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방랑 (8)2021.08.11.
뱀파이어들은 아주 심각하게 서서 엘펜하임 기사단 놈들이 모조리 잠든 이 기회를 틈타 다 죽이고 갈지 고민했지만 라이킨은 오직 한 지점만을 향해 걸어갔다. 간단했다. 잠든 이들을 따라가면 된다. 그는 몇 번이고 소렐에게 건넬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빠르게 걸어갔다. 뛰어가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소렐이 놀라서 달아나게 하면 안 될 일이다.
‘일단은 무사하신지부터 확인하고…….’
엘펜하임 기사단이 잔뜩 몰려들었다가 죄다 픽픽 쓰러져서 자고 있었다. 저들이 얼마나 잠들었던 건가? 라이킨은 대리석 계단을 서둘러 내려가면서도 날카로운 눈으로 사람들을 살폈다. 언제 깨어날지 모른다. 잠깐 잠든 거라면 괜찮지만, 잠이 계속해서 이어진다면 이들은 잠든 채로 죽을 것이다. 소렐은 제 마력을 전혀 제어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스터.”
뱀파이어들은 우뚝 멈춰선 라이킨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공비전하께서는 계시지 않습니까?”
질문에 라이킨은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은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탈하다. 손에 잡힐 듯 했는데 사라져버렸다. 밤낮을 달려서 이곳까지 왔는데, 소렐은 또 없다. 황금색 물결이 계속 반짝거리다 사라지고, 또 반짝거리다가 사라지길 반복하지만 정작 그 물결 끝에 연결된 여자는 없다. 이젠 익숙해지기 시작한 광기가 고요한 그의 의식 아래에서 한 번 더 폭발했다. 라이킨은 깨끗하게 정리된 의자와 책상을 살폈다.
“……얼마 전에 왔다 가셨군.”
그의 말에 부하들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엘펜하임 본부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서고다. 온갖 먼지 쌓인 자료들이 가득했다. 라이킨은 그중 최근에 먼지를 털어냈거나, 손을 댄 흔적이 있는 종이뭉치부터 찾았다. 소렐이 여기까지 와서 찾으려던 게 과연 무엇인가. 라이킨은 책장을 살피다가 낡아빠진 종이뭉치를 황급히 빼냈다.
“그게 뭡니까?”
주변을 경계하다가 떨어진 도끼와 쓰러진 사람을 보고 욕을 한마디 한 조슈아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라이킨은 종이를 휙휙 넘겼다.
“……나에 관한 일.”
조슈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라이킨이 읽고 있는 오래된 고문서를 바라보았다.
“마스터에 관한 일이 아니라 고대마법사의 가디언에 관한 내용 아닙니까?”
“그러니까 나에 관한 일이지.”
딱 잘라 말하는 라이킨은 다른 이야기는 들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아, 예.”
어련하시겠습니까. 소렐이 납치된 이후로 제정신이 아니더니 이젠 드디어 백팔십도 돌았다가 백팔십도 더 돌아서 완벽하게 제대로 돈 라이킨이다. 무슨 말을 더 해봤자 그의 귀에 들릴 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왜 찾으시는 걸까요?”
조슈아는 물어봐놓고선 괜히 물어봤다 싶었다. 말을 하자마자 그도 깨달았기 때문이다. 라이킨은 입귀를 비틀었다.
“가디언이 마음에 안 드시는 모양이지.”
혹은 떼어내고 싶을 정도로 괴롭거나. 소렐은 이곳에 있는 가디언에 관한 내용은 싹 다 읽고 사라졌다. 라이킨의 표정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돌아가지.”
이곳에 소렐은 없으니, 그도 볼일이 없었다. 엘펜하임에겐 굴욕도 이런 굴욕이 없었지만, 이젠 그들을 신경 쓰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 이후로 소렐 이드리스는 가디언에 대한 고문서가 있는 곳에 몇 번 더 출몰했지만, 라이킨은 그녀를 결코 만날 수가 없었다. 언제나 그 흔적만 뒤늦게 발견하고 꺾여버린 희망에 괴로워할 뿐이었다. * 가디언. 혹은 수호자. 고대마법을 부리는 대마법사에게 그런 존재가 필요한 경우는 딱 하나, 대마법사가 혼자 고대마법을 감당할 수 없을 때였다. 소렐은 동이 트고, 사방이 밝아지는 것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갑자기 폭발해버린 마력은 그녀를 편안히 잠들지도 못하게 했다. 그러나 잘 자지 못한다고 해도 피곤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편안하지도 않다. 글래스턴 공작부처, 이혼소송에 휘말리다! 엘펜하임 기사단장을 살해한 칼리에르 공비, 지금은 어디에? 칼리에르 공, 살인이 아니라 정당방위라 주장해 신문기자들은 신이 나서 그녀에 관한 기사를 연일 쏟아내고 있었다. 온갖 주목을 다 받으며 등장한 헬레인의 마지막 공주가 살인을 저지르고 이혼하며, 대마법사라는 소문까지 돌고 있으니 당연히 기사를 쓸 거리가 무궁무진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뭐라 떠들어대던, 고대마법을 완벽하게 이해한 소렐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대마법사야.’
적어도 혼자 자부할 정도는 되었다. 모자라거나 부끄러움도 없다. 당당하게 어깨를 펼 수 있었다. ……모든 가디언은 마법사가 사용하는 크고 작은 마법들을 함께 감당한다. 그들의 연결은 황금색 결합점으로 나타난다. 바꿔 말해, 마법사의 체력이나 그릇이 받쳐주지 못하는 강대한 마법을 가디언 없이는 사용할 수 없다. 가디언은 마법사가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진다. 소렐은 어릴 때부터 마법을 잘 다루지 못했다. 헬레인 토끼의 피가 섞였기 때문인 건지, 아니면 원래 그냥 그런 체질인지는 모르지만 아빠와는 달리 가디언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나 보다. 여러 곳을 돌면서 얻어낸 지식들이 머릿속에서 라이킨과 함께 제멋대로 뒤섞였다.
‘……보고 싶어.’
떠나버린 주제에 참 뻔뻔도 하다. 소렐은 고개를 푹 숙였다.
‘끊어버리기 전에 한 번만……. 안 되나? 너무 뻔뻔하나?’
소렐은 이제 라이킨과의 관계를 끊어내는 방법을 알았다. 될지 안 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가디언을 해제하는 방법을 오래된 문헌에서 결국 찾아냈고, 엘펜하임에서 연구한 유물도 빼냈다. 마법을 각성했으니 이젠 그녀 혼자서 마법을 감당해야 한다. 문헌에는 각성한 마법사가 가디언을 끊어내야 한다거나, 끊어낸 적이 있다는 사례는 찾아보지 못했지만 신문만 봐도 그녀가 라이킨과 헤어져야 할 이유는 분명했다. 칼리에르 공의 이름과 명예가 소렐 때문에 더럽혀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한 번만 멀리서라도 보면 안 될까? 충분히 세상을 헤매면서 돌도 맞을 만큼 맞고, 자료도 뒤져볼 만큼 뒤져봤다. 그런데도 뭐가 맞는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를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남자를 잘 모르겠다. 지금 그에게 사랑하는 거 맞냐고 물어보러 가는 건 어리석은 짓일까?
‘나는 왜 아직도 잘 모르지?’
사람들은 어리석은 짓이란 걸 알면서도 한다는데, 소렐은 여전히 잘 몰라서 속상했다. 전혀 똑똑하지 못하다. 라이킨에게 어울리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멍청하지 않을 텐데. 그녀는 그러면서도 보고 싶은 걸 어쩔 수가 없어서 글래스턴으로 향했다. 글래스턴에서 납치된 지 약 보름만이었다. * 라이킨이 비록 다른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는 몹쓸 성격을 가진 건 아니었지만, 그의 성격은 충분히 지랄맞았다. 그래서 뱀파이어들은 글래스턴에서 숨죽여 다녔다. 연이은 신문기사에 글래스턴 공작의 신경이 곤두설 대로 섰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를 가장 가까이에서 상대해야 하는 이혼담당 변호사 샤를렌은 술이라도 따야 했다.
“안 마셔. 마신다고 취하는 것도 아니고.”
라이킨은 딱 잘라 거절했다. 그는 전국이 아니라 전 세계를 쏘다니느라 피곤해진 몸을 의자에 푹 파묻은 참이었다.
“그럼 나 혼자 마시지 뭐.”
샤를렌은 일부러 더 유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공주님은 이래저래 이혼을 철회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야. 그쪽 변호사가 아주 완강하던걸.”
“내 재산 다 가지고 갈 생각이 아니면 꿈도 꾸지 말라고 해.”
유책배우자도 아니면서 소렐은 오히려 그에게 위자료를 주겠다고 했다. 그게 더 그를 돌게 만드는 거라는 걸 모르나? 라이킨은 그깟 엘펜하임 기사 몇 명을 죽이고 루드밀라에게 중상을 입힌 게 뭐가 그리 큰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혼사유 자체가 너무 말이 안 돼.”
“보통은 말이 돼. 배우자가 범죄자가 되면 이혼하는 건 흔히 있는 일이니까.”
“그게 무슨 범죄야, 먼저 친 새끼들이 범죄자지.”
샤를렌은 험악하게 말하는 오빠를 잠시 바라보았다. 요즘 말투가 험악해졌다는, 이유가 뻔한 사실을 굳이 재미없게 지적해야 할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소렐을 끼고 도냐고 물어야 할지 고민하다 후자를 택했다.
“공주님이 원망스럽지 않아?”
“……도대체 뭐 때문에 내가 공주님을 원망해야 해?”
라이킨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싸우고 가출했잖아. 오빠 말도 안 들으려고 하고.”
그는 뭐라 말을 하려다가 잠시 침묵에 잠겼다. 샤를렌은 그를 기꺼이 기다려주었다.
“……그럴 만해. 일단 사비나 로체 건이 그렇고.”
“하긴 그 나이대 아가씨들한테 친구는 중요하지. 그건 오빠가 잘못했네.”
“거기에 얹어서 협정서까지 보셨고,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는데 마법을 통해 내가 협정서에 서명할 때 상황을 다 보신 모양이야.”
샤를렌은 와인을 잔에 따르다 말고 오빠를 쳐다보았다.
“내가 그 새끼들 앞에서 말을 좀 심하게 했거든.”
“……예를 들면?”
“공주님을 애완토끼 취급했어.”
샤를렌은 잠시 침묵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둠은 이미 내려앉았고, 낙엽들이 쓸쓸하게 굴러다녔다. 언제나 소렐이 돌아오길 기다리면서 시내의 타운하우스와 이 불길한 공작저의 불을 환하게 켜놓았지만, 그럴수록 그림자만 더 짙어질 뿐이다. 나무가 흔들리고, 관목 울타리가 수선거렸다. 꼭 마법사가 찾아든 것처럼 요란하지만 저 어둠을 헤치고 나가봤자 늘 그랬듯, 아무도 없을 거다.
“……그냥 사랑한다고 하지 그래?”
샤를렌이 창가에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그거면 다 되잖아.”
“이제 와서 하라고?”
허공에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이 탁 내뱉어졌다.
“그건 너무 뻔뻔하잖아. 그 말을, 이따위로 멍청하게 아껴놨다가 이 사달이 벌어졌는데.”
라이킨은 목 깊이 울리는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듯 대답했다. 그는 담배상자를 열고 재떨이를 가까이 끌어왔다. 연초를 피워대지 않으면 속이 답답해서 하지 못할 이야기였다.
“줘?”
샤를렌은 대답 하는 대신 오빠가 내민 담배상자에서 담배를 집어 들었다. 금세 글래스턴 공작저의 공작 집무실에는 희뿌연 연기가 가득 찼다. 활짝 열어놓은 창문에서 이젠 서늘한 가을바람이 휙 들어왔다.
“왜 사랑한다는 말을 처음에 안 했어?”
“처음?”
라이킨은 샤를렌을 쳐다보았다.
“처음이라니, 갑자기 나타난 아가씨 떠맡은 기분 반, 나 없으면 마법 못 쓰는 대마법사가 나타났으니 편리함 반이라고 생각했던 그때?”
“그랬었어?”
아니, 샤를렌은 그게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이미 오빠는 소렐을 몹시 아끼고 아꼈다. 지켜야 할 존재가 샤를렌 하나밖에 없던 건조한 인생에 저렇게 예뻐할 존재가 또 있구나, 싶어 샤를렌은 신기했었다. 오빠도 이젠 여유가 많이 생겼구나, 해서 기뻤다.
“그럼 뭘 어떻게 더 생각하겠어? 나는 천 년 내내 끊임없이 전쟁만 치러왔다고.”
샤를렌은 오빠의 건조해진 눈가와 움푹 팬 뺨을 바라보았다. 소렐이 사라진 사이, 오빠는 많이 망가졌다. 늘 쾌활하고 여유롭던 눈에는 스산한 외로움과 날카로운 광기만 떠돌았다. 소렐이 사라져서 라이킨은 빛을 잃었다.
“그런데 웬 스무 살짜리와 결혼이라니. 펠릭스가 정말로 그 유언을 이행했다는 걸 알곤 그놈이 진짜 미쳤나 보다, 했지. ……이건 뭐, 날더러 마법을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건가.”
“그다음에는?”
“그다음에는…….”
오늘도 끼니 대신 담배나 피워댄 남자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섬세한 눈썹이 같이 내려앉는다.
“모든 게 다 좋았지.”
좋았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고, 소렐이 그에게 웃어만 줘도 배가 불렀다. 그게 뭔지 모를 정도로 라이킨이 얼간이는 아니었다.
“……다 좋았는데 그런 감정이 얼마나 갈까, 싶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언제나 잃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살았던 사람은 모든 것에 회의적이다. 샤를렌이야 피를 나눈 혈육이었지만, 생판 남에게, 그것도 마냥 긍정적이지만은 못한 감정을 느끼는 건 처음이라 라이킨은 더더욱 비겁하게 몸을 사렸다.
“공주님을……, 마냥 소중하게 아끼는 게 아니니까.”
만지고 싶고, 더럽게 욕망했다.
“욕망이 컸어.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당연한 거 아니야? 같이 자고 싶지. 우리 나이가 몇인데 그런 말을 안 해?”
“너랑 나 사이야 괜찮지. 다 터놓고 말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다른 놈들이 쳐다보면 그건 그거대로 치졸하게 불쾌하면서도 기분 좋고. 말간 공주님한테는 영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감정인데.”
여전히 황금색 물결이 그의 주변에서 일렁인다. 소렐은 도대체 어디서 또 무슨 마법을 쓰고 있는 걸까. 그 물결은 늘 그랬듯이 저 창밖으로 뻗어나갔다.
“물론 내가 여태까지 느낀 감정 중에는 가장 사람다운 감정이지만, 그걸 가지고 공주님께 뭐라고 하겠어? 나이도 많은 남자가 당신을 욕망합니다? 집착하고 있습니다? 들으면 기겁할 노릇이지.”
글쎄. 공주님을 지나치게 어리게 봐서 그러는 거 아닐까. 샤를렌은 오빠가 좀 안쓰러웠다.
“오빠, 그것도 사랑이야. 질투하고, 같이 자고 싶고, 보면 즐겁고, 계속 보고 싶고……. 지금도 걱정되어서 미치려고 하잖아. 그게 사랑이잖아. 나나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끼는 것과는 다른, 부부사이에 당연히 있어야 하는 사랑이잖아.”
샤를렌이 안타까워하며 길게 말했지만, 라이킨은 손바닥 끝으로 제 이마를 꾹꾹 눌렀다.
“우리는 너무 길게 살아, 샤를렌.”
그건 그가 증오해 마지않는 어머니가 내린 저주였다.
“장수는 좋지만, 감정은 수명에 비해 짧아.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도 아무렇지도 않아지고, 아름다운 걸 보다 보면 질리고, 욕망도 집착도 결국에는 사라지잖아.”
그는 공허하게 중얼거렸다.
“유효기간이 버젓이 있는 걸 어떻게 감히 공주님한테 말할까.”
기왕 사랑을 받는 거면 영원한 것을 고백했어야 했는데, 그때 그는 오만했다. 감정이 끝나기도 전에 이별부터 찾아올 줄도 모르고 입을 다물었다.
“……아직도 유효기간이 있다고 생각해?”
동생의 그 질문에 라이킨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젠 이 감정이 어렵고 무거워서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의 의식을 삼키고 등에 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이 감정의 유효기간을 따지는 게 아니라, 허덕이더라도 소중히 이고 가야 했다. 고작 보름인데 너무 버거워서 죽을 것 같았다. 소렐이 있으면 그저 새털같이 가볍고 부드러우며 기쁘기만 하던 사랑이었는데. 한참 침묵하던 라이킨이 중얼거렸다.
“난 그 말을 할 자격이 없어.”
서늘한 바람이 쏟아졌다. 쏴아, 하고 나뭇잎들이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샤를렌은 날씨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다.
“이제 와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 기만이지.”
이미 오래전에 말했어야 했던 건데. 라이킨은 담배를 내려놓고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한숨을 쉬어도 꽉 막히고 조여드는 마음이 조금도 트이지 않는다. 고백을 들어야 할 이는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밥은 잘 먹고 있는지, 날이 추워졌는데 따뜻하게 입고 다니긴 하는 건지, 여자 혼자 잠잘 곳은 제대로 찾았는지, 그녀의 행적을 낱낱이 다 알아내면서도 늘 걱정에 미칠 것 같았다. 아니, 이미 보름 만에 미쳤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제라도 말하는 게 낫지 않아?”
샤를렌이 물었지만, 라이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팔걸이를 짚고 상체를 앞으로 약간 기울였다. 새파란 눈에 경악이 떠올랐다. 그는 마력을 어쩌질 못해 머리카락을 제멋대로 풀어헤치고, 황금빛이 도는 새카만 눈을 보고 있었다.
“오빠?”
그 눈에서 눈물이 가득 고이더니 주르르 떨어졌다. 숨을 쌕쌕 몰아쉬며 눈물을 뽀얀 턱 아래로 뚝뚝 떨군다. 라이킨은 소렐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그녀가 그와 같은 공간 안에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바로 알았다. 잘 먹여서 토실토실 살이 올랐던 뺨이 홀쭉해져서 안 그래도 속이 상하는데, 소렐은 그를 보며 울고 있었다. 순한 눈을 최대한 사납게 치뜨고 그를 노려보다가, 주먹을 꼭 쥐고 고개를 숙이다가, 다시 노려본다.
“공주님.”
라이킨은 간신히 말했다. 너무 많은 말이 한꺼번에 생각나서 오히려 말문을 막아버렸다. 아니, 일단은 붙잡아야 했다. 잠깐 그의 눈에 보이는 허상이라 해도 손을 뻗어 붙잡아야 했다. 라이킨은 미친 사람처럼 손부터 뻗었다. 눈으로 확인하고, 부르고, 당장 낚아채려고 손을 뻗은 시간은 사실 몇 초에 불과했다. 샤를렌은 갑자기 오빠놈이 미친 것처럼 행동하는 걸 보았다. 하다 하다 술을 마시지도 않고 취한 건가? 허공을 향해 라이킨이 손을 뻗는 것까지는 미친 줄 알았지만, 그다음은 아니었다. 찰싹, 하고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라이킨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다시는…….”
좌절하고 절망에 가득 찬 목소리도 들렸다. 울음기가 가득했다.
“찾아오지 않을 거야…….”
이 나쁜 놈아, 하고 퍼붓지도 못하고 울먹였다. 소렐은 입을 꾹꾹 눌러 다물면서 울음을 어떻게든 멈춰보려고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그녀는 서럽게 어깨를 떨면서 돌아섰다. 그러곤 사라졌다.
“공주, 공주님!”
쏴아아아, 하고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샤를렌은 문득 그 사나운 바람이 바깥에서 안으로 불어오는 게 아니라, 방 안에서 바깥으로 부는 것이란 걸 알아차렸다. 마치 누군가가 빠르게 바깥으로 나간 것 같았다. 그녀는 질린 눈으로 오빠가 그 바람을 따라 창문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소렐이 만일 칼리에르 공이 미치는 꼴을 보고 싶었던 거라면 그녀는 제대로 성공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