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방랑 (7)2021.08.07.
소렐 이드리스라는 이름을 수식하는 지위는 제법 휘황찬란하고, 또 변덕스러울 만치 빠르게 바뀌었다. 처음에는 칼리에르 공비이자 헬레인 공주이더니, 이젠 사람들은 전부 그녀를 대마법사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 소렐은 칼리에르 공비 자리에서 멀어져버렸다. 그녀는 누가 봐도 대마법사였다. 마법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고대마법의 상징이자 모든 마법사와 마녀들을 압도하는 유일한 존재, ‘소렐 이드리스’가 아닌 그저 ‘대마법사’였다.
“아아아악!”
소렐은 무서울 게 없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그녀가 지금 밟고 있는 건물의 수장을 죽였다. 물론 그녀는 뼈가 꺾이고, 근육이 파열되며, 피가 튀어나오는 촉감을 한 번도 제 손으로 느낀 적은 없었지만 어쨌든 그녀가 죽였다. 수뇌부가 전부 다 죽었다. 그러니 남은 사람들은, 라이킨이 ‘잔챙이’라고 지칭할 수준이란 걸 소렐은 아주 잘 알았다. 그러니 솔직히 두렵지 않았다.
“마법사 정렬!”
“주문 대기!”
그녀는 뼛속까지 무섭게 엄습하던 공포를 안다. 스무 살, 나이에 맞지 않게 뒷골목에서 폭행을 당하기도 했고, 납치도 당했으며, 암살자들이 대낮에 찾아온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가장 무서웠던 존재는 협정서 안에서 보았던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였다. 그는 두려운 존재다. 두려우면서도 너무 아름다워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들고, 사려 깊고 따뜻한 시선으로 사람을 바라보아 그것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상관하지 못하게 하는 그런 강력한 존재.
“대마법사를 막아라!”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라이킨도 그러할까? 떨어져 있으면 있을수록 자신감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그녀가 생각하는 가장 볼품없고 초라한 소녀만 남아서 라이킨만을 그리고, 원망하다가, 의심하다가, 그에게 합리적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가, 이 모든 게 허망한 짓이란 걸 알고 울기만 반복한다. 허망한 일이었다. 해봤자 소용도 없는 짓. 지금 그녀를 막으려고 분투하는 엘펜하임 소속 마법사와 마녀들도 그러했다.
“주문을 퍼부어라!”
저들이 사용하는 마법이 저리 미약하고 애들 장난에 불과한 것이었나. 땀을 뻘뻘 흘리며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건 알겠지만, 저들이 피워내는 힘은 너무나 하찮았다. 소렐은 조금 서글퍼졌다. 악착같이 힘을 가지려 애썼지만, 쇄도하는 성기사들의 칼날도, 마법사들의 마법이란 것도 아무런 힘이 없이 바스라지고 있었다. 수백 명이 들러붙어 소렐을 저지했지만, 소렐이 차분하게 걷는 것조차 막지 못했다. 소용도 없는 짓이었다.
‘관두게 할까?’
소렐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그냥 접었다. 벌써 마법사들과 마녀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고, 진땀을 줄줄 흘리다가 픽픽 쓰러지는 사람들이 여럿이다. 있지도 않은 힘을 끌어내느라 진을 빼고 있었다. 그녀가 막지 않아도 알아서 제 풀에 지쳐 넘어갈 이들이다. 신경 쓰지 말자. 그녀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칼이나 화살도 그저 막고 튕겨내기만 할 뿐이었다. 보이지 않는 막에 가로막힌 날붙이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대리석 바닥에 부딪쳐 나뒹굴었다.
‘아. 라이킨이 봤다면 화냈겠다.’
예전에는 그 생각으로 끝났을 거다. 하지만 이제는 온갖 상념들이 군더더기처럼 덕지덕지 꼬리를 물고 생겨났다.
‘화를 냈을까? 진심으로 화를 낼까? 나는 이제 마법도 잘 부려서 손가락 까딱 안 해도 안전하잖아. 그럼 화를 내지 않을걸. 어쩌면 상관하지 않을지도 몰라.’
소렐이 다치든 말든 상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 생각은 이제 그만하자. 대신 ‘모른다’는 것에 집중하자. 소렐은 계속 걸음을 옮겼다. 앞길을 가로막는 이들은, 미안하지만 살짝 밀어내서 길을 텄다. 그녀는 아는 게 없으니 이 힘을 휘두를 자격이 없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마법을 혼자 잘 사용해야 했다. 그래서 엘펜하임에 왔다.
“저기…….”
소렐은 뭘 좀 물어보려고 입을 열었지만, 기사단원들은 제각기 고함을 지르면서 그녀에게 달려드느라 목소리가 묻혔다.
“도서관이 어딘가요?”
대답이 들려올 턱이 만무했다. 오히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못 들었다는 표정이다. 하긴 날붙이가 부딪치고,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쳐 질질 끌려 나가는 이 판국에 가냘픈 목소리가 들릴 리가 없다. 소렐은 목소리를 더 크게 돋워볼까, 하다가 관뒀다. 귀찮다. 강제로 각성한 이래로 소렐은 말수도 적어졌고,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났다. 고대마법이란 그런 것이다. 내내 새로 이해하고, 또 흡수하기 바빴다. 저 마법사들과 마녀들은 그녀를 동경하면서도 그 힘을 가지고 싶어 안달났다. 학자들이라면 환장을 하고 달려들 아주 깊은 학문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중요한 건 없어.’
하지만 소렐이 알고 싶은 건 없었다. 고대마법 자체는 이해하겠다. 어떻게 활용할지도 대충 알겠다. 하지만 어째서 그녀는 특별하게, 아니, 유별나게 라이킨과 이어져 있는지 모르겠다. 라이킨은 그게 그녀가 그냥 조금 약하기 때문에 그와 짐을 나눠지는 것뿐이라고 했다. 소렐은 여전히 늘어진 황금색 물결을, 이젠 너무나 많아서 파도처럼 그녀에게서 뻗어져 나와 라이킨에게로 달려가는 거대한 파도를 바라보았다. 아빠에겐 가디언이란 게 없었다. 펠릭스 이드리스는 홀로 완전한 대마법사였다.
“아…….”
소렐은 아빠와 그녀가 다른 이유, 왜 그녀가 라이킨과 만났어야만 했는지를 알아야 했다. 그런데 그러려면 이 아수라장을 뚫고, 엘펜하임이 긁어모은 고대마법에 관한 자료가 어디 숨겨져 있는지도 찾아야 했다. 엘펜하임의 고대마법에 대한 집착이야 소렐은 아주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들은 아주 귀중한 자료들을 오래전부터 모아왔을 거다. 무슨 배짱으로 여길 왔냐고 묻는다면, 소렐은 대마법사다.
“일단은, 조용히.”
시끄럽던 소리가 딱 그쳤다. 대신 사람들이 의식을 잃고 쓰러졌으며, 힘을 잃은 무기들이며 지팡이가 바닥에 요란하게 떨어졌다.
“아휴.”
소렐은 쨍그랑대는 소리에 어깨를 움츠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마지막 무기까지 굴러다니다가 조용해졌다. 무섭게 소렐을 공격하려던 이들은 전부 다 쿨쿨 잠들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는……, 아니겠지.”
그래도 엘펜하임의 명성치곤 적은 인원이었지만, 소렐에겐 무척 많아 보였다. 아휴. 소렐은 또 무거운 한숨을 쉬고 말았다. * 라이킨은 내쉴 한숨도 없었다. 너무 기가 막히고 너무 황당해서 손이 벌벌 떨렸다. 엘펜하임 본부로 가셨다고? 공주님이? 그 위험한 곳에 왜?
“오빠, 진정해. 기사단장까지 한꺼번에 날린 공주님이야. 괜찮을 거야.”
“그건 각성했을 때, 공주님이 의도하시지 않은 일이고!”
그는 발작하듯 고함을 지르며 달려가 무기고부터 열어젖혔다. 사냥총, 아니, 이딴 장전과 발사가 오래 걸리는 장식품은 필요 없다. 샤를렌은 오빠가 전장에서 가장 오래 잡고 있었던 검을 꺼내는 걸 보곤 이마를 짚었다. 저건 말 그대로 사람을 가장 효과적으로 죽이기 위한 살인무기였다.
“그래서, 지금 엘펜하임으로 가려고? 만약에 오빠가 엘펜하임까지 가는 사이에 공주님이 다시 여기에 뻥 나타나시면 어쩔 건데?”
“넌 공주님께서 제 손으로 그 교활한 버러지들을 죽이실 수 있다고 생각해?”
샤를렌은 뭐라 더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눈에 핏발이 선 라이킨이 더 빨랐다.
“세 치 혀로도 얼마든지 공주님을 농락할 새끼들이야. 순식간에 무슨 말을 속살거려서 그 순진한…….”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퍼붓듯 말하던 라이킨이 말을 멈췄다.
“왜 그래?”
오빠새끼가 이혼당할 거라는 충격에 돌아버렸나? 샤를렌은 물론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을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아니, 지금 그 새끼들이나 나나 공주님한테 별반 다를 게 없겠다 싶어서.”
“오.”
샤를렌은 박수를 쳤다.
“그 정도까지 객관화가 되다니, 공주님께서 오빠를 사람 만들어놨네!”
“넌 좀 입 다물어.”
“오빠야말로 입을 다물고 차분히 앉아서 생각할 필요가 있어. 나는 공주님이 아무 생각 없이 엘펜하임에 무턱대고 간 건 아닐 거라고 봐.”
“이유야 있으시겠지.”
그는 검의 상태를 살피고,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짐가방 위에 턱 하니 올려놓았다.
“각성한 스무 살짜리 대마법사라면 엘펜하임도 마다하지는 않을 테고.”
“계속 마법 쓰는 거 몰라? 안 보여?”
“보여.”
라이킨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보이는데 안 갈 수가 없잖아.”
보이는 건 마법뿐이잖아.
“아, 저 미친…….”
샤를렌은 입을 딱 벌리고 있다가 결국 욕을 하기 시작했다. 공주님 뒤꽁무니나 쫓고 다니다가 다 죽어가는 꼴을 보려고 여태까지의 그 염병스러운 작태를 참아준 건 아닌데 말이다.
“오빠새끼야, 제발 정신 좀 차려. 지금 엘펜하임까지 가장 빠르게 간다 해도 닷새는 걸려! 닷새면 공주님은 거기에서 손 털고 나오실 거라고!”
“가다가 손 털고 나오셨다는 소식을 들으면 다시 돌아오면 될 거 아니야. 너는 그사이에 그 이혼장을 보낸 변호사가 누군지나 확인해봐.”
“내가 그것도 안 알아보고 여기 왔을 것 같아? 법원에 접수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고, 기자들이 아는 것도 최대한 막는 중이라고.”
“그럼 계속 막고 있어. 특히 왕세자 그 개새끼가 알게 하지 말라고.”
“왕세자 전하는 왜?”
“알면서 괜히 찔러보는 짓은 그만하고. 받아줄 기분 아니다.”
“아, 그래.”
샤를렌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이쯤이면 오빠는 사람이 하는 말은 안 들을 작정인 거다. 시간과 자원을 낭비해가며 엘펜하임으로 갔다가, 중간에 또 다른 소렐의 소식을 듣고 방향을 트는 미친 짓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겠지.
“누가 말리겠어.”
“샤를렌.”
라이킨은 한발 물러난 여동생을 돌아보았다. 그 들은 온갖 고난을 함께 손잡고 견뎌낸 사이였다. 서로의 모든 것을 알았고, 또 남매였기에 딱히 모든 걸 알고 싶지 않아 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는데…….”
머리로는 샤를렌의 말이 맞다는 건 알았다.
“혹시 공주님이…….”
샤를렌은 저와 똑같이 푸른 눈동자가 형편없이 일그러지는 걸 바라보았다.
“공주님이 그놈들한테 잡히시면 내가 가서 구해드려야 하잖아…….”
그가 아니라면 누가 엘펜하임 기사단 본부로 쳐들어가서 소렐을 빼낼까.
“만약에, 만약에 붙잡혔을 가능성이 있잖아…….”
철저히 방비했음에도 불구하고 루드밀라는 그의 방비를 뚫고 엘펜하임과 손을 잡아 소렐을 납치했다. 라이킨은 그대로 소렐을 빼앗겼다. 소중한 아내를 완전히 빼앗겼다. 그녀는 이젠 이 타운하우스에 돌아오지 않는다. 샤를렌은 그녀가 어머니에게 맞아 다쳤을 때만큼 무너진 오빠를 안고 토닥였다.
“그래, 어서 가.”
누구에게도 허물어질 것 같지 않던 오빠가 자그마한 토끼 공주님이 이곳에 오자마자 등신같이 허물어지는 게 어떤 의미인지 좀 더 일찍 눈치챘더라면, 지금이 달라졌을까? 소렐 이드리스, 갑자기 등장한 아가씨는 영원히 오빠의 마음에 박혀서 빠지지 않을 거다. 여동생과 함께 살아남는 것에만 급급하던 칼리에르 공이 결국 영원히 지키고 싶은 존재 하나를 품어버렸다. 그 마음에 유효기간이란 건 더 이상 없었다. * 소렐은 빛을 밝혔다. 딱히 촛불에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 그녀는 대마법사니까. 엘펜하임의 모든 사람들은 다 잠들어버렸다. 모든 사람인지 아닌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사람이 보이거나 기척이 느껴질 때마다 족족 재워버렸으니까. 소렐은 문득 머리를 묶었던 리본이며 핀이 또 풀려서 제멋대로 머리카락이 날뛰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 참.”
머리카락을 아무리 단단히 묶어 고정해도 결과는 늘 이렇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그냥 내버려두기로 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엘펜하임의 서고는 아주 방대한 자료를 축적해놓았고, 그만큼 넓었다. 소렐은 엘펜하임 본부에서 고대마법에 관한 자료라면 닥치는 대로 읽어야 했다. 그사이 본부를 구하기 위해 엘펜하임 각 지부에 있던 성기사들이 몰려든다 해도 다 읽어내야 했다. 전부 알아내야 했다.
“……이……!”
소렐은 그때 책장 사이에 숨어 달려드는 이를 뒤늦게 발견했으나,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다. 그녀가 발견하기도 전에 그는 도끼를 떨어트리고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다.
‘……대가가 크구나.’
소렐 이드리스는 엘펜하임의 증오를 받는 수배자다. 신문에 그녀가 지명수배되었다는 소식을 보았을 때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 그녀는 멍하니 떠돌면서 돌도 맞아보았고, 엘펜하임으로 들어서면서부터 크나큰 증오와 그보다 더 큰 욕망을 느꼈다. 그녀를 둘러싼 시선에서 ‘소렐 이드리스’라는 사람에 대한 건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고대마법’일 뿐이다. 손에 넣으면 강력해질 힘. 내 손에 있지 않아서 증오하고 저주하는 힘.
‘뭐, 그냥 토끼에서 고대마법으로 별명이 바뀐 것뿐이지.’
둘 다 사람들이 경멸하듯 부른다는 점은 좀 유감스러웠지만, 그건 소렐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무도 그녀를 도와주지 않는다. 혹은 도와준다 해도, 따로 노리는 속셈이 있을 거다. 어쩌면 라이킨조차도 그럴 수 있다.
‘안 돼, 정신 차려야지.’
소렐은 이를 악물고 눈앞에 있는 책장에서 부스러지기 직전인 종이뭉치와 낡은 책들을 꺼냈다.
“고대마법. 고대마법 가디언. 수호자.”
정신을 차리려고 지금 당장 찾아야 하는 단어들을 입으로 중얼거려보았다. 먼지가 잔뜩 내려앉아서 그녀는 심하게 기침을 했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그녀는 새로운 대마법사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수습하고 해결해야 했다. 황금색 눈에 타오르는 불길이 일었다. 소렐은 엘펜하임이 차곡차곡 모은 고대마법에 관한 모든 사료들을 전부 다 먹어치우듯 흡수하고, 또 흡수했다. 가디언이 있는 대마법사의 경우 도서관 주변에 성기사들이 잔뜩 쓰러졌다. 소렐은 몇 시간 만에 찾아낸 기록을 보고 눈을 빛냈다. 이거다! 가디언을 잘라내는 방법 그 글귀가 소렐에게는 ‘홀로 설 방법’으로도 보였다. 드디어 찾았다. * 엘펜하임에 혈혈단신으로 쳐들어간다는 건 누가 봐도 미친 짓이었다. 그랬기에 그 미친 짓을 하려는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의 뒤로 중무장한 뱀파이어 수십 명이 급하게 따라붙었다. 아마 이렇게 많은 뱀파이어들이 엘펜하임 기사단 본부로 곧장 들어가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일 거다. 라이킨은 지금 역사를 새로 쓰고 있었지만, 역사가들이 환장하며 달려들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움직임은?”
그의 질문에 수하가 고개를 저었다.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소렐과 만나기 위해, 혹은 위험에 처했을 소렐을 구하기 위해, 또는 소렐의 얼굴이라도 보기 위해 달려왔는데 엘펜하임은 아주 조용했다. 라이킨은 잠입의 정석대로 움직이는 부하들을 잠시 보다가 얼굴을 굳힌 채,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마스터!”
뱀파이어들은 기겁을 하며 라이킨을 불렀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칠흑같이 어두운 가을밤, 라이킨은 침묵하고 있는 엘펜하임 기사단 본부에 당당하게 들어갔다.
“……전부…….”
사람들은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다. 뱀파이어 하나가 다가가서 확인한 뒤 고개를 들었다.
“잠들었습니다.”
공주님은 살생을 싫어하신다. 그래서 살인을 저질렀다는 충격도 컸을 거다. 라이킨은 분명히 전투를 하려고 뛰어나왔으나, 무기마저 떨어트리고 잠들어버린 이들의 모양을 토대로 소렐이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 짐작했다. 곳곳에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고, 그중에 의식을 차린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고요하기 그지없어 오히려 더 이상한 기분이 들게 하는 거대한 건물 안, 라이킨은 한참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아…….”
엘펜하임이 흙과 대리석 따위로 어떻게 해서든 매장하고 없애려고 했던 예언이 환한 달빛을 받고 있었다. 백칠십여 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예언은 아래로 떨어져 박살난 봉인을 조롱하듯 붉게 빛났다. 헬레인의 마지막 왕 레너드 3세가 전사하면서 자신의 피로 남긴 예언이라 했다.
“이름을 기억하는 이 없이, 침묵과 고요로 묻힐 것이다.”
라이킨은 예언의 한 구절을 한번 중얼거려보았다. 그러곤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위가 고요하기만 하다.
“과연 그대로 되었군.”
그러나 알게 뭔가. 라이킨은 소렐 이드리스를 찾으러 걸음을 옮기고, 또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