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방랑 (10)2021.08.18.
소렐 이드리스의 꿈은 대학을 가서 많은 걸 보고 배우는 것이었다. 꿈이자 목표였던 것은 어느새 저만치 뒤로 밀렸다. 주체할 수 없는 마력 때문에 머리카락이 춤을 추고, 눈에는 황금빛이 맴돌다 못해 걸핏하면 벼락을 동반한 폭풍우를 몰고 다니는 대마법사가 대학을 가는 건 좀 곤란했다. 소렐은 미친 듯이 춤을 추는 머리카락을 보고 조금 우울해졌다.
‘겨울이라니…….’
기대했던 새 학기가 다 끝나가는 마당이다. 그녀는 오른쪽 대퇴골을 비롯해서 다섯 군데나 부러졌고, 뒤집어진 내장은 아직까지도 안정이 필요했으며, 내내 침대에 누워 지내느라 몹시 허약해졌다. 공부고 나발이고 집에 들어앉아 정양을 해야 할 참이었다. 그나마 죽지 않았던 건 고대마법이 최소한 그녀의 몸을 지키려고 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라이킨이 빠르게 움직인 덕분이었다. 그에게 또다시 목숨을 빚졌다. 소렐은 작은 손을 맞잡고 만지작거렸다.
“답답하십니까?”
이 방에, 이 낯설지만 그녀가 두 달 넘게 누워 있었던 방에 출입하는 사람은 딱 셋이었다.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과 라이킨, 그리고 의사뿐이다. 소렐은 특히 라이킨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차라리 그가 화를 냈으면 편했겠다. 그러나 그는 정말 이상하게도 예전과 전혀 다를 게 없었다. 분명히 아주 큰일을 겪었는데도 전혀 흔들림 없이 똑같이 자상하고, 똑같이 섬세하게 그녀를 살피기만 한다. 비난 한번 없었다. 이상하다. 소렐은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잘못된 선택을 했고 경솔한 행동으로 이어져 하마터면 두 사람 다 죽을 뻔했다. 그녀 혼자서 벌인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을 라이킨이 목숨을 걸고 수습했으니 당연히 화가 날 텐데 왜 화를 내지 않을까. 아니, 왜 최소한의 질문도 하지 않을까.
“그래도 조금만 참으세요. 겨울의 정취는 창문으로 감상할 때가 가장 아름답지, 밖에 나가서 느끼는 건 춥기만 합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벽난로에 장작을 더 던져 넣었다. 글래스턴 공작은 직접 불쏘시개를 들고 벽난로 상태를 살폈다. 소렐은 그가 가까이 올 때마다 시선을 떨어트렸다. 어제 깨어난 그녀는 지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몰라 두어 시간 정도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그러다가도 힘없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게 뭐하는 거지?’
대마법사가 다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까지 한참 부족한 것 같다. 처음으로 한 대단하고 커다란 결정은 말 그대로 대단히 무모한 결정이었고, 그녀는 죽을 뻔했다.
‘라이킨은 왜 아무것도 묻지 않지?’
어쨌든 목숨을 걸었으니, 결합점을 끊는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온몸을 바쳐가며 배웠다. 그러니 가디언은 그녀와 평생 함께일 거다.
‘……고대마법 때문에 그러나? 그래서 여전히 잘해주는 건가? 어차피 평생 함께여야 한다면, 일부러 얼굴 붉히지 않는 게 편하니까?’
소렐은 일부러 무표정을 유지했지만, 라이킨이 그녀의 미세한 얼굴근육 변화도 다 잡아낼 만큼 그녀를 가을 내내 바라보았다는 건 몰랐다.
“여기……, 여기는 어디예요?”
“글래스턴 공작저입니다.”
라이킨은 조용히 대답했다.
“제 본가이지요. 일전에 한 번 방문하신 적이 있습니다.”
아, 로렌스를 처음 만나고 화들짝 놀라 그를 밀어냈던 곳이다. 소렐은 담요를 만지작거리다가 겨우 표정을 관리하고 고개를 들었다. 라이킨은 벽난로 곁에 서서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걸까?
“또 궁금하신 건 없습니까? 곧 해가 바뀔 텐데요.”
소렐이 누워 있는 사이 날짜가 바뀌고,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그게 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저 작은 아가씨가 알까?
“……내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어요?”
“두 달 하고도 보름입니다.”
“……이제 다 괜찮은 건가요?”
많은 질문이 포함된 말이었다. 라이킨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번에도 소렐은 많은 대답을 얻어내지 못했다. 그녀는 계속 라이킨의 말을 기다려 보기로 했다.
“……당분간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저기, 엘펜하임 일은…….”
아니, 사실 당신은 어떠냐고 물어보려고 했지만 말이 자꾸 뱅뱅 돈다.
“그건 여전히 처리가 복잡한 문제입니다. 외교도 얽혀 있으니까요. 하지만 공주님께서 아주 걱정하실 필요는 없고, 엘펜하임에서도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구나. 그렇다면 일단은 다행이다. 가장 걱정했던 급한 불은 조금 무시해도 괜찮단다.
“이 붕대는 얼마나 더 하고 있어야 해요?”
소렐은 그의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일부러 마주치지 않는 건지, 아니면 차마 마주칠 수가 없는 건지. 라이킨은 그녀를 앉혀둔 의자 팔걸이에 손을 얹고 바로 거리를 좁혔다. 도톰한 입술이 놀라 숨을 들이마시느라 살짝 벌어졌고, 황금빛이 감도는 검은 눈은 어쩔 수 없이 그와 마주해야 했다. 좁은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마법으로 낫게 하실 생각은 하시면 안 됩니다.”
“그런 생각 안 했어요.”
“마법 때문에 얻은 부상이니 자연스럽게 치유되어야 합니다. 워낙 여러 군데가 골절되어서 오래도록 쉬셔야 한다고 의사가 말했잖습니까.”
“알아요.”
소렐은 조그맣게 대답했다. 그녀는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새파란 눈동자가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니…….”
라이킨은 그녀에게 담요를 더 덮어주었다.
“다른 생각은 하지 마시고.”
어쩐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눈 같다.
“푹 쉬기만 하세요.”
소렐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눈썹을 살짝 모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해야 하는데, 그녀는 입술을 달싹대다가 겨우 한마디를 조심스럽게 했다.
“……알겠어요.”
그러곤 저도 모르게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때 남자는 손을 뻗어 그녀의 아랫입술을 눌렀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소렐이 그만 굳어버렸다.
“깨물지 마십시오. 아프실 텐데.”
눈을 동그랗게 뜬 여자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고 있던 이를 뒤로 물렸다. 라이킨은 엄지로 그녀의 입술을 천천히 훑었다. 분명히 그녀의 입술인데, 그녀의 것이 아니라 라이킨의 소유인 것만 같았다. 소렐은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도톰하고, 여전히 사랑스러운 다홍빛인 입술을 홀린 듯이 바라보던 라이킨은 갑자기 흠칫 놀라며 손을 내렸다. 그저 순간에 불과한데, 너무나 긴 시간처럼 느껴져서 소렐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지루하시면 읽을 것을 좀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그녀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킨은 그저 평범하고 자연스럽게 굽혔던 몸을 펴고 침실을 가로질러 나갔다. 그의 등 뒤에서 문이 닫히고, 라이킨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부드럽고 연한 살이 파르르 떨리던 감각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남자는 그 감각을 소중히 감싸 입 맞추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애써 태연한 척했으나, 명백히 의도하지 않았던 본능적인 실수였다.
* 말을, 말을 해야 했다. 라이킨은 진땀을 흘리며 아무도 없는 서재에서 혼자 왔다 갔다 하며 중얼거렸다.
“공주님, 제가 공주님을 사모…….”
아니, 이건 너무 갑작스럽다.
“공주님, 우리가 지난 가을에 겪은 일에 대해서 함께 의논하고 싶은, 아, 제기랄, 이것도 아니야.”
너무 딱딱하잖나. 갑자기 이야기를 꺼내면 어색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말을 해야 했다. 그렇지만 이 상황에서 아직 요양 중인 소렐에게 불쑥 고백을 하면 꼭 발목을 잡기 위해 뻔뻔하게 꾸며내는 것처럼 들리지 않을까?
‘최대한 진심을 담아서, 진실하게 느껴지게끔…….’
소렐에게는 뭐 하나 소홀히 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그의 마음을 보이고 표현하는 건 더더욱 중요했다. 귀한 사람에게 하는 지나치게 늦은 고백이다.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야 했다.
“그런데 지금 막 깨어난 사람한테 이런 말을 해도 되나……?”
왜 일찍 말하지 않았을까. 자괴감에 머리카락을 쥐어 뜯어가면서도 라이킨은 어떻게든 말을 연습했다. 그가 서재에서 중얼중얼하는 사이, 위쪽 침실에서는 소렐 역시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내가 물어봐야 하나? ……근데 뭐라고 물어보지? ……우리 앞으로 어떡해요? 아니, 아니야.”
소렐은 나풀나풀 저 혼자 춤을 춰대는 머리카락을 절박하게 쥐었다. 이건 너무 대마법사가 하기엔 멍청한 질문 같잖아! 라이킨은 그녀에게 그 어떤 것도 제한하지 않았다. 신문이든 전화든 뭐든 마음껏 쓸 수 있게 해줬다. 심지어 이혼변호사에게 연락하는 것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렐은 생각하다가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설마 지금 생각이 바뀌어서 그냥 이혼하자는 건가……?”
아니, 아니, 이건 너무 갔다. 돌아오자. 소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혼을 할 거였으면 진작 했겠지.
‘어쨌든 같이 있어야 한다니까!’
그런데 같이 있으면 뭐지? 그냥 단순한 공주와 호위기사?
‘공주라고 하기엔 이미 망한 왕실의 공주인걸. 그럼 그냥 마법사와 가디언?’
그뿐이라고 하기엔 그는 그녀의 입술을 만졌다. 홀린 듯이 만졌다. 소렐의 가슴이 간질거리다 못해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이 콩닥거릴 만큼 은밀한 손길이었다. 그러다가 오히려 그가 움찔 놀란 것처럼 손을 빼긴 했지만, 사과를 하진 않았다.
‘그럼 사과를 할 일이 아니란 거지?’
골똘하게 생각에 사로잡힌 대마법사는 점점 깊이 집중했다.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공주님.’
요즘 소렐의 시중을 들어주고, 간호하는 라이킨이 누누이 하는 말은 무의식 중에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스스로의 몸이 붕 떠오르고,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는 것도 몰랐다. 붕대를 감은 다리로 왔다 갔다 하며 생각에 잠길 수는 없으니, 무의식적으로 마법을 사용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아니, 진짜 웃기는 사람 아냐?”
그녀의 미간이 조금 구겨졌다. 하고 싶은 건 다 하겠다는 거야, 뭐야. 아직까지 초보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고대마법의 계승자이자 유일한 대마법사, 그리고 망하긴 했어도 유서 깊은 헬레인 왕조의 공주에게 감히 그래놓고! 입술에 손을 대놓고! 아무 말도 안 하다니!
“아니, 아니지. 아니야. 내가 화를 내면 아직 안 돼. 그러니까…….”
혼자 중얼중얼, 고개를 도리도리, 정신이 없다. 소렐은 둥둥 떠서 방 안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이 보았다면 경악을 했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녀는 지금 침실에 없었다. 물론 서재에서 진땀을 뻘뻘 흘리며 고민하고 있는 라이킨도 그랬다.
“나는…….”
대마법사는 또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몸은 여전히 둥둥 떠서 이젠 스르륵, 벽까지 통과했다. 소렐은 그렇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깊은 학문이나 다름없는 고대마법, 엘펜하임을 비롯한 유서 깊은 서고에서 잔뜩 흡수한 지식, 그리고 라이킨에 대한 생각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그 어느 곳에서도 소렐 이드리스에 대한 고찰은 없었기에 소렐은 이번에는 자신과 장래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했다.
‘나는……, 나는 대마법사야. 고대마법을 지키고 올바르게 계승시켜야 해.’
그거 하나는 분명히 알았다. 머릿속에서는 배우지도 않았던 방대한 지식이 휘몰아쳤다.
‘그렇지만 가디언이 있을 수밖에 없는 대마법사야. 나 혼자 지킬 수 없어. 그러니까 언제나 함께 있어야 해.’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아주 태연하고 정중하게 굴고 있는 남자와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가고 싶었다.
“어……, 그렇지.”
소렐은 아, 하고 깨달았다. 내내 같이하고 싶었다. 늘 그랬고, 지금도 그랬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라이킨이 그걸 바라지 않는다면 소렐은 아마 무척 슬프겠지. 무척, 무척 슬플 거다. 여전히 그랬다. 대마법사는 여전히 멍한 눈을 하고 상념에 잠겨 글래스턴 공작저 전체를 둥둥 떠다녔다. *
“공주님, 제가 공주님을 사모……, 아니, 이것도 아니야. 아까랑 똑같잖아.”
제기랄! 라이킨은 손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공주님께서 깨어나신 지 벌써 이틀째면 빨리 생각이란 걸 하고, 수습이란 걸 해야 할 거 아닌가! 무능력해도 지나치게 무능력한 호위기사다. 진심 하나 전달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지 천 년 만에 알았다. 천 년을 살았는데도 벌벌 떨고 있다.
“꽃, 그래, 꽃을 아주 많이 준비하고…….”
일단 꽃과 보석, 그래, 보석도 좋겠다. 라이킨은 혼자 중얼거리다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교수님.”
에벌린이었다.
“어서 이쪽으로 오시는 게 좋겠어요. 당황하지 마시고요.”
당황하지 말라니, 그게 무슨 뜻인가. 목소리마저 아주 작게 말하는 에벌린을 따라 라이킨은 일단 나갔다.
“공주님께서 침실에 안 계세요.”
“예?”
당장 그의 목소리가 확 튀었다.
“당황하지 마시라니까요. 그래서 급히 찾았는데, 이리 오세요.”
에벌린은 라이킨을 이끌고 식당 쪽으로 걸어갔다. 식당에 계시나, 했는데 그게 또 아니었다. 그 다리를 해서 어떻게 여기까지 오신 건가. 라이킨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휘발되었다.
“저기 계세요.”
소렐은 식당 뒤편 복도에서 멍하니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앉아서 뱅글뱅글 돌고 있으니 다리는 아프지 않겠지만, 일단 마법이었다. 깨어난 지 이틀밖에 안 되는 사람이 마법을 쓰고 있단 말이다.
“이 근처에서 경호하고 있던 사람들은 다 물렸어요.”
“……고마워요, 에벌린.”
에벌린은 나지막하게 속삭인 뒤 사라졌다. 지금 소렐의 표정을 보니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멍하니 허공을, 아니, 허공 넘어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마법을 사용하고 있다면 과연 대마법사다웠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했지만, 대마법사의 가디언이 조용히 처리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그는 그가 가까이 왔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소렐에게 조심스럽게 딱 한 발자국만 다가섰다.
“……공주님?”
솔직히 라이킨은 그런 조심스럽다 못해 낮은 목소리에 소렐이 반응할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아마 약간 크게 목소리를 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를 전혀 바라보고 있지 않던 황금색 눈이 그를 휙 돌아보았다.
“……공주님.”
라이킨은 잔뜩 긴장했다. 어딘가 인간 같지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대마법사다. 그 역시 조심스럽게 대해야 했다.
“……아.”
소렐이 중얼거렸다. 서늘한 푸른 눈이 그녀를 찾아왔다. 처음 생각했던 눈이다. 어쩌다가 저 눈에서 푸른 바다를 떠올리고, 따뜻한 물에 대한 마법을 고찰하는 것까지 왔을까?
“여기서 뭐하고 계셨습니까?”
애써 침착함을 가장하는 목소리에 소렐은 눈을 깜빡였다. 완전히 황금색으로 빛나던 눈에 다시 까만빛이 돌았다. 여기? 여기가 어딘데? 여긴 침실…….
“어, 어……!”
대마법사는 외마디비명을 지르며 허우적거렸다. 여긴 침실이 아니잖아!
“어, 저기, 아, 그…….”
또 마법을 저도 모르게 써버렸다. 크게 실수해서 신중해야 하는데! 안 그래도 라이킨의 표정이 아연실색한 것 같아 소렐은 두 배로 당황해버렸다.
“도, 돌아갈게요!”
얼른, 빨리 제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공주님!”
둥둥 떠다니던 대마법사가 뿅, 하고 사라졌다. * 쏴아아아아, 파도가 밀려들었다.
“……아, 큰일 났다.”
소렐은 벽난로에 달궈져 훈훈한 공기가 아닌 습기를 머금은 더운 공기와 만났다. 그녀는 목이 졸린 듯한 목소리로 내뱉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푸른 바다와 황금빛 백사장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여태까지 생각하고 있던 해변이었다. 얼른 제자리로 돌아가겠다고 마법을 쓴 게 그만, ‘얼른’에 초점을 맞춰버린 모양이다.
“아, 어떡하지, 그러니까 일단…….”
라이킨이 또 놀랐겠네. 대책 없이 일을 저질러버려서 소렐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그녀는 정신없이 허공을 더듬으며 글래스턴 공작저 침실로 돌아가기 위해 눈을 질끈 감고 집중했다.
“침실에, 침실로 돌아가는, 돌아가는 마법……!”
그때 꼭 쥔 그녀의 양 주먹을 누군가가 턱 잡았다.
“……참 말 안 들으십니다.”
낮은 목소리와 강한 손이었다.
“으아아악!”
너무 놀란 소렐이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허공에 떠 있는 게 아니라 무릎 아래가 휙 올라가서 아예 안겨 있는 상태였다.
“……이젠 비명까지 지르시는군요.”
“아, 아니, 나는, 저기, 아니…….”
너무 놀라서 꿈틀거리는 몸을 꽉 붙잡아 품 안에 누른 라이킨은 주변을 한가롭게 둘러보았다.
“좋은 곳이군요.”
간단하게 소렐을 안아든 그는 아주 태연했다. 정작 대마법사는 혼자 경악하고 있는데 말이다.
“라, 라이킨이 어떻게 여기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