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방랑 (1)2021.07.17.
몸이 너무 무거웠다. 천근만근이라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렇다 해서 머리를 잘 쓸 수 있느냐, 그건 또 아니었다. 마법을 쓸 수 있는 건 당연히 아니었다. 라이킨을 불러야 하는데, 라는 생각밖에 못 했다. 하지만 그 생각을 밀어낼 정도로 강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쉼 없이 쏟아부어졌다.
“이건 아주 오래된 물건이야. 네 아버지를 상대로도 한 번 만들어졌고, 이젠 널 상대로 만들어졌지. 얼마 안 된 아주 최신식이란다.”
소렐도 글을 읽을 줄은 알았다. 그 협정서에는 사실 글자랄 것도 없었다. 그녀는 흐릿한 눈으로 살벌한 문구를 읽었다.
“고대마법의 계승자가 뱀파이어에게 해를 끼칠 시 서명한 뱀파이어들은 전부 다 계승자를 죽이겠다고 서약한 거야.”
루드밀라는 아주 친절하게 설명도 해주었다.
“그리고 여기 제임스의 서명도 있지.”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라고 멋들어지게 서명한 부분도 직접 짚어주었다.
“그거 아니? 뱀파이어들은 너처럼 약한 개체라면 딱 질색이란다. 그런데 제임스가 애완토끼를 참 잘 길렀어. 주변에 친구랍시고 끄나풀도 하나 달아주고.”
루드밀라의 시선이 소렐의 곁으로 향했다. 소렐은 저도 모르게 그 시선을 따라갔다. 사비나가 끙끙대고 있었다. 루드밀라는 다가가서 사비나의 머리채를 홱 쥐어 올렸다. 그런 일은 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갑자기 쏟아지는 일들은 소렐이 혼자 소화해내기엔 지나치게 큰 충격이었고, 그녀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죽인다고?
“안 그래? 칼리에르 공의 충실한 개인 로체 집안의 따님.”
무슨 소리야, 라는 말이 튀어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소렐의 머리는 그 와중에도 무겁지만 영민하게 돌아갔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너도 그냥 가짜 우정 놀이를 해준 거잖아. 귀찮거나 성가시지 않았어?”
루드밀라는 저 나이대 아가씨들의 생리를 아주 잘 알았다. 그녀 역시 저 나이였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우정, 첫사랑, 뭐 이런 시답잖은 것에 목숨 걸 때지. 그게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고, 그게 사라지거나 배신하면 온 세상이 깨지고 갈라지는 거다. 루드밀라는 소렐 이드리스에게 세상의 종말을 선사했다.
“나, 아, 아…….”
사비나는 새파랗게 질려서 거의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뒤늦게나마 한마디를 했다.
“성가시지 않았…….”
루드밀라는 사비나의 머리채를 툭 내려놓았다.
“일부러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쟤랑 어울려준 거라는 말에 부정은 안 하네.”
필요한 말까지 들었으니 사비나 로체는 더 이상 필요 없었다.
“너 이해했니?”
루드밀라는 소렐에게 물었다.
“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아, 이럴 줄 알았어.”
토끼들은 너무 멍청해. 루드밀라는 한숨을 쉬며 미간을 접었다. 그런 뒤 소렐의 머리채를 확 잡아채서 그 앞에 협정서를 들이댔다.
“글 읽을 줄 몰라? 아니면 제임스의 필체를 몰라? 너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안 가? 내가 하나하나 일일이 다 설명을 해줘야겠어?”
짜증과 신경질, 귀찮음이 덕지덕지 묻은 목소리에 성기사들마저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리지는 않았다.
“넌 그냥 이대로 엘펜하임으로 가는 거야. 고대마법으로 뭐 어떻게 할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생체실험을 당하든 말든 그건 내 알 바가 아니고. 아, 이제 오는군.”
루드밀라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에서 불빛이 하나둘 보이더니, 엘펜하임 기사단 단장이라는 이가 성기사들을 이끌고 이 낡고 거대한 건초 창고로 걸어오고 있었다.
“이해가 될 때까지 다시 읽고 있어.”
루드밀라는 소렐 코앞에 협정서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이 단장인가?”
그녀가 먼저 당당하게 물었다.
“당신이 에설론 백작이군.”
기사단장이라는 대답이기도 했다. 그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중년 남성으로, 오자마자 바로 소렐 이드리스를 찾았다.
“고대마법의 계승자인가?”
“그래. 그대로 잡아다 ‘내가’ 인수인계해주는 거지.”
단장은 소렐 이드리스를 불편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녀는 온몸이 꽁꽁 묶여 있었지만, 고대마법의 계승자가 고작 줄 따위로 제압될 리가 없었다.
“걱정하지 마. 지금 충격받아서 이쪽 신경 쓸 겨를이 없으니까. 애가 좀 어려. 그런데…….”
루드밀라의 눈이 사나워졌다.
“카메론 셀레스트는 어디 있지?”
“주변 방비를 확인하는 중인데.”
루드밀라는 당장 소렐의 머리채를 쥐었다.
“이러면 곤란하지. 내가 넘겨주는 대가로 낙인을 지워주기로 했잖아.”
카메론 셀레스트가 직접 찍은 낙인이다. 루드밀라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시간이 없는데 이딴 식으로 나오겠다, 이거야?”
언제 칼리에르 공이 쫓아올지 모른다. 그는 그녀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빠르고 민첩한 자였다.
“아니, 일단 그 머리는 놓고…….”
단장은 루드밀라의 험한 행동이 혹시 고대마법을 자극할까 봐 걱정되는지 안절부절못했다.
“머리가 뭐? 당신들이 얘를 끌고 가서 마법과 사람을 분리해대는 짓을 하는 것보다는 훨씬 덜 험할 텐데. 아니야?”
단장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직접 고대마법의 계승자를 데리고 오기 위해 그가 직접 나섰고, 또 단장으로서 마땅히 그래야 했지만 어쩌면 그러지 말아야 했을 수도 있었다. 고대마법의 계승자는 좀 이상했다. 그녀의 눈은 아까부터 계속, 바닥에 놓인 큰 종이에 붙박인 채 떼어지지 않았다. 루드밀라가 머리채를 잡고 흔드는 와중에도 그랬다. 마치 종이가 계승자를 붙잡아 놓는 것처럼,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것 좀 놓지?”
단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고대마법의 계승자는 시한폭탄이다. 어디서 뭐가 터질지 모른다.
“카메론 셀레스트가 내 낙인을 지우기 전까지는 어림도 없어.”
새카만 눈은 여전히 협정서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소렐은 이해하지 못했다. 라이킨의 필체고, 서명이 맞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늘도 그녀에게 잘 다녀오라고 다정하게 속삭이고, 기다리고 있겠다고 약속하고, 입을 맞춘 사람이 왜 그녀를 죽이겠다는 협정서에 서명한 걸까? 그리고 저 사술을 거는 나쁜 여자는 왜, 사비나는 왜, 엘펜하임은 갑자기 왜? 왜? 왜? 오늘은 평범하고 좋은 날이었다. 그런데 왜?
“마법사가 뱀파이어에게 위협이 되었는데 어떻게 안 할 수가 있습니까?”
“더구나 헬레인 토끼 아닙니까. 위험합니다.”
“뱀파이어에게 해가 된다면 마땅히 죽여야지요.”
웅웅대는 소리가 뒤섞였다. 소렐은 눈앞에서 꿈틀대는 서명들이, 아니, 피들이 그녀의 눈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자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비명을 지를 수 없었다. 새카만 피가 세상에 나와 본 것들이, 그 까맣고 어둑하며 싸늘한 밤의 기억이 그녀에게 밀려들고 있었다. 소렐은 그 기억에서 황금색 머리카락을 지닌, 그녀가 너무나 좋아하고 아끼며 연모하는 이를 보았다.
“자네는 여태까지 협정서에 서명을 하는 것에 반대를 했잖나.”
그가 매끄럽게 웃었다.
“계속 반대할 거였으면 이 자리에 오지 않았겠지.”
뱀파이어들이 모두가 서명한 협정서 더미를 라이킨 앞에 밀어놓는다. 라이킨이 웃는다.
“변경백. 이번 일로 가장 피해를 많이 본 사람은 나라는 걸 좀 알아줬으면 좋겠어.”
보고 싶지 않아! 소렐은 외쳤지만 라이킨은 자꾸만 말했다.
“결혼은 실리지. 나도 엄연히 말해 정략혼이고, 변경백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는 소렐이 처음 보는 표정으로 쉽게 팔뚝을 그었다. 그의 피도 쏟아져서 소렐에게 기억을 전달한다.
“스무 살짜리 비위 맞추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수틀리면 당장 이런 일이 발생하잖나.”
소렐이 들은 적이 없는 목소리로 싸늘하게 말한다.
“그럼 고대마법 때문에 결혼했다는 건가?”
“나는 여기저기 다 보험을 만들어놓는 것뿐이야. 고대마법은 내 것이지만, 딱히 제어할 수 없다면 없애야지. 그걸 이번에 제대로 실감했고.”
눈치를 보고 있던 젊은 뱀파이어 하나가 라이킨에게 물었다.
“많이 다치셨습니까?”
“하도 물어 뜯겨서 다리에 살이 남아나질 않았어.”
소렐은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건 발레시나스에서 개들이 덤벼들어 소렐이 다치고, 라이킨도 다쳤던 때 이후에 벌어진 일이다.
“고대마법은 내 거야, 변경백. 그게 내 친애하는 동족들에게 위협이 된다면, 그건 안 될 말이지.”
싫어, 보기 싫어, 듣기 싫어. 소렐은 밀려드는 기억에 저항하려 했지만, 파도처럼 밀려와 기어코 그녀를 집어삼켰다. 그녀는 몸서리치지도 못하고 싸늘한 목소리를, 비틀린 입가를, 가슴 찢어지는 말들을 그저 목도하기만 해야 했다.
“토끼를 키우는 재미가 있긴 하지만, 기르는 것에 위협당하면 도살해야 하는 법 아닌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아니,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애완동물을 뭐라도 들이라고. 적당히 예뻐해줄 만한 걸로. 뭐, 나처럼 효율 따지다가 도살하는 건 좀 슬프니까.”
‘애완동물’, ‘도살’, 전부 다 소렐이 듣기에 끔찍하기 짝이 없는 단어를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사람이 태연한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주인을 물지 않을 만한 걸로. 애정은 적당히 주고.”
제가 얼마나 공주님을 아끼고 있는지 잘 알고 계시지요, 라고 말했던 입으로 저런 말을 했다.
“그럼 여기 나 말고 고대마법의 계승자를 죽일 자신이 있는 이가 있나?”
새파란 눈이 웃었다. 그 눈을 보며 새까만 눈은 끝내 폭발해버리고 말았다. 콰앙! 벼락이 떨어졌다. 벼락이 떨어지고, 불이 번쩍거리고, 성기사들이 허공에 날아가다 창고 벽에 부딪쳐 다시 떨어졌다. 콰앙! 벼락이 또 떨어졌다. 루드밀라는 벼락을 맞고 뭔가에 거세게 부딪쳐 던져지다 벽에 부딪쳤다. 강력한 충격이 그녀를 후려쳤다. 내장이 뒤틀리고 뼈가 부서졌다. 그녀는 자신과 똑같은 꼴을 당한 수많은 성기사들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철썩, 하고 살이 부딪치는 요란한 소리에 루드밀라는 다시 눈을 떴다.
“일어나.”
기괴한 소리였다. 어린 아가씨의 목소리였지만 어딘가 소름 끼치는 구석이 있었다. 다시 한번 눈앞에 불이 번쩍거렸다. 고개가 휙 돌아갔다.
“일어나라고.”
눈앞에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퍼져 있었다. 루드밀라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으나 비명이 나오지 않았다. 까만 눈은 황금빛과 뒤섞여 마치 불처럼 타올랐고, 긴 머리카락은 바람에 나부끼듯 무섭게 일렁였다. 일생에 공포를 느낀 적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루드밀라는 제대로 된 공포를 느꼈다. 엄청난 힘이 일렁였다. 소렐 이드리스의 주위에는 성기사들이 제멋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수십 명이 되는 사람들 중, 움직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너는 악한 사람이야.”
어린애가 비난하는 게 아니라 강대한 힘과 권위가 루드밀라를 그렇게 규정했다. 루드밀라는 차마 거스르지도 못할 존재가 그녀의 눈앞에서, 그녀를 비난했다.
“조잡하고 게으른 사술을 걸어 사람의 마음을 탐하고, 제대로 얻어내지도 못할 심성을 지녔어.”
여기에서 혀를 한번 잘못 놀렸다간 그대로 즉사다. 루드밀라는 본능적으로 깨달았지만, 사실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온몸이 너무 아팠다. 묵직한 둔통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녀를 두들겨 패고 있었다.
“그러니까 너는 그대로 살아.”
대마법사가 선언했다. 절대적인 선언이자 예언이었다.
“성기사의 낙인도 찍힌 채로, 그대로 평생 살아.”
이 꼬맹이가 성기사의 낙인까지 알았던가?
“그냥 알아.”
대마법사는 루드밀라를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냥 알게 되었어.”
루드밀라가 세차게 후려쳤던 소렐의 뺨에는 손자국조차 없었다. 모든 게 깨끗하고 멀쩡하기만 했다. 그러나 루드밀라는 멀쩡하지 못했다. 그녀는 벼락을 맞고 멀리 날아갔다가 부딪쳐 추락한 탓에 여기저기 뼈가 부러지고 심한 화상까지 입었다. 참혹한 고통이 몰려드는데도 루드밀라는 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강대한 존재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존재는 루드밀라에게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루드밀라를 지나쳐 창고 한가운데에 엎드려 있는 이를 살살 흔들었다.
“사비나.”
유일하게 아무런 상처도 없는 어린 아가씨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소렐은 그녀의 손을 쓸었다. 묶였던 줄이 다 풀려났다.
“이제 곧 사람이 올 거야.”
소렐은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거대한 황금색 물결이 멀리 뻗어나가는 방향을 응시했다.
“여기엔 너를 해칠 사람이 아무도 없어.”
아무도 없었다.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 소렐은 잠시 고개를 숙여 침묵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고대마법을 강제로 완전히 이해한 대가는 지나치게 컸다.
“그러니까 괜찮을 거야.”
그녀는 사비나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더니 머뭇거렸다.
“그동안 나 때문에 고생 많았어.”
“아니, 아니야!”
갈라진 목소리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그런 거 아니야…….”
사비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소렐은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아.”
알지만, 그뿐이었다.
“가지 마, 소렐. 어딜 가려고 그래?”
사비나가 울먹였다. 소렐은 뒤를 돌아보았다. 엘펜하임 기사단이 왔던 방향이었다. 갈 곳이 있나? 사실 없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건 이 몸뚱이뿐. 소렐은 자신을 내려다보다가 항상 달고 다니는 펜던트에 손을 댔다.
“응? 가지 마…….”
소렐은 사비나의 간절한 애원 때문인지,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다가 멈칫거리고는 손을 뗐다. 그러곤 왼손에 걸렸던 약혼반지와 결혼반지를 모조리 빼냈다.
“라이킨에게…….”
그녀는 입술을 말았다. 그녀가 손을 떼자 영롱한 반지는 허공에 떴다.
“내가 저 여자 몫의 협정서를 가지고 갔다고 전해줘.”
그리고 할 말이 또 있나? 소렐은 열심히 생각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엄청난 충격을 받은 머리는 계속 멍하기만 했다. 그녀를 충만하게 채우는 힘은 지나치게 컸고, 소렐은 이런 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 그리고…….”
소렐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너무 엄청난 짓을 저질러서 미안하다고 하고……. 이혼, 이혼장을 내가 보내겠다고…….”
칼리에르 공비가 사람 여럿을 살해했다. 자신이 한 짓이라는 실감은 없었지만 수십 명의 시체 앞에서 소렐은 할 말이 없었다. 엘펜하임 기사단 수뇌부 대부분이 사망했다. 그러니 라이킨은 그녀와 연을 끊는 게 좋을 거다. 소렐도 자세히는 몰랐지만, 어렴풋이는 알았다.
“소렐, 괜찮아, 괜찮아.”
사비나는 어떻게든 소렐을 붙잡으려 애쓰며 울었다.
“이게 왜 네 잘못이야?”
“아니야. 모든 마법에는 책임이 뒤따라.”
순식간에 혼란스럽던 얼굴이 단호해지고, 말이 아주 분명하게 나왔다. 소렐은 펜던트를 다시 만지작거렸다. 반지 두 개는 허공에 떠 있다. 소렐은 입술을 꼭 깨문 후 돌아섰다.
“잘 있어, 사비나.”
“소렐!”
한 걸음 내디디면, 순식간에 다른 곳이다. 쏴아, 하고 바람이 소렐을 덮쳤다.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이다. 소렐은 펜던트를 꼭 쥐고 주저앉았다. 버려진 창고가 아닌 풀들이 돋아난 초원이었다. 그녀는 한 번 중얼거려보았다.
“……안 믿어.”
아니, 사실은 이미 아는데 믿고 싶지 않을 뿐이다. 협정서를 통해 본 라이킨의 싸늘한 얼굴이 그녀를 매섭게 후려쳤다. 아니, 다 거짓말일 거야. 아니, 잘 모르겠어. 아니, 거짓말이야. 라이킨이 거짓말을 한 거야. 소렐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힘이 그녀를 중심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이제 막 각성한 대마법사는 넋을 잃은 얼굴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갈 곳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