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The golden wave (8)2021.09.15.
대마법사는 계속해서 결합점을 매끄럽게 다듬고 있었다. 라이킨의 피는 여전히 선명하게 남았지만, 억지로 붙여놨던 결합점이 다시 새것처럼 매끈해졌다.
“너무 오래 하지는 말아요. 어깨 아플라.”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이 노래하듯 말하며 소렐을 만류했다.
“아, 네.”
소렐은 보스스 웃었다. 그런 다음에 또 입을 꼭 다문다. 그녀는 처음 깨어난 후에 에벌린과 라이킨을 놀라게 한 것처럼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일이 잦았다. 각성을 한 이후로 머릿속에 밀려드는 고대마법을 소화하느라 여념이 없는 것이다.
‘저러니 교수님 속이 타지.’
에벌린은 속으로 쯧쯧, 하고 라이킨에 대한 유감을 표시했다. 소렐은 침대에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지만 지나치게 바빴다. 세상을 아주 오래 산 에벌린이 보기에 이 부부는 이혼장을 아직 법정에 걸어둔 상태다. 그러니 소렐이 끝내 결합점을 끊었던 그날에 대해 분명히 대화를 나눠야 하건만, 라이킨은 누가 기사 아니랄까 봐 소렐의 처분만 기다리고 있었다.
“공주님.”
소렐이 고개를 들었다.
“공주님 앞으로 편지가 왔어요. 사비나 로체 양이 편지를 보냈고, 또 공주님의 변호사도 편지를 보냈네요.”
“고마워요, 에벌린.”
하지만 소렐은 에벌린이 내려둔 접시 위에서 편지를 바로 가지고 가지는 않았다. 단지 변호사가 보냈다는 편지를 힐끔 쳐다볼 뿐이다.
“저기요, 에벌린.”
“네, 공주님?”
“왜 타운하우스가 아니라 글래스턴 공작저에 머무르고 있는 건가요?”
그건 사실 타운하우스보다 요새나 다름없는 글래스턴 공작저가 더 방어하기 좋았기 때문이다.
“이곳이 훨씬 더 안전하지요.”
엘펜하임이 힘을 잃었으니 때가 왔다는 듯 활개를 칠 이들을 생각하던 소렐은 다른 질문을, 차마 라이킨에게는 할 수 없었던 질문을 또 했다.
“저기, 샤를렌이나 아버님은……, 여기 오시긴 하나요?”
“다들 너무 바쁘세요. 변호사님은 언론 쪽을 맡으셨고, 공작합하께서는 내내 엔버네스에서 머무르시면서 중앙정치를 조율하고 계시다고 알고 있어요.”
그렇구나. 결국 라이킨과 소렐, 두 사람만 남는다.
“그렇군요. 고마워요, 에벌린.”
“별말씀을요. 쉬세요, 공주님.”
아니, 어쩌면 대마법사는 고대마법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녀의 기억으로는 불과 며칠 전에 불과했던 끔찍한 날을 떠올리는지도 모른다. 에벌린은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갔다.
‘이젠 좀 익숙해져야 하는데.’
소렐은 휴, 하고 한숨을 쉬며 높이 쌓인 베개에 몸을 기댔다. 라이킨의 의사, 혹은 마음은 일단 알겠다. 하지만 그게 어디 아, 그렇구나, 하고 바로 받아들여질 일이던가.
‘라이킨은 나한테 맹목적이니까 아마 내가 또 쉽게 넘어가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아직까지는 조금 밉단 말야! 소렐은 또 한숨을 푹 쉬었다. 엄마가 계셨다면 ‘무슨 일이 있길래 한숨을 그렇게 쉬니’라고 물어보셨을 텐데. 아마 라이킨도 시간이 해결해줄 일이란 걸 알 거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녀의 유일한 기사는 처분만 기다리고 있었다. 변명도 하지 않았고, 그녀가 귀찮게 쫓아다니면서 매달리지도 않았다.
“공주님.”
아, 아니다. 소렐은 들어와서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면서 노골적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라이킨의 시선을 보며 생각을 정정했다. 그는 아주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자기 자신을 소렐에게 열심히 부각시키고 있었다. 아주 부드럽게 입을 맞춘 라이킨은 소렐의 머리카락을 스스럼없이 쓸어 넘겼다. 흠, 얄미워라.
“뭘 생각하고 계셨습니까?”
“내가 결합점 끊던 날 들었던 얘기요.”
공주님은 어떤 예고도 없이 갑자기 불쑥 직구를 날리신다. 순식간에 내내 조심만 하고 눈치를 살피던 죄 많은 남자의 명치를 때리신다. 라이킨은 소렐의 손을 조심스럽게 놓았다.
“……그러셨군요.”
그래서, 어떤 결론을 내리셨을까? 까딱하다간 이혼당하게 생긴 남편은 사형선고를 기다리는 기분이었다.
“라이킨.”
“예, 공주님.”
“라이킨은 연애 안 해봤어요?”
음. 교수형쯤 되겠다. * 사사삭, 사사삭, 불길하고 불쾌한 기운들이 말라빠져서 눈에 덮인 잡초 위를 쓸고 지나간다. 음울한 회색 대학 도시 글래스턴을 향해 기운들이 달려갔다. 그들을 억제하다 흔들리고, 결국 사라진 엘펜하임은 이제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성기사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아무도 그들을 막지 못했다. 힘은 약하지. 우리가 바라는 힘은 약하지. 지금 가지고 와야 해, 지금! 이히히히히, 마녀의 웃음소리가 섬뜩하게 들렸다. 눈이 시뻘게진 흑마법사들이 마력을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고 있는 대마법사를 내내 노리고 있었다. 사실 지금이 기회라면 기회였다. 이제 막 기지개를 켠 이들이 모처럼 모여서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갔다. 지난 약 석 달간 제각기 시도해보던 일들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기에, 그들은 어울리지도 않게 전부 힘을 합쳤다. 뱀파이어들을 죽이고, 대마법사의 시체는 공평하게 나눠서 뜯어먹자고. 좋아! 좋아! 좋아! 그들이 노리는 곳은 글래스턴 공작저. 그곳에 이미 무수히 뿌려진 흑마법사들의 피 따위 산 자에게 알 바가 아니었다. 그저 그들이 바라는 건 어두운 힘을 탐구할 수 있는 순수한 힘의 원천이자, 그들을 천대와 박해에서 벗어나 당연하게 끔찍한 실험을 자행할 수 있게 해주는 권세뿐이었다. 힘은 곧 권력이다. 마녀들과 마법사들은 무서운 웃음소리를 내며 먼 길을 달려갔다. *
“아니면.”
라이킨은 수백 년 동안 그가 사용했던 검을 바라보았다. 그 검은 요즘 부쩍 소렐의 침대 곁에 세워져 있었다. 여차하면 바로 빼들기 위함이다. 그는 저 검으로 방금 참수된 기분이었다.
“누구한테 아주 심하게 차였어요?”
그는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토끼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쳐다보는 시선이 따갑다.
“연애는 할 필요성을 못 느껴서 안 했고, 그래서 차인 적도 없습니다.”
“와, 그 얼굴로 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고 말하니까 엄청 말 된다…….”
소렐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라이킨은 그냥 눈을 딱 감고 죽고 싶었다.
“그럼 찬 적은 많았겠네!”
“예?”
“아, 그렇겠네, 저런 죄 많은 사람…….”
저런, 저런. 소렐은 통속소설을 주파하여 웬만한 연애에는 ‘이론적으로’ 밝은 사람답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공주님, 잠시, 잠시만…….”
“그럼 찬 적이 열 번도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냥 계속 말씀하십시오.”
“백 번은 넘어요?”
“그런 일을 천 년간 일일이 다 세어보지는 않았습니다.”
“백 번 넘는다는 얘기네. 그럼 그 사람들 찰 때 죄다 ‘나는 사랑의 짧은 유효기간 따위는 믿지 않아’라고 하면서 찼어요?”
과장되게 몸짓을 하면서 작은 집게손가락까지 까딱이며 그를 흉내내는 건 귀엽다. 참 귀여운데 라이킨은 너무 곤혹스러워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랬냐고요.”
듣기에는 삐약삐약 하는 소리로 들리지만, 잘못했다간 토끼에게 된통 걷어차인다. 그땐 교수형에 이어 참수형일 거다.
“그……,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회피하는구나.”
아아, 그렇구나! 소렐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쳐다보았다.
“정말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그런가 봅니다.”
그 말에 대한 대답은 오랫동안 들려오지 않았다. 눈을 희게 뜨고 그를 노려보던 소렐은 라이킨이 묵묵히 기다리고 또 기다린 후에야 입을 열었다.
“……속을 알 수가 있어야 내가 뭘 하지. 됐어요. 가 봐요.”
천 년이나 묵은 뱀파이어를 이제 갓 대마법사가 된 어설픈 토끼가 어떻게 상대하겠나. 또 구워삶아져서 한입에 홀라당 털어 먹히지만 않으면 다행이지. 흥이다! 흥!
“제 속을 알 수 있으시지 않습니까.”
여러 번 고민하던 말이 그의 입에서 툭 터져 나왔다.
“대마법사께서 할 수 없는 마법이 어디 있습니까.”
“마법 쓰지 말라면서요. 손끝 하나도 까딱이지 말라면서요. 말도 하지 말라면서요.”
흥, 흥, 흥! 또박또박 따진 공주님이 시선을 휙 하고 던져버렸다. 지금 단순히 삐친 게 아니라 아직까지도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는 않았기에 화가 난 거다. 새삼스럽게 그날 들었던 샤를렌과 라이킨의 대화를 되새겨보니 더 그랬다. 어쨌든, 그 대화에 대해 짚고 넘어가긴 해야 했다. 그래야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안 생기지.
“안 해요, 싫어요. 어차피 그때 솔직하게 말 다 했으면 그걸로 된 거지, 내가 뭐하러 이 몸을 하고 마력까지 낭비해가면서 마법으로 진실을 알아내요? 라이킨이 말을 할 때마다 이것이 진실인가, 거짓인가, 하고 마도구라도 가져와서 물어봐요?”
“뭐하러 그러십니까.”
조용히 말한 남자는 작은 손을 잡아다 제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공주님. 제 뇌를 헤집으세요. 마법을 사용하신 대가는 제가 대신 가져가겠습니다.”
그러곤 상냥하게 웃었다.
“샅샅이 다 뒤져서 제가 얼마나 공주님을 사랑하는지, 어떻게 사랑하고 공주님을 그리는지 전부 다 보세요.”
혹은 어떻게 집착하고 얼마나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전부 다 소유하고 싶어 미쳐버렸는지. 그의 표정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적어도 제 마음이 진심이란 건 아실 테니.”
얼마나 완벽하겠는가.
“의심은 안 하시겠지요.”
의심보다는 차라리 싸늘한 경멸이 나았다.
“라이킨, 나 방금 라이킨을 한 대 때릴 뻔했어요.”
그는 산뜻하게 웃었다.
“치십시오.”
모든 마법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펠릭스가 마법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딸에게 귀에 못이 박이도록 말한 바로 그 말은, 바꿔 말하면 해선 안 될 마법도 있다는 뜻이었다. 상상력의 한계란 존재하지 않았고, 사람의 가장 깊은 곳까지 파헤치고자 하는 욕망은 어디에나 있었다. 마법사는, 특히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그 한계가 없었다.
“미쳤어요?”
대마법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뇌를 헤집어라’라니. 그의 뇌를 샅샅이 다 읽어내는 동안 광기에 미칠 사람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진심입니다.”
“아, 미쳤구나.”
소렐은 한숨을 쉬며 라이킨의 머리에서 손을 떼려고 했지만, 그는 소렐의 손을 놔주지 않았다.
“공주님은 좀 뻔뻔해지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고작 ‘좀 뻔뻔해지면’ 할 수 있는 마법이던가.
“이거 못 놔요?”
빽 소리치고 나서 라이킨의 서늘한 눈과 마주친 소렐은 합 하고 입을 다물었다. 저 남자는 완전히 순수한 진심이었다. 그는 천천히 소렐의 손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공주님은 제가 제정신으로 보이십니까?”
“미친 사람이 자기 미쳤다고 하는 경우가 어디 있어요……?”
“스스로 정상이 아니라고 인식할 정도는 됩니다.”
기막혀 하는 목소리에 태연하게 대답한 라이킨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잘 쓸어내린 뒤, 머리빗을 멀리 치웠다.
“그러니 제 머리를 좀 더 헤집으셔도 저는 상관없습니다.”
“싫어요, 안 해요.”
소렐은 진저리를 쳤다. 결과를 생각하자니 끔찍했다.
“허면 공주님의 마음을 좀먹는 의심만 계속하시겠군요.”
그건 의심을 하는 사람이 가장 괴로운 일이다.
“계속 아파하실 테고요.”
라이킨은 한숨을 쉬었다. 아릿한 아픔이 푸른 눈에 번졌다. 미친 짓을 벌이는 건 그의 취미이자 특기였지만, 소렐 앞에서는 제대로 돌다가도 어쩔 수 없이 최소한의 이성은 유지하고 늘 물러나게 된다. 그는 그렇게 소렐에게 약했다. 이제 와서 깨닫자니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제 잘못입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소렐이 두고 갔던 약혼반지와 결혼반지는 그가 항상 소중히 품에 넣고 다녔다. 언제라도 소렐이 달라고 할 때만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런 때는, 어쩌면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런 건 아니라고요! 사람이 왜 그렇게 극단적이에요?”
갑자기 까만 머리카락 사이로 토끼 귀가 펑 하고 솟아올랐다. 라이킨은 놀라서 눈을 약간 크게 떴다. 화가 잔뜩 난 소렐이 라이킨의 옷깃을 꽉 움켜쥐었다. 졸지에 공주님께 멱살이 잡힌 뱀파이어는 당황했다. 아니, 이렇게 힘을 잔뜩 주시면 안 되는데. 하지만 공주님께서 퍼부으시는 말을 얌전히 들어야만 했다.
“신뢰를 무너뜨린 게 누군데 금방 포기해, 아쉬운 사람이 노력해야지! 내 말 듣고 있어요? 어? 내 말 듣고 있냐고! 내가 노력하는 건 보고 있냐고!”
“공주님, 이거 좀 놓으시고…….”
커다란 손이 하얗게 뼈가 불거진 작은 손을 감쌌다.
“손 아프실 겁니다.”
아무리 흔들어도 미동도 않는 두터운 상체를 지닌 남자는 작은 손을 풀어 내려놓고 엄지손가락으로 손등을 살살 문질렀다.
“그리고 저는 포기한 적 없습니다. 누가 포기한다고 했습니까?”
아차. 소렐의 귀가 위험을 감지했는지 쫑긋쫑긋, 움찔움찔댔다.
“공주님이 제게 뭘 어떻게 하시든 저는 좋다는 것뿐입니다. 공주님 말씀은 언제나 경청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뇌를 헤집으라니, 그런 말은 하는 거 아니에요. 절대 안 할 거야. 알아들어요?”
“예.”
온순하게 대답한 라이킨은 그녀를 살피다가 웃었다.
“공주님께서는 제가 모르는 사이 많이 바뀌신 것 같습니다.”
“내가 뭘요? 하나도 바뀌지 않았어요.”
라이킨은 귀가 튀어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가리려고 들지 않는 소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쉬지 않고 쏘아붙였다.
“라이킨도 하나도 안 바뀌었어요. 그런 말을 서슴지 않고 하고……. 정말 내가 라이킨한테 한마디도 안 하고 경멸이나 했으면 좋겠어요? 도대체 그 머리에서 무슨 상상을 하는 거예요? 내가 매일 벗고 있어요?”
“매일…….”
중얼거리던 남자의 표정이 어쩐지 서글퍼졌다.
“웃고 계시지요.”
뜻밖의 대답이었다.
“건강하시고요.”
그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