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방랑 (3)2021.07.24.
눈이 시뻘겋게 물든 칼리에르 공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아직 엘펜하임 수뇌부 대부분이 이 나라 안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때, 그는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잠도 자지 않고, 음식을 입에 대지도 않은 채 나라 여러 곳을 들쑤시며 다녔다. 그는 내킨다면 잠들어 있던 나라의 밤을 찢어서 사람들을 모조리 깨울 작정이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오?”
그래서 아침 일찍부터 당장 알현을 해야겠다고 난리를 쳐대는 발레시나스 공작을 오전에야 맞이한 페르난데스 7세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칼리에르 공이라면 몰라도, 이 노회한 뱀파이어는 더 대하기가 껄끄러웠다. 겉으로는 온화하고 사람 좋아 보이지만 최소 오천 년은 더 산 뱀파이어다. 정치는 겪을 대로 겪은 데다, 비슷한 연배인 저 슈토넨 후작보다 더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급하게 알현을 요청해 죄송합니다, 폐하.”
그래, 이게 발레시나스 공작 로렌스 오블리앙을 더 대하기 어렵게 만드는 이유였다. 강제로 국왕의 멱살을 잡아 알현실로 끌고 온 거나 다름없이 굴었으면서도, 또 만나면 웃으면서 정중히 사과한다. 그런 다음에 뜬금없는 소리를 줄줄 늘어놓더니,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나면 만족한 얼굴로 사라진다. 발레시나스 공이 도대체 뭘 바라고 찾아왔는지는 한참 후에나 알게 되는 것이다.
“오전부터 영 안 좋은 소식을 알려드리게 된 것 같아 송구합니다만, 반드시 아셔야 할 일입니다.”
로렌스는 아주 차근차근 말했다.
“국방부 장관과 외교부 장관을 필히 부르셔야 할 겁니다.”
“아…….”
페르난데스 7세는 요직이 거론되자 머리가 아파왔다. 저 정도 급이라면 일이 터져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칼리에르 공비 문제요?”
“예, 그렇습니다, 폐하.”
며느리 일로 시아버지가 찾아오다니, 그럼 남편인 칼리에르 공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가? 페르난데스 7세는 불길한 느낌에 로렌스를 쳐다보았다.
“어제, 엘펜하임이 국경을 넘어 글래스턴에 침입했습니다.”
“아이고, 맙소사.”
페르난데스 7세는 이마를 짚었다. 정치가라면 이런 때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끝까지 들어야겠지만, 엘펜하임 기사단이 국경을 넘어왔다는 건 반응을 안 보일 수가 없는 문제였다.
“그 불한당들.”
그러게나 말입니다. 로렌스는 대답하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마저 이었다.
“그것도 엘펜하임 수뇌부가 거의 다 직접 밀입국했습니다. 기사단장 페드로 곤잘레스를 포함, 열한 명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국경에서 그걸 막지 않고 도대체 뭘 했다는 건가!”
“작정하고 들어왔습니다.”
일단 국경에 구멍이 크게 뚫린 셈이니, 페르난데스 7세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그래서 글래스턴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간략하게 말씀드리자면 기존에 입국해 있던 기사단원 열넷과 함께 칼리에르 공비를 납치 시도했고,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그게 실패했다니 그건 참 다행이군!”
페르난데스 7세는 일단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치진 않았소?”
“그게 문제입니다.”
“많이 다쳤소?”
“부상자는 있었지만, 칼리에르 공비가 다친 건 아닙니다. 반면, 엘펜하임 기사단 수뇌부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페르난데스 7세가 이번에야말로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발레시나스 공작을 쳐다보았다.
“그들이 고대마법을 강제로 열어젖혔습니다, 폐하. 대마법사가 각성했고, 그 대가는 목숨이었습니다. 기사단장을 비롯한 엘펜하임 수뇌부가 전부 즉사했습니다. 살아남은 건 함께 납치당한 로체 가문의 영애뿐입니다. 칼리에르 공비를 엘펜하임에 팔아넘기려던 에설론 백작 역시 죽었습니다.”
“그런 일이……!”
“증인은 로체 가문의 영애가 설 것입니다. 현재 도망친 엘펜하임의 글래스턴 지부장, 카메론 셀레스트 교수를 추적 중입니다.”
“정말 다 죽었소?”
로렌스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건 기쁨이나 조소가 아닌, 그저 예의를 차려 웃는 것일 뿐이었다.
“안 그래도 그러실 것 같아 수급을 잘라 올까, 했습니다. 시신은 직접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폐하. 얼굴들도 나름 온전하니, 써먹기는 좋겠지요.”
갑자기 엘펜하임 기사단장을 비롯한 수뇌부의 시신이 글래스턴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면 전 세계가 발칵 뒤집힐 일임은 분명했다.
“에설론 백작이 그런 짓을 했다고?”
하지만 이 왕국 내부에서 엘펜하임을 불러들인 자가 있다니, 이건 망신이었다.
“역모지요. 엄연한 외부인에게 국경을 열어주었다니.”
로렌스는 씁쓸하다는 투로 부드럽게 말했다.
“에, 에설론 백작이 국경까지 직접 열어주었소?”
“그건 확인해봐야 알겠습니다만, 어제 시간과 장소를 약속하고 칼리에르 공비를 빼돌리기로 한 건 확실합니다.”
페르난데스 7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건 신문에 대서특필될 만한 거대한 사건이었다. 앞으로 며칠 내내 이 일로 떠들썩할 것이다.
“……대마법사가 각성하여 몰살되었다면, 칼리에르 공비가 충격이 크겠군.”
“예.”
처음으로 로렌스 오블리앙의 그린 것 같은 표정이 깨지고, 조금 더 사람다운 표정이 드러났다.
“현재 애쓰고 있습니다만…….”
로렌스는 말끝을 흐렸다.
“폐하께서는 알고 계셔야 할 일이지요. 충격이 컸는지 이혼을 하겠다고 하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습니다.”
“이, 이혼?”
갈수록 더 황당한 말만 튀어나온다. 이혼이라니, 무슨 이혼인가! 페르난데스 7세는 눈을 크게 떴다. 대답하는 발레시나스 공작도 곤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아직 어려서 정당방위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살인을 했으니 칼리에르 공작가에 누가 된다 하여 이혼을 하겠다고 한 것 같은데…….”
“지나치게 원리원칙을 따지는 건데. 원래 대마법사들이 그랬소?”
“모든 마법에는 책임이 뒤따릅니다, 폐하. 그들의 신조입니다.”
페르난데스 7세는 더 당황하고 말았다.
“대마법사가 그럼 어딜 간단 말이오? 붙잡을 수도 없는 존재 아닙니까. 지금 마력을 주체할 수 있는 상황이긴 한 거요?”
“폐하. 대마법사가 국경 밖으로 나간다면 이 나라의 커다란 손실이겠지요.”
“안에 있다 해서 큰 이득이 될 것도 없소이다.”
“예. 이득은 없지만, 손해는 클 수 있습니다.”
이래서 오블리앙 공과 말하는 게 영 어렵다. 페르난데스 7세는 결국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제 아들은 이혼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어제 만들어진 총 스물한 구의 시신은 정당방위의 결과일 뿐, 칼리에르 공작가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은 아닙니다. 명예가 실추당한다 해도 이혼할 생각은 없다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공의 생각은 어떻소?”
그거야 아들의 생각이고, 아버지의 생각은 또 다를 수도 있다.
“저 역시 동의합니다. 정당방위로 이혼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공주님이 많이 놀라신 것뿐입니다.”
사실 그 뒤에 협정서가 더 있다는 건 굳이 페르난데스 7세가 알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뱀파이어들의 일은 뱀파이어들이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법이니까.
“폐하께서는 엘펜하임의 불법입국과 칼리에르 공비를 납치하려 한 점을 밝히시고 비난하시면 됩니다.”
“그거야 마땅히 할 일이오. 그리고 에설론 백작도 처벌해야겠는데.”
페르난데스 7세는 얼굴을 확 굳혔다.
“그럼 일단 밀입국 방조에, 납치 방조인가? 하지만 죽었다니……. 정말로 죽었소?”
“예.”
라이킨은 국왕이 에설론 백작 루드밀라 아스테어 프랑슈틸을 법정에 세울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범행 과정을 전부 다 밝히다 보면, 뱀파이어들의 협정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딱 십 분만 생각한 끝에 루드밀라를 죽은 사람으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남편이 아내를 죽이겠다고 맹세한 내용에 서명했다는 게 신문을 통해 보도되고 법정기록에 남게 되면, 소렐에겐 그만한 충격을 더 주는 셈이기 때문이었다. 전국적으로 그 내용을 광고하고 여러 사람의 기억에 새길 필요까지는 없었다.
“죽었습니다, 폐하.”
로렌스 오블리앙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이라면 몰라도 뱀파이어까지……. 대마법사가 강하긴 정말 강한가 보오. 그 아버지만큼이라고 봐도 되겠소?”
“그건 아직까지는 가늠할 수 없습니다.”
“하긴 펠릭스 이드리스의 힘도 가늠할 수 없었지…….”
페르난데스 7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논의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는 아무래도 오찬 약속을 취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충격이 크겠소. 칼리에르 공은 어떻소?”
로렌스는 손을 맞잡았다. 사실은 그게 제일 문제였다. * 뱀파이어들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언제나 그림자로만 활약하던 이들이 무섭게 왕국 전역을 휩쓸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있는 이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저 칼리에르 공을 격노하게 한 무슨 사건이 있구나, 하고 웅크리고 앉아 몸을 사릴 뿐이다.
“다 죽여.”
협정서에 있는 이름들을 천천히 수확하려 했으나 지금 그럴 때가 아니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정확하게 죽이면서 소렐을 찾을 것이다.
“예, 마스터.”
라이킨은 글래스턴으로 돌아오자마자 은행으로 향했다.
“공주님께서는 분명히 이곳으로 먼저 오실 테니, 다시 한번 점검하고.”
그 말에 조슈아가 고개를 들었다.
“은행직원부터 전부 철저하게 입을 막아놓고 지시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라이킨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소렐을 찾는 지시 이외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마스터, 공비전하께서 은행에 오실까요?”
그냥 금고로 이동해서 돈만 슬쩍 빼 가면 그만 아닌가. 조슈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공주님은 고지식하시거든.”
아무리 출금을 한다 해도 반드시 은행직원을 통해서 할 생각만 하지, 금고로 바로 이동할 생각은 죽어도 못할 거다.
“다니실 때 돈이 가장 먼저 필요하다는 건 아마 아셨을 거야.”
학교에 가야 한다고 약초까지 부지런히 캐고 있던 성격이니, 돈에 대한 감각은 어느 정도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고작 그것으로 안심하기엔 이미 하룻밤이 지나버렸다. 지난밤,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건지, 제대로 된 곳에서 쉬었는지, 돈도 없으실 텐데 여자 혼자 몸으로 어떻게 다닌 건지 생각하면 미쳐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마스터, 공주님께서 은행에 오시면 제가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는 눈을 좀 붙이시지요.”
조슈아는 조심스럽게 제안했으나 라이킨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평소보다 훨씬 더 흐트러져 있었다. 눈은 붉었고, 표정은 엉망이다.
“며칠 자지 않아도 상관없잖아.”
그렇다고 하기엔 지금 꼴이 말이 아니라서요. 조슈아는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물러났다. 뱀파이어들은 혹시 소렐을 놓칠까 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대마법사는 얼마든지 위장해서 나타날 수도 있다. 유일하게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라이킨이었다.
“마스터, 공비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소렐은 정직하게 은행 정문으로 들어왔다. 편법이란 걸 생각해본 사람이 아니니 당연했다. 그녀는 여전히 강대한 기운을 어쩌질 못하고 있었고, 힐끔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에 불편해하면서도 곧장 은행 창구를 찾았다.
“출금을 하고 싶은데, 아…….”
소렐은 지금 신분을 증명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돈은 꼭 필요했다.
“아, 공비전하.”
하지만 은행직원은 다행히 그녀를 알아보는 모양이다.
“얼마나 출금하실 건가요?”
되도록 많이. 소렐은 딱히 금액을 정해놓지는 않았지만, 최대한 많이 가져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수표책을 사용하셔도 될 텐데요.”
“그걸 잃어버렸어요.”
“아, 그럼 새로 발급해드릴까요?”
그런가? 소렐은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연하게, 은행을 옮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커다란 금고들을 가득 채운 재산을 어떻게 옮긴단 말인가. 은행직원은 소렐의 머리카락이 미친 듯이 너울거려도 딱히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렇게 하도록 교육받았거나.
“출금은 얼마나 하신다고요?”
“아…….”
얼마나 해야 하더라? 머물 곳도 있어야 하고, 당장 새 옷과 신발, 그리고 머리카락을 누를 수 있는 모자라도 사야 했다.
“금고에 직접 가셔서 돈을 가져가시겠어요?”
“그, 가방이 없는데…….”
“주머니야 저희가 얼마든지 제공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야. 소렐은 연신 주변을 살피며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그녀는 사람을 여럿 죽였다. 경찰이 와서 체포하지는 않을까? 그대로 끌려가야 하나? 하지만 라이킨과의 일이 다 끝나지 않았다.
“저를 따라오세요.”
소렐은 멍하니 생각하며 은행직원을 따라갔다.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금고로 내려가는 길은 여전히 썰렁했지만 밝은색 대리석으로 넓게 만들어졌다.
‘빨리 돈을 찾아서 나가야 해.’
어느 정도 도피할 수 있는 자금을 챙겨서 달아나야 했다. 아니, 이대로 자수하는 게 올바른 건가? 하지만 붙잡혔다가 엘펜하임에게 넘겨지면 고대마법을 잃을지도 모른다. 소렐은 가슴을 꾹 눌렀다.
‘돈을 챙겨서……, 어디로? 아니,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사실 그녀를 체포하려고 했다면 이미 은행에 들어섰을 때 체포되었겠지만, 이제 갓 대학에 들어갈 스무 살이 그런 걸 알 턱이 없었다. 소렐은 조마조마한 얼굴을 숨기지 못한 채 금고로 들어섰다. 직원은 아주 복잡한 자물쇠를 몇 개나 풀고, 또 두꺼운 문을 몇 번이나 연 뒤 소렐을 돌아보았다.
“자, 이제 들어가시면 됩니다.”
휘황찬란한 헬레인 왕조의 유산과 이드리스 가문의 유산이 발에 채일 만큼 쌓인 곳이다. 소렐은 직원이 금고 앞에 놓인 가죽 주머니 하나를 건네주자, 받아들고 아무 말 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너무 많으니, 도대체 뭘 가져가야 할지 모르겠다.
“저는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원하시는 만큼 천천히 계시다가 나오세요.”
“네, 감사합니다.”
소렐은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40프랑짜리 금화는 좀 챙겨야 할 거다. 그리고 보석도 나중에 요긴하게 팔 수 있을지 모른다. 가치로 따지자면 금화를 잔뜩 짊어지고 가는 것보다 보석을 챙기는 게 더 나으니까. 그렇지만 그렇게 따지면 티아라를 가지고 나가는 게 옳은데, 아니, 아니다. 소렐은 고개를 흔들었다. 티아라를 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다 눈물이 툭 떨어졌다.
‘팔지 않으면 뭘 해. 여기다 두면 경찰이나 은행이 빼앗아 갈지도 모르는 거고. 어디 하고 나갈 곳도 없으면서.’
엄마는 왕을 만날 때와 데뷔할 때 쓰라고 했지만, 아무래도 그 말대로 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엄마의 편지조차 글래스턴 타운하우스에 두고 왔다. 소렐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소렐은 훌쩍거리면서 비참한 기분으로 무릎을 접고 앉아서 주머니에 금화를 채워 넣기 시작했다. 빨리해야 했다. 빨리 챙겨서 도망쳐야 했다. 그녀는 신중하게 다이아몬드를 골라 주머니에 또 넣었다.
‘다른 금고도 열어달라고 할까……?’
그래야 할 텐데. 소렐은 금고 문을 뒤돌아보다가 움찔거리곤 다시 고개를 돌려 얼른 주머니를 채우는 데 열중했다. 한참 만에 주머니 하나가 들지도 못할 정도로 꽉 찼을 무렵, 그녀는 기계적으로 집어넣던 것을 관두고 입을 열었다.
“왜 그러고만 있어요?”
보지도 않고, 말도 걸지 않고, 그렇다고 들어와서 그녀를 낚아채지도 않는 라이킨에게 물었다. 금고 문밖에서 힘 빠진 웃음소리가 들렸다.
“공주님께서 저를 또 두고 가실까 봐 겁이 나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