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The golden wave (10)2021.09.22.
소렐이 글래스턴 공작저에서 눈을 뜬 지도 며칠이 지났지만, 그녀의 몸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그녀는 침대에서 거의 빠져나오지 않고 지루한 하루를 보냈고, 종종 힘들어했다. 당연히 그녀는 도움을 필요로 했고, 가장 가까이에서 돕는 남자가 곁에 앉아 그녀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왜 쳐다보는 거지?’
소렐은 힐끔 눈을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새파란 눈이 무섭게 그녀를 보고 있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는 찬찬히 가늠하듯 다시 한번 소렐을 훑어보았다. 그녀를 계속해서 훑어보는 건 오늘만 해도 벌써 마흔두 번째다. 무례한 짓이란 건 알고 있지만, 대마법사의 가디언으로서 어쩔 수가 없었다. 보면 볼수록 그녀의 상태가 좀 더 많이 보였으니까.
“라이킨.”
“예.”
“내가 그렇게 예뻐요?”
발음이 조금씩 뭉그러지고, 웅얼웅얼 댄다.
“예.”
“그렇구나.”
그래서 계속 쳐다보는 거라면야. 혼자 납득한 소렐의 눈꺼풀이 점점 내려왔다.
“난 언제 나을까요? 왜 대마법사가 되었는데도 이걸 몰라……?”
그 와중에 눈썹도 시무룩하게 가라앉았다.
“공주님께서 마력을 워낙 자연스럽게 움직이셔서 그렇습니다. 저도 확실하게 보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럼 라이킨은 대충 안다는 거네…….”
잠에 취해 종알대던 그녀가 갑자기 눈을 애써 치켜들었다.
“근데 왜 나는 모르지? 어, 또 웃어!”
눈에 힘을 주고 어떻게든 말하려다가, 더 뾰족하게 말하려다가, 저런. 다시 순한 눈이 풀려버리고 말았다.
“마법사의 상태는 가디언이 살피는 거지요. 공주님께서도 차차 아시게 될 겁니다.”
“아, 그런가…….”
쫑알쫑알, 미간을 확 좁히고 열심히 말하다가 결국 눈꺼풀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또 픽 쓰러져 잔다. 라이킨은 고개를 숙여 소리 없이 웃다가, 다시 소렐을 쳐다보았다. 체력이 한계에 다다르면 헬레인 토끼는 갑자기 픽 쓰러져 곤히 잠들었다. 이래서 마력에 의존하면 안 되는 거다. 동시에 라이킨과 에벌린이 자꾸만 소렐을 눕혀놓거나 앉혀놓으려고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시도 때도 없이 픽픽 쓰러져 자는데 기함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잘못 쓰러져서 다치기라도 하면 더 큰 일이다.
“그럼요.”
그는 잠든 소렐이 듣지 못할 정도로 조곤조곤 말했다. 별 거 아니다. 단지 소렐이 지금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졌고, 알게 모르게 입은 내상도 심했으며, 바깥에는 나약해진 대마법사를 해치러 오는 놈들이 득시글댈 뿐이다. 라이킨은 창가로 걸어가서 섰다. 솔직히 담배를 물고 싶었지만 소렐과 같은 방에서 흡연을 할 수는 없었다. 요즘 그의 신경을 간신히 부드럽게 풀어주는 건 소렐뿐이었다. 그것도 제 몸 상태도 잘 모를 정도로 마력 제어가 안 되는 소렐.
‘……버러지들이.’
마법에 대한 최소한의 희망인지, 아니면 불타오르는 욕망인지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다. 아무튼 그런 걸 품은 버러지들이 자꾸만 글래스턴으로 기어오고 있었다. 대마법사의 넘쳐나는 마력은 마치 꿀을 뚝뚝 떨어트리는 과실과도 같다. 단내가 나니 냄새를 맡은 짐승이고 벌레들이고 죄다 달려드는 거다.
“마스터.”
누군가가 문밖에서 조용히 그를 불렀다. 라이킨은 창가에서 물러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요즘 공작저 분위기는 소렐을 깨어났을 때를 제외하고 살벌하기만 했다. 어제는 소렐의 침실 문 앞까지 침입자가 도달했다. 라이킨은 당장 그녀의 침실에서 모든 숙식을 해결하기 시작했다. 그는 문을 열고 조슈아와 마주했다.
“오늘은 조용합니다만, 한 놈이 얼쩡거리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곧 습격이 있을 것 같습니다.”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서 추적대를 보내 뒤를 밟는 중입니다. 원, 어중이떠중이가 다 몰려들어서…….”
“머리가 좀 돌아가는 놈들이라면 이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지. 늘 어설픈 놈들이 문제야.”
대마법사의 힘을 훔쳐낼 수 있을 거라고, 고대마법을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자아가 비대한 놈들. 라이킨은 그런 놈들이 가장 역겨웠다. 정작 뱀파이어들 앞에서 꼼짝도 못 하고 어설픈 주술이나 좀 쓰다가 도망치는 주제에 기어들어 와서 신경을 왜 긁어대냔 말이다.
“전 대마법사 때도 이랬습니까?”
펠릭스 이드리스가 고대마법을 완전히 각성했을 때도 이렇게 몰려들었나? 그는 개미떼같이 꾸역꾸역 몰려드는 온갖 사람들을 보며, 이렇게 마법을 탐내는 이들이 많았나, 새삼스럽게 놀라던 중이었다. 가을부터 내내 이랬다.
“……펠릭스 이드리스는 가디언이 필요하지 않은 마법사였고.”
중얼거린 이는 생겨나는 한숨만큼 깊게 빨아들였다.
“처음부터 뭐든 다 잘했지.”
뭐 저런 새끼가 있나, 싶을 만큼.
“그런데도 우습게 보고 달려드는 멍청이들은 어디에나 있었어.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별로 변하지 않은 것 같군.”
“예.”
조슈아는 깊이 공감했다.
“제가 봐도 그런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엔버네스에서 눈코 뜰 새 없이 귀족들을 상대하고 계시다면서, ‘왕세자가 거슬린다’고 말씀 남기셨습니다.”
라이킨은 하하 웃었다.
“그 개새끼.”
“예. 그러게나 말입니다.”
“안목은 있는데.”
“예. 계속 공비전하를 추적하는 모양입니다. 게다가…….”
라이킨은 고개를 들어 조슈아를 쳐다보았다.
“이혼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계속 알아보라고 하면서, 계류 중이라는 소식에 법원까지 채근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공작합하 말씀대로, 왕세자가 공비전하께서 이혼하시면 바로 청혼을 할 생각인 모양입니다.”
“……확실해?”
“그러지 않고서야 왜 법원에까지 압력을 넣겠습니까?”
너무 뻔하다는 투로 중얼거리던 조슈아는 움찔 굳고 말았다.
“……이 XX…….”
눈이 번뜩거리며 돌아간 라이킨은 순식간에 전장에서의 그 모습으로 바뀌었다.
“마스터, 뒤를 한 번만 보십시오.”
조슈아는 물론 그를 오래 모신 사람답게 당황하지 않고 라이킨의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뒤는 왜?”
무섭게 미간을 좁히고 험악한 표정으로 뒤를 넘겨본 라이킨은 쌕쌕 숨소리를 내며 잠든 소렐을 보았다. 귀와 코끝은 분홍빛으로 물들었고, 그가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 작은 얼굴만 쏙 나왔다. 라이킨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화가 좀 가라앉으셨습니까?”
“이성은 좀 돌아왔지만 화는 글쎄.”
라이킨은 고개를 까딱였다. 그는 남의 아내를 넘보는 진부하게 미친놈이 왕세자라는 게 상당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외람되지만, 마스터. 정치적인 계산도 분명히 있습니다.”
“당연히 있겠지.”
“그리고 왕세자뿐이 아닌 것 같습니다.”
돌겠군. 라이킨은 그건 또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조슈아를 쳐다보았다.
“이 나라의 유력한 귀족 중 독신자나, 외국 왕족들도 왕세자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정치적으로 보자면…….”
“아무리 사라진 왕조의 공주라 해도 어쨌든 왕족이고, 가지고 올 재산도 엄청나며, 무엇보다 대마법사이기까지 하다, 이거지.”
“예, 그렇습니다.”
마다할 사람이 없었다. 당연했다. 소렐은 조건이 차고 넘쳤다. 더구나 라이킨이나 조슈아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는 사실이었지만, 그녀의 친정이 없다는 점에서 더 휘어잡고 흔들기 유리하다는 계산도 있을 거다.
“그래서 지금 계속 시선이 이쪽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마법을 노리는 흑마법사들에, 칼을 갈고 있는 엘펜하임 잔당, 그리고 슈토넨 후작을 위시한 뱀파이어들, 게다가 그들이 이혼하기만 하면 벌떼같이 달려들 남자들까지 더하니 가관이다.
“환장하겠군.”
라이킨은 그냥 웃었다.
“공비전하께서 여기저기 나타나시다가 아무런 소식이 없으신 게 벌써 석 달이 넘어가고 있으니, 이제 뭔가 이상하다 싶은 거지요.”
그렇다고 해서 이혼소송을 취하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소렐이 두고 갔던 결혼반지와 약혼반지를 아주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는 라이킨은 그걸 언제 돌려주나, 고민만 하고 있는데 여기저기에서 그의 신경을 긁어댔다.
“……알았어. 다른 건 또 없고?”
“변호사님이 지금 언론 틀어막는 건 얼추 되셨다고 합니다. 어차피 한동안 한참 조용해서, 기자들도 별 건수가 없으니 흥미를 잃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왕세자 건이 밝혀지면…….”
“그때는 1면을 독차지하겠지. 알겠어.”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슈아를 보냈다. 지나치게 달아올랐던 침실 공기가 조금씩 시원해지고 있었다. 동시에 빨갛게 물들었던 소렐의 뺨도 조금씩 원래 색을 찾아갔다. 그는 한동안 소렐을 바라보며 문간에 서 있다가, 한참 만에 문을 닫고 도로 들어왔다. 그러곤 자꾸만 픽픽 쓰러져 잠들어서 그를 놀라게 하는 토끼 공주님을 한 번 쓰다듬어 보았다.
“그래……. 이렇게 예쁘신데.”
이놈저놈 다 달려드는 거야 당연한 거다. 당연한 건데 말이다.
“이혼은 언제 취소해주시렵니까?”
그는 아주 비겁했다. 면전에 대놓고 차마 물어보지 못하는 말을, 곤히 잠든 소렐에게 괜히 물어보았다. 이혼을 취소하겠다고 딱 한마디만 해주면 당장 샤를렌에게 연락할 텐데. 아직까지도 그를 믿을 수가 없고, 상처가 큰 걸까. 라이킨은 협정서를 쓸 때를 자꾸만 곱씹고 후회했다. 이혼이라니. 그의 단조롭고 권태로운 인생에 이렇게 크고 감당 못 할 비극을 맞게 될 줄은 몰랐다.
‘아, 제기랄.’
공주님 앞에서 욕을 내뱉을 수는 없다. 그는 한숨을 쉬며 침대 곁에 세워 놓은 검을 집어 들었다. 이젠 뱀파이어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는 이곳도, 그의 어머니가 건설한 삼엄한 작은 요새마저 뚫리는 건가. 소렐이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사이, 그가 직접 검을 들고 나선 것도 수차례였다. 그나마 글래스턴 공작저가 가장 방어하기에 좋았지만, 이번에는 도저히 막아내지 못할 물량으로 밀고 들어오나 보다.
“마스터!”
창밖에서 제롬이 그에게 고함을 쳤다. 챙강, 하고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
“피하십시오!”
피하다니. 도대체 어디로? 라이킨은 제롬이 막내라서 할 법한 말이라 생각하며 입귀를 비틀었다. 그는 날카롭게 벼려둔 검을 뽑아 들었고, 또다시 소렐의 침대 앞에 피를 뿌릴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챙강, 하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창문이 깨졌다.
‘공주님께 이불을 잘 덮어드려서 다행이야.’
밀려오는 찬바람을 맞으며 그는 딱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러곤 바로 검을 휘둘렀다. 그의 모든 근육은 실전으로 얻은 것이다. 열 살 때부터 끔찍한 추위와 달려드는 ‘어른’들, 그리고 피에 대한 욕구와 싸워가며 전장을 굴러다녔다.
‘많이도 몰려왔군.’
이젠 정말 대마법사가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은거 중이라는 소문이 퍼질 대로 퍼진 모양이다. 라이킨은 웃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창문을 깨고 달려드는 십여 명의 침입자들은, 그가 상대해본 가장 많은 숫자의 적보다 다행히 적었다. 그러니 한 번 더 지켜낼 수 있었다. 라이킨의 칼은 침대 근처에서 군더더기 없이 움직였다. 급소만 단숨에 찌르고, 비틀어 빼낸다. 피가 튀는 것마저 소렐에게는 튀지 않도록 했다.
“호, 호, 호랑이……!”
호랑이가 우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질려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을 화나게 하면 안 되는데. 라이킨은 설핏 웃었던 것도 같다. 엄청난 물량으로 밀고 들어온 흑마법사들은 급기야 라이킨을 붙잡아 놓기 위해 마법을 시작했다.
“저놈부터 묶어라!”
소렐 이드리스 가까이 가지도 못하게 하는 원흉, 칼리에르 공, 저 미친 전쟁귀신을 어떻게든 죽여야 했다. 가장 간단하게 살육하고 있는 라이킨에게 온갖 마법이며 저주가 날아들었다. 마법사들이 여기까지 들어오다니, 수하들이 더 죄어야 하나.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소렐과의 결합점을 쥐었다. 딱 그때였다.
“아아아악!”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아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라이킨은 침실 허공에 떠오른 마법사‘들’과 마녀‘들’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시선을 침대로 옮겼다. 긴 머리카락이 또 춤을 추었고, 초점을 잃은 황금색 눈이 무섭게 빛난다. 일어나 앉은 소렐 이드리스는 어딘가를 보고 있으면서도 보고 있지 않았다.
“손대지 마.”
소렐의 평소 목소리가 아니었다. 강대한 마법이 깃든 주문이자 마법 그 자체다. 말하는 것만으로도 라이킨이 싸우고 있던 모든 적들이 그에게서 전부 떨어졌다.
“내 가디언한테 손대지 마!”
깨진 창문을 통해 들어왔던 침입자들이 휙, 하고 다시 바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으악!”
밖에 있던 이들이 기겁을 했다. 그러나 그 침입자들마저 허공에 떠오르는 걸 보며 라이킨은 모처럼 즐겁게 웃었다. 아, 그렇지. 그는 그녀가 소유한 사람이었다.
“내 거야!”
제정신이 아닌 대마법사가 외치는 말이 공작저에 쩌렁쩌렁 울렸다. 언뜻 아이 같은 말이었지만, 그 문제의 ‘내 거’는 짜릿해 죽을 지경이었다. 이보다 그를 황홀하게 하는 호칭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