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The golden wave (9)2021.09.18.
소렐은 화를 내다가도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날’ 보고 들었던 라이킨의 말만 생각하면 따지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지금의 라이킨을 앞에 두고 도저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협정서를 통해 봤던 그 싸늘하게 조소 어린 표정만 짓는다 해도 무조건 화를 낼 텐데 그는 소렐 앞에서는 결코 그런 표정을 짓지 못했다.
“……뭐든 말씀하세요.”
자신을 보며 입을 여러 번 열었다, 닫았다 하는 소렐에게 라이킨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할 거예요! 따질 거야!”
발끈해놓곤 또 정작 따지자니 그의 표정이 너무 서글퍼 보였다. 그녀가 이렇게 라이킨에게 약한 사람이었나 보다.
“협정서 쓸 때 한 말들은 속임수를 쓴 거겠지만, 나도 그걸 잘 알고는 있으니까 그건 제쳐두고!”
그래놓고 또 그의 표정을 보다가 입술만 달싹거리는 소렐을 대신해 그가 먼저 말을 꺼내주었다.
“공주님이 다치셨던 날 말씀이시지요.”
“그래요, 그거!”
그때 샤를렌과 나눴던 말을 하나하나 문장마다 따져보고 싶었다. 그 말들을 생각하면, 라이킨이 아무리 슬픈 표정을 짓고 있다 해도 소렐의 어깨는 푹 가라앉고 몹시 서러워졌다.
“……내가 처음부터 그렇게 귀찮았어요? 그냥 대마법사가 될 사람이니까 떠맡은 거예요? 아니, 나도 갑자기 고아 떠맡으라고 한다면 분명히 부담스러울 테니까 이해는 하는데…….”
그럼 선이라도 긋지. 그는 처음부터 설탕이 녹아 내리 듯 소렐에게는 몹시 다정하기만 했다.
“귀찮지는 않았습니다. 난감했지요.”
라이킨의 낮은 목소리가 조용하게 대답했다.
“너무 어리시고, 앞으로도 함께 있어야 하는데 너무…….”
너무, 뭐! 또 헛소리하기만 해봐라, 깍 깨물어버릴 거다.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는데, 라이킨은 뜻밖에도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너무 예쁘셔서…….”
“어어…….”
예뻤다니. 조금 붉어진 얼굴이 아래로 수줍게 내려갔다. 축 처졌던 어깨가 다시 둥실둥실 솟아올랐다.
“예, 예뻐서 뭐요!”
아니지. 여기서 그냥 넘어가면 안 된다. 소렐은 라이킨의 한마디마다 휘둘리는 자신을 책망하며 서둘러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예쁘다. 그래. 다 예쁘다 그랬다. 그게 뭐? 그게 뭐 어쨌다고!
“그다음은 아시잖습니까.”
고루한 신사의 죄책감,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어나는 욕망, 소렐도 다 아는 이야기이긴 했다.
“알긴 뭘 알아요?”
소렐은 그래도 괜히 궁시렁거렸다.
“말을 안 했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입 뒀다가 뭐해? 내가 오해하기 전에 알아서 잘 설명을 하면 됐을 거 아냐. 말도 안 해놓고 뭘 잘했다고…….”
“예, 말씀을……, 말씀을 드려야 하는데……. 제가 잘못…….”
라이킨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말을 더듬거렸다. 소렐은 또 금세 눈썹을 하늘을 향해 확 올렸다. 토끼 귀도 바짝 올라갔다.
“그리고, 그게 끝인 줄 알아요?”
눈이 가늘어진 소렐은 다음 문제로 넘어갔다. 특히 그놈의 ‘유효기간’이라는, 가장 큰 문제 말이다.
“그놈의 유효기간 끝나서 나 안 좋아하면 그땐 어쩌려고 그랬어요? 응? 어쩌려고 그랬냐고.”
어디 말을 해봐! 귀를 바짝 세운 토끼 공주님이 침대 바닥을 팡팡 두드렸다. 라이킨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공주님께는 소중한 감정이니 공주님께서 식으실 때까지 기다려야지요. 눈치채지 못하시도록 최선을 다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려고 했단 말이야? 더 괘씸해!
“먼저 차일 거라곤 생각 못 했어요?”
라이킨은 쓰게 웃었다.
“그것도 생각했습니다. 제 유효기간이 길지, 공주님의 유효기간이 길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요.”
그건 또 처음 듣는 말이라, 소렐은 침대를 두드리던 손을 떼어냈다. 그녀가 더 이상 손에 힘을 주지 않아 그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더 두드리면 말리려고 했으니까.
“그리고 그 점에 대해서는 지금도 걱정하는 중입니다.”
가만 생각하던 소렐의 미간이 좁혀졌다.
“왜요?”
“……공주님께서는 아마 믿지 못하시겠지만, 저는 제 감정의 유효기간이 없을 거라고 깨달은 건 한참 되었습니다. 공주님이 납치되셨던 때보다 훨씬 전에……. 아마 공주님이 웃고 계신 걸 보고 느꼈던 것 같은데.”
그는 잠시 고개를 돌려 벽난로에 남은 장작을 가늠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저는 그렇게 되었다 해도.”
글래스턴 공작은 부지깽이를 들고 장작을 들쑤셨다. 빨간 불티가 함께 일었다. 그는 이 방의 벽난로를 지난가을부터 내내 직접 관리했다.
“우리 공주님께서는……, 이 나이만 많고 잘해드리는 거 하나 없는 남편이 지겨워지실 수 있지요. ……충분히 그러실 수 있습니다.”
소렐에게 세상은 넓었다. 아직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일들이 많다. 그 모든 것들을 다 보면 그녀에게 끊임없이 집착하는 남편이 질릴 수도 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뭐, 저보다 잘난 남자를 찾는 건 아주 힘드시겠지만 말입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어머나.”
뭐 저런 남자가 다 있담? 아주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대놓고 지었다.
“사실은 사실입니다, 공주님. 저보다 잘생기고 신체도 훌륭하며, 무엇보다 돈이 아주 많은 남자는 찾기 힘듭니다.”
소렐은 서둘러 그녀가 봤던 남자 중에 라이킨보다 더 잘생긴 남자가 있나 생각해보았다. 엘펜하임에도 하나도 없었고, 방랑을 하면서도 저렇게 생긴 남자는 못 본 것 같다.
“기왕 데리고 사시는 거, 보기에도 좋고 데리고 살기에도 편한 남자를 선택하셔야지요. 공주님께서 객관적 조건이 떨어지는 놈과 만나셔야 되겠습니까.”
그 와중에도 양심은 조금 남아 있어서, 라이킨은 ‘객관적 조건’이라고 단서를 붙였다. 주관적인 걸로 따지자면 그녀에게 큰 상처를 입힌 그가 발을 붙일 곳이 없으니까.
“그……, 루벤 실베스터 선배님도 잘생겼던데.”
라이킨은 빙긋 웃었다.
“돈도 많대요. 방계이긴 한데 돈이 무지 많대요.”
“저보단 보유재산이 적습니다만, 공주님 취향이 그쪽이십니까?”
그는 장작을 더 던져 넣은 뒤 손을 털고 몸을 일으켰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소렐은 눈을 감고 손을 들었다.
“그 선배님한테 가는 거면 동작 정지하고 다시 돌아와요.”
재깍 몸을 돌려 돌아온다. 그녀가 비난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더니 볼멘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경쟁자를 제거하는 건 당연한 논리 아닙니까.”
“……전혀 당연하지 않아요…….”
“제가 지금 무척 절박한 상황인지라 이 방법 저 방법 가릴 때가 아닙니다.”
라이킨의 시선이 날카로웠다. 루벤 실베스터. 방계라 납작 엎드리고 있긴 해도, 그놈도 눈이 제대로 달린 놈이긴 했다. 슬쩍 소렐에게 접근하고, 인사를 하면서도 소렐에게 영 관심이 없는 눈치는 아니었다.
“제 얼굴이 그놈보다 별로입니까?”
“그렇다면요?”
순식간에 넓은 어깨가 푹 가라앉았다.
“……세상에는 여러 취향이 있으니까……. 남는 게…….”
그는 꼽아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몸과 재력뿐이군요.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지?”
고상하고 고귀한 칼리에르 공이 여기까지 떨어지다니. 그냥 무덤을 파고 드러누웠다고 하는 게 맞겠다.
“몸으로 뭘 하려고요?”
저 답이 없는 남편을 어찌하나, 하고 중얼거린 소렐에게 라이킨이 고개를 휙 돌렸다.
“설마 모르셔서 물으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지금 뭐해요?”
“얼굴도 별로라 하시니 바로 실행에 옮기는 중이지요.”
라이킨은 당장 셔츠 단추를 툭툭 풀어냈다. 소렐은 저절로 그의 가슴으로 눈이 가려는 걸 애써 참으며 생각했다. 근데 저 몸이면 매일 벗고 다녀도 좋을 것 같은데?
“내가 언제 얼굴이 별로라고, 근데 춥지도 않아요?”
“저는 딱히 추위를 타지 않습니다.”
옷깃을 느슨하게 매만진 라이킨의 눈매가 나른했다. 그는 그녀를 아주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었고, 소렐은 괜히 토끼 귀를 다시 집어넣는 데만 신경을 쓰며 딴청을 부렸다. 살짝 보이는 뺨이 발간 게 사랑스러웠다. 눈이 시리게 보고 싶었던 공주님은 가슴이 아리도록 예뻤다.
“……처음에 내가 그렇게 별로였어요?”
그리고 아주 예쁜 얼굴로 그의 명치에 주먹을 꽂아 넣는다.
“예?”
못 알아들은 게 아니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반문이다.
“처음에는……, 갑자기 떠맡은 거라면서요.”
나는 다 기억하고 있다! 토끼 공주님은 웅얼거리다가 갑자기 그때 대화를 엿들었던 생각이 나자 화가 났는지 그를 확 째려보았다.
“라이킨 없으면 마법도 못 부리는 애라서 편리했다며!”
“제가 잘못했습니다.”
일단 재깍 사과부터 했다.
“내가 그렇게 별로는 아닌데…….”
“처음부터 예쁘시고 사랑스러우셨습니다. 정말입니다.”
“우리 엄마가 한 예언이 예언 같지 않게 들렸어요? 그런 거야?”
그랬단 말이야? 노려보는 시선이 따갑다.
“공주님, 제가 아무리 양심이 없어도 학교에 가겠다고 행복해하는 어린 공주님을…….”
말하다가 말문이 턱 막혔다. 라이킨은 손을 들어 입가를 쓸어내렸다.
“내가 그때 뭐! 너무 어려서 뭐!”
“아뇨, 공주님 탓이 아니라…….”
생각해보니 그때부터 그냥 마냥 예뻐했던 것 같아서.
“예.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그는 곤혹스러운 얼굴을 애써 가다듬었다.
“전혀 잘못했다는 표정이 아닌데?”
“제 식견과 안목이 매우 높습니다. 그래서 공주님께 빠진 건데 그게 잘못된 일은 아니잖습니까.”
양 주먹을 꼭 쥐고 따지던 그녀가 눈을 깜빡거리고 잠시 생각했다.
“……그건 그래.”
아주 뻔뻔하게 대답했다. 예쁜 사람한테 빠지는 게 맞는 거지, 뭐!
“그렇지요? 공주님은 제가 여태까지 본 존재 중에 가장 사랑스러우신걸요. 당연한 거지요.”
“근데 난 좀 억울해요.”
“예, 제가 많이 모자라고 부족하지요. 죄송합니다. 만회하겠습니다.”
끄응, 소렐은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무슨 말을 해도 라이킨은 다정하게 웃으면서 진심으로 죄송하다, 사랑한다만 반복했다. 그러면서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얼굴로 꼭 안아주고, 온갖 수발을 다 들어주니 오래 화를 낼 수가 없었다.
“평생 안 잊을 거야…….”
째려보며 중얼거렸다.
“못됐어. 저주할 거야. 대마법사의 저주가 얼마나 무서운데. 평생 독수공방하라고 저주 내려야지.”
“공주님께서 내려주시는 거라면 뭐든 달게 받겠습니다.”
“말은 잘해.”
“말이라도 잘해야지요. ……공주님.”
“왜욧.”
귓가에 속삭이는 나지막한 고백에 소렐은 그의 단단한 팔뚝을 있는 힘껏 꼬집었지만, 워낙 단단해서 제대로 잡히지도 않았다.
“아픕니다.”
“하나도 아프지 않으면서!”
찰싹 때리니 덤덤하게 대답한다.
“아야.”
* 눈은 어디에나 있다. 글래스턴 공작저로 향하는 눈들도 많았지만, 그 눈들을 바라보는 눈도 있었다. 흑마법사들이 낄낄대며 웃고, 까마귀들이 끼룩거렸다. 황량한 겨울하늘을 사냥하듯 할퀴며 지나가는 그것들을 보던 눈 한 쌍이 있었다.
‘요란하군.’
하긴, 이젠 저들을 짓누르던 이들이 사라졌으니 요란할 수밖에. 그 눈은 제 초라한 몰골을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엘펜하임은 붕괴했고, 버려진 본부는 급속도로 무너져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마 그대로 붕괴될 거다. 방화와 약탈이 몇 번 더 일어난 후에는 흔적조차 남지 않겠지.
“……이제 어쩔까요?”
질문이 들려왔다. 불안하지만 그를 내내 따라다니고 있는 충직하고, 아직은 젊디젊은 청년이다.
“어쩌긴.”
돌아갈 곳을 잃은 성기사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살아야지.”
이름을 잃고 소속을 감춰, 어둠 속에 스며들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인 양 새로운 이름을 달고 새로운 인생을 살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살아야 했다. 더럽고 치사한 일을 겪고, 또 모멸을 겪을지언정 사는 게 죽는 것보다는 낫다.
“가자. 날이 저물기 전에 움직여야지.”
“예.”
움직이는 이들은 흑마법사와 뱀파이어 뿐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