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The golden wave (6)2021.09.08.
라이킨에게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말을 퍼붓고, 그는 결코 인정하지 않았지만 싸워볼 만큼 시원하게 싸웠다. 그 후에 곧장 아빠가 한 번 쓸고 지나가니, 소렐은 어느 정도 정신이 들었다. 아니, 정신이 맑아졌다고 하는 게 맞겠다. 그녀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마음으로 옷을 제대로 입고, 배가 고프다고 했다. 당연히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이 기쁜 마음으로 묽은 음식을 들고 왔다. 배를 든든히 채우고, 말끔한 상태로 소렐은 해야 할 일을 했다.
“그……, 아빠가 그런 마법을 걸어놔서 정말 미안해요.”
라이킨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를 ‘그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가’ 사랑하며,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아 하는 건 사실이다. 완전히 다 풀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소렐은 조심스럽게 사과했다.
“라이킨은 괜찮다고 했지만, 어쨌든 나는 사과는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녀는 아주 화가 나지 않은 이상, 기본적으로 온순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하며, 또한 책임감이 있는 성격이었다. 소렐은 무시무시했던 그날이 떠오르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수그렸다. 그러다가 고개를 팍 들고, 꼭 다짐하듯이 똑바른 눈빛으로 말했다.
“내가 꼭 풀어줄게요.”
“다들 제 말은 전혀 안 들으시는군요. 저는 그냥 그대로 가만히 두는 게 좋은데요.”
“……그 저주는 당연한 거 아니에요. 내가 다쳤다고 라이킨도 꼭 다치란 법은 없잖아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라이킨으로 인해 소렐이 아파하고 힘들 때 저주가 실현되는 거다.
“저는 ‘당연하다’고 말하지 않고 ‘좋다’고 아주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어딘가 나사가 빠진 것 같은 남자가 수려한 얼굴로 빙글빙글 웃었다. 그는 소렐이 식사할 때마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도록 시중까지 다 직접 들어놓은 참이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이 문제는 말이 안 통하겠다.
“……알겠어요, 그럼 다음.”
“예, 말씀하십시오.”
설마 부부간의 규칙을 말씀하시는 건가. 그거라면 그도 얼마든지 적극적으로 합의할 수 있었다.
“……에설론 백작도 죽었다는데, 죽은 거 아니죠?”
여기서 그 여자 얘기가 왜 또 나와? 라이킨의 기쁘던 얼굴이 팍 식었다. 하지만 소렐은 대마법사로서 해야 할 일을 차분히 가려서 하는 중이었다.
“내가 그 부상을 입고도 죽지는 못하게 만들어놨는데……, 혹시 라이킨이 죽였어요? 아니라면 내가 가서 마법은 풀어놓으려고요.”
“어째서요?”
“두 달 넘게 겪었다면 이제 충분한 것 같아서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느껴질 만큼 잔인한 여생을 선사했다. 그때 소렐은 강제로 각성된 여파로 제정신이 아닐 만큼 격노했었다. 그때 한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조금 관대했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어쨌든 라이킨이 알게 된 일이니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그 말을 들은 라이킨의 표정이 또 바뀌었다. 소렐이 잠들었던 내내 늘 차갑기만 하던 얼굴이, 눈을 뜬 소렐 앞에서 시시각각 다채롭게 변화하고 있었다. 그는 또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공주님은 참 착하시다.
“……예전이었다면 공주님께 그 여자는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을 겁니다.”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세상이 그렇게 알고 있고, 저는 공주님께서 어떤 성격이신지 잘 알고 있으니 마음의 부담을 덜어드리고자, 그렇게 말했을 겁니다.”
타닥타닥 벽난로가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장작을 태우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글래스턴 공작저의 벽은 켜켜이 내려앉은 세월과 그만큼의 찬란한 역사를 자랑하는 초상화와 풍경화로 장식되어 있었다. 두터운 벨벳 커튼과 투명하고 흰 커튼이 멋진 조화를 이루며 바깥의 설경을 슬쩍 보였다.
“그게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걸 이제 알았습니다.”
솔직히 라이킨은 소렐이 그를 지금 얼마나 좋아하는지 가늠이 되지 않아 불안했다. 이런 상황이 생기기 전에 좀 더 일찍 루드밀라의 목을 잘랐어야 했다. 온몸으로 그를 좋아한다고 외치던 공주님이 울면서 도망치고, 심지어 엘펜하임까지 들어가서 그와의 결합점을 죄다 끊어내려고 하는 걸 눈앞에서 직접 봤는데, 그라고 멀쩡할까. 엄청난 충격에 스스로를 추스를 새도 없이 소렐만 쫓아다녔다. 지금도 열심히 쫓아다니고, 필요하다면 또 울면서 무릎을 꿇고 애원할 거다. 라이킨은 자꾸만 소렐을 붙잡을 방법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앞으로는 공주님께 숨기는 일 없이 전부 소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여자는 지금 살아 있습니다.”
그는 아주 신중하게 말했다. 소렐에게 그의 진심이 제대로 보이길, 정직하게 하나도 숨김없이 이야기하고 있는 게 그대로 전달되길 애타게 바라면서.
“공주님께서 떠나신 곳을 제가 수습했으니, 그건 당연한 일이지요.”
소렐도 짐작했던 일이다.
“왜 제가 그 여자를 죽었다고 언론에 알렸는지도 아시겠지요?”
그는 루드밀라를 자신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그 여자’라고 불렀다. 어떤 경멸하는, 그러나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는 형식의 호칭이 ‘그 여자’인가 보다.
“……알아요.”
소렐은 이젠 남편의 잔인한 면모도 잘 알았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결코 그녀에게 향하지는 않지만, 라이킨은 필요하다면, 아니, 필요하지 않다 해도 내키면 아주 잔혹하게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저는 공주님께서 제게 그 여자를 처리할 권한을 완전히 넘겨주셨으면 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루드밀라는 용서할 수 없다는 듯 새파란 눈이 무섭게 번뜩였다. 다정하고 따뜻한 손길로 아내의 무릎 위에 담요를 꼭꼭 덮어주면서, 논하는 말은 무섭기 그지없었다.
“다른 엘펜하임 놈들이 더 살아 있었다면 이런 요청은 드리지 않았을 테지만, 남은 게 그 여자밖에 없군요. 공주님, 제 몫의 복수를 하게 해주십시오. 저는 이런 일은 결코 곱게 넘어가지 않습니다.”
“……라이킨은…….”
소렐은 조금 어렵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내가 스무 명을 죽이고 한 사람은 상해를 입힌 혐의를 받는 게, 스물한 명을 죽인 혐의를 받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그건 대단히 귀족다운 계산이었다. 그의 공비가 그런 혐의를 받고 있다는 게 그에겐 불명예가 아닌가.
“스무 명이나 스물한 명이나 어차피 죽어 마땅한 짓을 한 놈들이고, 살려두었다간 내내 독이 될 화근은 바깥으로 내보내지 않는 게 맞습니다, 공주님. 동정을 베푸신다면 베풀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 베푸십시오.”
예를 들면 그녀의 남편에게라든가. 그라면 그 동정이라도 눈물 나게 감사해서, 게걸스럽게 핥아먹고 어떻게든 더 받고 싶어 매달리고 또 매달릴 거다.
“그 여자는 풀어주자마자 공주님을 더 적대시할 겁니다. 저는 그 꼴은 절대로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라이킨은 소렐을 똑바로 보며 분명하게 말했다.
“안 그래도 지금도 일찍 죽였어야 했다고 후회하는 중입니다.”
“……그럼 그냥 지금 죽이지…….”
“공주님께서 그간 하신 고생에 비하면 지금 주어지는 죽음은 그 여자에겐 축복입니다.”
그는 단호했지만, 마지못해 말했다.
“물론 공주님께서 안 된다고 하시면 그 말씀에 따르겠지만…….”
그가 감히 공주님의 말에 거역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루드밀라는 곤란했다.
“후환은 남기지 마십시오, 공주님.”
그 말이 끝나자마자 소렐이 선뜻 고개를 끄덕여서, 오히려 라이킨이 놀랐다.
“알겠어요. 라이킨 좋을 대로 해요.”
“허락해주시는 겁니까?”
이렇게 쉽게?
“후환이 될 거라면서요. 두 달 반이 넘도록 그 지경으로 겪었을 텐데, 풀어줬는데 반성은커녕 복수할 거라고 더 큰 일을 벌이려 한다면 놔줄 수 없지요. 나도 어쭙잖은 동정심으로 후환을 남기는 바보는 아니에요.”
그러기엔 지나치게 살벌한 세상이라는 걸, 소렐도 방랑하면서 많이 배웠다. 애초에 루드밀라가 바로 그 방랑의 원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일에 대한 처리는 라이킨이 나보다 더 잘 알겠죠.”
“그건 아닙니다. 제가 그냥 뒤끝이 좀 긴 것뿐입니다.”
남들보다 훨씬 더 치열하게 복수하는 편이기도 하고. 라이킨은 아주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럼 뒤끝이 길고 복수도 철저하게 하는 글래스턴 공작님.”
“예, 글래스턴 공비전하.”
소렐은 손을 펼쳤다. 라이킨은 얼른 그 작은 손을 두 손으로 감싸며 뭐가 필요하냐고 눈으로 물었다.
“……보통은 손을 잡지 않고 뭐가 문제냐고 물어봐요.”
“공주님께서 손을 주셨으면 일단은 잡고 봐야지요. 제가 지금 많이 절박한 처지인지라.”
그는 지금 속이 바짝 타서 전전긍긍하는 중이었다. 소렐이 도대체 어떤 결론을 내릴지 알 수가 없었다. 믿고 싶은데, 희망을 걸고 싶은데 함부로 희망을 걸었다가 다 깨져버리면 어쩌지? 이 팍팍한 인생에 두려운 게 생겼다. 겪을 건 다 겪어서 아무것도 두렵지도 않고, 미련마저 없었는데. 삶은 놀라움의 연속이다.
“결합점 좀 다시 볼게요.”
아, 그 얘기였나. 라이킨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순식간에 두 사람만 볼 수 있는 황금색 결합점이 부드럽게 펼쳐졌다. 다른 것들은 전부 매끄럽게 춤을 추듯 미끄러져 내렸지만, 소렐이 모질게 끊어놨던 부분을 라이킨이 강제로 우악스럽게 연결한 부분은 그러지 못했다. 다시 보니 그 양이 놀랄 정도로 상당했다. 그 덕에 소렐은 두 달 반이나 혼수상태였고, 라이킨은 라이킨대로 피를 쏟았다.
‘나 진짜 많이 끊어놨네.’
소렐은 그의 피가 묻은 결합점들을 모아다 살피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정신없이 하느라 많이 엉망이긴 합니다만…….”
그녀의 표정을 잘못 해석한 라이킨이 슬쩍 눈치를 보았다.
“내가 많이 끊어놨네요.”
“……예.”
조금만 덜 끊었어도 조금이라도 더 일찍 일어나셨을 텐데. 조금이라도 덜 아프셨을 텐데. 라이킨의 섬세하고 긴 속눈썹이 아래로 향했다.
“조금 정리만 할게요. 끊는 건 아니에요. 끊지 못하니까.”
“예, 알고 있습니다.”
벌어진 일은 수습하고, 잘 정리하고, 얻을 수 있는 건 얻고, 털어내야 할 것은 털어내야 한다. 그 자리에 머물러 곱씹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라이킨의 새카만 피가 선명하게 묻어 굳은 결합점들이 소렐의 손안에서 밝게 빛을 냈다. 이미 그에게 많은 비중이 넘어간 결합점들은 이제 그가 계속 짊어질 것이다.
* 아서 모드릭 헴피온, 슈토넨 변경백, 혹은 슈토넨 후작은 새카만 중절모를 집사에게 넘기며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그는 지팡이부터 프록코트까지 전부 다 검은색으로 맞춰 입은 채 외출했다가 돌아왔다. 누가 봐도 장례식에 참석하는 복장이었다.
“불과 두세 달 남짓한 사이에 이게 다 뭔지.”
끊임없이 부고가 날아들고 있었다. 한두 번은 그렇다 하지만, 그게 수많은 사람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과 겹치면 공포가 된다. 오래도록 살아온 슈토넨 후작은 눈을 가늘게 떴다. 세월이 세월인지라, 그가 수많은 의복을 갈아입고, 말을 타다가 기차를 타게 된 지금, 그의 눈가에도 주름들이 많이 생겼다.
“빌어먹을 제임스 칼리에르.”
에설론 백작은 칼리에르 공비, 새로운 대마법사가 제대로 죽였다. 칼리에르 공비 자리까지 노리고 있던 그녀가 사망함에 따라 에설론 백작위는 이제 프랑슈틸 가문이 아닌, 그 방계로 넘어가게 생겼다. 차라리 칼리에르 공이 아니라 다른 남자를 만나 일찍 결혼했다거나, 전대 칼리에르 공이 했듯 빨리 후계자부터 세웠다면 그런 유감스러운 일은 없었을 텐데.
‘유감이긴 하지만 그깟 가문에서 백작위를 잃는 것 따위 내 알 바가 아니야.’
슈토넨 후작은 화가 나서 곧장 서재로 가 빈 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뱀파이어에게 음주는 딱히 소용이 없었지만, 요즘 그는 술을 찾는 빈도가 늘었다.
‘빌어먹을 계집, 내 뒤통수를 치고 일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루드밀라와 소렐 이드리스, 그리고 엘펜하임 지도부가 한자리에 있었다는 사실만 듣고서 기절하는 줄 알았다. 절대 같이 있어서는 안 될 이들이 한자리에 있어서 함께 죽었다니, 무슨 뜻이겠는가. 살아남은 이를 제외하곤 전부 다 한통속이었다는 거지. 결국 협정서에 서명했지만, 루드밀라 역시 동족을 배신한 거다. 엘펜하임에게 소렐 이드리스를 팔아넘기다니!
“제정신이 아니야, 제정신이 아니야……!”
슈토넨 후작은 고개를 흔들며 잔을 비웠다. 요즘 것들은 자기밖에 생각하지 않는 게 문제다. 정말 문제다. 에설론 백작도 그렇지만, 지금 미친 짓을 벌이고 있는 제임스 칼리에르도 마찬가지였다.
‘나에게는 언제 찾아올 테냐?’
새파랗게 젊은 놈이 감히 노회한 뱀파이어의 목을 조금씩 조르고 있었다. 정작 그에게는 칼리에르가 키운다는 그 유명한 암살자가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는데, 자꾸 부고나 실종 소식만 들려온다. 소식이 들려오는 이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였다. 소렐 이드리스가 뱀파이어에게 위협이 될 경우, 죽이겠다고 협정서에 서명한 뱀파이어들이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슈토넨 후작은 잔에 가득 술을 따라 마셨다. 몇 달 새 벌써 장례만 일곱 번째예요. 실종은 다섯 건이 넘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실종도 있겠지요. 이 정도면 학살이지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오늘 다녀온 장례식에서도 사람들은 목소리를 낮춰 수군거렸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서야 이렇게 뱀파이어들이 많이 사망하는 일도 드물었다. 제임스 칼리에르는 지금 대학살을 벌이고 있었다. 슈토넨 후작은 탁 소리가 나도록 빈 잔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이대로 가만 앉아서 당하고 있기엔 살아온 세월이 아까웠다. 그는 한 번 주먹을 부르르 떤 뒤, 책상 앞에 앉아 신속히 펜을 들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의 부름에 대답하는 이들이 거의 없을 것 같았다. 펜을 든 손에 힘이 빠졌다.
‘도대체 누가?’
누가 그를 도와 제임스 칼리에르를 막고, 고대마법을 막는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