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방랑 (9)2021.08.14.
소렐에게 있어 라이킨과 보낸 시간은 꼭 가을 같았다. 온 세상이 붉게 물들고, 새파란 하늘과 기가 막히게 대비된다. 그러나 그 모든 건 찬 서리 한 번에 순식간에 회색으로 변하고 죽어버리는 짧은 순간. 가을이었지만, 그녀는 대학에 가는 대신 세상을 떠돌았다. 눈물을 흘리면서 이동하는 대마법사를 따라 번개가 내리치고 비가 내렸다. 소렐은 반쯤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그녀에게 가장 익숙한 장소를 찾았다. 콰광! 요란한 가을폭풍이 시골집에 들이닥쳤다. 소렐은 자신이 폭풍을 불러왔다는 것도 몰랐다. 머리카락이 급기야 황금색으로 물들어 춤을 추고 있었지만, 그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라이킨이 깨끗하게 훑고 간 바닥에 오래된 고문서를 내려놓고, 엘펜하임에서 슬쩍 가지고 온 성스러운 유물도 꺼냈다. 그 유물이란 것은 은으로 만든 날카로운 가위였다. 섬세하게 보석까지 조각되어 있었지만 소렐에겐 그저, 마법을 쓸 때마다 라이킨과 이어지는 결합점을 다 끊어낼 수단에 불과했다.
‘끊어버릴 거야.’
다 끊어버릴 거야. 소렐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면서 손가락으로 진을 바닥에 그렸다. 사랑보다 욕망이 컸대. 그마저도 그냥 언젠간 끝날 감정이었대. 유효기간이 있다고 생각하냐는 샤를렌의 질문에 라이킨은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은 긍정이다. 황금빛이 도는 검은 눈은 뭔가에 사로잡힌 것처럼, 가득 고이는 눈물을 몇 번이나 털어내면서 무섭게 집중했다.
“나쁜 놈…….”
처음에도 그냥 떠맡은 아가씨 때문에 난감하고 대마법사라 편리했단다. 라이킨의 그 말은 소렐에겐 별로였다는 걸로 들렸다. 귀하게 키워진 헬레인 공주님께서 참지 못하고 남의 뺨을 때리는 엄청난 짓을 벌인 게 바로 그 때문이었다. 결국 별 거 아니었다. 소렐에겐 소중했던 게, 라이킨에게는 언젠간 픽 죽어버릴 사소한 욕망에 불과했다. 사랑보다 욕망이 더 크다면 그게 사랑인가! 욕망이지! 라이킨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겠지만 몰래 찾아가서 한참 기다리고, 그냥 가야 하나, 아니면 말을 걸어볼까, 한참 고민한 공주님에겐 세상이 무너지는 이야기였다.
“잘라버릴 거야…….”
소렐은 주먹을 꼭 쥐고 눈물을 닦았다. 눈물이 자꾸 나와서 앞을 똑바로 보기가 힘들었다. 내내 죄스러웠다. 라이킨에게 살인자의 남편이라는 수치스러운 칭호를 붙인 게 미안했고, 그가 그래도 그녀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는 걸 알아서 의심하면서도 그 점은 미안했다. 그 와중에 라이킨의 얼굴을 때린 게 못내 미안해서, 그래서 더 화가 났다. 라이킨이 끝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그럼 이 관계는 끝이다. 그녀는 그걸 막을 힘도, 마음도 없었다. 그는 그녀를 욕망할 뿐이고, 그녀는 그를 지금도 몹시 사랑했으니까.
“혼자 씩씩하게 살 거야…….”
하나도 씩씩하지 못하게 울면서 그린 진은 순식간에 완성되었고, 그녀가 은가위를 집어 들자 마법진이 발동되었다. 황금색 물결 같은 결합점들이 잔뜩 펼쳐졌다. 너무나 많아서, 소렐은 물결을 잘라내야 했다. 그녀는 잠시 그녀와 라이킨을 연결해주는 결합점을 울면서 바라보았다. 자르면 어떻게 될까? 그녀 혼자서 고대마법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을까? 아니, 라이킨에게는 어떠한 타격도 없을까?
“그, 그건 아, 안 돼.”
라이킨이 아프면 안 된다. 대마법사는 혼자서 모든 걸 잘 감당해야지만 제대로 된 대마법사다. 소렐은 가위를 내려놓고 급하게 진을 고쳐 그렸다. 모든 결과는 그녀에게로 향할 것이다. 그녀는 고대마법의 계승자이니 괜찮지만, 라이킨은 아니다. 끊는 사람도 그녀이니, 그녀가 홀로 깨끗하게 정리해야 했다. 더 깊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기에 소렐은 거기까지만 생각했다. 혼자 책임지는, 의젓한 어른이자 대마법사가 되자고. 그뿐이다. 절대로 라이킨을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나쁜 놈.”
소렐은 그녀가 아는 최고의 욕을 한 번 해보았다. 그놈은 나쁜 놈이야. 그녀는 마땅히 화를 내야 했다! 그러곤 가위를 집어 들고,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면서 괴로운 만큼 크게 그어 결합점을 잘라냈다. 황금색 실들이 잘려서 눈앞에서 흩날린다. 더 잘라야 했다. 소렐은 팔을 더 들어보려다가, 비명을 질렀다.
“아악!”
뚜둑, 하는 소리와 함께 끔찍한 고통이 기다렸다는 듯이 찾아왔다. * 눈앞이 새까맸다. 정신은 혼곤했고, 의식을 차리지 못했지만 의식을 차리지 못한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주님, 공주님!”
누군가가 악을 썼다. 새까맣던 눈앞이 조금씩 가물가물하니,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낮인가? 소렐은 간신히 눈을 떴다. 인식이란 걸 하자마자 참아내기 힘든 통증이 오른다리에서부터 올라왔다. 이미 이마는 진땀으로 젖어 있었다. 소렐은 그려놓은 진 위에 쓰러진 채 몇 시간 동안 기절했다는 걸 깨달았다.
“아, 제기랄…….”
폭풍우를 뚫고 지금 막 도착한 라이킨은 범람하는 황금색 물결과 뒤틀리기 시작한 고대마법을 보며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막혀버렸다. 마법진이 그의 출입을 불허하고 있었다.
“공주님!”
소렐은 얼마나 부러진 건지 모를 오른다리를 내려다보다가, 그녀를 애타게 부르며 마법진의 투명한 막을 주먹으로 내리치는 라이킨을 보았다. 커다란 고통에 다시 기절할 것 같았지만, 그는 그래도 멀쩡한 모양이다.
“그만하세요, 제발!”
끝을 염두에 둔 남자가 하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 소렐은 괜히 마음이 급했다. 그는 너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손만 뻗어도 그녀의 마음을 쥐고 흔들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또 휘둘려서 얌전한 애완토끼가 되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소렐은 떨리는 손을 뻗어, 바닥에 떨어트렸던 은가위를 잡았다. 날카로운 금속이 황금색 결합점을 비춰 반짝거린다.
“안, 안 됩니다, 공주님!”
대마법사가 굴러들어와 좋았다고 하는 남자가 안 된다고 하는 거면 해도 된다. 소렐은 그녀 주변에 일렁이는 결합점을 아무렇게나 붙잡고 날카로운 가위날을 댔다. 침착하자. 부러진 다리야 마법으로 붙이면 된다. 일단은 그와의 결합을 많이 끊어내야 했다. 최대한 많이.
“다쳐요, 제발……!”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렐은 아무렇게나 결합점을 잘라냈다. 몸을 제대로 일으키지도 못하면서, 토끼는 난생처음으로 악에 받쳐 일을 저질렀다. 가위가 다시 떨어졌다. 커튼처럼 잘린 결합점이 나부꼈다. 소렐은 고개를 숙인 채 숨을 몰아쉬었고, 라이킨은 숨을 쉬지 못했다. 다가오는 공포를 기다리는, 그 찰나의 정적은 금방 깨졌다.
“……우으…….”
소렐은 신음 같은 소리를 내며 피를 왈칵 토해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토해낸 피를 바라보았다. 피는 한 번 토해낸 것으로 끝이 아니라, 계속해서 주르르 쏟아졌다. 라이킨은 그걸 보자마자 온몸으로 부딪쳐 마법진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또한 피를 토했다. 강인한 무릎이 저절로 꺾이고, 고대마법은 침략자에게 매섭게 굴었다. 이대로 있다간 둘 다 대량출혈로 죽을 거다.
“으……!”
곧 죽어도 싫다고 힘없이 바르작대는 소렐이 그에게 붙잡혔다. 까만 눈에 또 눈물이 가득해서 후드득 떨어졌다. 라이킨은 버텨야 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버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왈칵왈칵 피가 올라오는 걸 참고 소렐의 턱에 줄줄 떨어지고 있는 피를 삼켰다. 그의 것과는 대비되는 붉은 피는 너무나 강력해서, 이 아수라장에서도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고 버티게 만들어주었다. 소렐은 이미 반항을 할 여력도 없이 그의 품 안에서 축 늘어졌다. 고대마법은 더 사납게 날뛰었다. 가디언에 의존하는 부분을 점점 잃고 있으니 소렐의 몸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싫어…….”
보는 사람이 두려울 정도로 희게 질린 얼굴로 피를 토하면서도 기어이 싫다고, 소렐은 고개를 저었다. 기어이 싫다고 그에게 대못을 박았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라이킨은 계속 치밀어 오르는 토기를 참아가며 싫다는 소렐의 피를 더 받아마셨다. 꾹꾹 눌러 삼켜 버텨야 했다. 속이 뒤집어지고 있었지만, 간신히 손을 뻗을 정도가 되자마자 그는 힘없이 끊어져 나풀대는 결합점들을 모아 움켜쥐었다. 소렐은 어떻게든 눈을 뜨고 있으려고 애썼지만 더 이상은 힘이 없었다.
‘마법으로 치료하고, 더 잘라야 하는데…….’
힘줄 돋은 커다란 손이 끊어진 결합점들을 모으고 있었다. 소렐은 그 손을 마지막으로 정신을 다시 잃었다. 라이킨은 혼절한 소렐을 몸으로 지탱하며 결합점들을 전부 그러모았다. 하나하나 따로 잇는 건 불가능했다. 사납게 날뛰는 고대마법 앞에 그럴 시간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는 턱에 쏟아진 자신의 시커먼 피를 손으로 훔쳐냈다. 피 묻은 손으로 잘려 나간 결합점과 결합점을 다시 묶어 억지로 이었다.
“……다시는 끊어지지 않게 할 테니.”
그는 푸른 눈으로 허공을, 정확하게는 날뛰고 있는 고대마법을 노려보았다. 황금색으로 반짝이던 결합점에 시커먼 피가 잔뜩 묻어났다.
“그만 날뛰고 들어가.”
라이킨의 턱으로 다시 시커먼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는 그래도 몇 번이고 끊어진 결합점들을 더 찾아서 묶고, 또 묶었다. 그가 묶은 부분에는 그의 피가 잔뜩 칠해져 있었다.
“공주님에게 가지 말고.”
이미 잔뜩 다쳐서 감당하기 힘든 공주님에게는 말고.
“나한테 돌아와.”
뱀파이어는 피를 계속 흘려대면서도 고대마법을 노려보며 분명히 말했다. 원래 그가 짊어지고 있던 의무였다. 다시 되돌려 받는 것뿐이다. 저게 더 이상 날뛰지 못하도록 그의 안에 처박아놔야 했다. 소렐이 사용할 때만 차분히 꺼내서 사용하는 힘에 불과해야 했다. 그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노려보는 푸른 눈에 사납게 일렁이던 힘들이 잠잠해졌다. 라이킨은 눈을 감고, 소렐이 끊어낼 때 사라졌던 감각이 다시 이어진 것을 확인했다.
‘아. 됐군.’
라이킨은 그 와중에도 씩 웃었다. 그가 도로 묶은 힘만큼 고대마법의 비중이 그에게로 더 옮겨져 왔다. 일부러 피를 묻혀 묶은 대가는 꽤나 훌륭했다.
“……윽……!”
그러나 웃는 것도 잠시, 라이킨은 뚜둑, 하는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소렐을 안은 채 주저앉고 말았다.
‘오른다리인가?’
골절이 세 군데. 아니,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 고대마법은 이제 잠잠해졌고, 라이킨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지만 뼈가 뚝뚝 부러지고 있었다. 그럼 뭐겠는가. 안타깝게도 소렐과 라이킨 사이에는 또 한 사람, 죽은 이가 하나 남아 있었다. 내 딸 눈에서 눈물이 났다간 네놈 눈에서는 피눈물이 날 줄 알아. 이건 진심이야. 마법사의 명예와 모든 지식을 걸고 진심이라고, 이 개자식아. 라이킨은 피가 묻은 손으로 소렐을 안고 내려다보았다. 눈이 많이 부었다. 그만큼 그 때문에 많이 울었다는 건 알겠는데,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다. 대마법사의 저주란 게 꼭 이런 때 나타나야 하는 건가?
‘시끄러워. 이제 와서 뭘 어쩔 건데?’
펄펄 뛰는 펠릭스 이드리스를 떠올려보았다. 이 와중에도 기분이 좋았다. 그의 긴 손가락이 연신 소렐의 목덜미를 더듬었다. 느리지만 분명하게 뛰는 맥박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마스터!”
뛰어드는 수하들을 보며 라이킨은 희미하게 웃었다. * 소렐은 다시 눈을 떴다.
“움직이면 안 돼요.”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이 안쓰럽다는 듯 웃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눈꺼풀을 밀어내는 것조차 힘겨웠다.
“너무 오래 깨어나질 못하시는데…….”
누구의 목소리인지 모르겠다.
“부부가 저렇게 나란히 누워서 어떡해요?”
“벌써 보름이나 지났습니다.”
알지 못할 말들이 흐릿하게 들리다가 다시 사라졌다. 빛이 시야에 들어오다가 다시 명멸한다. 바람이 들어오다가 다시 닫히고, 따뜻한 공기만이 남았다. 가끔 그녀를 만져주는 손길이 있었지만 소렐은 거의 느끼지 못했다.
“공주님.”
누군가가 한숨을 쉬며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다친 건 제가 더 많이 다쳤는데 왜 아직도 안 일어나십니까?”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귀찮을 정도로 말을 걸었다.
“공주님 혼자 다치겠다고 굳이 마법을 걸지 않아도 제가 더 빨리 일어났을 텐데.”
말 걸지 마. 나는 아직 기분이 좋지 않아서 잘 거란 말이야.
“어서 일어나세요. 이 가을이 다 지나고 있습니다.”
바스락바스락, 낙엽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해명은 들으셔야 할 거 아닙니까…….”
쏴아, 하고 바람이 불던 소리도 어느덧 멎었다. 괴로운 목소리는 그래도 쉬지 않고 들려왔다.
“이혼장까지 날려놓고 뺨까지 때렸으면서 이거 너무 뻔뻔하신 거 아닙니까?”
그건 맞는 말이었다. 맞는 말이라서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부끄러워서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아니, 괜찮으니까 그냥 일어나세요.”
목소리는 황급히 말을 바꿨다. 마치 그녀가 미안해하는 걸 안다는 듯.
“다른 아가씨들은 전부 다 학교에 갔습니다, 공주님. 학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어요.”
그 목소리는 때때로 새로운 사실도 전해줬다. 대부분 소렐은 기억하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는 말에 불과했지만, 정말 성실하게 꾸준히 혼자 말을 걸어왔다.
“왕세자 그 새끼가 공주님께 따로 편지를 보냈더군요. 읽어드릴까요? 아니, 딱히 읽어드리고 싶지 않군요. 사실 시건방지게 이혼에 유감을 표한다느니 어쩌고 하면서 공주님을 떠보는 편지라 즉시 태워버렸습니다. 깨어나셔도 어떤 내용이었는지 알려드리지 않을 겁니다.”
“공주님의 시골집 수리를 다 마쳤습니다. 창문을 다 깨버리신 거 아십니까?”
가끔 그 목소리는 끊어질 듯 괴롭게 들리기도 했다.
“……이 나이 먹고 이런 짓까지 시켰으면서, 깨어나자마자 이혼 얘기 하기만 해봐…….”
때론 그 목소리가 다른 목소리들과 섞였다.
“교수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젠 두 달이 가까워요. 이 정도면 너무 심각한 거 아닌가요?”
“에벌린, 진정해요. 괜찮으니까. 뼈도 붙고 있고, 고대마법이 제 주인을 그냥 둘 리가 없습니다.”
목소리는 계속 되었다. 끊어지면 오히려 목소리의 주인이 큰일 난다는 듯, 절박하고도 성실하게 계속 되었다. 그러나 들리는 귀에는 그저 스쳐지나갈 뿐이었다. * 주위가 너무나 고요해지기 시작한 계절, 소렐은 눈을 떴다. 낯선 곳이었다. 사주식 침대에 드리워진 커튼 사이로 훨씬 더 높은 천장이 보였다. 그녀는 커다란 침대 오른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만 더 시선을 옆으로 돌리다, 시리도록 푸른 눈과 마주했다. 그 눈은 계속해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던 듯했다. 얼굴에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느낌이 익숙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소렐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저 눈과 마주하는 순간, 서로 피를 토해내던 끔찍한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공주님.”
부르는 목소리가 떨렸다. 새파란 눈이 금세 붉게 물들었다. 불러놓고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다시 눈을 감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이 푸른 눈에 가득했다. 소렐은 그 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냉기 하나 없이, 불안하게 떨리는 그 눈에 소렐만이 담겨 있었다.
“……제가 누군지.”
목소리마저 잠겼다.
“……알아보시겠습니까?”
죽기보다 하기 싫은 질문을 어쩔 수 없이 했다. 기억이 제대로 있는지 확인하는 건 아주 중요했다. 고대마법이 그가 모르는 소렐의 의식을 어떻게 망가트렸는지 모른다. 뼈가 부러지고 피를 토하는 내상을 입은 것 외에 정신적인 상처까지 입었다면 어쩌나.
“……라이킨은.”
소렐은 쩍쩍 갈라지는 목을 간신히 움직여 말했다.
“말하지 마세요.”
그가 급히 고개를 내저었지만, 토끼는 아주 고집이 셌다.
“……다치지, 않았어요?”
잘생긴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의 표정이 바뀌자마자 토끼의 까만 눈이 얼른 시선을 피했다. 하긴 그녀가 생각해도 뻔뻔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었다.
“……저를 정말 들었다 놨다 하시는군요.”
기가 막혀서. 정신을 차리자마자 하는 말이 그의 안부 확인이라니. 소렐은 그를 저 시커먼 땅 아래 지옥까지 단숨에 처박다가도 구름 위 천국에 올려놨다.
“……미…….”
라이킨은 소렐이 뭐라 더 말하려던 걸 잘랐다.
“그만 말씀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소렐은 입을 다물고 그를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창밖에는 눈이 가득 쌓여 있었다. 공주님은 긴 가을 내내 잠들었다가 겨울이 찾아왔을 때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