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방랑 (6)2021.08.04.
‘좋아해요!’
해맑게 웃으며 표현하는 스무 살에게 라이킨은 그의 묵직하고 날 것에 가까운 감정을 그저 예쁘게 포장할 수밖에 없었다. 소렐이 놀라서 달아나지 않을 정도로, 딱 부담스러워하지 않을 정도로만 보여주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감정은 사랑이라고 대답하기엔 지나치게 추하고 질척거렸다. 해맑은 ‘좋아한다’라는 감정에 비하면 새까맣고 진득하기만 했다.
‘……벌 받나?’
펠릭스 이드리스가 걸핏하면 태어나지도 않은 우리 애 눈에 눈물 나게 하면 네놈 눈에서는 피눈물이 날 거라고 게거품을 물면서 저주했던 게 지금 실현되는 건가?
“여기, 목록입니다.”
조슈아가 라이킨에게 도서관 사서에게서 빼낸 도서목록을 내밀었다. 공주님은 이제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멍한 표정으로 강력한 마력을 몰고 다니며 갑자기 오래된 기록을 찾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번쩍번쩍 나타나는 마법사를 추적하고 있는 라이킨은 누구보다 빠르게 소렐이 뒤진 기록을 알아냈다. 그녀는 고대마법에 대한 오래된 기록들을 닥치는 대로 읽고 있었다.
“어쩌시려는 걸까요?”
고대마법의 계승자가 고대마법에 대해 알아내고 있다. 그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을 정확히 알기 위함인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이 더 있는가?
“글쎄.”
라이킨은 소렐이 읽은 기록들을 자세히 살폈다. 그녀가 읽었던 것, 머물렀던 정확한 자리,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나누었던 사람, 물건을 산 곳, 잠시라도 눈을 붙였던 곳, 라이킨은 전부 다 훑어내고 있었다. 조슈아가 저건 범죄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하나도 놓치지 않고 살벌하게 알아냈다.
“……마스터, 애들이 못 여쭈겠다 해서 제가 여쭤보는 건데 말입니다.”
“그럼 물어보지 마.”
“공비전하를 어떻게 만나실 생각이십니까?”
“그게 질문이야?”
“아뇨. 정확히는 어떻게 붙잡으실 생각이십니까?”
대마법사를 무슨 수로 붙잡아? 왕국 전역에 나타나는 소렐의 흔적이나 겨우 줍기 바쁜 뱀파이어들은 허깨비를 쫓아다니는 기분이었다. 그 와중에 엘펜하임은 칼리에르 공비를 기사단장을 비롯한 성기사 살해범으로 지목했지, 페르난데스 7세는 감히 이 나라에 밀입국해서 죽은 게 자랑이냐며 날을 세우고 있지, 슈토넨 후작은 에설론 백작의 살인혐의까지 추가해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고 있다.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마력을 주체하지 못하고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대마법사는 확실히 문제였다. 사람들은 무서워하고 있었다.
“붙잡을 수는 있을까요?”
어떻게 대마법사를 붙잡냐는 소리가 나오고 있었지만, 조슈아는 대마법사의 의지보다는 그가 모시는 칼리에르 공의 의지가 더 지독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일단 그의 밑에서 사정없이 굴려지고 있는 조슈아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았다.
“붙잡아야지.”
라이킨은 마치 사냥하듯 소렐을 추적하고 있었다. 단지 그녀를 상대로 어떠한 무기도 겨누지 않고, 그저 어르고 달래며 무릎까지 꿇을 거라는 점에서 사냥과는 달랐다. 하지만 결국 사냥은 사냥이다. 칼리에르 공은 차분하게 대마법사마저 붙잡아다 그가 만들어놓은 새장 안에 가둘 것이다. 새장이라고 느껴지지도 못할 만큼 넓게 만들어서, 그곳에서 내내 지내면서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하게 만들 것이다. 그렇다. 헬레인의 마지막 공주님은 칼리에르 공을 두고 사라지지 말았어야 했다.
“……시간이 좀 걸리겠군.”
“이걸 다 읽으시려고요?”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렐이 보았던 책들 중, 도서관 밖에서 사 갔다던 얄팍한 통속소설들을 가장 위로 빼놓았다. 상당히 조야하고, 또 유치하기 짝이 없는 소설이라고 폄하되곤 하지만, 이런 소설들이 아주 인기가 있는 이유가 따로 있을 거다.
“알겠습니다.”
칼리에르 공과 통속소설이라니, 너무 안 어울린다. 조슈아는 못 본 척하면서 돌아섰고, 라이킨은 그 조야한 소설들을 펼쳐서 빠르게 훑어보기 시작했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공주님은 통속소설을 너무 많이 읽으셨다. 하긴 지금 친구도 못 믿을 판에 연애에 대해 조언을 구할 곳이 그 좋아하는 통속소설밖에 더 있겠냐만, 죄다 주인공들이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아 파국을 맞이하는 소설만 골라볼 게 뭔가. 오, 메리, 그가 널 사랑한다고 하지 않는 건 널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야! 전부 다 거짓말이라고! 라이킨은 환장할 것 같은 대사에 천장을 쳐다보다가, 요즘 아주 빈번히 나타나는 황금색 결합점이 다시 나타나는 것을 발견했다.
‘……아직 아무런 위험 없이 잘 계시는구나.’
소렐이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그와 연결되는 황금색 물결은 위안이자 고통이었다. 소렐이 마법을 사용한다는 건, 다시 말해 그녀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마법을 쓸 만큼의 여유와 체력이 뒷받침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잘 있나 보다. 그는 전혀 잘 있지 못하는데. 당장이라도 품에 안고 나는 당신 때문에 내내 새카맣게 타오르기만 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싶은데. 라이킨은 고개를 숙이고 잠시 침묵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조슈아가 빠르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마스터! 공비전하께서 글래스턴에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라이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스튜어트 부인이 전화를 걸어오셨습니다. 가서 받아보세요!”
그는 서둘러 뛰어가서 전화기를 잡아챘다.
“에벌린?”
[공주님이 오셨다 가셨어요!]
갔구나. 돌아온 게 아니었어. 잠깐 가졌던 미약한 희망은 다시 잿빛이 되어버렸다. 라이킨은 미간을 문지르면서도 급히 물었다.
“얼굴은 봤습니까?”
[겨우 잠깐 봤어요. 제가 침실 문을 다 열어놓고 그 근처에 있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못 볼 뻔했지 뭐예요.]
“뭘 입고 계셨습니까. 제대로 따뜻하게 입고 계셨습니까? 안색은?”
[많이 우신 것 같았어요.]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의 목소리가 흐렸다.
[눈가가 빨갛게 짓물러서 어찌나 안쓰럽던지……. 옷은, 뭘 입고 계셨더라……? 아, 그래요. 회색 망토를 길게 둘렀어요. 후드는 쓰고 계시지 않아서 얼굴을 볼 수 있었지요. 아휴, 그 머리를 좀 빗겨드려야 하는데. 그리 치렁치렁한데 머리카락이 마구 흩어져서 어쩐대요.]
라이킨은 뻑뻑한 눈가를 비비며 간신히 웃었다.
“그리고요?”
[아이구, 내가 찰나밖에 보질 못했어요. 공주님, 하고 부르려는데 싹 사라지시더라니까요. 그래도 다행이에요. 또 오시겠지요. 가보니까 아무래도 어머니의 편지를 가지고 가셨나 봐요.]
“티아라는?”
[전부 다 제자리에 있어요.]
티아라 상자 안에 끼워두고, 소렐이 항상 소중하게 여겼던 메리 헬레인의 편지만 들고 갔다는 이야기다. 라이킨은 요즘 부쩍 늘어버린 한숨을 다시 한번 쉬었다. 소렐에게 의지가 되는 게 별로 없는 셈이었다. 그러니 엄마가 남긴 편지를 찾았겠지. 그 편지가 부디 두꺼운 만큼 충분히 소렐에게 위안이 되길 바랐다. 비록 다 읽어버린 편지라 해도 말이다.
[그게 다네요, 교수님. 어째요. 시나몬롤과 당근케이크를 늘 구워놓고 있는데 공주님한테 드리지도 못했어요. 아휴. 이번에 사과가 참 좋아서 사과파이도 구워놨는데.]
에벌린은 그게 못내 속상한 모양이었다.
[아무튼 더 생각나는 게 있으면 바로 연락할게요.]
“예, 에벌린.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교수님도 끼니 꼭꼭 챙겨 드시고, 잠도 잘 주무세요. 안 되더라도 노력은 해보세요. 시도라도 해보는 것과 안 하는 건 분명히 큰 차이가 있으니까요.]
라이킨은 간신히 웃었다.
“예, 그러지요.”
요즘 그의 주식은 술과 담배였고, 밤은 기나긴 여정을 할애하는 시간에 불과했다. 라이킨은 전화를 끊은 뒤, 오래도록 고개를 들지 못했다. 늘 집에서 피아노를 엉망으로 뚱땅대고, 책을 잔뜩 쌓아놓고 읽으며, 신문에서 재미난 기사를 봤다 하면 라이킨에게 달려와서 읽어주던 아가씨가 곁에 없었다. 항상 볼을 부비고 수줍게 키스를 하며, 오늘 무슨 일이 있었다고 솔직하게 줄줄 말하던 공주님이 없었다. 견딜 수가 없으니, 이 커다랗고 넓은 세상 전체를 새장으로 만들어 가둬야겠다. 가두고, 밤새 귀에 집착과 욕망이 뒤섞인 애정을 속삭여줘야지. 비록 그 애정이 그녀가 생각하는 예쁜 사랑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젠 돌이킬 수 없다. * 소렐은 요즘 자꾸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주르륵 났다. 라이킨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꾹꾹 참는 중이었다.
‘나는 좀 바보인가 봐.’
협정서를 다시 한번 보고, 또 보고, 그놈의 애완토끼니 도살이니 하는 끔찍한 말을 들어도 소렐은 멍하니 라이킨의 얼굴만 보게 될 뿐이었다. 그렇게라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바보 같았지만 좋았다. 협정서를 잃어버리지만 않는다면 라이킨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셈이다. 조금 괴상한 방법이긴 했지만, 소렐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행이었다.
“……정신 차려야지.”
저 남자는 사랑한다는 말도 안 해준 사람이야! 거짓말쟁이라고! 소렐은 고개를 흔들며 또 나오려는 눈물을 닦아냈다. 첫사랑을 잃어버렸고, 또 친구도 잃었다. 하지만 끝을 내도 그녀가 끝을 내야겠다. 너는 뭐든 할 수는 없을 거야. 하지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책임감을 가지렴. ‘뭐든’ 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은 다 할 수 있을걸? 우리 귀염둥이 마법사. 엄마의 편지를 소중하게 내려놓은 소렐은 며칠 만에 머리카락을 제대로 묶고,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러곤 후드를 푹 눌러쓰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훌쩍거렸다. 코가 시큰했지만 울지 않을 거다. 각성을 해서 벌어진 일들을 더는 피할 수 없었다. 수습해야겠다. 다 귀찮고, 협정서만 꼭 끌어안고 침대에 누워버리고 싶었지만 소렐은 이제 대마법사가 되었다는 걸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안 된다. 엄마가 책임감을 가지랬다.
“으…….”
그렇지만 라이킨도 없고, 사비나도 라이킨이 시켜서 친구가 되어줬다고 했다. 에벌린도, 샤를렌도, 심지어 다정한 시아버지도 없다. 혼자서 잘할 수 있을까?
“아냐, 안 울어.”
소렐은 힘껏 고개를 흔들었다. 안 울 거다. 그냥 라이킨이 오기 전, 혼자 열심히 약초를 찾아다니던 때로 돌아간 것뿐이다. 라이킨에게 어울렸던 그 멋진 언니들처럼 혼자 제대로 해야 했다.
‘라이킨은, 라이킨은 나를 속인 걸까? 아니, 아니라고 했는데……. 무릎까지 꿇었는데……. 그렇지만 사비나는 정말로 속인 거였잖아!’
생각이 제멋대로 이리로 튀었다가, 저리로 갔다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소렐은 어깨를 펴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보았다.
“나는 펠릭스 이드리스와 메리 헬레인의 딸이야.”
대마법사이자 헬레인의 마지막 공주님이다. 그녀도 자존심이란 게 있었다. 라이킨만큼 능력은 없겠지만, 지금 아무것도 몰라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알 수 있는 건 다 알아낸 다음에 할 수 있는 일부터 하자. 그래, 그러자.
“일단은…….”
소렐은 마법을 쓸 때마다 나타나는 황금색 물결이 어디로 뻗어져 나가는지 바라보았다. 저 끝에 라이킨이 있을 거다. 라이킨을 생각하자마자 또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소렐은 일부러 더 힘껏 손가락을 꼽아가며 큰소리로 자신에게 말했다.
“신문을 읽고, 지금 상황이 어떤지 살피고, 기록들을 찾아보는 거야.”
멍하니 떠돌아다니면서 많은 생각들을 했다. 대부분 두서없이 스쳐 지나가고 사라졌으며, 소렐은 무척 많이 울었다. 하지만 그중에 남은 생각도 있었다. 도대체 왜 그녀에게 라이킨이 연결되어 있는 걸까? 아빠는 혼자서도 마법을 아주 잘 사용하셨다. 소렐이 각성하지 못하고 미숙한 대마법사라서 라이킨이 필요했던 거 아닐까? 그에게 의지해야 했던 거 아닐까?
“각성을 했으니까 이젠 라이킨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마법이라도 혼자 감당하고 혼자 지켜야 했다. 성인이니까, 성인답게 제대로 홀로 서고 나서, 이혼도 제대로 하고, 제대로 된 대마법사가 되고 나서 그다음에 라이킨을 만나러 가자.
“그다음에…….”
그녀가 혼자서 모든 일을 잘 감당했을 때, 그때 가서 다시 한번 물어봐야지. 그때도 공주님으로서의 도도한 자존심보다 그를 더 좋아하는 마음이 무척 크면, 꼭 다시 물어봐야지.
‘나를 정말 사랑하지 않아요?’
아니, 아니야. 소렐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사랑한다는 말은 라이킨에겐 조금 부담스러울지도 몰라. 그런 말을 하면 당황할 거야.
‘나를 조금도 좋아하지 않아요?’
좀, 아니, 많이 비참한 질문이었지만 꼭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었다. 여태까지 그가 그녀에게 해준 일들이 거짓이건 진심이건 간에, 애정은 없었냐고.
‘……좋아했던 것 같은데.’
하지만 협정서에서 본 라이킨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가운 말을 했다. 그녀가 본 모습 중, 하나는 거짓이란 얘기고, 결국 라이킨은 연기를 상당히 잘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물어보고 싶었다. 물어본다는 것 자체가 아프고 참담하겠지만.
“아냐, 그건 나중에 생각해.”
지금 라이킨을 살인자의 남편으로 둘 수는 없었다. 소렐은 잘 모르겠지만, 그와의 관계를 끊어내고 떳떳하게 혼자서 뭐든 해야 어른다운 일인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랑 마법 때문에 결혼한 거라고 하면 진짜 비참하니까…….’
그가 말하지 않았던 감정이 결국 기만이었다면, 그건 반드시 이혼해야 하는 일이니까. 어차피 반지를 빼내 두고 올 때부터 해야 하는 일이라고 굳게 결심한 일이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주룩주룩 났지만, 소렐은 유일한 대마법사이자 헬레인 공주님으로서 제대로 처신할 것이다. 그런데 이혼장은 어떻게 써서, 어떻게 보내는 거지? 토끼 공주님은 잠시 빨갛게 된 눈을 깜빡거렸다. * 샤를렌은 마침 글래스턴에 잠시 들른 오빠에게 달려갔다. 이건 그녀가 여동생이라 오빠의 안부를 묻기 위함이 아니다. 그들은 뱀파이어고, 남다른 과거를 공유했기에 서로 애틋한 게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징그럽게 올 때마다 얼굴을 볼 정도는 아니었다. 그들은 아주 평범한 남매다.
“에벌린,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변호사님.”
“오빠새……, 아니, 오빠 어디 있어요?”
샤를렌이 급히 말을 고치며 물었다. 라이킨은 소렐이 그대로 사라진 후, 이 타운하우스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가 이곳에 있다는 건 소렐이 이곳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공주님 방에 계세요.”
샤를렌은 대답을 듣자마자 위로 뛰어 올라갔다.
“오빠! 야!”
소렐의 방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로 황금색 물결이 주변을 가득 채우는 걸 보고만 있던 라이킨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은 샤를렌이 우당탕 들어왔다.
“지금 궁상떨고 앉아 있을 때가 아니야.”
그녀는 오빠새끼의 무릎 위에 서류봉투를 하나 툭 집어 던졌다. 이미 뜯어본 서류봉투다. 라이킨이 이게 뭐냐고 묻기도 전에 샤를렌은 저지르듯 와르르 대답했다.
“오빠 앞으로 온 이혼장이야. 내가 변호사라서 나한테 보냈나 봐. 공주님도 변호사를 고용하셨어.”
라이킨은 그 말에 서류봉투를 잡아채듯 열고, 눈을 부릅뜨고 내용을 읽었다. 샤를렌의 말 그대로,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 글래스턴 공작에게 온 이혼장이었다. 그는 빠르게 서류를 훑었다. 이혼사유가 도대체 뭡니까, 공주님?
“……‘혼인을 유지하지 못할 상황’이라고?”
“어, 그러니까 일단 공주님은 이 나라에서도 경계 대상이긴 하니까. 사비나 로체 양이 증언한다 해도 에설론 백작, 엄연한 이 나라 귀족이 표면상으로는 죽었잖아?”
“아직 숨은 붙어 있으니 다시 끄집어내면 되는 거지.”
라이킨은 짓씹듯 거칠게 말했다.
“이딴 이유로 이혼 성립이 돼?”
“판사 앞에 가봐야 알지만……, 오빠가 버티면 성립될 리가 없지. 사생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정황상 공주님께서 범죄자가 되셨으니…….”
“범죄자 아니야.”
“본인이 생각할 때 그렇다는 거야. 남편을 위해서 헤어져주겠다는 걸로밖에 안 보여.”
라이킨은 잠시 침묵했다.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이혼장을 구길 듯이 쥐기만 했다. 소렐은 진심일 거다. 표면적인 사유야 착해서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거지만, 이미 신뢰가 깨졌다. 라이킨은 아직까지도 통증을 느끼는 게 꽤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내장이 다 비틀릴 대로 비틀리고, 끊어지듯 아프다가 결국 썩는 고통까지 느꼈기에 더 이상 아플 곳도 없는 것 같은데 말이다. 그때 요란하게 전화가 울리더니, 에벌린이 받는 소리가 났다.
“예에? 아이구, 교수님!”
에벌린이 그를 소리 높여 불렀고, 라이킨은 방 바깥으로 나갔다.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은 뜻밖에도 사색이 되어 있었다.
“공주님이 엘펜하임 기사단본부에 나타나셨답니다……!”
소렐은 그를 미치게 만들려는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위험하고, 그가 처절하게 아파하며 불안해 할 짓만 골라서 할 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