서도 궁금한 건 참지 못했다.
“넌 소름 돋는다면서 왜 물어보냐?”
“궁금하니까. 눈에 차는 여자는 없었잖아. 고자냐, 아니면 취향이 남자냐는 소리까지 듣고.”
그런데 눈이 땡글땡글, 뺨은 발간 토끼 공주님이라니.
“이젠 도둑놈 소리 듣는 거 알아? 취향이 그쪽이었냐고.”
“알아.”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고자 탈출이야?”
“공주님 상대로는 딱히 기능에 문제가 없던데.”
“더러워.”
오만상을 찌푸린 샤를렌이 구역질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먼저 물어봤다.”
라이킨은 여상하게 대꾸했다.
“그렇게 귀엽고 깜찍한 공주님이 취향이었어?”
“공주님은 예쁘시잖아. 사랑스럽고.”
샤를렌은 그냥 듣기로 했다. 말해봤자 입만 아프지.
“아니, 굳이 사랑스럽거나 예쁘지 않아도 괜찮아. 귀엽지 않아도 상관없고.”
잃어버리고 나니 그깟 외양이나 조건 따위 아무것도 아니었다.
“굳이 귀엽지 않아도, 나이가 들어서 할머니가 되어도 멋질 거고, 함께 있으면 즐거울 거야.”
그는 고개를 숙였다.
“함께 있으면 즐거워.”
그뿐이었지만, 그게 얼마나 중요하고 얼마나 귀한 건지도 잘 알고 있었다.
“없으면 불안해 미칠 것 같고.”
소렐이 정처 없이 떠도는 동안 오빠가 얼마나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굴었는지는 샤를렌이 가장 잘 알았다.
“지금 안에 계시니 좋고.”
라이킨은 자신의 침실 쪽을 가리켰다.
“나는 공주님이 오빠한테 그렇게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공주님이 사라진 이후로 오빠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알지?”
여러 건의 실종과 의문의 변사체 사건. 피해자는 모두 뱀파이어다. 라이킨은 희미하게 웃었다.
“샤를렌,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내가 전쟁터에서 죽인 시신들을 하나하나 일일이 다 세어야 해.”
“세지도 않았어?”
“열한 살 이후로 세지 않았어. 세어봤자 의미가 없어서.”
“그래, 뭐.”
샤를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래. ……잘했어. 살려뒀다간 기어이 공주님을 죽이러 왔을 거야.”
지금 기어들어오고 있는 흑마법사들도 어마어마한데, 거기에 힘과 재력까지 움켜쥐고 협정서에 미쳐버린 고릿적 유물들까지 달려드니 충분히 골치 아팠다. 결국 지키기 위해 죽인다. 라이킨이 천 년 내리 해왔던 일이었다.
“좀 버틸 만해?”
“나쁘지 않아. 공주님께서 전부 다 싹 치워주셔서 한동안은 소강상태야. 최대한 쥐어짜고 쥐어짜서 그 인원으로 밀고 들어온 것일 텐데, 그것마저 전부 시체도 남지 않았으니 저쪽도 출혈이 심각하겠지.”
그리고 그렇게 소렐이 회복할 시간을 벌었으니, 그걸로 되었다. 라이킨은 충분히 만족했다.
“언제까지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무작정 버티자면 우리가 이겨.”
버틸 인력도, 자원도, 능력도 무궁무진하다. 제일 큰 고비를 넘겼으니 이제 할 만했다. 남은 건 그저 소렐이 무사히 쾌차하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왕세자 놈이 진짜 왜 그러지?”
삐딱하고 날카로운 오빠의 말에 샤를렌은 슬슬 돌아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불만이면 이혼장 철회해달라고 매달리든가, 라는 말이 혀끝까지 올라왔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그놈의 이혼장 때문에 파리떼가 꼬여 들어서, 라이킨의 신경은 무척 날카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