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The golden wave (12)2021.09.29.
성가시다. 라이킨은 이번에는 동족의 급소를 찌르며 생각했다. 뱀파이어, 인간, 가끔 수인, 그리고 엘펜하임이, 무너져 오갈 데가 없는 마법사와 마녀들이 간도 크게 고대마법을 넘보다가 마법은 구경도 못 하고 그의 손에 죽었다.
‘이 새끼들이 죄다 짜고 들어오는 건가? 그럴 거면 한꺼번에 들어오지, 귀찮게…….’
그는 공주님 곁에 있고 싶었다. 공주님에게서 떨어져 있는 시간만큼 아까워 죽겠는 것도 없었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그는 피 한 방울 튀지 않도록 깔끔하게 상대를 죽였다. 암살이든, 혹은 대량학살이든, 어쨌든 모든 방면의 살인에 정통했다. 아주 가벼운 옷차림으로 검 하나만 들고 학살을 벌인 그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직접 마무리했다.
“……벌써 지쳤어?”
라이킨의 물음에 숨을 헉헉 몰아쉬고 있던 제롬이 기겁을 했다.
“아닙니다!”
“지쳤으면 지쳤다고 해.”
“절대 아닙니다! 몽슈텐 전투 때를 생각하면 이까짓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몽슈텐? 그게 뭐였지?”
피가 잔뜩 묻은 검을 짜증내며 노려보던 라이킨이 잠시 머릿속을 뒤적였다. 워낙 요란했던 전투들이 많아서, 이젠 한참 생각해야 했다. 몽슈텐이 어디더라?
“그, 몽슈텐에서 523일간 버티면서 농성하던 그때 말입니다. 그때가 저는 정말 지옥이었습니다.”
“아.”
그제야 생각난다는 듯 라이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이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공비전하께서 큰 마법을 쓰셔서 제일 큰 공격마저 막아주신 마당에 막내지만 나름 잔뼈가 굵은 뱀파이어가 지친 기색을 보일 수는 없었다. 듣기론 공비전하께서 피를 토하시면서 쓰러지셨다는데, 그러면 그가 더 잘해야 하지 않겠는가! 갓 이백 살을 넘긴 제롬은 젊은 만큼 더 열심히 할 생각이었다. 물론 길게 이어지는 크고 작은 습격을 막아내는 게 보통 일이 아니지만 말이다.
“그거 좀 유감인데.”
“예?”
저 녀석이 몽슈텐에도 있었지. 라이킨은 막내를 힐끗 넘겨보며 중얼거렸다.
“몽슈텐보다 더 길게 갈 수도 있어.”
여기 남은 사람들은 죄다 볼꼴 못 볼 꼴 다 본 사람들뿐이다.
“상관없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튀어나온 대답에 라이킨은 어이가 없다는 듯 제롬을 쳐다보았다.
“생각은 하고 대답한 거냐?”
“그렇습니다!”
저 녀석은 몽슈텐까지 겪었다면 대충 굴러다녀도 상관없다는 걸 깨달았을 텐데, 여기가 군대가 아닌데도 아직까지 군기가 바짝 들었다.
“여기 다 치우고.”
“예!”
“부상자들 치료해. 나는 공주님한테 가볼 테니 무슨 일이 있으면, 알지?”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충실하게 대답한 제롬은 라이킨이 돌아서자 다시 의욕적으로 움직였다. 솔직히 연속되는 전투에 그도 지쳐 있었지만, 그래도 가장 존경하는 뱀파이어이자 상관인 라이킨 앞에서 지친 기색을 보이기는 싫었다.
‘마스터께서 제일 힘드실 테니까!’
웬만한 일에는 항상 소렐의 곁에 있는 라이킨이지만, 조금 규모가 크다 하면 그가 가장 먼저 나와서 항상 선두에 섰다. ‘그’ 칼리에르 공이 모습을 드러내면 사실 결과는 정해진다고 봐도 무방했다. 흑마법사들의 흑마법에도, 성기사들의 성력에도, 그리고 가장 뛰어난 무인의 칼에도 다칠 만큼 다쳐보며 전부 다 목숨을 거두는 것으로 끝냈던 그는 웬만한 침입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쉽게 일을 마무리했다.
“수고해.”
“예, 들어가십시오.”
라이킨은 검을 닦으며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아주 침착하고 멀쩡했으며,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조슈아.”
“예, 마스터.”
마침 소매에 튄 핏방울에 짜증을 내고 있던 조슈아가 얼른 대답했다.
“이번에는 뱀파이어였지?”
“예. 차라리 인간이었으면 애들이 포식이라도 할 텐데 말입니다.”
당장 저번에 소렐을 습격했던 마법사들은 뱀파이어들이 전부 다 흡혈을 해버려서 깔끔하게 치워버렸다. 영 쓸모가 없다며 조슈아는 투덜거렸다.
“슈토넨인가?”
“아마도요. 가능성이 높습니다. 더 알아보겠습니다만 정확하실 겁니다. 마스터께서 워낙 몰아붙이셨어야지요.”
“일을 저지르기 전에 예상했어야지. 하루 이틀 살았나.”
라이킨은 상대의 목을 천천히 죄었다. 특히 증오하는 상대일수록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구석으로 몰고 또 몰아서 틈도 주지 않았다. 충분한 공포를 느낀 후에야 자비로운 죽음을 선사했다. 혹은 그 죽음조차 선사받지 못할 때도 있었다.
“저번에는 흑마법사들이었지?”
“예, 그렇습니다.”
이미 여러 번 겪어봤던 일이다. 라이킨에게는 항상 적이 많았다. 혹은 그의 어머니에게도 많았다. 달려드는 적들을 처리하는 건 라이킨이 할 일이었고, 그는 그 치열한 전장에서 배운 게 많았다.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진 적들은 때론 저들끼리 연합했다.
“엘펜하임 잔당들과 흑마법사들이 아직까지 손을 잡을 리는 없고.”
“예. 아직까지는 힘들다고 봐야지요. 상황이 더 불리해진다면 모르겠지만.”
“하지만 그들이 각각 뱀파이어와 손을 잡을 수는 있겠지.”
“그렇습니다. 슈토넨 후작 쪽을 계속 주시할까요?”
그를 아주 천천히 죽이려던 라이킨은 한숨을 쉬었다. 점점 사람다운 도리를 잊는다. 최소한의 도리마저 잊고, 이성을 잃은 채 ‘다 쓸어버리면 편하겠다’, 라고 생각한지 오래였다. 공주님께서 좋아하지 않으실 거다.
“그쪽이야 이제 뻔하지. 나는 엘펜하임 잔당들이 더 신경 쓰이는군.”
아버지는 엔버네스에서 정치로 적들을 상대하고 있고, 딸은 아버지와 함께 언론으로 싸우고 있다. 그리고 아들은 직접 검을 들었다. 이 가족에 또 다른 사람이 추가될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새로운 가족은 아주 연약하고 소중한 사람이라 그들이 나서서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카메론 셀레스트의 흔적은 여전히 찾을 수 없나?”
“예. 아무래도 공비전하의 각성 당시 휩쓸리지 않았던 게 분명합니다.”
“그게 이상하군. 그럼 바깥 방비를 하느라 수뇌부가 안에 있는 사이 바깥에 있었다는 얘기밖에 안 되는데, 루드밀라 프랑슈틸에게 낙인을 찍은 장본인이 카메론 아닌가?”
당연히 날뛸지도 모르는 루드밀라를 제어하기 위해서라도 카메론 셀레스트는 지척에 있었어야 했다.
“아니면 각성에 휩쓸리고도 살아남았을 수 있지요.”
라이킨은 픽 웃었다. 대마법사의 각성에 휩쓸리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는 로렌스 오블리앙 공과 같은 아주 강력한 뱀파이어거나, 대마법사의 가디언 정도밖에 없었다.
“그랬다면 그 생존력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겠군.”
* 실패했어. 실패했어. 실패했어. 어떡하지? 주절대는 소리에 절망이 섞였다. 짙은 염원은 ‘또’ 꺾였다. 흑마법사들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중얼 주문을 외워대면서도 저들끼리 수군댔다. 그들의 성급하고도 호전적인 형제와 자매들이 글래스턴 공작저로 들어갔다가 다시는 나오지 못했다. 고대마법이 그들을 잡아챘다는 걸 흑마법사들도 느꼈다. 소름이 돋고, 머리카락이 쭈뼛 설 만큼 무시무시한 고대마법의 힘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아직 대마법사는 힘들다며? 아프다며? 거짓말이야? 거짓말인가 봐. 거짓말인가 봐. 거짓말이었어. 거짓말이 아니면? 아직 아프면? 그래봤자 그게 무슨 소용인가. 새카만 목소리들이 허공에서 웅얼거리다가 다시 침울해졌다. 이번에 글래스턴 공작저에서 사망한 그들의 형제자매들은 전부 뛰어난 이들이었다. 그런데 고대마법 앞에서는 맥을 못 춘다. 그러기에 더더욱, 짓밟히고 짓밟혔던 흑마법사들은 고대마법으로 생존과 그들만의 평화를 염원했다. ‘그들만의 평화’. 살아 있는 존재의 존엄성이든 뭐든 신경 쓰지 않고 원하는 마법을 어떠한 제약 없이 연구할 수 있는 평화 말이다. 고대마법이 요동친 다음에 근 석 달 만이야. 회복한 걸까? 회복이 다 된 걸까? 사사삭, 빠르게 움직이는 바람 같은 수군거림이 계속되었다. 어디선가 비명소리도 들렸지만, 새카만 두건을 눌러 쓴 흑마법사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또 끌고 온 ‘재료’가 좀 시끄럽게 구나 보다. 우리끼리 말해봤자 의미가 없어. 우리의 형제자매가 죽었다. 뱀파이어에게 죽었다. 더 이상은 안 돼! 우리의 입을 불러라! 입을 불러내! 입을? 중얼거리는 사이, 흑마법사들이 중얼대며 외우고 있는 새카만 주문과 연기 사이로 누군가가 일어났다.
“친애하는 형제자매들이여.”
허공에 웅얼대는 소리와 달리 똑바로 두건 아래 입술을 움직이는 흑마법사였다.
“우리에게 새로운 힘이 필요합니까?”
필요해! 고대의 마법을! 순수한 힘을 우리에게! 우리에게! 우리의 것이다! 외쳐대는 소리는 시끄러웠으나 보통 사람들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라도 공기 중에 팽배한 대마법사에 대한 증오심은 쉽게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우리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군요. 허면, 누구에게 손을 내밀까요?”
누구든 우리처럼 절박한 이에게. 두건 아래 입술이 미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
“하도 누워만 있어서 몸살이 날 것 같아요.”
토끼는 잘 넘어져도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들쑤시고 다녀야 한단 말이다! 소렐은 좀이 쑤셔서 입을 뚜하고 내밀었다.
“어차피 밖에는 비나 진눈깨비만 내리고, 날은 음산하기만 합니다. 글래스턴은 겨울엔 볼 거라곤 하나도 없으니 따뜻하고 아늑한 실내에 있으세요.”
하지만 소렐은 그런 말 한마디에 금방 납득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또 양손을 마주 잡고 꼼지락거렸다. 그게 어떤 버릇인지 잘 아는 라이킨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빗겨주며 말했다.
“……학교에 가시고 싶으십니까?”
다른 친구들은 지금 시험을 치려나, 신입생이 재미나게 즐길 수 있는 행사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누워 있기만 하니 그리 가고 싶었던 대학부터 친구들까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 거다. 소렐은 고개를 돌려 라이킨을 쳐다보았다.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지요.”
라이킨은 조용히 말했다.
“공주님께서는 조금 요란한 가을을 겪으시고, 안식할 겨울을 맞이하신 것뿐입니다.”
학교는 언제든지 갈 수 있었다. 그는 소렐이 그걸 알았으면 했다.
“……솔직히 학교는 더 이상 갈 생각이 들지 않아요.”
소렐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그거 놀랍군요.”
그렇게 학교에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공주님 입에서 나올 거라고 예상했던 말은 아니었다.
“진심이십니까?”
“학교에 가려던 건 뭐라도 배우고 싶어서였어요. 뭐든, 더 많이.”
홀로서기에 충분한 지식이 필요했다.
“지금 내 머릿속에는 평생을 연구해도 모자랄 지식들이 들어 있고요. 너무 많아서 어떻게 이 안에 다 들어갔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예요.”
온갖 격랑이 밀려와 마구 흔들리고, 파도가 덮쳐와 제멋대로 인생을 뒤집어엎었다. 그녀는 자신이 더 이상은 평범하게 사는 게 불가능할 거라는 걸 잘 알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스무 살과, 그녀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추적자와 암살자들을 잔뜩 겪은 대마법사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그러니까……, 지금은 됐어요. 가봤자 별 소용이 없어요.”
“그럼 따로 가시고 싶으신 곳은 없으십니까? 이리 움직이시는 걸 보면 많으신 것 같은데, 다 나으시면 한 곳씩 저와 돌아보시지요.”
“나랑 다녀서 뭐하게요.”
아, 이런. 공주님이 보통 풀이 죽으신 게 아니다. 라이킨은 팔을 뻗어 그녀를 안았다.
“어디든 제가 함께 가야지요. 공주님은 언제나 용감하시지만, 저는 살아온 세월 덕에 먼저 경험해본 것이 많아 공주님께서 낯설고 겁이 나실 때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그는 조곤조곤 부드럽게 속삭였다.
“혼자서 하는 건 가끔 외롭고, 무섭기도 하지요.”
갑자기 우으,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낸 소렐은 황급히 허리를 더 숙여 얼굴을 가렸다. 혼자 떠도는 동안 어떻게 무섭지 않았겠는가. 그녀에게 달려드는 사람들을 가볍게 처리할 수 있다는 건 알았지만 마주칠 때마다 괜히 놀랐다. 게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를 죽이려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흑마법사들은 지금도 주문을 외워대고 있다. 이 모든 상황이 너무 무섭고, 너무 외롭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버림받은 기분인데, 라이킨은 마치 그 심정을 안다는 투로 말했다.
“혼자 밤을 보내는 건 더 싫고요.”
감싸고 있던 어깨가 떨렸다. 우으윽, 하고 이상한 소리가 품 안에서 나고 있었지만 라이킨은 등을 토닥이고 머리카락만 쓰다듬어 줄 뿐, 그녀의 얼굴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소렐은 내내 무서웠을 거다. 지금도 느껴지는 게 많은 만큼 더 외롭겠지.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펑펑 우는 소렐을 토닥였다. 그녀는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우는 모습을 그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그만 홍수처럼 밀려드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 소렐은 라이킨의 품에 완전히 푹 잠겨서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울었다.
“공주님, 쉬이…….”
차라리 소리 내어 엉엉 울었으면 좋겠는데, 소렐은 어떻게든 애써 소리를 죽여 울어서 라이킨의 속을 아프게 긁어내렸다. 이대로 소렐이 잠들 때까지 자리를 지켜야겠다. 그러니 지금 온 손님은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아래층에 샤를렌이 왔다는 걸 알아챈 라이킨은 습관대로 정신없이 우는 소렐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달래고 또 달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