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불꽃놀이 (15)2021.07.14.
소렐 이드리스의 경호를 뚫기는 힘들다. 하지만 사비나 로체는 아니다. 루드밀라는 도서관 정문이 아닌, 뒤쪽에 있는 난방시설을 통해 몰래 들어갔다. 명색이 에설론 백작인데 이런 개구멍이나 다름없는 곳을 이용하다니, 들켰다간 체면을 구길 일이었다. 그녀는 평소 입던 화려한 옷들은 잠시 벗어둔 채, 평범하고 얼굴을 가릴 수 있는 옷을 챙겨 입은 참이다.
“열람실은 위층에 있습니다.”
도서관 안내원이 안내해주는 소리를 뒤로 흘려들으며 루드밀라는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이미 이 도서관 아래에 어제부터 함정을 마련해두었다. 사실 소렐 이드리스가 어제 이곳에 들렀을 때부터 시립도서관은 가장 완벽한 습격 장소가 되어버렸다.
‘토끼는 성실하지.’
아주 성실하게 공부를 하고 싶어 할 뿐이지. 그녀는 소렐이 있는 위층은 한 번 쳐다본 뒤 지하로 내려갔다. 저 위층에는 뱀파이어들이 잔뜩 도사리고 있었다. 루드밀라가 갔다간 손가락 까딱하지 못하고 그대로 물러나야 할 거다.
‘치밀한 계획은 아니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오래 준비하고 아무리 치밀해봤자 저 칼리에르 공을 상대로 하는 모든 계획은 언제나 위험부담이 컸다. 그러니 물러날 곳도 없으면 그냥 실행하는 게 나았다. 루드밀라는 더 끌어봤자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다. 엘펜하임이 가장 좋은 예가 아닌가. 아무리 부딪치고, 또 부딪쳐도 오래 시간을 끄는 만큼 칼리에르 공은 더 강해졌다. 소용이 없었다.
‘빠르게 해야 해.’
시간만 허락해준다면, 정말 빠르게 움직인다면 가능할 거다. 루드밀라는 아직까지 칼리에르 공의 수하들이 들춰보지 않은 도서관 지하로 몸을 감췄다. * 소렐은 몇 분째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학생이 된다는 설렘과 기쁨에 괜히 사비나를 비롯한 친구들과 도서관에 다니기로 했지만, 어쩐지 집중이 안 된다.
‘공주님.’
헤헤,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오늘도 라이킨은 잘 다녀오라고 꼭 안아주고, 키스도 한참 해주었다. 그녀는 괜히 연필로 공책에 낙서를 했다. 라이킨이라고 한 번 적어보고 또 웃었다. 한 번 제대로 싸우고 나서 함께 이런저런 일도 겪다 보니 사이가 더 단단해졌다. 소렐에게 있어서는 첫사랑이고, 첫 순정이라 모든 게 좋기만 했다. 통속소설에서는 첫사랑은 죄다 실패하던데, 그녀는 무척 운이 좋았다.
“소렐.”
사비나가 그녀에게 소곤거리더니, 제 공책에 뭐라 써서 보여주었다. <기사 아클라반의 서정시> 찾으러 갈게. 그 수수께끼 같은 책을 읽어 보려고 하는구나. 소렐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갔다 와, 나랑 같이 봐! 그래. 사비나는 사서에게 가서 물어보고, 또 서가 사이를 드나들었다. 인간과 뱀파이어의 혼혈인 그녀는 인간보다 약간 감이 좋았지만, 뱀파이어만은 못 했다.
“아, 이건 너무 오래된 책이라 저 아래 창고에 있는 것 같은데요.”
“창고요?”
사비나는 사서에게 되물었다.
“네. 이번에 글래스턴 대학 필독도서인가요?”
“아뇨, 그건 아닌데…….”
“제가 적어드릴게요. 이 쪽지를 가지고 지하로 내려가시면 사서 하나가 있을 거예요. 그 사람한테 보여주시면 됩니다.”
사비나는 꽤 이상한 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가방에 끼워진 처음 보는 낯선 책에서 내내 이 <기사 아클라반의 서정시>를 운운하고 있었다. 아니, 그 <기사 아클라반의 서정시>가 없다면 읽기가 어려울 지경인 책이었다. 삼촌이 또 이상한 걸 끼워 넣은 거겠지. 분명하다. 괜히 오기가 생기니, <기사 아클라반의 서정시>를 찾아 가방 안에 있던 책과 비교해가며 읽어볼 생각이었다.
“네, 감사합니다.”
사비나에게 쪽지를 건넨 사서는 사비나가 걸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 안쪽 문을 열고 사서들만의 공간으로 들어갔다. 사서는 안에 서 있던 낯선 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낯선 이 역시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뒤에 나 있던 문으로 사라졌다. 낯선 이는 체격이 단단하고 손에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누가 봐도 검을 잡던 사람이었다.
“……미끼를 물었습니다.”
소식은 사비나가 지하로 내려가는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르게 지하로 전해졌다. 키가 큰 사비나는 차분한 걸음으로 지하로 내려갔다. 엔버네스에 있는 도서관에 비하면 글래스턴에 있는 도서관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작은 규모였고,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글래스턴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은 오히려 대학 도서관을 더 많이 이용했기 때문이다.
“저, 실례합니다.”
사비나는 위층과는 달리 사람이 거의 보이지도 않는 지하로 내려가 사서에게 말을 걸었다. 어두운 지하에는 불이 거의 켜져 있지 않았고, 그래서 그녀는 밟고 있는 바닥에 뭐가 그려져 있는지도 잘 몰랐다.
“네, 무슨 일이지요?”
“이 책을 찾고 있는데요.”
사비나는 쪽지를 내밀었다. 사서는 쪽지를 받아들더니 사비나를 바라보았다.
“아, 그렇군요. 이리 와요.”
이리로, 어서 이리로. 엘펜하임 소속의 마녀가 손을 뻗어 사비나를 안쪽으로, 사람이 전혀 없는 안쪽으로 데리고 갔다. 머리가 핑글핑글 돌기 시작했지만 사비나는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아주 순순히 따라가서, 순순히 사술에 걸렸을 뿐이다. 그녀의 발밑에서 올라온 새빨간 기운이 그녀의 눈에 자리했다.
“자, 가서 소렐 이드리스를 데리고 와.”
루드밀라가 멍하니 선 사비나에게 말했다.
“조용히, 가서 책을 같이 찾아보자고 하면 돼. 귀찮은 놈들은 따라오지 않게 아주 조용히 말해.”
“네.”
사비나의 눈은 생기를 잃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그녀는 다시 돌아서서 오던 길을 되짚어 갔다. 어차피 방치되다시피 한 도서관 지하를 점거한 루드밀라와 엘펜하임 기사단은 이제 제 발로 들어올 토끼를 기다렸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사비나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서 소렐과 함께 앉아 있던 책상으로 갔다.
“소렐.”
나지막하게 부르는 소리에 소렐이 고개를 들었다. 사비나는 고개를 숙여서 소렐에게 소곤거렸다.
“같이 가자.”
어딜? 소렐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친구를 따라갔다. 열람실에서 나오자 소렐이 물었다.
“어딜 가는데?”
“책 찾으러.”
“책 여기에 없대?”
“응. 아래에.”
“아래에? 지하?”
지하에 있단 말야? 그렇다면 사비나가 혼자 가기 무서울 수도 있겠다. 소렐은 납득하곤 빠른 걸음으로 사비나와 함께 아래로 내려갔다. 타박타박 걸어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냉기가 엄습했다. 돌로 지은 도서관은 서늘하기만 했고, 소렐은 어깨를 괜히 움츠렸다. 저 멀리 사서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사비나, 그 책 제목이 뭐였더라?”
“<기사……>.”
“응?”
사비나는 다시 말하려고 했지만 말을 하지 못했다. 소렐은 문득 친구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뭐라 대답을 하려고 애쓰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평범한 하루였다. 평범하게 있을 수 있는 일이 연속되었고, 그 끝에서 소렐은 갑자기 사지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어…….”
그녀는 그대로 암흑 속에서 쓰러졌다. 마지막으로 본 건 그녀를 향해 튀어나오는 수많은 희디흰 손이었다. 불과 삼 분 후, 기절해버린 소렐 이드리스는 도서관에서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사라졌다. *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에게 소렐의 실종소식이 당도한 건 실종된 지 약 이십오 분 후였다. 그것도 아주 빠른 거였지만, 라이킨이 돌아버리기엔 충분했다.
“지하로 사비나 로체 양과 함께 책을 찾으러 가셨다가 올라오지 않으시길래 사람을 보내봤더니, 지하에 있던 담당사서는 기절해 있고 사술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라이킨은 외투를 들고 빠르게 내려갔다.
“에벌린, 집을 부탁하고, 아버지와 샤를렌에게 연락해줘요. 바로.”
“네, 교수님!”
“조슈아를 불러. 뱀파이어 전부 다 풀어. 에설론 백작 그 여자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또 사술이라면…….”
라이킨은 마차에 올라타며 생각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지만 아주 냉철하게 생각해야 했다. 당황하지 말고, 허점을 찔린 만큼 판단을 정확하게 해야 했다.
“엘펜하임일 가능성도 있지.”
루드밀라에게 낙인이 찍힌 이상 그녀는 엘펜하임과 한 몸이다. 게다가 엘펜하임은 성력이 모자라니 여태까지 힘을 잃어가는 마법사들과 마녀들을 긁어모아 세를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가능성은 충분했다.
“예, 알겠습니다.”
그쯤만 말해도 바로 알아듣는 뱀파이어들이 사방팔방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아직까지는 이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 라이킨은 주먹을 꽉 쥐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여깁니다.”
아직까지 결합점이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선 소렐은 기절했거나,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무슨 일이 있으면 분명히 그를 부르라고 했는데. 라이킨은 도서관 지하에 가득한 사술의 흔적을 내려다보았다.
“……이런 게 공주님에게 통할 리가 없는데.”
사술 따위 씩씩한 토끼에겐 따갑지도 않은 정도였다.
“예. 그래서 아무래도 사비나 로체 양이 당한 거 아닌가, 추측 중입니다.”
“로체 양은?”
“함께 사라졌습니다.”
라이킨은 미간을 찌푸렸다.
“왜 데리고 간 거지?”
보통 목표는 소렐일 테고, 사비나는 귀찮은 떨거지라 목표만 이루었으면 두고 갈 텐데 챙겨서 갔다니. 그 또한 이상했다.
“모르겠습니다.”
“로체 가에 연락하고.”
“예.”
라이킨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마스터.”
누군가가 그를 불렀고, 라이킨은 그쪽으로 걸어갔다.
“이런 걸 발견했습니다.”
“이게 뭐지?”
“액체를 증기로 쏘는 기계입니다.”
“……또 엘펜하임이 창고를 뒤졌나.”
무슨 약을 증기로 쏘아 공기 중으로 흩어지게 한 거지?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도록 한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남아 있는 약물을 검사해.”
“예, 마스터.”
“흔적은 찾았나?”
“굉장히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지금 이 근방을 계속 수색 중입니다만…….”
라이킨은 고개를 저었다.
“여태까지 여기에 있을 리가 없잖아.”
“에설론 백작이 머물 것으로 추정되는 곳 역시 수색 중입니다.”
“카메론 셀레스트의 거처도 수색해.”
“예!”
칼리에르 공의 푸른 눈이 살벌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피를 보고 있었는데, 기어이 이렇게 나오시겠다? 엘펜하임이 조금이라도 관여했다는 사실을 확인만 하면, 그때는 증거가 있건 없건 엘펜하임과 전면전을 벌이겠다. 페르난데스 7세가 뭐라 하든 간에 엘펜하임 성기사들의 목을 다 따버리고, 그들의 시체를 부하들에게 하사하며 진격해 들어가 헬레인 마지막 왕이 남긴 예언 앞에 엘펜하임의 멸망을 바치리라. 여태까지 쌓아온 글래스턴 공작의 모든 부귀영화를 전쟁에 다 쏟아부어서라도 반드시 승전할 것이다.
“마스터, 공비전하께서 마법을 사용하신 흔적은 아직 없습니까?”
라이킨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전혀. 오늘은 마법을 전혀 사용하지 않으셨다.”
엘펜하임을 비롯해, 칼리에르 공과 맞서는 모든 존재에게는 무척 유감스럽게도 그는 전쟁이라면 이골이 난 전문가였다. 그는 군대의 온갖 계급을 두루 거쳤고, 그가 직접 지휘했던 전투에서 패배한 적이 없었으며, 허를 찌르는 계책에 능하다고 정평이 나 있었다. 최근에는 전쟁이 잘 벌어지지 않았다지만, 그래도 이 나라에 전쟁이 난다면 페르난데스 7세는 당장 칼리에르 공을 사령관으로 임명할 거다. 뻔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허를 찔렸군.’
라이킨은 안 그래도 싸늘하던 손발이 완전히 차가워져서, 저도 모르게 벌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공주님은 실종된 게 아니다. 납치당했다. *
“일어나.”
이미 짙푸른 어둠이 주변을 잠식하고 있었다. 화다닥 놀라 달아나는 모양새로 라이킨이 알아차리기 전에 소렐이며 사비나를 들고 냅다 도망친 엘펜하임 성기사들과 루드밀라는 간신히 접선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행이다. 한결 마음이 놓인 루드밀라는 소렐의 뺨을 쳤다.
“일어나라고.”
엘펜하임 창고에 굴러다니던 약을 증기로 들이마신 소렐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약이 지나치게 효과가 좋은 건가.
“그렇게 깨워서 어쩌려고?”
카메론 셀레스트의 수하들은 질색을 했다. 그들 역시 마법사는 두려운 것이다.
“마법은 못 부린다면서. 의식은 있어야 한다니까.”
“그래도 웬만하면…….”
루드밀라는 그 와중에도 철썩 소리가 나도록 소렐의 뺨을 또 내려쳤다.
“이대로 끌고 가면 당신들은 마법사를 제어하지 못해. 이빨 다 뽑아놓고, 발톱까지 다 뽑아서 고분고분하게 길들인 다음에 넘겨주겠다는데 나한테 고마워해야지.”
그리고 낙인만 지워지고 난 다음에 네놈들도 다 죽여 버릴 테다. 루드밀라는 사나운 눈을 축 늘어진 토끼에게로 내렸다.
“이제 곧 단장님께서 도착하실 거야.”
“오, 영광이네. 단장이 직접 나오다니.”
루드밀라는 사납게 비꼬며 소렐의 뺨을 한 번 더 때렸다. 간신히, 정말 간신히 새카만 눈이 열렸다.
“정신 차려. 일어나라고. 일어나서 빨리 상황 파악을 하란 말이야.”
그녀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경멸이 가득했다. 설마 너무 멍청해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친절하게 설명까지 해줘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귀찮은 생각에 짜증이 치밀 지경이었다. 루드밀라는 어서 빨리 이 토끼를 치워버리고, 서둘러 낙인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마음이 급했다. 다행히, 그녀에게는 다행히도 소렐 이드리스는 그녀의 얼굴과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낯선 얼굴들을 보고 바로 상황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눈빛이 휙 달라지는 걸 보고 루드밀라는 웃었다.
“인사해. 널 데리고 엘펜하임으로 갈 사람들이니.”
다 망해버린 헬레인 왕조의 마지막 공주를 공주랍시고 대우해주는 것도 꼴같잖았다. 네 망해버린 집안 상황이나 냉정하게 파악하라고 집안을 멸망시킨 이들을 곧장 들이대는 것도 꽤나 괜찮은 충격요법일 것이다.
“자, 정신을 차렸으니 됐지. 이젠 네 주제를 파악할 때가 됐어.”
루드밀라는 소렐에게 생각이란 걸 정리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사실 루드밀라도 그럴 시간이 없었다. 칼리에르 공이, 제 토끼를 혼자 독점하려는 그 욕심 사나운 뱀파이어가 들이닥치기 전에 어서 엘펜하임과의 거래를 끝내야 했다. 그녀는 품 안에서 차곡차곡 접어 온 큰 종이 하나를 펼쳤다.
“너, 이게 뭔지 아니?”
뱀파이어들이 자신의 피를 직접 내어 서명한 협정서가 소렐 이드리스의 눈앞에 내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