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The golden wave (1)2021.08.21.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라이킨을 데리고 온 건가? 그 정도로 전혀 제어가 안 된단 말이야? 어떡해! 소렐은 입을 틀어막았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표정을 보던 라이킨이 한숨을 쉬었다.
“또 무슨 생각을 멋대로 하시는 겁니까…….”
“내가, 내가 라이킨 끌고 왔어요?”
소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아뇨, 제가 공주님 따라왔습니다만. 늘 이런 곳으로 오셨습니까?”
라이킨은 제 품 안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소렐에게 느긋하게 물었다.
“좋은 곳이군요.”
“따, 따라왔다고?”
“예.”
그는 태연한 얼굴로 대마법사를 자극했다. 눈을 또로록 굴리던 호기심 많은 대마법사는 일단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아야, 아우…….”
엉덩방아를 찧고 보니 바로 라이킨이 서 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도 않은 모래사장이다. 그는 황당하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아니, 여기가 아닌데. 여기 말고, 침실…….”
아우, 진짜. 소렐은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심경이었다. 너무 당황해서 마법이 제대로 안 되고 있는데, 그 와중에도 더 놀랄 일의 연속이다.
“참 혼자 가는 데는 참 탁월하십니다.”
이를 갈아붙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소렐은 숨을 급하게 들이마시며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 사이에 이어진 결합점 뭉치를 꽉 쥔 라이킨이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요…….”
소렐은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그가 쥐고 있는 결합점을 더 자세히 보았다. 아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일렁이는 황금색 물결 사이에 군데군데 억지로 이어붙인 흔적과 시커먼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소렐은 어떻게든 설명을 하려고 했지만, 라이킨은 쥐고 있던 결합점 뭉치를 확 끌어당겼다. 그녀는 그대로 그의 품 안에 다시 갇혔다.
“어, 어어?”
소렐은 분명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라이킨도 그저 팔을 움직여 결합점을 꽉 쥐고 끌어당겼을 뿐이다. 그런데 그녀가 끌려갔다.
“나쁜 버릇을 들이셨습니다.”
새파란 눈동자가 타오르고 있었다.
“그래도 이쯤이면 제게 따지기라도 하실 줄 알았는데.”
이 사람 눈이 맛이 갔어!
“저기, 라이킨, 잠깐만…….”
당황한 소렐은 그를 마법으로 밀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오히려 시커먼 피가 묻은 황금색 결합점은 그녀를 끌어당겨 라이킨과 더 밀착시켰다.
“또.”
그는 기가 막히다는 듯 중얼거렸다. 언뜻 제정신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또 저를 버리고 가셨어요.”
화를 내는 것 같은데, 라이킨은 오히려 웃었다. 싸늘하게 웃었다.
“아니, 저기서 여기로 조금만 움직인 건데, 근데 마법을……, 써요?”
소렐이 너무 놀라 얼어붙은 표정으로 물었다.
“……하도 공주님을 놓치는, 아주 빌어먹을 경험만 하는 것도 못 해먹겠다 싶었는데 며칠 안 봤다고 저를 아주 까맣게 잊으셔서.”
전장을 뒹굴며 배웠던 껄렁하고 질 낮은 말투가 툭툭 튀어나왔다. 어지간히 기분이 바닥을 치지 않고서야 공주님 앞에서 이런 말투를 쓸 리가 없었다. 하지만 깨어나자마자 며칠 되지도 않아 기어이 휙 사라지는 걸 보니 기분은 더 저조해졌다.
“아쉬운 사람이 열심히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대마법에 정통한 대마법사는 결합점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잘라낸 결합점들을 라이킨이 자신의 피를 먹여 다시 연결했다. 그는 그게 무슨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뼈가 하얗게 불거지도록 꽉 붙잡고 있었다.
“그게 어떻게…….”
소렐은 턱이 빠져라 입을 딱 벌리고 라이킨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상당히 많이 다친 만큼, 상당히 많은 결합점들을 끊어냈었다. 어림잡아 수만 가닥은 충분히 넘을 거다. 온 힘을 다해 가위를 휘둘렀으니까. 라이킨은 그 결합점들을 전부 다 다시 묶어 소렐과 자신을 새로 연결했다.
“어, 어떻게 그런…….”
그저 우악스럽게 묶어놓은 결합점이 아무런 부작용 없이 다시 제대로 작동하는 이유는 단 하나, 라이킨이 제 피로 연결했기 때문이다. 끊어졌던 결합점에 그의 시커먼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피와 목숨이다. 대마법사는 그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바로 알아차렸다.
“‘어떻게’라뇨, 공주님.”
가디언은 기가 막힌다는 듯 하하 웃었다. 그러다가 얼굴을 괴롭게 일그러뜨렸다.
“제가 무슨 짓인들 못 할까요.”
소렐을 붙잡기 위해서라면 더 끔찍한 짓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이미 그를 버리고 떠나려고 목숨까지 건 그녀인데, 그라고 뭘 못 할까.
“그, 그러면 라이킨이 더 많은 걸 감당해야 하잖아요.”
가디언으로서 고대마법의 무게를 좀 더 감당하고, 더불어 대마법사가 어디에 있든 결합점을 통해 그녀를 찾아내고, 또 붙들어두게 되었다. 그건 뭐 아무래도 좋다. 어쨌든 평생 함께해야 할 사이니까. 하지만 라이킨에게 ‘감정’은 ‘유효기간’이 있는 거였지. 새삼 떠올리니 또 마음이 아파왔다.
“예.”
소렐은 라이킨만큼 똑같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나는……, 나는 라이킨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항상 이해하실 만큼 충분히 설명드릴 기회도 안 주셨잖습니까.”
그 말에 소렐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러는 라이킨은 언제 말을 똑바로 했어요?”
말을 안 한 이유도 결국 끝날 감정이라서 그랬다며! 다 들은 나를 바보 취급하는 건가! 그 사실이 너무나 서럽고 슬프지만 그래도 같이 잘 지내보려고 하는 중인데! 그 와중에 이곳은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다워서 더 서러웠다.
“일단 이거 놔요.”
그녀는 한참 누워 있어 잔뜩 약해진 팔로 강철같이 탄탄한 라이킨의 몸을 밀었다. 물론 힘껏 밀어봤자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려놓고 앉아서 이야기하자고요!”
“지금 마법을 웬만해서는 사용하시면 안 된다는 거 아십니까?”
“몰라요! 나 내려놔요!”
빽 소리를 지른 다음에 소렐은 신음을 하며 머리를 쥐었다. 깜짝 놀란 라이킨이 그녀를 더 꼭 끌어안았다.
“어지러우십니까?”
“아뇨!”
이 와중에도 억지 쓰고 고집을 또 부리는 게 부끄럽고 창피해서 그랬다, 왜! 소렐은 얼굴이 빨개져서 끙끙거렸다.
“완전히 멀쩡하고 하나도 아픈 곳도 없어요! 나는 괜찮아요! 놔주세요!”
“그건 안 됩니다.”
고개를 홱 든 소렐은 미친 사람을 보듯 라이킨을 쳐다보았다.
“제가 가디언인데 왜 공주님을 놔드립니까? 또 어디로 사라지실지 어떻게 알고.”
“이게 얼마나 무례한 건지 알아요?”
“그럼 때리십시오.”
태연한 말에 소렐은 경악하며 중얼거렸다.
“미쳤나 봐, 진짜…….”
“그럼 저를 그렇게 버리고 가셨는데, 제가 제정신일 줄 아셨습니까?”
열심히 그를 밀어내고 버둥거리던 소렐이 움찔 놀랐다. 라이킨은 처음 보는 눈을 하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초점이 나간 것 같으면서도 분명하게 소렐 한 사람에게만 향한 시선이다. 그 시선에는 이글대는 분노, 혹은 원망과 함께 그녀는 헤아릴 수도 없는 광기가 번뜩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질 소렐이 아니었다. 공주님도 성깔이 있으시다. 지랄 맞은 뱀파이어에 결코 지지 않는다.
“내가 뭘 버리고 갔어요! 얘기 들을 거 다 듣고 갔는데!”
하아. 라이킨은 결국 고개를 푹 숙이면서 한숨을 쉬었다.
“하, 한숨 쉬었어……!”
“그게 아니라…….”
“내가, 내가 어리다고 무시…….”
소렐은 눈이 빠져라 그를 노려보며 하는 말에 라이킨이 서둘러 대답했다.
“하는 거 아닙니다.”
토끼는 무시무시한 두 주먹을 여전히 꽉 움켜쥔 채 씩씩대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다치고 순진하다고 만만하게 보고…….”
라이킨은 그녀의 말허리를 또 잘랐다.
“만만하게 보지 않습니다.”
그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덧붙였다.
“만만하게 보고 무시했으면 결합점에 피까지 먹여가며 공주님을 붙잡으려고 애썼겠습니까?”
“근데 왜 내 말을 안 들어줘요?”
“듣고 있습니다.”
“안 듣잖아요!”
“떨어지시지만 않으면 무슨 말이든, 아, 제기랄.”
라이킨은 제 손에서 또 쑥 빠져나가는 무게에 욕설을 내뱉었다. 소렐은 그저 몇 걸음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서 허공에 둥둥 떴을 뿐이지만, 라이킨은 그 사라지는 느낌이 끔찍하게 싫었다.
“여기, 여기 있을 테니까 건드리지 말아요.”
그는 그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도 참는 중이었다. 어쨌든 대화를 하자고 하시니 참아야 했다.
“그 찬 공기 위에 앉으시는 것보다 제대로 된 곳으로 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보다 더한 데서 잠도 잤어요. 상관없어요.”
뾰족하게 대꾸한 소렐은 라이킨의 강인한 어깨가 늘어뜨려지고, 삽시간이 표정이 괴롭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놀랐다.
“왜 바깥에서…….”
그는 말을 하려다가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꾹 눌러 감았다. 그녀의 행방에 관한 모든 것을 다 추적했기에 알고는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걸 소렐이 제 입으로 말하자 순식간에 심장이 날카로운 끌에 긁히는 느낌이었다.
“마법만 있으면 어디든 상관없어요. 나는 진짜 괜찮았어요! 무척 따뜻해요!”
눈이 동그래진 소렐이 손을 허우적거리며 열심히 말했지만, 라이킨은 한숨을 간신히 쉬며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소렐은 문득 그의 손이 무척 섬세하게 생겼으면서도 그 자체로도 흉기가 될 수 있을 만큼 강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께가 제법 되었다. 긴 손가락은 선이 굵고 품고 있는 힘과 요령이 엄청났다. 끝내 대마법사를 물리적으로 따라잡을 방법까지 실행한 손이다.
“그렇게 마법이 중요하시면, 마법을 담고 계시는 몸도 잘 챙기셔야 할 거 아닙니까. 왜 귀하신 분이 길바닥에서 주무십니까, 왜……!”
억눌렸던 것이 터져 나왔다. 내내 뒤쫓기만 하고, 기다리기만 했던 남자가 결국 터졌다.
“잠이라도 와서 주무셨어야지요. 제가 싫으시다면 저더러 방에서 나가라고 하시면 될 거 아닙니까.”
“나한테 유효기간 어쩌고 해놓고서 그게 또 무슨 소리예요? 왜 나한테 화를 내요?”
유효기간이란 단어에 라이킨이 움찔거렸다. 그러곤 그다음에는 꽤나 찜찜하고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첨벙. 그래, 첨벙이었다. 라이킨은 아래를 보곤 한숨을 쉬었다. 햇빛은 여전히 찬란하고, 해변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는 발목까지 찰랑이는 바닷물을 내려다보았다.
“……아.”
그러곤 그대로 완전히 주저앉았다. 이건 결코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고집 센 대마법사이자 토끼 공주님께서 ‘유효기간’이라는 말을 내뱉고 나니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나서 성질을 있는 대로 부리기 시작하신 거다. 그는 그래도 덤덤한 표정으로 얼굴을 쓸어내릴 뿐이었다.
“끝이라며!”
그는 얼른 말하려고 했지만 또 짠 바닷물이 끼얹어졌다. 라이킨은 고개를 슬쩍 돌렸다.
“내가 화를 내야지 왜 나한테 소리를 질러? 내가 만만해?”
그럴 리가.
“친구 가지고 나한테 거짓말이나 하고! 혼자서 끝이라고 생각이나 하고! 날 만만하게 본 거지!”
그걸 묻고 따지는 게 얼마나 그녀에게 비참한 일인가. 소렐은 아무것도 몰랐는데 라이킨은 이미 끝을 생각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눈물이 후드득 쏟아졌다. 밀려드는 파도가 죄다 라이킨에게로 몰려갔다. 차라리 강한 파도였으면 좋겠는데 이 평화로운 휴양지에, 발목까지나 차는 깊이에서는 애들 장난 수준이었다.
“나, 나는 진심이었는데…….”
그녀는 진심이었는데. 사실, 사비나도 상처였고, 협정서도 상처였지만 무엇보다 샤를렌과 라이킨이 하던 대화가 가장 큰 상처이자 충격이었다.
“사랑한다고 말도 못 할 그런 욕망에 불과한 거면 왜 사랑하는 척을 한 건데! 진짜 나빠! 이 나쁜 놈아!”
소렐은 눈을 꼭 감고, 주먹을 꼭 쥐고 소리 질렀다. 라이킨은 또 물을 맞고 휘청거렸다. 고작 ‘나쁜 놈’에 ‘진짜 나쁘다’, 그리고 고작 이것밖에 물세례라니. 공주님은 착해도 너무 착했다. 그러나 소렐은 지금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욕설을 퍼붓고는 자괴감에 휩싸인 표정이었다. 여긴 꽃도 없고, 보석도 없다. 그녀는 어느새 그와 마찬가지로 흠뻑 젖어서 바닷가에 주저앉은 채 소리를 지르며 울고 있었다.
“공주님.”
“라이킨이 하는 말 듣기 싫어요!”
듣기 싫다니 라이킨은 일단은 입술을 말았다. 그는 그러면서도 열심히 연습해보았던 말들을 떠올리려고 노력했지만, 눈앞에서 소렐이 울고 있는데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언젠간 끝낼 거라면 시작도 안 하는 게 나아요. 그냥 지금 끝내요!”
소렐은 입고 있던 잠옷을 따뜻한 바닷물이 밀려들어 적시든 말든 열심히 말했다.
“이혼 계속 진행하라고 할 테니까……!”
순식간에 새파란 눈이 휙 돌아갔다.
“공주님, 공주님.”
훌쩍거리던 눈이 붙잡는 팔에 반사적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사비나 로체 양 건은, 제가 잘못했습니다.”
소렐은 재깍 무릎을 꿇고 사과부터 하는 라이킨을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하지만 라이킨은 이혼 얘기가 나오자마자 무엄하지만, 공주님 말을 끊고서라도 사과를 해야 살 수 있다는 절박함이 앞섰다.
“친구는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에요. 잘못한 거 알면서 왜 그랬어요?”
“사교계에서는 그런 식으로 자주 만들어집니다. 이미 공주님의 친구들도 전부 다 집안끼리 어울리지 않습니까.”
사실 그건 그랬다. 소렐은 제가 순진한 소리를 했다는 걸 깨닫고는 움찔거리다가 발끈했다.
“그래서 친구를 빙자한 감시역을 붙인 게 잘했다는 거예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사비나한테 얼마나 보고받았어요?”
“따로 보고받은 건 없습니다. 공주님께 무슨 일이 생길 때나 알려달라고 한 것뿐이고, 공주님께서는 ‘무슨 일’이 생길 일을 아예 만들지 않으셨고요.”
라이킨은 최대한 솔직하게 말했다. 소렐이 믿지 않는다 해도 그는 밤을 새워서라도 다 말할 생각이었다. 몇 번이고 반복해가면서, 그녀가 믿지 않을 진실을 말할 거다.
“……처음부터 날 라이킨이 원하는 대로 철저하게 통제할 생각이었어요? 내 친구들은 전부 다 라이킨이 만든 거예요?”
“다 만들었다면 굳이 사비나 로체 양만 에설론 백작이 끌고 왔겠습니까?”
그건 맞는 말이었다. 루드밀라는 최대한 소렐에게서 라이킨에 대한 믿음을 부수고, 상처를 주는 게 목적이었으니 라이킨이 심어놓은 친구들이 더 있다면, 그 애들까지 싹 끌고 왔을 사람이었다. 그게 안 된다면 말이라도 했겠지. 그래도 소렐은 그를 잔뜩 노려보았다.
“……공주님께서 가장 마음 쓰시는 친구를 공주님과 일부러 친하게 지내도록 한 건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는 눈물이 뚝뚝 굴러떨어지는 소렐의 뺨을 보며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울고 있는데 안아 달래주지도 못하다니, 이보다 더 끔찍하고 잔인한 일이 또 있을까. 더 최악인 건 울린 사람이 라이킨 본인이라는 거였다.
“다시는 그러지 않을 테니, 용서해주십시오.”
몇 달 만에 간신히 여기까지 왔다. 라이킨은 그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소렐은 턱에 힘을 주고 또 울먹거렸다. 저 말 한마디에 간사하게 마음이 조금이나마 사르르 풀렸기 때문이다. 안 된다. 정신 차리자. 교활한 뱀파이어에게 홀라당 넘어가면 안 된다!
“그거 말고 또 있잖아요.”
소렐은 일부러 더 무섭게 인상을 쓰면서 울지 않으려고 애썼다. 저 뱀파이어의 죄는 차고 넘쳤다. 그러니까 아무리 물에 빠진 생쥐 같은 몰골로 빌어도 용서해주면 안 된다. 물론 생쥐치곤 지나치게 기품이 있었고, 잘생기기까지 했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그럴 필요 없어요. 무릎 꿇지 말아요.”
그녀는 결국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날 그냥 요, 욕망한 것 뿌, 뿐이지……, 사, 사랑도 아니고…….”
얼마나 울었는지 이젠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소렐은 헐떡거리면서 뻗어오는 라이킨의 손을 쳐내고 말을 간신히 이었다.
“어, 어차피 끄, 끝날 거…….”
가장 비참하고 가슴 찢어지는 말을 기어이 또 내뱉었다. 가슴을 쥐어뜯어도 모자랄 통곡이 새어 나왔다. 언제 끝날까? 끝나버린다니, 죽고 싶어. 그냥 지금 다 끝나고 세상도 끝났으면 좋겠어.
“……공주님.”
소렐은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뺨을 맞고 물세례를 맞아도 화를 내지 않았던 남자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아니, 아닙니다, 공주님……. 제발……. 저 좀 보세요. 제 말을 끝까지 들어주세요.”
엉망으로 우는 공주님 앞에서 그는 빌고 또 빌었다.
“저는 공주님을 사모합니다.”
뒤늦어서 면목도 없고 뻔뻔한 고백이라 라이킨은 말하고도 또 비참했다. 새파란 눈에서 선이 굵은 얼굴을 타고 눈물이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