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방랑 (5)2021.07.31.
칼리에르 공은 글래스턴 타운하우스를 떠나, 그리도 싫어하던 글래스턴 공작저로 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소문이 글래스턴 사교계를 중심으로 조금씩 퍼지기 시작했다. 글래스턴 공작이 완전히 돌아왔다. 그는 수면 위로 올라와 자신이 물려받은 권력을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페르난데스 7세가 곤혹스러워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왕세자 라이오넬이 분노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무엇보다 더 커지는 건 글래스턴 공작, 칼리에르 공이 미쳤다는 소문이었다. 그는 막대한 돈을 퍼부으며 전 세계를 뒤지고 있었다.
“누가 봐도 마녀더라니까요. 이렇게 머리를 산발을 해가지고, 머리가 막 춤을 추는데 오줌 지리는 줄 알았어요!”
시골 아낙이 새된 소리로 떠들어대는 걸 멀리서 듣던 라이킨은 시선을 돌렸다. 여름이 가버린다. 온 세상을 지배할 것 같던 더위가 갑자기 싹 사라지고, 가을이 온다 간다 기별도 없이 불쑥 찾아왔다. 젊은 아가씨가 다니기엔 좋은 계절이 아니다. 순식간에 기온이 뚝 떨어졌다. 소렐은 변변한 옷가지조차 챙기지 않았다. 가지고 간 돈주머니 두 개가 아주 묵직하다는 건 전혀 안심이 되지 않았다. 순진한 공주님이 사람한테 속아 울면 어쩌나. 그러다가 힘이 쭉 빠졌다. 아, 이미 속았으니 울었겠다.
“마스터, 맞는 것 같습니다.”
다가온 부하의 보고에 라이킨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지도를 펼쳤다. 공주님은 여기저기 정처 없이 헤매고 다녔다. 그것만으로도 그가 미칠 이유는 충분했다. 마력을 갈무리하지 못하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 사람들은 보고 놀랄 상태라, 소렐에게 사악한 마녀라며 돌도 집어 던졌다고 했다. 앞으로도 빈번히 일어날 일이다. 그와 아버지 오블리앙 공이 페르난데스 7세를 구워삶고 있으니 망정이지, 공권력이 소렐을 추적했다간 더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게 분명했다. 엘펜하임 수뇌부 대부분이 죽었고, 기사단 본부에 남아있던 부기사단장이 일단은 단장직을 맡았다고 한다. 알게 뭔가.
“아무래도 어디 몸을 숨기실 생각은 없으신 것 같은데…….”
몸을 숨긴다면 어쨌든 정착을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소렐은 아무것도 정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녔다. 잠은 제대로 잤는지 모르겠다. 밥은 먹었을까? 이런 날씨에는 감기에 걸리기 딱 좋다. 따뜻한 식사를,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한숨 자야 할 텐데.
“점점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알 게 뭐야.”
내내 침묵하고 있던 라이킨이 툭 던지듯 말했다.
“대마법사를 어떻게 해보겠대? 어느 미친놈이?”
“슈토넨 후작이…….”
부하는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 노인네가 몇 마디 떠들어대긴 했는데 잊어버렸어.”
관심이 없어서 건너 듣고도 잊었다.
“뱀파이어를 죽인 대마법사이니 협정대로 움직여야 한다고…….”
부하는 더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그도 죽을 지경인데 지금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는 조슈아는 오죽할까. 하지만 칼리에르 공은 그들에게 그만한 대가를 주는 사람이다. 노고도 잘 알아주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아, 그래서 잊었지.”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는 개소리다.
“에설론 백작이 죽은 줄 알고 있으니 그런 말을 하나 봅니다.”
부하들은 요즘 특히 살얼음판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우리의 지랄맞은 칼리에르 공께서 드디어 돌아버리셨다. 그러니까 요즘 왕국 전역에 파다한 소문이 사실이긴 했다. 그냥 미친 정도가 아니라는 게 문제였지만. 차라리 글래스턴 타운하우스에서 재떨이를 집어던질 때가 호시절이었다. 칼리에르 공은 먹지도, 자지도 않는다. 공비전하께서 뭘 조금이라도 드셨다는 첩보를 접하면 그제야 담배를 간신히 물었다. 덕분에 부하들은 공비전하께서 뭘 드셨는지, 어디서 얼마나 주무셨는지를 알아내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신경 써야 하지 않을까요?”
“……협정에서 실효성을 끌어낼 수 있다면 해보라고 하고.”
라이킨은 짧게 말했다. 그 협정에 찬성한다고 하는 새끼들이 얼마나 될까. 속으로 가늠하고 계산했다. 대마법사의 목을 따겠다고 덤빌 정신 나간 놈은 아무도 없었다.
“그게, 지금 마스터께서 협정을 지키려고 움직이신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라이킨은 그제야 부하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공비전하를 찾고 계신 거라고…….”
“그사이 또 그런 말을 했단 말이야?”
“예에…….”
그는 푸른 눈을 돌려 소렐이 한동안 보았을 주변을 바라보았다.
‘어제 여기서 사과를 한 알 드셨다고 했나.’
라이킨은 이미 주변을 샅샅이 뒤져서 소렐이 먹고 버린 사과 씨와 꼭지를 찾아냈다. 소렐은 냇가에 앉아 비싼 돈을 주고 산 사과 한 알을 아삭아삭 먹곤, 씨와 꼭지는 던지지도 않고 옆에 고이 내버려뒀다.
‘그 좋아하시는 걸 겨우 한 알……. 입맛이 없으시군.’
먹고 버린 사과 씨가 더 많았으면 좋았을걸. 그깟 사과, 봉투 하나 꽉 차게 사서 씩씩하게 다 먹어버리시지. 그걸 왜 돈을 주고 사시나. 뒤에 오는 놈이 알아서 계산할 거라고 외상이나 긁고 가시지. 억지 같은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고작 사과 한 알만 먹고 어떻게 여기저기 다니시나. 속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입부터 다물게 해야겠군.”
슈토넨 후작이 신이 나서 칼리에르 공이 직접 공비를 잡아오려고 한다고 떠들어대는 말을 소렐이 듣는다면 어떻게 될까. 라이킨은 그것만큼 아찔한 게 없었다.
“오늘 델루테 자작의 목이 도착할 겁니다.”
협정서에 서명하고, 슈토넨 후작에게 동의한 이의 목이다. 점점 암살 속도는 빨라지고 있었고, 슈토넨 후작도 곧 눈치챌 거다. 아니, 오늘 눈치챘을 가능성도 컸다.
“저 좋을 대로 편하게 상상하는 게 역겨워.”
라이킨은 중얼거리며 피곤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가을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그리고 협정서에 서명할 때 더한 소리를 해댔으면서도 소렐을 찾아대는 자신도 역겨웠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다. 소렐이 마법을 쓸 때마다 잠깐 보이는 결합점 방향을 추적하는 건 본능이었다. 그는 그 잔인한 황금색 물결에만 의존하고 있었다. 그는 그래도 소렐 이드리스의 유일한 가디언이었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교활한 수호기사였다.
“내일은 니아얄로 할까.”
또 다른 뱀파이어의 이름에, 부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킨도 할 말이 없었다. 협정서에 올라온 이름들을 다 살해해버리면 소렐에게 조금이라도 떳떳할 수 있을까. 해명이라도 할 기회를 얻을 수가 있을까. 소렐은 협정서를 서명할 당시에 그가 했던 모든 말을 들은 모양이다.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가 그런 종류의 사람이긴 했다. 그는 말 그대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내킨다면 그녀의 눈까지 가리고, 귀를 막아서라도 제 품에 가둘 사람이었다.
‘나는 후회해.’
딱 한 가지, 가슴이 미어지게 후회가 되는 일이 있었다.
‘당신이 너무 어리고 연약하다고, 말해주지 않았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협정서도, 세상이 험하다는 것도, 그녀를 노리는 이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런 건 알 필요 없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공주님이 겁먹는 건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 말해주고, 이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려주고, 겁을 줘서 가뒀어야 했어.’
대마법사에겐 무서운 게 없다. 그녀보다 더 무시무시한 존재는 이 세상에 없었다. 그러니 할 수 있을 때 필요한 만큼 경계하게 하고, 그의 품 안이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알게 할 것을.
‘말을 할 수 있을 때 말해야 했어. 이젠 말을 걸지도 못하잖아.’
닿지 않았다. 이곳에 오면 소렐이 있을 것 같은데 없다. 또 어디로 찾으러 가야 하나. 눈이 시렸다. * 소렐은 제법 잘 있었다. 비록 눈은 황금색으로 번쩍번쩍 빛나고 있고, 머리카락은 아무리 묶어도 살아 있는 생물처럼 너울너울 춤을 추고, 마력도 따라서 그녀를 감싸고 춤을 춰댔지만 어쨌든 잘 있었다.
“……뭐 하시우?”
묻는 말에 소렐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면 누구든 놀라서 도망가거나, 아니면 소리를 지르며 돌을 집어 던진다. 그것도 아니면 병을 고쳐달라고 물고 늘어졌다. 신문을 집어 들던 아저씨가 소렐을 보았다.
“아, 그게…….”
힘이 없는 목소리로 뭐라 대답을 하려다가 못했다.
“배가 고프면 들어와야지.”
그는 이 시골의 유일한 식당을 경영하는 사람인가 보다.
“밥때도 지났는데 얼른 안 들어오고 뭐하오? 배 안 고프나?”
투박하고 퉁명스러운 말투에 소렐은 저도 모르게 일어났다.
“……배고파요.”
식욕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가 허망할 정도로 배가 고팠다. 믿을 수가 없어서 협정서에 코를 박고 라이킨이 하는 끔찍하고 잔인한 말들을 다시 한번 듣고 보았지만, 배는 여전히 고팠다. 그리고 그가 하는 말이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하도 보고 들어 외울 정도라, 이젠 무뎌졌는지 그저 덤덤할 뿐이다.
“들어와요. 뭐, 딱히 파는 건 없지만 더 가봤자 식당도 없어.”
소렐은 그래서 아저씨를 따라 들어갔다. 안에는 컵을 뽀득뽀득 소리가 나도록 닦고 있는 아주머니가 한 분 있었다.
“아이구야.”
그녀는 소렐을 보자마자 턱을 늘어뜨렸다.
“거 멍하게 있지 말고 커피나 좀 끓여줘. 손님 오셨잖아.”
아저씨는 안쪽으로 들어가며 한마디 했다.
“그, 그래야겠네. 거기 앉아요. 아무 데나 앉아.”
소렐은 주춤주춤 서 있다가 아주머니가 빼주는 의자에 앉았다.
“저기, 주문은…….”
“우린 그런 거 없어요. 다 저 양반 마음이지. 뭐 먹고 싶은 건 있어요?”
아주머니는 소렐을 신기해하면서도 경계했고, 그러면서도 들어온 손님이라는 건 잊지 않았다. 소렐은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딱히 먹고 싶은 게 없었다.
“그럼 기다려요.”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나. 정처 없이 여기저기 다니면서도 생각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고대마법이라는 어마어마한 힘은 아빠가 가르쳤던 지식과 더불어 그녀에게 스스로를 강제로 이해시키고 있었지만, 정작 그녀가 뭘 해야 할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협정서를 들여다본다 해서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는 않았다. 도리어 글래스턴 은행 금고에서 마주쳤던 라이킨이 자꾸 생각나서 괴로울 뿐이었다.
‘나한테 왜 그러는 건가요? 왜 잘해주고, 협정서에 서명할 때는 왜 그랬고, 왜 그렇게…….’
가지 말라고 빌었을까. 그녀가 그와 같이 있는 게 왜 중요한가. 협정서에 서명할 때 하던 말을 생각하면, 믿을 수 없는 말들인데. 솔직히 소렐은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알 수 없던 사람이었다. 아니, 이제 와서 그녀가 자신감이 뚝뚝 떨어져서 모른다고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소렐은 내내 어깨가 처지고, 고개를 숙인 채로 죄인처럼 떠돌아다녔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고, 이제 어떻게 되는 건지 여전히 모르겠고, 나랑 라이킨은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 우와.’
소렐은 고개를 또 숙였다. 목이 아플 지경이었지만 참 놀랍고도 스스로가 한심하기도 했다.
‘나 아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네.’
그래서 뭘 할지도 모르겠고. 그녀는 루드밀라에게 머리채가 잡혔던 때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똑같았다. 속이 허했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자, 음식 나왔소.”
퉁명스러운 아저씨가 김이 풀풀 나는 그릇을 턱턱 내려놓았다. 소렐은 화들짝 놀라 그를 본 뒤, 얼른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뜨거운 옥수수 수프, 기름기 빠진 베이컨, 동그란 노른자가 톡 솟은 계란프라이 두 개, 노릇하게 구운 팬케이크 냄새가 기가 막혔다. 소렐은 숟가락을 들고 수프를 몇 번 먹다가, 아예 그릇을 잡고 먹기 시작했다.
“수프 더 줄까?”
신문을 읽던 주인아저씨가 물었다.
“네.”
소렐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제법 잘 있었다. 잘 먹고 있었다. 먹을 게 들어가니 정신이 들었고, 기억은 더 또렷해졌다. 제가 공주님 없이 어떻게 살까요? 소렐 이드리스는 라이킨을 잘 아니까, 바깥은 위험하니까, 그러니까 같이 있어야 한다. 소렐은 다시 가득 채워진 수프를 열심히 먹었다. 그 이유들은 빈약했다. 잘 안다는 이유로 같이 있어야만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리고 바깥은 위험하다고 하는 말을 ‘애완토끼’를 ‘도살’하겠다고 한 남자가 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아이구, 우네.”
주인아주머니가 손수건을 꺼내서 쓱 밀어주었다. 소렐은 먹으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제 알겠다. 그는 끝내 사랑한다는, 모든 말의 가장 강한 이유가 될 말을 해주지 않았다. 늘 사랑스럽다고는 해줬지 사랑한다고 하지는 않았다.
‘좋아해요.’
솔직한 고백에 그는 그저 웃었다. 웃으면서 공주님을 많이 ‘아낀다’고 했지,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다. 그때도 소렐 이드리스는 몰랐던 게 아니다. 다 알고 있었던 거다. 먹을 게 들어가니 울 힘이 났다. 그 말 한마디만 해줬으면, 사랑이 아니라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았는데, 그렇게만 말해줬으면 틀림없이 두말 않고 따라갔을 텐데.
‘라이킨은 날 사랑하지 않아. 그래서 그 말을 한 번도 안 했던 거야.’
납치에 폭행을 당하고, 팔릴 뻔한 충격부터 시작해서 온갖 풍상을 한꺼번에 겪은 스무 살은 혼자서만 골똘히 생각하며 땅을 파고 내려가다 가장 안 좋은 결론에 이르고 말았다. 라이킨이 들었다면 이래서 대화가 필요하다며 중얼거리다가 결국 미쳐버릴 결론이었다. * 라이킨은 딱 여섯 시간 뒤, 소렐이 앉아 있던 자리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래서 대화가 필요한…….”
아니, 근데 공주님께서는 대화할 기회도 안 주시지.
“처음에는 무슨 마녀인가, 했는데 우리 바깥양반이 손님이라 해서…….”
주인 여자는 행주를 쥐어뜯다시피 하며 어렵게 말했다. 그녀에겐 갑자기 들이닥친 이 귀족 뱀파이어들이 너무나 어려운 상대였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그저 신문이나 보고 앉아서 파이프담배나 뻑뻑 피워대고 있었다.
“근데 또 훌쩍훌쩍 우는 거 보니 영락없이 어린 아가씨라…….”
그 어린 아가씨는 지금 엘펜하임 기사단이 기사단장 살해혐의로 수배를 내리고 현상금을 걸었다. 몸을 사릴 줄 알았는데 이판사판이라고 덤비는 모양이다. 라이킨은 아직까지도 찾지 못한 카메론 셀레스트가 현상금이 걸리는 데 한몫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소렐은 지금 마력을 주체하지도 못하고, 까딱했다간 또 폭주할 수 있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엘펜하임에겐 해볼 만한 상대인 것이다. 게다가 이 나라 내부에는 슈토넨 후작을 비롯한 마법사를 위협으로 여기고 두려워하는 이들도 있었다.
“쉬고 가라고 했는데 거스름돈도 안 받고 큰돈을 휙 주고 가던데…….”
냉큼 받고는 싶은데 너무 거금이라 받아도 되나, 싶을 정도인 40프랑짜리 금화다.
“그릇은 싹싹 비우셨다고요.”
“아, 그럼요. 우리 바깥양반이 음식 솜씨 하나는 기가 막혀요. 여기선 아무도 음식을 남기지 않지요. 옥수수 수프는 두 그릇이나 비웠어요. 팬케이크까지 야무지게 다 먹고 갔다니까요.”
라이킨은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울면서도 얼마나 잘 먹던지, 씩씩하게 먹고 갔어요. 근데 돈을 너무 비싸게 줘서…….”
쓴웃음을 지은 금발머리의 신사는 안절부절못하는 주인 여자에게 고개를 저었다.
“그냥 받아둬요. 잘 못 드시던 분인데 이 집 음식이 입맛에 맞으셨나 봅니다.”
“그래도…….”
“그리고 이건 내 사례이니 따로 챙기세요.”
주인 여자는 라이킨의 수하가 따로 내미는 돈주머니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남편을 쳐다보았다. 파이프나 피우고 있던 남편이 그제야 이쪽을 쳐다보았다.
“……우리는 밥값 외에는 안 받는데.”
“나중에 혹시나 그 아가씨가 또 오시면, 그때 이걸로 계산하세요.”
라이킨은 웃었다.
“신경도 좀 써주시고. 혹시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찾아와서 그 아가씨에 대해 물어보면 모른다 해주시고.”
“글쎄 밥값 외에는 안 받는다니까.”
그러나 라이킨은 그게 앞으로 소렐이 와서 먹을 ‘밥값’이라며 억지로 안겨주고 떠났다. 소렐은, ‘무슨 말을 안 해줬다’라면서 울었단다. 아무래도 그가 어떤 말을 안 한 모양인데, 그게 뭐였을까. 알 것 같긴 했다. 하지만 그 말을 그 은행금고에서 무릎을 꿇어가며 내뱉기엔 너무 새빨간 거짓말처럼 들리지 않나. 공주님을 사랑합니다. 사모하고 있습니다. 협정서를 통해 별 끔찍한 소리를 다 들은 공주님에게 바치기엔 지나치게 싸구려고, 발목 붙잡는 변명에 급급한 말이다. 남들은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냐고 화를 내겠지만 소렐은 그 싸구려 한마디면 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묵직한 그 말이 너무 괴로워서 늘 품고 있던 남자는 심장이 꾹꾹, 쥐여 짜이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