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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The golden wave (2) (112/181)

112. The golden wave (2)2021.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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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06122223318.jpg“파렴치하다고 제 뺨을 치셔도 좋습니다. 늦었다고 화를 내셔도 좋고, 뻔뻔하다고 또 메다꽂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러니 제발…….”

그는 감히 손을 뻗어서 눈물로 젖은 소렐의 뺨을 만졌다.

16606122223318.jpg“사실이 아닌 것으로 아파하지는 마십시오.”

멍하니 그가 눈물을 툭툭 흘리는 것을 바라보던 소렐은 뱀파이어의 눈물이 굉장히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이 따뜻한 해변에 앉은 차가운 존재는 조각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멍하니 쳐다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16606122223326.jpg“내가 다 들었……!”

16606122223318.jpg“무거운 감정입니다.”

라이킨은 뭐라 따지려드는 소렐에게 조용히 말했다.

16606122223318.jpg“너무 무거워서, 저도 가끔은 버텨내기가 버겁습니다.”

그냥 그게 중요했다. 눈앞에서 울고 있는 작고 여린 존재가 중요했다. 그녀가 손에 피를 묻혔든, 현상금이 걸린 수배자든, 그게 무슨 소용이고 무슨 상관인가.

16606122223318.jpg“한 번도 공주님 같은 존재를, 공주님과 맺은 관계를 가져보지 않아서 이렇게 깊어지고, 이렇게 감당 못 할 지경이 될 거란 건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는 그녀에게 있어서 무엇으로 찔러도 상처 하나 나지 않을 것 같은 강대한 존재였다. 그런데 그가 눈물을 흘리다니, 소렐 이드리스의 세상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믿어도 될까?

16606122223318.jpg“내내 공주님만 찾았습니다. 마법이든 뭐든 상관없습니다. 그딴 건 공주님께서 가지고 계시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공주님의 강했던 신뢰를 한꺼번에 잃어버리기는 너무나 쉽고, 관계를 얕보는 건 더 쉬웠다. 어쩌면 이 사랑에 유효기간이 있다고, 감히 교만하게 말했던 것을 그대로 돌려받는 건지도 모른다.

16606122223318.jpg“저는 공주님께 예쁜 것만 드리고 싶었습니다.”

라이킨은 고개를 떨어트렸다.

16606122223318.jpg“제가 아는 가장 예쁘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공주님이니까요. 그에 비하면 제가 가진 감정은 정말 더럽고 추합니다. 치졸하고 비열하고 더럽지요. 뭐, 이젠 아시고 계시겠지만요.”

그는 간신히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것을 내뱉었다.

16606122223318.jpg“가끔은 공주님을 저만 아는 곳이 가두고 싶습니다. 저만 보시게 하고,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디 가서 아프지도 말고, 다른 사람에게 웃어주는 것조차 거슬릴 때가 있어요. 저만 보시고, 제게만 웃어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16606122223318.jpg“공주님을 보고도 둘이서 침실에 내내 있기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쓰레기가 따로 없지 않나. 공주님은 기함을 하실 거다. 하지만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16606122223318.jpg“딱히 예쁘고 사랑스러운 감정은 아니지요. 그건 공주님께서 생각하시는 ‘사랑’과 다를 겁니다. 다르다 해도…….”

라이킨은 울었다. 이렇게 울어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16606122223318.jpg“제가 노력할 테니까, 절대로 감정대로 행동하지 않겠습니다. 그러지 않을 겁니다.”

다급히 약속했다. 그러니까 겁먹지 말라고 고개를 필사적으로 저었다. 토끼 앞에서 뱀파이어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감추고 필사적으로 무해한 척하고 있었다. 그는 뭐든 할 수 있었다.

16606122223318.jpg“그러니 끝을 낸다면 공주님이 내셔야지요.”

어리석은 뱀파이어의 눈에서 그림 같은 눈물이 또 떨어졌다. 이 종족의 어리석음은 어쩌면 지나치게 긴 수명과 지나치게 빠른 회복력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쉬울 게 없고, 그 어떤 것도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하니 끝도 없이 교만해지고 또 어리석어졌다. 그래서 잃고 난 후에야 자신이 얼마나 멍청하고 얼빠진 소리를 해댔는지 깨달았다. 그놈의 감정에 유효기간이 있단 생각을 어느덧 잊고 지냈던 것만 봐도 뻔했다. 헤어나지 못할 정도로 소렐에게 푹 빠졌다.

16606122223318.jpg“저는 멈추는 방법도 몰랐고, 오만하고 한심해서 끝이 있을 거라고도 믿었다가 이 꼴이 되었습니다. 공주님께서는 저를 믿지 않으시지요.”

글래스턴 공작에게 그보다 더 큰 비극이 없었다.

16606122223318.jpg“저는 항상 늦습니다. 이 모양이라 마음에 들지 않으시겠지만, 공주님, 제 쓸모를 생각해서라도 제발.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싫어하시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 테니 제발 저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그는 밑바닥을 구르며 빌고 애원했다.

16606122223318.jpg“제가 왜 공주님을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라이킨은 너무나 괴로운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16606122223318.jpg“어떻게 제가 공주님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생명체를, 당신을 어떻게.

16606122223318.jpg“저 좀 버리지 마세요…….”

그녀를 간신히 붙잡은 커다랗고 강인한 손이 벌벌 떨렸다.

16606122223318.jpg“버리고 가지 마세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연신 빌어대는 목소리도 손과 마찬가지로 떨리고 있었다. 늘 반듯하고 여유롭던 남자가 완전히 망가졌다. 이 또한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끝내 의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소렐은 이상하게도 그럴 수가 없었다. 절대로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모질게 그가 보는 앞에서 결합점까지 잘랐는데 그 독했던 마음을 또다시 먹을 수가 없었다. 그냥 알겠다.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고, 그 역시 그녀만큼 속이 새카맣게 탔다고 알겠다. 소렐은 그를 보다가 그만 눈썹을 잔뜩 모으고, 코끝이 빨개지도록 울음을 터트렸다. * 글래스턴 공작저에 물에 빠진 생쥐 둘이 나타났다. 둘 다 실컷 운 얼굴에, 한참 더 어린 쪽은 아직까지도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16606122228241.jpg“두 분……! 아이고, 맙소사.”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은 두 사람의 대단한 몰골을 보며 당장 뛰어 들어가서 수건을 가져오고, 목욕물을 받으러 달려갔다. 둘 다 뭘 하고 온 건지 물에 흠뻑 젖어서 소렐 혼자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라이킨은 그 와중에도 소렐의 손을 일방적으로 꽉 붙잡고 있었다.

16606122228241.jpg“들어가요, 어서 들어가요! 두 분 다 씻고 나오세요! 세상에, 이 겨울에 이게 뭐람!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요!”

에벌린은 서둘러 욕조 두 개를 김이 풀풀 나는 더운물로 가득 채웠다.

16606122223318.jpg“에벌린, 나는…….”

16606122228241.jpg“공주님도 욕조에 얌전히 계실 테니 걱정하지 말고 씻으세요.”

그녀는 그사이에 또 소렐과 떨어지는 게 마음에 걸려 손을 쉬이 놓지 않으려는 라이킨을 타일러서 보냈다. 착한 토끼 공주님은 일단은 포기하셨는지, 에벌린의 말대로 욕조에 들어가 얌전히 앉았다. 자존심 강하고 귀하게 자란 헬레인 공주님이다. 도도한 자존심이 몹시 상처받았는데, 기어이 못돼먹은 뱀파이어에게 붙들렸으니, 얼마나 기가 막힐까. 에벌린은 안쓰럽고 또 복잡한 눈빛으로 소렐을 바라보았다.

16606122228241.jpg“붕대는 풀었으니 다 씻으시고 다시 감도록 해요, 공주님. 깨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 겨울에 다 젖어서 나타나세요, 속상하게.”

소렐이 목욕하는 동안 옆에서 도와주던 에벌린이 부드럽게 말했다.

16606122228241.jpg“짠 냄새가 나는데, 어디 바다에 갔다 오셨나요?”

입술을 가만두지 못하고 내내 고민을 하던 소렐이 고개를 간신히 주억거렸다.

16606122228241.jpg“둘이서 바다에서 논 거예요?”

설마 그랬을 리가. 소렐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16606122228241.jpg“근데 왜 이렇게 젖었어요?”

16606122223326.jpg“……내가 라이킨 빠트렸어요.”

불퉁한 대꾸에 에벌린은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16606122228241.jpg“그럼 공주님은 왜 젖으셨어요? 세상에나, 소금기가 가득하네.”

분명히 마법으로 빠트렸을 텐데.

16606122223326.jpg“……그러게요.”

소렐은 고개를 숙였다. 다 큰 어른이 울 수도 있다는 거야 훨씬 더 어릴 때 알았지만, 라이킨이 그렇게 무너진 건 조금 이야기가 달랐다. 소렐은 하도 바다에 있어서 쪼글쪼글해진 제 손을 쳐다보았다.

16606122223318.jpg‘저 좀 버리지 마세요…….’

  자꾸만 라이킨의 끊어질 것같이 미약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반복되고 있었다. 버리다니, 누가 누구에게 할 소린가. 그게 욕망이나 좀 해대다 말 여자한테 할 소리인가? 정말 욕망뿐이었고, 편리하게 끝낼 수 있는 관계였다면 라이킨은 분명히 그렇게 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렇게 세상이 끝나는 것을 목격한 것처럼 부들부들 떨면서 가련하게 빌 리가 없었다.

16606122223326.jpg‘분명히 뿌리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사정없이 결합점도 잘랐는데. 못하겠다. 그대로 버렸다간 그 남자의 진심을 버리는 거고, 그는 죽고 말 거다. *

16606122228241.jpg“공주님은 아직 욕조 안에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가운 매듭을 지으며 생각에 잠겼던 라이킨은 에벌린을 돌아보았다.

16606122223318.jpg“고마워요, 에벌린.”

16606122228241.jpg“별말씀을요, 교수님. 그나저나 공주님 다리가 걱정이에요. 절대로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데 저리 자꾸 써서 약해지면 어쩌지요?”

라이킨은 그 말에 잠시 생각했다.

16606122223318.jpg“치료에 최선을 다해야겠지만, 각오는 해야지요.”

16606122223318.jpg‘……다 낫지 않는다 해도 유감이지만 어쩔 수 없지.’

그의 사지가 튼튼한데 어려울 일도 없었다. 소렐을 항상 안고 다니는 것만큼 기껍고 즐거운 특권도 없을 것이다.

16606122228241.jpg“괜찮아요, 이제?”

에벌린이 떠나려다가 멈칫거리더니, 뜬금없이 물었다. 호랑이 특유의 다 안다는 눈이 라이킨에게로 향했다.

16606122223318.jpg“글쎄요.”

죄가 많은 남자는 자신 있게 말하지 못했다.

16606122228241.jpg“저런. 노력하셔야겠어요.”

16606122223318.jpg“예.”

일단 소렐은 그가 눈물을 흘리며 무릎 꿇고 빌 거라곤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금 그는 소렐을 붙잡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었다. 더구나 듣지 않아야 할 말만 참 타이밍 안 좋게 골라 들은 상대를 붙잡으려면, 무릎 정도야 당연히 꿇어야 하지 않겠는가. 무릎이 깨지도록 꿇고, 눈이 멀도록 울어서라도 소렐을 잡을 수 있다면 그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천 년 내리 누군가에게 빌어본 역사가 없었지만 소렐 앞에서는 너무나 쉽게 무릎이 접혔다. 그의 증오하는 어머니가 보았다면 대단히 자존심이 상해 펄펄 날뛰었을 일이다. 라이킨은 샤를렌이 걸린 치명적인 상황에서도, 그 여자가 시키는 일의 정확히 두 배를 완성해서 돌아갔으면 돌아갔지, 그 여자에게 무릎을 꿇고 빌고 부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16606122223318.jpg‘해보니까 당연한 거군.’

지금도 역시 그 여자는 물론이고 그 누구에게도 결코, 목에 칼이 들어와도 무릎 꿇지 않겠지만, 공주님께 무릎을 꿇는 거야 당연했다. 여동생만 겨우 챙기는 게 최선이고, 그 이상은 꿈도 꿀 수 없어 포기하고 말았던 길고 삭막한 인생에 유일하게 붙잡고 싶은 빛이었다. 메리 공주가 예언한 대로 딱 하나뿐인 빛이었다. 그 빛은 그의 마음을 알아줬을까. 찬란한 그녀에게 잘못한 게 너무 많아 죄스러운 이 진심을 알아줬을까. 그는 아까 해변에서 그를 따라 결국 같이 울어준 소렐의 눈물에 미약한 희망을 걸 뿐이었다.

16606122228241.jpg“와서 공주님 붕대나 갈아줘요.”

오래 살다 보니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가 사랑에 목숨 거는 꼴도 다 본다.

16606122223318.jpg“아, 기꺼이.”

소렐을 돌보라는 말에 금방 싹 바뀌어서 빙긋 웃는 얼굴을 본 에벌린은 혀를 차며 가던 길을 다시 갔다. 저리 좋을까? 에벌린은 깨끗한 붕대를 가지고 돌아와서 씻고 나온 소렐이 라이킨과 낯을 가리는 흥미진진한 광경을 구경했다.

16606122223326.jpg“……저리 가요.”

16606122223318.jpg“공주님…….”

뱀파이어는 어색해하는 토끼 공주님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한바탕 싸우다가 울리기까지 했으니 어색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저리 가라고 손짓을 하던 소렐이 난감해 어쩔 줄을 몰랐다.

16606122223326.jpg“아니, 멀리 가라는 게 아니라 좀 떨어져 앉으라고…….”

16606122223318.jpg“제가 불안합니다.”

16606122223326.jpg“나 지금 가운 차림이에요!”

16606122223318.jpg“저도 그렇습니다. 부부끼리 뭐 어떻습니까.”

머리 위에 커다란 수건을 두른 소렐은 그녀에게 절박하게 손을 뻗는 라이킨을 보다가,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말았다.

16606122223318.jpg“제게 오세요, 공주님.”

라이킨의 말투에서 예전과 같은 여유는 싹 사라졌다. 그는 욕실 안 푹신한 소파에 앉아 있던 소렐을 달랑 들어다가 바깥으로 나왔다. 두툼한 목욕가운을 입히고, 그 위에 마른 수건으로 한 번 더 감싼 소렐은 불을 지펴놓은 벽난로 앞에 앉혀졌다. 밖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실력도 안 되는 마법사와 마녀들에게 쫓기고, 가끔은 돌도 맞고 욕도 듣는데 이곳에서는 제대로 된 공주님 대접을 극진하게 받았다.

16606122223318.jpg“다리를 좀 살피겠습니다.”

16606122223326.jpg“의사가 와야 하지 않아요?”

16606122223318.jpg“전장에서 몇 년 굴렀더니 이 정도는 저도 볼 줄 압니다.”

몇 년이 아니라 몇백 년이지만. 라이킨은 희미하게 웃으며 소렐의 오른다리를 살피고, 에벌린이 가져온 깨끗한 붕대를 다시 감기 시작했다.

16606122223326.jpg“그거 꼭 감아야 해요?”

소렐은 영 성가시고 싫은 눈치였다.

16606122223318.jpg“부목을 대고 천장에 끈을 매달아서 겨우 뼈가 붙은 게 얼마나 되었다고요.”

그랬단 말이야? 소렐이 깜짝 놀라는 사이, 그는 어르고 달래가며 솜씨 있게 붕대를 감았다. 이미 소렐에게 붕대를 감아주는 게 익숙해 보였다.

16606122223318.jpg“조금만 더 참으세요. 그리고 앉거나 눕는 것도 조심하시고요. 앉으실 수 있는 것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의식을 잃은 채 두 달 넘게 누워 있기만 했으니 그나마 뼈가 깨끗하게 붙었다. 가디언이 함께 제어해주고 있다가, 균형을 잃은 고대마법이 날뛰는 건 그만큼 끔찍한 일이었다. 소렐은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렀다.

16606122223318.jpg“내상까지 입으셔서 여기저기 다니시면 안 됩니다.”

소렐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눈을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작은 두 발은 땅에 닿지 못해 허공에서 달랑거렸고, 두 손은 얌전히 모아져서 무릎 위에 놓였다. 나이도 어린 아가씨가 갖은 풍상과 고초를 한꺼번에 거쳐서, 라이킨은 속이 미어졌다. 그는 항상 소렐을 따뜻한 곳에 모시고 누구도 건드릴 수 없게 지켜왔다. 소중한 공주님인데 풍천노숙까지 하셨다니,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지경이었다.

16606122223318.jpg“아직 회복이 덜 되셨습니다.”

작은 손이 꼼지락거린다. 듣기 싫다는 걸까, 아니면 그가 곁에 있는 게 불편하다는 걸까? 연신 소렐의 안색을 살피는 라이킨은 그녀가 또 도망칠까 봐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16606122223326.jpg“……나 현상금 걸렸어요.”

16606122223318.jpg“예, 제가 그래서 그 현상금 건 놈의 목에 현상금을 두 배로 걸었습니다.”

그는 환하게 웃었다.

16606122223318.jpg“머리를 말릴까요, 공주님?”

소렐이 도대체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사이, 라이킨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감은 수건을 풀어냈다.

16606122223318.jpg“……이런.”

수건을 풀자마자 튀어나온 젖은 머리카락들이 마력에 의해 부유하는 모습은 상당히 독특했다. 라이킨이야 독특하다고 평하겠지만, 보통 사람들은 기겁을 하고 도망칠 무서운 광경이었다.

16606122223318.jpg“여태까지 많이 불편하셨겠습니다.”

소렐보다 먼저 깨어나 그녀를 돌보는 내내 그녀의 머리카락은 그가 직접 빗기고, 감기고, 말렸다. 거대한 힘을 못 이겨 춤을 춰대는 머리카락을 관리할 사람은 어차피 가디언인 라이킨뿐이었거니와, 라이킨은 자신과 에벌린을 제외한 다른 사람이 소렐을 돌보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16606122223318.jpg“공주님.”

소렐은 내내 말이 없었다. 아내는 지금 찬찬히 남편이 한 말을 곱씹는 중이었다. 그리고 남편은 연신 자그마한 아내의 눈치를 보았다.

16606122223318.jpg“지금 당장 결정을 하거나, 뭘 어떻게 해달라는 게 아닙니다.”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 시간 내내 라이킨의 피가 바짝바짝 마르겠지만 그건 그녀가 알 필요 없는 일이었다.

16606122223318.jpg“의심이 되시면 계속 물어보시고, 화가 나시면 화를 내세요. 얼마든지 그러셔도 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16606122223326.jpg“……나는 라이킨이 왜 화를 내지 않나, 궁금했어요. 화도 안 내고, 말도 안 하고.”

그는 잠자코 듣기 시작했다. 하도 울어서 꽉 잠긴 작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16606122223326.jpg“라이킨 말대로 하자면 나는 오해를 크게 한 거고, 정말 하지 말았어야 할 선택을 아주 경솔하게 해서 큰일을 저지른 건데…….”

16606122223318.jpg“그러실 수도 있지요.”

아직 어린 대마법사가 좌충우돌할 수도 있지. 그건 라이킨이 소렐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살 만큼 살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소렐은 아직 그럴 수 있었다.

16606122223326.jpg“아뇨, 그래도 해선 안 될 일이었어요. ……대마법사의 본분에 어긋나요.”

고대마법이 대마법사는 물론이고 가디언마저 죽일 뻔했다. 대마법사가 마법을 계승하고 보호하긴커녕 재앙을 만들 뻔한 걸, 가디언이 막았으니 대마법사는 실격이고 가디언은 제 할 일을 목숨 바쳐 한 셈이다. 소렐은 아빠에게, 엄마에게, 그리고 라이킨과 그녀를 아는 모두에게 면목이 없었다.

16606122223326.jpg“라이킨도 알고 있는 일인데, 나한테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16606122223318.jpg“이미 혼자 잘 반성하고 계시는데 안 그래도 속상한 사람을 다그쳐서 뭐합니까. 저도 딱히 공주님을 다그칠 자격이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도 책임이 있는 일입니다.”

그는 수건을 내려놓았다. 그의 손이 닿아서인지, 소렐의 머리카락이 좀 더 차분해졌다.

16606122223318.jpg“제가 말을 그따위로 하지만 않았어도 공주님께서 그런 선택을……, 이렇게 다치시고 많이 우실 필요는 없었겠지요.”

소렐은 푸른 눈 안에서, 그녀와 비슷한 후회를 읽었다. ‘그날’에 대한 짙은 후회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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