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The golden wave (7)2021.09.11.
“……미안해요.”
자그마한 공주님은 다시 한번 사과했다. 결합점을 정리하다 보니 라이킨이 흘린 피가 보통 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 때문에 다치지 않아도 되는 걸 자꾸 다쳐서, 정말 미안해요.”
결합점을 정리하느라 고개를 숙인 소렐은 차마 그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열심히 사과했다. 그래서 그가 어떤 눈을 하고 그녀를 바라보고, 얼마나 씁쓸하게 웃는지 보지 못했다.
“후유증은 없어요?”
사과를 듣고 싶은 게 아니라 날 얼마나 사랑하냐고 확인하고 보채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더 표현해 달라 떼를 쓰는 건 더 좋았다. 온순한 토끼 공주님은 그에게 마냥 미안하기만 한가 보다. 정작 그녀가 그렇게 착해서 발목이 잡혔다곤 상상도 못 하나 보다. 그래서 그가 더 비참해진다는 건 모르시는 건가.
“공주님. 저는 공주님 가디언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공주님을 잘 지켜야 하고, 평소에도 기사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니 선택받았지요.”
소렐은 문득 결합점을 고르고, 다듬는 자신의 손이 라이킨의 커다란 손 위에 여전히 올려져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뼈도 멀쩡하고, 아주 건강합니다. 그러니…….”
그리고 라이킨이 쓴웃음을 짓고 있다는 사실도 그제야 알았다.
“제발 사과하지 말아주십시오.”
너무 많이 사과하긴 했나? 소렐은 퍼뜩 고개를 들고 더듬더듬 말을 늘어놓았다.
“아니, 이거 정리하다 보니까 피가 너무 많이 묻었길래, 그래서 피를 많이 토했겠구나, 그래서…….”
그래서 반사적으로 나온 말인데.
“예.”
라이킨은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이거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요, 양이 상당해서…….”
“저는 바쁘지 않습니다. 필요한 작업이니 편하신 만큼 하십시오.”
결합점뿐인가. 문제는 여기저기 산재해 있었다. 소렐은 라이킨과의 관계 말고도, 사람들을 흠칫 놀라게 하는 마력을 어떻게든 제어해야 했다. 머리카락은 그새 또 제멋대로 머리리본을 풀고 스물스물 허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스스로 힘을 가지고 날뛰어대니, 아무리 모양을 잡아놔도 저절로 풀렸다.
“이리 오시는 게 좋겠습니다, 공주님. 공주님은 결합점을 정리하시고, 저는 공주님 머리카락을 정리해드리지요.”
그는 소렐이 의사를 표현하기 전까지는 함부로 끌어당기는 짓 따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렐은 결합점만 내려다보며 대충 고개를 끄덕인 뒤, 아주 당연하다는 듯 그의 무릎 위에 올라앉았다. 그의 품 안으로, 뱀파이어의 팔 안으로. 언제나 정해져 있던 그녀의 자리인, 남편의 무릎 위에 앉았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겠지만, 그래서 뻣뻣하게 굳은 사람은 라이킨이었다.
“머리카락은 아무리 묶어도 다 풀려요. 근데 결합점은 이렇게 묶었는데도 안 풀리네.”
종알종알 하던 대로 말하는 소렐은 지금도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영 모르는 눈치였다. 대마법사의 관심은 온통 피칠갑을 한 결합점에 쏟아졌다.
“……풀리면 안 되지요.”
누구 좋으라고 풀려. 라이킨은 간신히 소렐의 머리카락을 다시 빗기기 시작했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가락이 물결치는 까만 머리카락에 휘감겼다. * 소렐은 루드밀라에 대해 잊기로 했다. 대마법사가 ‘강제’로 각성을 했지만, 어쨌든 각성은 각성이다. 그녀는 조금 성장했고, 많이 변한 것 같았다. 스스로 판단하기에 어쨌든 그랬다. 남들은 뭐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아니, 어쩌면 라이킨에게 익숙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잔인한 면모까지도 이젠 익숙했다. 루드밀라를 그에게 넘긴 건, 그도 복수를 할 권리가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살이 좀 더 찌셔야겠습니다. 제대로 드시지도 않고 여기저기 다니시다가, 겨울이 다 되도록 누워 계셔서 얼마나 마르셨는지 모릅니다.”
라이킨은 그녀의 손목을 보며 속상해했다.
“마력으로 간신히 버티시고 계신 겁니다. 아십니까?”
“내가 지금 마력에 의존하고 있어요?”
그걸 정작 소렐이 모를 지경이었다. 덩달아 라이킨의 얼굴이 더 심각해졌다.
“예. 하다못해 걷고, 앉아 있는 걸 버티시는 것까지 전부 마력으로 의존하고 계십니다. 숨 쉬는 것보다 더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계시는군요. 그러면 원래 몸에 남은 근육은 전혀 일을 하지 않으니 악순환입니다.”
“잘 모르겠는데…….”
“잘 모르시니 더 문제이지요. 일단은 알아차리시는 것부터 해야겠군요.”
고대마법이 계승자가 죽게 놔둘 리가 만무하지만, 고된 여정에 풍천노숙까지 해가며 몸을 한계까지 끌어다 쓴 소렐에겐 결합점을 자른 게 아주 치명적이었다. 두 달 반이나 누워 있어서 근육도 거의 없는데 이리저리 다닐 수 있는 이유가 뭐였겠나. 순 마법 덕분이지.
“예전보다 훨씬 더 가벼워지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녀의 발로 걸어서도 안 되고, 웬만하면 마법도 사용하지 말고, 두 달 반 내내 물만 간신히 삼켰기에 소화능력도 다 떨어져서 묽은 음식만 먹어야 한다. 그 말을 하면서 라이킨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두 달 반 동안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소렐을 보며 그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소렐은 그런 표정을 짓는 그가 조금 신기하기도 했다.
“공주님께서는 지나치게 오랜 기간 동안 의식도 없이 누워 계셨습니다. 언제 깨어나실지, 깨어나실 수는 있을지 몰라서 늘 곁에 사람이 있어야 했지요. 깨어나신 지 아직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설마 벌써 괜찮겠습니까.”
라이킨은 새카맣게 탄 속은 감추고 애써 다정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말간 눈이 그를 올려다본다. 아직 마력 제어도 하지 못하고, 그러면서도 그를 오롯이 담아주지는 않는 눈. 혹은 그를 담다가도 다시 상념에 빠져 스르르 비껴가는 눈. 저 작은 공주님에게 상처를 입힌 게 못내 후회되고, 또 미련하게 상처를 준 자신이 너무 혐오스러워서 라이킨은 매일 괴로웠다.
“솔직히 결합점을 정리하시는 것도 못하게 말리고 싶습니다만.”
그는 아주 복잡한 표정으로 소렐이 만지작거리고 있는 결합점을 바라보았다. 저 작업은 마법을 사용할 때 더 매끄러운 흐름과 라이킨과의 조화로운 균형을 위해서라도 대마법사가 반드시 손질해야 하는 부분이니 라이킨은 더 말리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 소렐이 얼마나 지루하고 심심해하겠는가.
“이건 꼭 해야 하는 일이고, 별로 힘도 안 드는데요.”
그저 부드럽고 가느다란 결합점을 붙잡고 슥슥 매만지기만 하면 그만인데. 그러면 어느새 강제로 매듭지어진 결합점이 다시 매끈해졌다.
“예. 그래서 마음만 있고, 말리지는 않고 있잖습니까.”
태연하게 대꾸한 그는 노크 소리에 문을 열고 에벌린을 맞았다.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은 수레에 따끈한 김이 나는 음식을 싣고 들어왔다. 벌써 식사 때가 되었다.
“공주님이 좋아하시는 크림수프예요. 최대한 묽게 해봤어요. 맛은 없겠지만 조금만 참아주세요.”
“고마워요, 에벌린.”
덕분에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은 오랜만에 요리책을 여러 권 쌓아두고 계속해서 요리를 해대고 있었다.
“아유, 별말씀을. 저는 일이 있어 나가볼 테니 교수님, 좀 부탁해요.”
“걱정하지 말아요, 에벌린.”
에벌린은 음식을 내려놓고 다시 수레를 밀며 종종걸음으로 나갔다. 소렐은 결합점을 놓고 무의식적으로 숟가락을 집어 들려고 했지만, 라이킨은 숟가락을 넘겨주지 않았다.
“지금 숟가락 드실 힘도 없으신 거 아시지요?”
그는 모든 말과 행동을 극도로 조심했다. 소렐 앞에서 살얼음판 위를 걷는 기분이다. 소렐은 그들의 미래에 대해서는 아직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또 그의 마음에 대해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력에 의지하지 않으시고 근육을 사용하셔야 합니다.”
“그 방법을 잘 모르겠어서 문제예요…….”
어쩌지. 소렐의 어깨가 축 처졌다.
“제가 도와드릴 겁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식사부터 하세요.”
빙긋 웃은 라이킨은 그녀의 무릎 위에 담요를 펼쳐 덮어 놓은 뒤, 수프를 한 숟가락 떠서 내밀었다.
“그럼 나 궁금한 게 좀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지금 소렐은 ‘건강 회복’이라는 명목하에 여러 가지 행동이 제약되고 있었다. 하지만 라이킨 입장에서도 할 말은 많았다. 그 ‘행동’이란 게 가만히 앉아서 신문이나 책을 보는 건 좋겠지만, 대뜸 ‘서재’에서 ‘저주를 연구’하겠다는 식이니 라이킨과 에벌린이 안 된다고 할 수밖에. 하여튼 대마법사들이란 어쩜 저리 똑같은지 모르겠다.
“한입 드실 때마다 질문 하나씩 하시지요.”
소렐의 말에 라이킨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제안했다. 궁금한 게 많으신 토끼 공주님께서 궁금한 만큼 많이 드셔야지.
“좋아요.”
어차피 협상은 라이킨의 특기였다. 결국 소렐은 열심히 받아먹기 시작했다. 라이킨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 때문에 걱정하고 속이 타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나중에 그녀와 쏙 빼닮은 아이들을 상대할 걸 생각하니 앞일이 까마득했다. 얼마나 말도 안 듣고, 얼마나 아빠 혼을 빼버릴까. 이거 좋아, 저거 하기 싫어, 투정은 투정대로 부리겠지.
“저기, 내가 신문을 찾아봤는데, 나에 대한 이야기는 안 들리더라고요. 법적으로 이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다 말해줘요.”
아무리 이 나라, 올센이 유지될 수 있는 배경에 뱀파이어 귀족들의 공로가 무척 크다 해도 소렐이 각성하면서 벌인 일을 없는 것처럼 넘어갈 수는 없다. 당연히 올센의 국왕 페르난데스 7세가 이 나라 안에서 돌아다니는 대마법사를 그냥 둘 리가 만무한데, 이상하게 아무런 소문이 없었다. 꼭 누가 입을 틀어막은 것 같다.
“공주님을 누가 기소하고, 누가 체포한답니까?”
느릿하게 되물은 라이킨은 한 숟가락을 더 떠서 내밀었다. 너무 묽은 수프라 마음이 아팠지만, 에벌린이 무슨 마법을 부렸는지 소렐은 맛있다며 답삭답삭 잘 받아먹었다.
“기소할 검사도 없고, 체포할 경찰도 없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공주님은 기소당하실 일도 없습니다.”
“왜요?”
물어놓고 소렐은 얼른 한 숟가락을 답삭 먹었다. 설마 귀족 면책특권인가?
“글쎄요, 무슨 죄목으로 기소할까요? 밀입국을 한 불법 침입자들에게 납치당할 뻔했다가 정당방위를 한 죄? 그건 이 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도 납득하지 못할 겁니다.”
라이킨은 한 숟가락을 더 떠서 소렐에게 먹였다.
“그렇지만…….”
소렐은 자신이 저지른 일 중 최고로 나쁜 짓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에설론 백작은 이 나라 사람이잖아요.”
“감히 칼리에르 공비이자 대마법사를 불법 침입자들에게 팔아먹으려고 한 내부공모자이기도 하지요.”
순식간에 새파란 눈에 차가운 분노가 들끓었다.
“아주 잘하신 겁니다, 공주님. 공주님이 그 여자를 그냥 놔두셨다면 제가 직접 똑같이 했을 겁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라이킨을 손가락질하면 어떡해요.”
라이킨은 글래스턴 공작‘전하’고, 아주 명예가 드높은 사람인데.
“내가 라이킨이랑……, 아버님이랑 샤를렌 명예를 실추시켰어요.”
소렐은 고개를 푹 숙였지만 그는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을 약간 크게 뜨더니 웃었다.
“지금 그 이유 때문에 이혼장을 계속 내버려두고 계시는 겁니까?”
“나도 귀족사회가 얼마나 보수적인지는 알아요. 나 때문에 그동안 쌓아 온 집안의 명예가 떨어지는 게, 라이킨은 좋아요?”
기껏 열심히 힘든 말을 했는데 라이킨은 서늘한 눈으로 웃기만 했다. 이젠 공주님께서도 그런 사교계의 일까지 신경을 쓰시게 된 건가. 다름 아닌 그를 걱정해준다는 게 가장 기뻤다.
“글쎄요, 공주님. 저 집 며느리가 대단한 대마법사라는 말만 들을 겁니다.”
그는 말을 끝낸 뒤 잠시 침실 문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나, 싶은데 다시 평범한 표정으로 수프를 마저 떠서 내민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법적인 문제는…….”
라이킨은 잠시 아버지가 복잡하게 움직이고 있는 정치문제를 가늠하고, 또 미래의 몇 수를 내다보았다.
“좀 더 체력을 보충하시고, 건강해지신 뒤에 엔버네스로 가서 하루나 이틀 정도 투자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게 다예요?”
질문이니까 또 한입.
“예. 공주님은 글래스턴 공비로서 글래스턴에 밀입국한 놈들을 처리하신 것에 불과하고, 에설론 백작 건이 좀 골치가 아파서 그렇게 시간을 들이셔야 합니다. 좀 귀찮지요.”
백작을 죽인 걸로 처리되었는데 겨우 이틀 투자하는 거라면 정말 말도 안 되는 특권인 거 아닌가. 소렐은 굳이 엔버네스로 가서 그 긴 시간을 투자해야겠냐는 듯, 미간을 찌푸리는 라이킨의 정치적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지금 에설론 백작위의 계승자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그 여자에게는 법적인 자식이 없었거든요. 덕분에 법률가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지요.”
라이킨은 조곤조곤 알기 쉽게 설명해주면서 소렐에게 계속 수프를 떠먹였다.
“아마 가장 가까운 방계로 돌아갈 겁니다. 그것만으로도 큰일인데, 절차가 아직 느리지요. 일단 계승자가 법적으로 결정되면, 계승자는 에설론 백작의 장례식을 반드시 치러야 합니다.”
“시신이 없는데 어쩌죠?”
또 한입. 라이킨은 소렐이 궁금한 게 많아서 좋았다. 그는 그녀가 한마디 할 때마다 허파에 바람이 들어간 사람처럼 계속 웃었다.
“빈 관으로도 장례식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형식이니까요. 하지만, 시신이 없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에설론 백작이 어떻게 죽었느냐는 문제입니다. 계승자는 그 과정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책임 있는 사람에게 소송 정도는 제기해야 합니다.”
소송! 소렐의 눈이 그의 예상대로 동그래졌다. 라이킨은 즐거웠다. 그녀가 그의 앞에서 말을 하고, 다양한 표정을 보여줘서 즐거웠다.
“하지만 소송까지는 가지 않도록 막을 겁니다.”
“그럼……?”
라이킨은 소렐이 이야기에 집중해서 주는 대로 열심히 받아먹고 있다는 걸 알았다. 언제 소렐이 그를 내칠까, 받아줄까, 지금 속을 모르겠어서 불안하기만 한데, 그래도 잘 드시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그는 정말 답이 없었다.
“그래도 소명 절차 정도는 밟아야겠지요. 에설론 백작이 어떻게 죽었는지, 또 그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밝히는 법적인 절차입니다. 백작의 시신이 없어도, 죽음에 대한 법정 서류는 남아야 하는 게 이 나라 법입니다.”
글래스턴 공작은 빈정거렸다.
“그렇구나……. 그래서 소명 절차를 엔버네스에서 밟는 거군요.”
“예, 그렇습니다. 어쨌든 거기까지 가는데 시간이 상당히 걸릴 테니, 공주님께서는 걱정하지 마시고 일단은 체력만 보충하십시오. 공주님께서 혼수상태이셨던 게 두 달 반이지만, 그사이에도 이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잖습니까.”
그러니 갈 길이 멀고, 소렐에게는 남은 시간이 많다는 거였다.
“소명 절차만 밟으면 그걸로 끝이에요?”
“예. 그렇게 될 겁니다. 에설론 백작 일은 그로써 마무리 지어야지요.”
만일 그렇지 않다면 라이킨이 강제로 중지시킬 거다. 그는 필요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최대한 귀찮은 일들은 없애고, 소렐에게만 집중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속을 이제는 모르겠다.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결론은 내린 모양인데, 그게 대마법사와 가디언의 관계를 말한 건지, 아니면 마음이 통하는 부부의 관계를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모르겠어서 피가 바짝바짝 말라가고 있었다.
“그보다 더 중한 일들이 많습니다. 아버님이 하신 말씀이 제일 중요합니다, 공주님.”
아, 그렇지. 소렐은 ‘더불어 내 일도 좀 중요하게 생각해주세요’라는 라이킨의 표정은 보지 못했다.
“……다 드세요.”
소렐은 들이밀어진 숟가락을 얼른 받아먹었다. 라이킨은 수프 그릇을 싹싹 긁어 다 먹이고, 머리카락을 한 번 더 빗어준 뒤 쟁반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앉아 계십시오.”
그는 소렐에게 오늘자 신문을 주곤 나갔다. 뭐 재미있는 거 없나, 싶어 신문을 펼치는 그녀를 뒤로하고, 라이킨은 침실 문을 굳게 닫았다. 그러곤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그는 쟁반을 둬야 하는 주방 쪽으로 가지 않고, 방향을 틀었다. 새카만 어둠 저편에 소매를 걷어붙이고 있는 에벌린이 있었다. 라이킨은 가만히 서서 눈으로만 물었다.
“별 건 아니에요. 세 놈이 기어들어왔네요.”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의 튼실하고 든든한 팔뚝이 움직이자 뚜둑, 하고 뭔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라이킨은 에벌린이 서 있는 어둠 속을 응시했다.
“공주님은 잘 드셨나요?”
“뚝딱 비우셨습니다.”
“아유, 다행이고 고마워라. 다음에는 초콜릿이나 사탕이라도 한 조각 올려드려야겠네.”
“그래야겠습니다.”
라이킨은 소리 없이 등장한 그의 수하들이 에벌린에게서 시신들을 넘겨받는 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공주님께 말씀드려야 하나. 그가 기껏 피를 흘려가며 확보해놓은 안락한 둥지에서 편히 쉬시기만 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모든 걸 다 이야기하기로 약속한 이상 언질은 해야 했다. 소렐은 공작저에 침입자가 있었다는 걸 눈치챌 단계는 아니니까. 소렐의 침실에만 들어가면 표정이 환해지는 그는, 그곳이 침실이 아니라서 어둡고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