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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방랑 (4) (104/181)

104. 방랑 (4)2021.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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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렐은 라이킨의 그런 목소리는 처음 들어보았다. 힘이 쭉 빠지고, 자신감 없이 약간 떨리면서도 기력이 전혀 없는 목소리였다. 그녀를 도살한다느니 하는 끔찍한 말을 할 때나, 평소처럼 강하면서 힘이 있고 낮은 목소리와는 확연히 달랐다. 소렐은 뛰쳐나가 라이킨을 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16606121691068.jpg“가지 마십시오, 제발.”

그는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16606121691068.jpg“제발 제 말을 한 번만 들어주세요.”

소렐도 그 말을 듣고는 싶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물어보고 싶은 일들이 많았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다, 그녀 소유의 작은 금고 바깥으로 고개를 살짝 빼보았다. 라이킨은 금고로 들어오는 철문에 기대서 차가운 바닥 위에 그냥 앉아 있었다. 그는 몹시 초조하고 불안해 보였다. 소렐은 고개를 약간 숙인 채로 시선만 들어 그녀를 바라보는 라이킨을 보다가 외면했다. 외면하고 조심스럽게 팔을 뻗어 빈 돈주머니를 더 집어 들었다.

16606121691068.jpg“식사는 하셨습니까?”

소렐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늘 하루 종일 먹은 게 없었지만 그게 중요한가?

16606121691068.jpg“지난밤에 어디 계셨……, 아니, 아닙니다.”

이건 꼭 어린 아가씨가 어디에 있었는지 다 알아야겠다고 일거수일투족을 캐묻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라이킨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굶주린 사람처럼 소렐을 바라보았다. 마력을 주체하지 못해 일렁이는 머리카락도, 색이 밝게 변한 검은 눈동자도, 어마어마하게 쏟아져 나오는 강력한 마력도 전부 다 샅샅이 살폈다. 그래봤자 그녀가 아무래도 굶은 것 같아, 마음이 또 아려왔다.

16606121691068.jpg“공주님.”

협정서는 서명한 뱀파이어들의 명단을 얻기 위함이었고, 전부 다 죽이고 있다고 말해야 했다. 하지만 소렐이 그렇게 잔인한 남자에게 질겁하고 도망칠 수도 있었다. 라이킨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지만, 어떤 말도 섣불리 할 수가 없었다. 입만 열면 소렐이 사라질 것 같았다. 그는 까칠해진 얼굴을 문질렀다.

16606121691091.jpg“협정서, 내가 가지고 있어요.”

소렐이 먼저 불쑥 말했다.

16606121691068.jpg“……예. 에설론 백작 것을 가지고 가셨더군요.”

라이킨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소렐은 돈주머니 입구를 벌리고 다시 금고 안을 살펴보았다.

16606121691068.jpg“공주님, 저는…….”

그건 그들을 이용하기 위해 제가 먼저 서명한 겁니다. 거짓말이에요. 말하려고 하던 라이킨은 말문이 턱 막혔다. 이걸 이해하라고 말하는 건 억지였다. 여태까지 그가 소중하게 지켜온 만큼 더더욱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16606121691091.jpg“여기도.”

소렐은 자신 명의의 금고를 가리켰다.

16606121691091.jpg“좀 열어줄래요?”

까만 눈이 그를 빗겨갔다. 차마 똑바로 마주할 수가 없어서 그의 얼굴 근처를 보며 중얼거렸다. 소렐도 혼란스러웠다. 그저 기계적으로 해야 할 일만 할 뿐이었다. 라이킨은 직원에게서 받은 열쇠와 암호문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16606121691068.jpg“……공주님을 해치려고 한 게 아닙니다.”

이 말도 뱉고 나니 형편없는 변명으로 들렸다. 모든 게 다 소렐을 붙잡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다. 소렐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라이킨이 금고 문을 열어주길 기다렸다. 대답을 할 생각이 없는 거다. 그는 시선을 떨어트리다가, 결국 다가와서 말없이 금고 문을 열어주었다. 어쩌면 이게 소렐을 떠나게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말을 어길 수는 없었다.

16606121691091.jpg“고마워요.”

소렐은 그 와중에도 예의는 잊지 않았다. 묵직한 문을 열어주자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서 둘러보았다.

16606121691068.jpg“……떠나실 겁니까?”

그녀는 죽을 것처럼 꺼져가는 목소리에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묻고 있었다.

16606121691068.jpg“그렇다면 저도 데리고 가세요.”

소렐은 그 어떤 말에도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 역시 아무것도 정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16606121691091.jpg“……나는 사람을 죽였어요.”

16606121691068.jpg“정당방위입니다. 아무도 공주님을 비난하지 못해요.”

16606121691091.jpg‘하지만 그걸 어떻게 믿지?’

라이킨의 다급한 말에 저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린 소렐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런 뒤 몹시 슬퍼졌다. 어느새 그녀는 라이킨도 의심하고 있었다. 의심을 한번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마치 지금 그가 하는 모든 말들이 혹시 그녀를 다시 잡아다 ‘애완토끼’로 키우려는 건 아닌지, 일말의 의혹이 아주 작은 그림자로 남아 일렁였다. 그 작은 의혹을 무시하고 싶었다. 무시해야만 했다. 그게 맞는 거다. 소렐은 스스로에게 한 번 타일러보았지만, 타이르는 말이 오히려 의혹보다 더 작았다.

16606121691068.jpg“아무도, 아무도 공주님을 해치지 않을 겁니다. 제가 막을게요. 제발…….”

소렐은 몹시 혼란스러워졌다. 그녀는 이 혼란을 종식시킬 말을 하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 그 말을 해주지 않는다.

16606121691091.jpg“라이킨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부터 불쑥 말했다.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더니, 어깨를 늘어뜨리며 대답했다.

16606121691068.jpg“그렇다면 제발 저를 데리고 가주십시오.”

그의 목소리가 꽉 잠겼다.

16606121691068.jpg“제가 바라는 건 그뿐입니다.”

여기서 그녀가 망설이거나, 자꾸만 마음을 덮는 의혹 때문에 뒤로 물러난다면 그 또한 라이킨에게 상처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상처를 주기 싫다고 해서 그녀가 입은 상처를 외면하기는 싫었다. 애초에 도대체 뭘 해야 맞는지도 모르겠다. 소렐은 아무것도 모르기에 아무것도 정하지 못했고, 따라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16606121691068.jpg“공주님, 제발요.”

저 애원은 정답이 아니다. 정답은 따로 있다.

16606121691091.jpg“상처 주고 싶지 않지만, 나는 잘 모르겠어요.”

소렐은 말을 하더니 입술을 꾹 말고서는, 몸을 숙여 보석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16606121691068.jpg“뭐든 대답해드릴 수 있습니다. 협정서에 서명한 건, 협정서에 동의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서명한 이들의 명단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라이킨은 다급하게 말했다. 소렐은 그제야 그를 돌아보았다.

16606121691068.jpg“그 명단은 다시 말해 공주님을 위협하는 이들의 명단이니…….”

알아내서 싹 잡아다 죽이려고요. 라이킨은 잔인한 말은 일단 생략하면서도, 소렐의 작은 손이 기어이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주머니 안에 쓱 밀어 넣는 것을 초조하게 지켜보았다.

16606121691091.jpg“정말 사비나를……, 일부러 나랑 친구가 되라고 라이킨이 붙인 거예요?”

소렐은 한 손으로는 주머니를 꽉 움켜쥐고, 다른 손은 아예 주머니 안에 넣어버렸다. 떨리는 손이 그렇게 가려졌다. 그녀는 그를 쳐다볼 용기도 나지 않아서 시선을 번쩍거리는 금화에만 고정했다. 그녀에겐 지금 아무런 의미도 없는 물건이었다. ‘사실대로 말해줬으면 좋겠다’라는 말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거짓말을 하기로 작정한 사람은 그런 말을 듣는다 해도 거짓말을 할 것이다. 그러니 그런 말은 의미가 없다. 소렐은 라이킨이 거짓말을 한다 해도 그게 거짓이라고 간파할 자신조차 없었다.

16606121691068.jpg“……예.”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 더 말하지도 않았다.

16606121691091.jpg“왜요?”

여전히 소렐은 라이킨을 보지 않고 물었다. 작은 목소리에서 감정을 읽어내긴 어려웠다. 그의 대답은 곧장 나오지 않았다.

16606121691068.jpg“……걱정했으니까요.”

16606121691091.jpg“나를요, 아님 고대마법을요?”

16606121691068.jpg“나는 둘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소렐은 강한 어투에 손을 꺼내서 금화를 더 쓸어 넣었다.

16606121691091.jpg“처음부터 그랬어요?”

16606121691068.jpg“예.”

처음부터. 어쩌면 이 모든 게 처음부터 다 거짓말이었을 수도 있겠다.

16606121691091.jpg“뭘 걱정했는데요? 사비나는 경호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16606121691068.jpg“……관계도 중요합니다.”

소렐은 그를 홱 돌아보았다. 은행에 들어올 때부터 내내 멍하기만 하던 눈동자에 사나운 빛이 서렸다. 사실 그마저도 아주 강하고 독하지는 못했다.

16606121691091.jpg“내가 어떤 친구를 사귀는지도 라이킨이 다 미리 걸러야 했다는 거예요?”

16606121691068.jpg“죄송합니다.”

순순히 인정하기까지 한다. 소렐은 다시 고개를 팩 돌렸다. 스스로의 처지를 모르는 건 아니다. 그건 어제 억지로 끌려가서 뺨을 여러 번 맞고, 머리채를 잡히고, 하마터면 더 끔찍한 일을 당할 뻔한 소렐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그녀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금화를 주머니 안에 팍 쓸어 넣었다.

16606121691091.jpg“……가끔 라이킨이 날 왜 좋아한다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었어요.”

잔뜩 억눌린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16606121691091.jpg“내가 못났는데 왜 좋아할까, 이게 아니라.”

금고 안은 신중한 설계로 건조하고 시원하기만 했다. 라이킨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남자는 그저 듣기만 하는 중이었다.

16606121691091.jpg“저렇게 오래 살고, 많이 알고, 부족한 거 없는 사람이 왜 동족들을 다 마다하고.”

그렇게 나름의 멋이 있고 매력적인 존재들을 다 마다하고.

16606121691091.jpg“만난 지도 얼마 되지 않고, 수준도 잘 안 맞는 나한테 좋아한다고 할까.”

이제 막 배우는 중이라 대화가 통하는 데도 한계가 있고, 한참 참아주기만 해야 할 텐데.

16606121691091.jpg“신기하고 궁금하고 좋기도 했는데.”

소렐은 무거운 눈을 들어 새하얀 진주가 가득 쌓인 쪽을 바라보았다.

16606121691091.jpg“결국 그런 생각은 꼭 ‘내가 고대마법의 후계자라서 그런가?’로 끝나더라고요. 엄마의 예언이나, 뭐 그런 것도 있으니까. 그래서 더 생각하지도 못했고.”

차마 그쪽으로는 더 생각할 수가 없었다. 헬레인 토끼가 예언한 것이니까 그냥 그대로 따르는 건가, 고대마법이 있는 소렐 이드리스를 좋아하는 건가, 그럼 고대마법이 없는 소렐 이드리스는 싫어하나? 감수성 풍부한 아가씨에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16606121691091.jpg“또 물어보지도 못했어요.”

촤라락, 진주가 돈주머니의 나머지 공간을 가득 채웠다.

16606121691091.jpg“……나는 라이킨의 그……, 전 약혼녀도요, 아주 크게 다치게 해버렸어요.”

16606121691068.jpg“잘하셨습니다.”

소렐은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라이킨을 돌아보았다. 그는 분명하게 말했다.

16606121691068.jpg“아주 잘하셨어요.”

16606121691091.jpg“사람도 많이 죽였어요.”

16606121691068.jpg“그것도 잘하신 겁니다. 공주님을 납치하려던 사람들이니 잘못하신 거 없습니다.”

저 남자는 늘 아주 애쓰면서 듣기 좋은 말만 한다. 정작 소렐은 자신의 손에 피를 묻혔다는 사실을 잊을 수가 없는데, 스스로를 살인자라고 생각하는데도 말이다.

16606121691091.jpg“……나는 협정서에 라이킨이 서명했다는 사실만 아는 게 아니에요.”

소렐은 주머니 두 개의 입구를 잘 조이고 일어났다. 일어나서 라이킨과 마주했다.

16606121691091.jpg“그때 라이킨이 누구와, 어떤 표정으로, 어떤 목소리로, 무슨 말을 했는지 다 봤어요.”

그녀는 말을 하다가 그만 고개를 툭 떨궜다.

16606121691091.jpg“엿볼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게 그냥……, 그렇게 되어서……, 피의 기억에 빨려 들어가서…….”

라이킨은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 소렐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라이킨은 뭐라 말하려고 입술을 한참 달싹거렸다. 아무래도 말을 고르는 듯했다.

16606121691068.jpg“죄송합니다만, 그때 말했던 것은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16606121691068.jpg“……그동안 제가 그렇게 공주님께 신뢰를 드리지 못한 겁니까?”

순간 아프게 깨지는 푸른 눈동자에 소렐은 괴롭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16606121691091.jpg“이런 식으로 만나고 싶지 않았어요. 나는……, 나는 준비가 되지 않았단 말이에요.”

그래서 끝내 라이킨에게 상처를 주고, 그녀도 상처를 받고, 악순환이다. 손을 대는 곳마다 와르르 무너지고 비극만 일어나는 기분이다. 소렐은 엄청난 사고만 저지르는 범죄자가 된 것 같았다.

16606121691068.jpg“저는 상관없습니다. 공주님께서 저를 믿지 못하셔도 상관없어요.”

16606121691091.jpg“왜요?”

소렐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라이킨을 보았다.

16606121691091.jpg“그게 얼마나 중요한데요.”

소렐에겐 너무나 중요했다. 믿음, 신뢰, 진심, 그런 단어들이 너무나 중요했다. 그리고 모든 관계에서 중요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맺어진 관계라곤 라이킨를 통해 만들어진 관계밖에 없었고, 그래서 지금 소렐의 모든 관계에는 믿음이 하나도 없었다.

16606121691068.jpg“저는 괜찮습니다.”

비는 건가? 소렐은 불현듯 생각했다. 라이킨의 목소리가 어쩐지 절박하게 들렸다. 언제나 고상하고, 또 예스러운 남자가 격렬한 감정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마구 드러내고 있었으나 소렐이 제대로 보지 않고 외면한 것인지도 모른다.

16606121691068.jpg“저를 끝내 의심하셔도 괜찮습니다. 계속 화내셔도 괜찮아요. 그러니까 제발.”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게 혼란스러운 소렐은 그거라도 알고 싶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또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16606121691068.jpg“제발 저를 두고 가지 마세요, 공주님.”

칼리에르 공작은 그의 가문이 늘 경멸하던 한낱 토끼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곳이 차가운 돌바닥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16606121691068.jpg“어딜 가시든 저는 데리고 가주십시오. 어제 일은 제가 알아서 수습하겠습니다. 괜찮아요.”

그는 몇 번이고 괜찮다고 말했다.

16606121691068.jpg“아무도 공주님을 비난하지 않을 겁니다. 저는, 공주님, 제발…….”

라이킨의 고개가 툭 떨어지자 소렐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정말이지 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라이킨은 정작 중요한 말은 해주지 않고 있었다.

16606121691091.jpg‘상처받았을까? 저것도 연기일 수 있어. 도대체 어떤 부분이 진실이라고 믿겠다는 거야? 아무것도 모르면서.’

마음 한구석에서 누군가가 속살거렸다. 어쩌면 그녀의 똑똑한 이성인지도 모른다.

16606121691068.jpg“공주님께서 믿지 않으신다 해도 저는 괜찮습니다. 제발, 공주님.”

그는 절박하게 빌었다.

16606121691068.jpg“제발 혼자 떠나지 마세요.”

소렐은 돈주머니를 꽉 움켜쥐었다.

16606121691091.jpg“내가 어째서 라이킨이랑 함께 있어야 해요?”

그녀는 조심스럽고도 당혹스럽고, 또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평소였다면 토끼의 순하고, 자신감 없는 모습으로 보였겠지만, 그녀는 지금 머리카락을 너울대며 황금빛이 도는 검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었다. 강력한 대마법사의 질문에는 의문이 잔뜩 섞여 있었다.

16606121691068.jpg“공주님.”

라이킨은 무너진 얼굴로 간신히 웃었다.

16606121691068.jpg“제가 공주님 없이 어떻게 살까요?”

내내 가슴 속에 맴돌던 질문이었다. 내가 어떻게 당신 없이 살라고.

16606121691068.jpg“제 모든 걸 다 아시는 분인데, 제가 어떻게 공주님 없이 살겠습니까.”

소렐이 없었던 하룻밤 사이에도 미치는 줄 알았다. 라이킨은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을 리란 걸 확신했다.

16606121691068.jpg“공주님께서 절 믿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제가 함께 있게만 해주세요. 아무 짓도, 아무것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냥 지켜만 드릴게요, 공주님. 혼자 가시면 어떻게 하려고요. 지금 막 각성하신지라 노리는 사람도 한둘이 아닐 겁니다.”

그는 빠르게 말했다. 열심히 말하고, 그가 한 말이 소렐에게 닿길 바랐지만 사실은 전혀 닿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더 절망스러웠다. 소렐은 작은 머리를 숙였다가, 다시 그를 보았다. 대마법사는 그의 앞에서는 원래 하던 버릇대로, 소렐 이드리스답게 굴었다.

16606121691091.jpg“나는 그런 말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소렐은 혼란스럽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면 무슨 말이 필요한 건가? 라이킨도 모르겠다.

16606121691091.jpg“나는 라이킨을 잘 모르겠어요.”

모든 걸 다 안다고 라이킨이 직접 말하고 있었지만 과연 그럴까?

16606121691091.jpg“내가 모르는 라이킨을 봐서, 정말 잘 모르겠어요.”

도살이니 애완토끼니 하는 끔찍한 말을 서슴없이 하고, 그러고서 돌아와 그녀에게 웃어줬을 그를 잘 모르겠다.

16606121691068.jpg“제가 다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공주님, 설명해드릴 수 있어요……!”

그는 발작하듯 외쳤지만, 소렐은 그와 시선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려 눈만 깜빡였다. 예나 지금이나 그녀는 애완토끼라는 말을 듣고서도 그에게 몹시 약했다. 그냥 모든 걸 다 믿고 싶지 않았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래서 그랬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아니, 벌써부터 믿고 있었다. 서명한 사람들 명단이 필요했다잖아. 그렇다잖아. 쇠로 만들어진 올가미에 목을 집어넣는 기분이 든다 해도, 이미 믿고 있었다. 그건 문제였다.

16606121691091.jpg“그러지 말아요, 라이킨.”

소렐은 간곡히 부탁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빌고 있었다.

16606121691091.jpg“나한테 그럴 필요 없어요.”

딱 한마디면 됐는데, 말만 하면 되는데 라이킨은 말 대신 무릎을 꿇고 있다. 그럴 필요가 뭐가 있을까.

16606121691068.jpg“공주님, 제발…….”

16606121691091.jpg“나는 잘 모르겠어요.”

달콤한 말을 뿌리치고, 눈을 가리고 있는 손도 치워내고, 라이킨을 똑바로 보아야 했다. 그러고 싶었다.

16606121691091.jpg“……잘 있어요.”

부디 안녕히. 건강하고, 밥도 잘 먹고, 잘 자길. 소렐의 진심이 담긴 목소리에 라이킨은 그만 눈이 뒤집혀서 그녀를 잡아채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또 사라졌다. 글래스턴 은행 지하 금고에는 칼리에르 공작의 끔찍한 절규가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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