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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The golden wave (4) (114/181)

114. The golden wave (4)2021.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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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법으로 만든 허상이든, 어쨌든 펠릭스 이드리스는 실제와 똑같았다. 아내가 죽고서 제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았을 때, 한참 어린 딸을 보며 심정이 어땠을까.

16606122628422.jpg“네놈이 하는 짓이 아주 뻔해. 보나 마나 헬레인 왕가, 그리고 이드리스 가문과 정략결혼 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허구한 날 주사위 굴려대던 머리로 또 뭔 짓을 했겠지. 잠깐, 너 아직도 도박판 쓸고 다니냐?”

16606122628426.jpg“그게 도대체 언제적 얘기야?”

라이킨은 펄쩍 뛰었다. 다른 건 몰라도 소렐 앞에서 도박판을 쓸고 다녔다는 과거는 들춰내선 안 된다.

16606122628422.jpg“내가 네놈을 마지막으로 봤을 때도 한참 칩을 집채만큼 쌓아놓고 있었던 것 같은데?”

16606122628426.jpg“재미없어서 손 턴 지 백 년이야. 매번 이기기만 하는데 재미가 있나.”

하지만 이미 들춰내졌다면, 최선을 다해 솔직하고 당당하게 굴어야 한다.

16606122628422.jpg“백 년밖에 안 됐다고? 무슨 바람이 불어서? 아니, 너 ‘설마’ 바람났냐?”

세상에. 소렐은 입을 틀어막았다.

16606122628426.jpg“미친…….”

라이킨이 결국 얼굴을 완전히 일그러뜨렸다.

16606122628426.jpg“사람을 도대체 뭘로 보고…….”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왔다. 이제 보니 사람 말을 제대로 안 들어주는 건 순전히 이 집안 내력이었다.

16606122628422.jpg“아니야?”

16606122628426.jpg“아니야!”

이건 뱀파이어라도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 판이다. 라이킨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16606122628422.jpg“하긴 네놈이 다른 건 몰라도 여자도 관심 없고, 남자도 관심 없어 했지.”

펠릭스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아빠를 뜯어말리려던 소렐의 눈에 호기심이 잔뜩 어렸다. 남편의 과거 얘기가 나왔다!

16606122631903.jpg“그랬어요?”

말간 공주님께서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시니 라이킨은 미칠 노릇이었고, 펠릭스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16606122628422.jpg“그랬지. 그래서 난 저놈이 고자인가, 했다니까.”

고자라니, 제발 공주님 앞에서 단어 좀 잘 선별하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의 말은 아무래도 통하지 않을 성싶었다. 아빠의 말을 듣던 소렐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16606122631903.jpg“약혼한 사람은 있던데…….”

16606122628422.jpg“뭐야?”

16606122631903.jpg“잘 어울리던데…….”

아버지의 목소리는 험악해지고, 딸의 목소리는 점점 시무룩해졌다. 펠릭스는 라이킨에게 아주 진지하게 물었다.

16606122628422.jpg“너 죽고 싶냐?”

16606122628426.jpg“넌 내가 루드밀라 프랑슈틸 그 여자랑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냐?”

라이킨은 하도 어이가 없어 덤덤한 얼굴로 되물었다.

16606122628422.jpg“아, 그 저 좋을 대로 생각하던 뱀파이어? 별로 어울리지는 않지. 한쪽은 지나치게 야망이 크고, 한쪽은 지나치게 고루하고. 그런데 소렐, 저놈이 그 여자랑 친하게 지내서 널 속상하게 했어?”

그래서 결합점을 끊으려고 한 건가? 아빠는 자꾸만 캐물었다.

16606122631903.jpg“그건 아니지만…….”

소렐은 고개를 숙이며 흔들었다. 지금 꽤나 미묘한 상황이었지만, 라이킨은 소렐을 그 와중에도 게걸스럽게 핥아내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빠한테 혼날 것 같을 때는 저렇게 양손을 잡고 쪼물락거리는구나. 그러다가도 혼날까, 싶어 아빠를 슬쩍 올려다보는구나. 양 뺨이 발그레하고, 눈이 동그란 어린 딸이 그에게 혼이 날까 봐 저리 쳐다본다면 그는 혼내려던 것도 잊고 말겠다. 엄마를 닮아 아주 예쁘고 착할 딸일 텐데, 일을 저질렀다면 당연히 이유가 있겠지.

16606122628426.jpg“그 여자가 공주님을 강제 각성시켰어.”

라이킨이 한마디 보탰지만, 펠릭스는 사위새끼의 말은 한마디도 듣고 싶지 않았다.

16606122628422.jpg“누가 너한테 물어봤어?”

닥치라는 뜻이다.

16606122628426.jpg“내 해명은?”

16606122628422.jpg“소렐이 말한 뒤에나 말해.”

펠릭스는 차갑게 라이킨에게 일갈했다. 아, 그래. 그럴 줄 알았다. 라이킨은 두 손을 들고 얌전히 소렐이 말하길 기다렸다.

16606122628422.jpg“소렐, 아빠는 네가 아무 이유 없이 결합점을 끊는 일을 벌였을 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 분명히 네가 생각하기에 타당한 이유가 있었을 거고, 타당했다면 아빠도 이해해. 그럴 수도 있어. 왜 그랬니?”

머뭇머뭇, 꼼지락거리던 토끼가 갑자기 고개를 팍 쳐들었다. 그러곤 작은 손가락으로 남편을 딱 가리켰다.

16606122631903.jpg“아빠, 저 사람이 나 애완토끼라고, 도살한다고 다른 뱀파이어들한테 그랬다!”

소렐은 이젠 더 이상 없는 아빠에게 일러바칠 기회가 지금 한 번뿐이란 걸 깨달았다. 라이킨의 진심을 의심하지는 않지만, 앙금처럼 남아 있던 일을 아빠한테 일러바치자 갑자기 속이 뻥 뚫렸다. 신난다! 그리고 천하에 다시없을 개새끼가 된 기분에 라이킨은 눈을 지그시 눌러 감았다가 떴다. 펠릭스는 라이킨을 쳐다보았다.

16606122628422.jpg“해명해봐.”

16606122628426.jpg“협정서 때문이야. 자네를 상대로도 똑같은 게 있었잖아.”

알면서 왜 그러냐는 투에 펠릭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16606122628422.jpg“그래. 자네 ‘어머니’가 만들었지.”

16606122628426.jpg“그리고 ‘내’가 자네한테 조심하라고 말해줬고.”

이쪽에서 한마디가 튀어나오면 저쪽에서 바로 받아친다. 소렐은 아빠와 라이킨의 새로운 면모를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솔직히 너무 신기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두 사람은 무척 친했던 모양이다.

16606122628426.jpg“공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면서 마법을 점점 사용하시기 시작했고, 그게 공개적으로 꽤 크게 드러났어. ……다른 뱀파이어들이 나한테도 서명하라고 난리였지. 알다시피 어머니 때도 살아 있었던 뱀파이어들이잖아.”

그리고 그들은 펠릭스를 상대로 한 협정서에도 서명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하지도 않았던 펠릭스는 다시 팔짱을 꼈다.

16606122628422.jpg“그래서 그걸 자네가 얌전히 서명했다고?”

네놈이 절대로 그랬을 리가 없을 텐데. 펠릭스는 라이킨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펠릭스가 예상했던 대로 라이킨은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으며 몸을 길게 기댔다.

16606122628426.jpg“일이 좀 커지니 개들이 덩달아 짖어대고, 다 때려잡자니 일일이 알아내는 게 번거롭잖아.”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고귀하지만 스스로 천한 출신이라 일컫는 뱀파이어의 모든 행동은 나른하면서도 여유로웠고, 다른 뱀파이어들을 가차 없이 ‘개’ 취급했다.

16606122628426.jpg“한 번에 누가 짖는지 전부 알아내고, 그동안 좀 닥치게 하려면…….”

소렐은 협정서에 서명하던 서늘한 라이킨의 표정을 지금 다시 한번 보았다. 그리고 그의 말을 아빠가 아무렇지도 않게 받는 걸 보고 조금 놀랐다.

16606122628422.jpg“직접 개떼들에게 섞이는 수밖에.”

펠릭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딸을 돌아보았다. 그와 아내, 그리고 라이킨이 안배했던 대로 자연스럽게 각성하지 못하고 강제로 각성되어 풍파를 모질게 겪은 딸이 안쓰럽긴 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고, 받아들여야 할 일은 아무리 쓰디써도 삼켜가며 소화시켜야 하는 법. 소렐이 평범한 스무 살이었다면 그럴 필요조차 없었겠지만 그녀는 이미 대마법사다. 어쩌면 어쩔 수 없다는 걸, 소렐도 아는 모양이다. 아빠를 쳐다보는 눈에 약간의 포기와 이해가 이미 서려 있었다.

16606122628422.jpg“알겠으니까 잠깐 자리 좀 피해줘.”

방만한 차림으로 아내의 머리카락을 소중하게 말려주고 있다가 난데없이 봉변을 당한 사위놈은 그대로 방에서 내쫓겼다. 여긴 엄연히 그의 공작저지만 그가 무슨 힘이 있겠나.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16606122628422.jpg“소렐.”

16606122631903.jpg“그건 그냥 그런 거고 어쩔 수 없다고? 알아.”

아빠가 말을 하기도 전에 소렐은 볼멘소리로 먼저 말을 가로챘다.

16606122631903.jpg“아빠가 보기에 문제가 없고 납득이 되는 거면, 뭐…….”

상처받고 화가 나도 머리로는 냉정하게 이해해야 하는 일이다. 펠릭스는 소렐의 곁에 앉았다. 둥둥 뜬 허상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래도 소렐이 속상했다는 걸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표시였다.

16606122631903.jpg“……어쩔 수 없지.”

섭섭한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침묵해야지. 그런 식으로 어른이 되어가고, 대마법사가 되는 거지. 푹 가라앉은 딸을 살피던 펠릭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16606122628422.jpg“아빠가 조금 더 오래 있어줬으면 좋을 걸 그랬다, 그렇지?”

그랬으면 이렇게 속상할 일도 없었을 텐데.

16606122631903.jpg“아냐. 괜찮아. 정해진 일을 바꾸지는 못하잖아.”

소렐은 그냥 그렇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밀려드는 일들을 소화하는 게 몹시 벅찬 일이지만, 그래도 해야만 했다. 이젠 그래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는 걸 잘 알았다.

16606122631903.jpg“내가 익숙해져야죠.”

펠릭스는 그렇게 말하는 딸의 눈치를 살폈다.

16606122628422.jpg“뭐……, 사과받았으니까……. 가디언이랑 계속 얼굴 붉히고 있을 수도 없고.”

평생 함께 있을 사람이라고 알고 있고, 또 그렇게 하겠다고도 정했다.

16606122628422.jpg“바로 마음이 풀리긴 좀 어렵다, 그렇지?”

소렐은 아빠의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16606122628422.jpg“다 처음이라서 그래. 누구든 처음은 어색하고, 당황스럽고, 충격적이잖아.”

함께 놀던 소꿉친구들과 갑자기 헤어지고, 뜬금없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던 때도 그랬듯이. 권모술수 한복판에 내던져져서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진실을 알게 된 소렐의 기분이 꼭 그럴 거다.

16606122628422.jpg“협정서를 봤니? 그 서명한 피를 통해서 봤겠지?”

아빠는 모르는 게 없다. 그래서 차라리 편했다. 입을 꾹 다물고 있어도 어련히 알아서 속을 짚어주고, 같은 대마법사라 상황을 다 파악했다.

16606122628422.jpg“네 가디언의 피라 더 선명하게 보였을 거다.”

16606122631903.jpg“그렇구나.”

16606122628422.jpg“있잖아, 소렐. 이혼하고 싶니? 아주 꼴도 보기 싫어? 그럼 그래도 괜찮아. 이 아빠는 네 선택을 언제나 존중한단다.”

소렐은 고개를 들고 아빠를 쳐다보다가, 어이가 없게도 픽 웃어버렸다.

16606122631903.jpg“엄마가 그렇게 말하라고 시켰어?”

16606122628422.jpg“……응, 맞다…….”

펠릭스는 고개를 푹 숙였고, 소렐은 키득거렸다. 아빠는 많이 참은 거다. 만약에 미래를 엄마가 주의를 주지 않았다면, 아빠는 분명히 당장 라이킨에게 무슨 짓을 했겠지. 아주 엄청나서 그녀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그런 짓 말이다. 오랜만에 옛날 생각이 났다. 정답고 그립고 익숙한, 세 식구끼리 복닥대며 즐겁게 살던 때.

16606122631903.jpg“그건 엄마가 잘했네. ……이게 처음이라 그렇지, 다음엔 내가 그런 짓을 해야 할 수도 있는 거잖아.”

중얼거리던 소렐은 라이킨이 나간 방문을 노려보았다.

16606122631903.jpg“……그땐 똑같이 되갚아줄 테다…….”

애완토끼에 맞먹을 말을 궁리해봐야겠다. 감히 대마법사를 화나게 하다니.

16606122631903.jpg“아빠는 가디언이 없어서 편했어?”

16606122628422.jpg“넌 가디언이 불편하니?”

어이구, 큰일이네. 아빠가 웃으며 물었다.

16606122631903.jpg“아니, 뭐……. 싸우면 곤란하잖아. 이혼은 한다 쳐도 계속 얼굴은 봐야 하니까, 얼마나 껄끄러워?”

으, 생각해보니 끔찍하다. 이혼은 안 하는 게 좋겠다.

16606122631903.jpg“아빠 탓을 하는 건 아니지만, 난 진짜 모르는 게 많았다가 갑자기 확 다 알게 된 거잖아요. 각성하면서 머리에 막, 이렇게 휙 쏟아져 들어왔어.”

소렐은 제 머리에 물이 쏟아지는 표현을 손으로 했다.

16606122628422.jpg“그래. 그전에는 아무리 말해봤자 소용이 없지. 그건 배우고 외워서 아는 게 아니니까. 뭐든 다 겪어봐야 아는 거야.”

16606122631903.jpg“으, 그거 아빠 입버릇.”

16606122628422.jpg“겪어보니까 어때, 예전과 다르지?”

펠릭스는 웃었다.

16606122628422.jpg“예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지. 예전이었다면 너는 그래도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할 수 있냐고 무척 화가 났겠지만, 이거 봐라. 웃잖아.”

아빠의 허상은 소렐의 뺨 근처를 쓸어내렸다. 촉감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아빠의 다정한 마음과 애정은 당연히 알 수 있었다.

16606122628422.jpg“그릇이 점점 커지는 거야. 충격을 달게 삼키고, 때론 울음도 몰래 삼켜야 한단다. 나는 그래서 네가 가디언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16606122631903.jpg“지금도 그렇게 생각해?”

16606122628422.jpg“그럼요, 당연하지요, 우리 공주님. 혼자 있으면 얼마나 외롭다고. 아빠가 많이 외로웠어요.”

소렐은 아빠를 새롭게 바라보았다. 늘 멋지고, 다정하고, 엄마를 깊이 사랑하던 든든한 아빠도 외로움을 타고, 그래, 많이 괴롭고 상처를 받을 수 있었다. 아빠도 평범한 사람이다. 대마법사라는 거대한 의무와 책임을 지닌 사람이었다.

16606122628422.jpg“하지만 아빠는 엄마가 있었지!”

갑자기 기분이 팍 식었다. 소렐은 고개를 돌렸다.

16606122631903.jpg“아, 그만해……. 또 시작이야.”

16606122628422.jpg“엄마가 천사였어, 천사. 우리 공주 만나게 해준 천사지, 아빠가 하나도 안 외롭게 해준 천사였지.”

펠릭스는 실실 웃었다.

16606122631903.jpg“그래서 일찍 간 거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아, 아빠? 나 이제 다 안다. 다 알아!”

소렐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말하다가 깨달았다. 그래. 정말 다 알았다. 모르는 게 많아서 속상했는데, 이젠 모르는 게 없었다. 아빠는 엄마가 없다는 걸 견딜 수가 없었다. 강건하던 몸이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딸을 보며 웃다가도 어느새 먼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견뎌보려 애써도, 오랜 시간 함께 한 짝을 잃은 이는 자꾸만 죽음이 가까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16606122628422.jpg“섭섭하겠구나, 미안하다.”

16606122631903.jpg“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야! 하나도 미안한 일이 아니야! 아빠는 시간이 없는데도 최선을 다했어!”

소렐은 당치도 않다면서 펄쩍 뛰었다. 필사적으로 뒤를 안배하고, 소렐에게 무사히 고대마법이 계승되도록 애썼다.

16606122631903.jpg“진짜……, 이젠 다 알아.”

갑자기 훅 커버린 기분이다. 그리고 그걸 아빠는 잘 알았다.

16606122628422.jpg“우리 소렐 다 컸네.”

16606122631903.jpg“……그러게.”

은근히 남아 있던 상처도, 섭섭함도 다 딛고서 슬쩍 웃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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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몇 달 내내 엔버네스를 비롯한 사교계에서는 전부 다 칼리에르 공작부처의 스캔들이 화두였다. 시간이 약이라지만, 사람들은 이 스캔들에는 지치지도 않고 열을 올렸다. 엄청난 시선을 끌며 등장했던 마지막 헬레인 공주이자 칼리에르 공비가 느닷없이 수배자가 되질 않나, 이젠 칼리에르 공에게 이혼장까지 보냈다는 풍문도 떠돌았다.

16606122645619.jpg“그런데도 칼리에르 공은 엘펜하임에 현상금을 내걸었다면서요?”

16606122645619.jpg“아니, 거긴 왜요?”

16606122645619.jpg“왜긴요, 칼리에르 공비에게 엘펜하임이 현상금을 내걸었다고, 엘펜하임에겐 딱 세 배만큼 현상금을 올려 걸었대요.”

16606122645619.jpg“그럼 이혼도 안 한대요?”

16606122645619.jpg“무슨 일이 있는지 아직 법원에 접수만 된 상태로 중지되었다고 하던데요.”

사람들은 자신의 정보망을 동원해 이번 사교계 최대의 스캔들을 어떻게든 캐보려고 애썼다.

16606122645619.jpg“칼리에르 공비가 에설론 백작을 죽였다잖아요?”

16606122645619.jpg“에설론 백작이 몇백 년 전에 칼리에르 공작과 약혼을 했었다면서요? 이백 년인가? 삼백 년인가? 아이구, 모르겠네.”

16606122645619.jpg“세상에, 그렇게 오래된 일인데도 신경을 쓴 건가?”

16606122645619.jpg“뱀파이어들은 오래 살아서 인간과는 시간개념 자체가 다르다잖소.”

그리고 말이 점점 부풀면서, 추악한 쪽으로도 거리낌 없이 옮겨갔다.

16606122645619.jpg“칼리에르 공이 헬레인 공주보다는 동족이 더 좋다고 한 모양이지?”

16606122645619.jpg“과거의 여자가 더 익숙하니 편한 법이지. 남자들이란.”

16606122645619.jpg“아, 우리 남자들이 원래 그렇지.”

신사들이 모이는 사교클럽에서도 저속한 이야기가 낄낄대며 퍼져 나왔다. 그런 소문들은 누구나 다 들을 수 있었고, 심지어 왕궁에도 퍼졌다.

16606122655633.jpg“……차라리 이혼이 나은데.”

왕세자, 라이오넬 빌헬름 앨버트는 올해 24세로, 한창 혈기 왕성한 나이였다. 그는 늑대 사냥 당시에 글래스턴 공작을 상대로 무참히 자존심이 뭉개졌던 일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토록 남의 이혼을 바라기는 또 처음이었다.

16606122655633.jpg‘그렇다고 해서 헬레인 공주가 나한테 올 거라는 장담은 못 하지만, 그만큼 내게도 기회가 더 많아지는 거 아닌가?’

소렐 이드리스는 이혼을 하기만 한다면, 꽤나 괜찮은 왕세자비감이었다. 헬레인 왕조가 다 망했다는 건 문제였지만, 그만큼 든든한 뒷배경도 없는 게 차라리 이쪽 왕실에서는 더 좋았다. 그러면서도 헬레인 왕조가 가지고 있던 대단한 유산을 고스란히 들고 올 거고, 더구나 대마법사라는 사실까지 밝혀지지 않았나. 이혼이 흠이라 반발이 있겠지만, 정치적인 면에서도 빠지지 않고, 라이오넬도 소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16606122655633.jpg“……칼리에르 공이 지나치게 감이 빨랐지.”

처음부터 그가 소렐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걸 알고 엄청나게 견제하고, 왕세자라 해도 결코 그냥 넘어가거나 한 수 접어주지 않았다. 왕세자가 감히 상대할 수가 없는 노련한 남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공비가 먼저 이혼장을 날렸다고 하지 않은가. 그게 지금 몇 달째 법원에서 둥둥 떠다니는 이유가 뭔지 몰라 심히 거슬렸지만, 라이오넬은 어쨌든 이게 그에게 좋은 기회라는 건 알고 있었다.

16606122655633.jpg“좋은 기회이긴 한데…….”

도무지 소렐 이드리스와 마주칠 수가 있어야지! 어떻게든 만나서 지친 심신을 위로하고,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가 뻥 차버린 황금 같은 기회를 거머쥐어야 하는데 대마법사는 왕국 곳곳에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두 달 넘게 목격담마저 나오지 않고 있었다.

16606122655633.jpg“아, 제기랄…….”

차라리 포기하는 게 편하긴 하지만,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도 미련이 남고, 소렐을 생각하면 없던 전의가 불타올랐다. 칼리에르 공에게 무참하게 상처 입은 자존심이 아직도 쓰라렸다. 왕세자는 계속해서 새로운 대마법사의 흔적을 뒤쫓아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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