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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불꽃놀이 (11) (96/181)

96. 불꽃놀이 (11)2021.06.30.

차가운 존재들과 차가운 공기를 공유하다가 돌아왔다. 밤길을 지나 돌아온 라이킨의 표정은 냉랭했다. 그는 다시 돌아오는 내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말할 것인가, 말 것인가.

16606121103023.jpg“……왔어?”

샤를렌이 기다리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이며, 품 안에 있던 협정서를 꺼내 샤를렌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협정서를 받아다 날카로운 변호사의 눈으로 하나하나 곰곰이 뜯어보았다.

16606121103023.jpg“……딱히…….”

16606121103034.jpg“문제가 없겠지? 당연하겠지.”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이며 얄팍한 외투를 벗었다.

16606121103023.jpg“응. 내용이 극단적이긴 하지만, 문제는 없어. 협정서는 이대로도 충분히 훌륭한 규약의 가치를 가지고 있어.”

샤를렌은 협정서에 잉크로 쓰인 새카만 피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험악하고 무서운 내용이다. 앨리스 루이즈 칼리에르다운 내용이기도 했다.

16606121103023.jpg“이거 나도 서명해야 해?”

16606121103034.jpg“하지 마. 내가 했으면 됐어.”

라이킨은 혼자 서명하면서 충분히 괴로웠다. 아내를, 사랑스럽고 아직 한참 어린 아내를 죽이겠다는 내용에 서명하면서 멀쩡할 수가 없었다.

16606121103034.jpg“해서 좋을 것도 없고.”

오빠는 언제나 혼자서 다 짊어지고 가려고 한다. 샤를렌이 아주 어릴 때부터 오빠는 부모 노릇까지 해가면서 그녀를 책임지려고 했다. 그 습관은 여전하다.

16606121103023.jpg“공주님한테는 말해줄 거야?”

라이킨은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16606121103023.jpg“이 협정이 이대로 묻힐 수도 있어. 그렇지만 공주님의 일이니, 공주님도 알아야 하잖아.”

16606121103034.jpg“알고 있어.”

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16606121103034.jpg‘협정서라는 게 있는데요, 공주님. 뭐 이런 식으로 시작해야 하나?’

소렐 이드리스의 일이다. 라이킨은 잘 알고 있었다.

16606121106461.jpg“이제 왔니?”

16606121103034.jpg“아버지.”

로렌스가 위층에서 내려왔다. 라이킨이 집을 비우면, 당연히 로렌스와 샤를렌이 이 집을 지켰다. 그건 소렐이 어디 있든 항상 같았다. 에벌린이 문단속을 다 해놓았고, 라이킨을 따라가지 않은 뱀파이어들이 물 샐 틈 없이 경호했다.

16606121106461.jpg“어땠니?”

16606121103034.jpg“뭐, 아시다시피…….”

라이킨은 셔츠 단추를 풀면서 앉았다.

16606121103034.jpg“만나봤자 달갑지 않은 얼굴들에…….”

샤를렌은 아버지에게 협정서를 넘겼고, 로렌스는 안경을 끼며 그것을 받아 읽기 시작했다.

16606121106461.jpg“예전과 다를 바가 없구나.”

16606121103034.jpg“아버지는 서명하지 마세요. 제가 했으니 됐습니다.”

라이킨이 이 집 대표로 서명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걸 다른 뱀파이어도 다 알 것이다. 라이킨은 협정서를 꼭 더러운 쓰레기를 바라보듯 바라보았다.

16606121106461.jpg“그래……. 네가 드디어 명부를 손에 넣었구나.”

16606121103034.jpg“예. 오늘 가서 본 얼굴들을 똑똑히 다 기억했습니다.”

16606121106461.jpg“전부 다 죽일 생각이니? 숫자가 꽤 되는걸.”

로렌스는 아주 한가롭게 물었다.

16606121103034.jpg“일주일쯤 후에 움직일 생각입니다. 잔챙이지만 제일 시끄러운 잔챙이부터 차근차근.”

일단 그가 자리에 앉았을 때 어쭙잖게 떠들어댔던 놈들은 전부 다 죽일 거다.

16606121106461.jpg“피바람이 몰아치겠구나. 가끔은 필요한 법이지.”

누군가는 눈치챌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교묘한 수법으로 죽은 이를 보며 칼리에르 공을 전혀 떠올리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두가 입을 다물게 되었을 때 찾아오는 그 미묘한 침묵과, 마디마다 서린 공포는 편리하다. 아무도 그에게 차마 ‘당신이 죽였냐’고 물을 수도 없고, 또 소렐 이드리스와 관련한 일은 다시는 입에 담지도 못한다. 그래서 뱀파이어들은 영원히 침묵을 지키며 공포에 지배된다. 라이킨은 여태까지 그런 식으로 모든 것을 다스려왔다.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16606121103034.jpg“예. 가끔은 필요합니다.”

가장 편리하고, 또 단순한 방법이자, ‘그 여자’가 가르친 방법이기도 했다. 따뜻하고 다정한 공주님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괴물이 바로 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이킨은 소렐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을 작정이었다. 개들이 이를 드러내며 몰려올 때, 그때 한 번이면 충분했다. 다시는 소렐이 울면서 그를 지키는 장면 따위 보고 싶지 않았다.

16606121103023.jpg“얼른 말하라니까.”

샤를렌이 다시 그를 찔렀다.

16606121103034.jpg“말……. 그래, 말해야지.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라이킨은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16606121106461.jpg“언젠간 말은 해야겠지만, 글쎄다.”

로렌스는 위층을 올려다보았다.

16606121106461.jpg“말도 들을 상태가 되어야 할 수 있는 거 아니겠니?”

라이킨은 순식간에 계단 위를 달려 올라갔다. 그는 하녀들도 걸음걸이마저 조심하는 어두운 복도를 지나 소렐을 고이고이 모셔둔 방문 앞에 섰다.

16606121103034.jpg“공주님?”

예민한 뱀파이어의 귀는 쌕쌕 숨 쉬는 소리까지 잡아냈다. 하지만 평소보다 작았다.

16606121103034.jpg“공주님, 접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러나 안쪽에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모든 게 불길했다. 라이킨은 지체하지 않고 바로 방문을 열었다. 그의 눈은 불이 꺼진 방 안을 빠르게 훑었다. 침대 위의 이불은 푹 꺼져 있었다. 물론 착한 아이는 잘 시간이다. 하지만 자야 할 사람은 침대 위에 없었다.

16606121103034.jpg“……공주님?”

그는 거의 속삭이듯 불렀다. 숨소리가 들리는 곳은 분명히 침대다. 라이킨은 굳은 얼굴로 침대로 다가가 이불을 들췄다. 그러곤 가만히 보다가 얼굴을 감싸고 소리 없이 주저앉았다. 흩어진 잠옷과 붕대 위로 작은 토끼가 엎드려 있었다.

16606121111979.jpg“제임스 교수님, 거기서 뭐…….”

20분마다 소렐을 살피러 오는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이 들어오다 말고 침대 위에 있는 토끼를 발견했다. 그녀는 빠르게 다가와 토끼에게 귀를 대어보고, 라이킨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16606121111979.jpg“괜찮아요, 괜찮아. 부상이 심해서 토끼 모습으로 변해 앓는 것뿐이에요. 가끔 열이 높게 올라 정신을 못 차릴 때 종종 이럴 수도 있어요. 아주 심각한 거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16606121103034.jpg“……정말 괜찮은 겁니까?”

16606121111979.jpg“계속 보고 있었는데 지금 막 토끼로 변한 거예요. 열이 좀 있네요. 교수님이 좀 안아드리는 게 좋겠어요.”

그래도 되나? 라이킨은 숨소리를 크게 내고 있는 어린 토끼를 불안한 듯이 쳐다보다 손을 뻗었다. 눈을 뜨지도 못하는 토끼는 움찔거리다가 내밀어진 손에 머리를 얹었다. 그러곤 또 숨을 크게 내쉰다. 작은 존재가 몹시 따뜻했다. 에벌린이 분주하게 뭔가를 준비하는 사이, 라이킨은 힘들어하는 소렐을 들어 품에 조심스럽게 안았다. 그의 커다랗고 마디 굵은 손에 힘이라도 잘못 줬다간 이 작은 토끼를 어떻게 할까 봐 힘도 못 주겠다.

16606121103034.jpg“뭐라도 감싸야 하지 않겠습니까?”

에벌린은 손수건을 여러 개 겹쳐 내밀었고, 라이킨은 황급히 소렐을 그것으로 싸안았다.

16606121111979.jpg“많이 지치셨나 봐요. 아주 과로해서 힘이 들면 몸이 이랬다저랬다 바뀌는데, 유독 힘드셨나 보네.”

토끼가 개에게 물렸으니 오죽할까. 라이킨은 소렐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토끼가 분홍색 코를 찡긋거리다가 그의 품에 아예 얼굴을 박고 기댔다.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협정서 같은 살벌한 말을 어떻게 더 할까. 소렐은 그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라이킨은 그저 뚫어져라 자그마한 토끼를 내려다보았다.

16606121103034.jpg‘이렇게 작은데.’

너무 작아서 한 손으로도 달랑 들어 올릴 수 있을 정도다. 그는 굳어 버린 석상처럼 그저 가만히 작은 토끼를 품고 앉았다. 혹시 그의 낮은 체온이 소렐을 춥게 할까 봐, 겹겹이 싸서 소중히 안았다. 손에 힘을 주지도, 그렇다고 힘을 빼지도 못한 채 소중하고 연약한 것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기만 했다.

16606121103034.jpg‘공주님.’

이유도 없이 가만 불러보기만 해도 좋은 사람이 생길 줄은 몰랐다.

16606121103034.jpg‘나는 당신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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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킨은 가만히 생각하다 토끼의 작은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잃고 싶지 않았다. 그런 끔찍한 생각은 하기만 해도 가슴이 지끈거린다. 명치가 쑤시다가, 끝내 내려앉아 그를 괴롭게 했다. 이렇게 아린 감정이 어떻게 사랑일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아프고 또 아프다.

16606121103034.jpg‘잃고 싶지 않아요…….’

그는 이제 자신의 권태가 두려웠다. 아니, 사실은 소중한 것들을 잃을까 봐 두려워서 항상 적게 가지려고 했고, 기대를 가지지 않으려고 했다. 어떠한 기대도 없으니 쉽게 질리고 싫증 날 뿐이다. 소렐이 그것마저도 다 뛰어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 중요한 건 그저 그녀를 소중히 품고, 안전하게 지키고, 그녀가 건강하게 살면서 행복하기만 하면 되는 건데…….

16606121103034.jpg‘너무 어려운데.’

소렐을 노리는 것들의 목을 다 따버리고, 시신에 불을 지른다 해도 그녀를 지키는 게 참 어렵다. 소렐은 이 고비를 잘 이겨내고, 개에게 물린 상처도 별 거 아니니까 금방 일어날 거다. 분명히 그럴 거다. 라이킨은 그럴 거라고 믿어야만 했다. 다 이기고 일어나서 넓은 세상을 보고, 하고 싶은 공부도 마음껏 하고, 그러다…….

16606121103034.jpg‘그러다가 이 남편이 얼마나 눈을 가려두고 있는지는 눈치채시지 못했으면 좋겠는데.’

라이킨은 천장을 쳐다보며 부질없는 소원을 빌었다. 고대마법을 철저하게 배우지 않아도, 소렐은 스스로 이해하고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한 번 성공하면 그다음은 더 큰 마법을 쓸 수 있다. 고대마법이 이제 슬슬 깨어나고 있는 마당이라 그저 자연스럽게 하나씩 저도 모르는 새 사용하도록 둬야지, 억지로 연습한다 해서 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소렐은 대마법사가 되고 있었다. 그렇게 똑똑한데, 남편이 눈앞에서 내숭을 떨고 있다는 걸 과연 모를까? 라이킨은 협정서 이야기도 소렐에게 말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딴 피비린내 나고 더러운 이야기를, 이렇게 지친 아기토끼가 반드시 들어야 할까?

16606121115201.jpg“……라…….”

쌕쌕대는 숨소리가 조금 바뀌었다.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던 토끼의 눈이 조금 열렸다. 빨간 세모 입도 살짝 벌어졌다.

16606121103034.jpg“예, 공주님.”

그는 낮게 속삭이며 부드러운 토끼의 이마에 또 입을 맞추었다. 소렐은 그러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할 존재였다. 그냥 이대로 품속에 항상 넣고 다니고 싶었다. 그러면 차라리 안전할까.

16606121103034.jpg“제가 왔습니다.”

토끼는 눈을 느리게 깜빡이면서도 그를 똑바로 보려고 애썼다.

16606121103034.jpg“물을 좀 드실까요?”

그녀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라이킨은 미세한 토끼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읽었다.

16606121103034.jpg“그럼 좀 더 주무세요. 아직 날이 밝지 않았습니다.”

16606121115201.jpg“……나 토끼…….”

16606121103034.jpg“예. 제가 토끼 공주님과 결혼했지요.”

그는 소렐이 무엇을 마음에 걸려하는지 알고 있었다.

16606121103034.jpg“주무세요, 공주님. 다 괜찮습니다.”

조곤조곤,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16606121103034.jpg“염려하실 일은 하나도 없어요. 내일도 화창한 날씨일 거고, 날이 밝으면 제가 공주님을 안고 잠시 산책을 나가도 좋겠지요.”

혼자서 이렇게 오래 중얼거려본 적도 없었다. 라이킨은 소렐을 내려다보며 그녀의 졸음 가득한 눈이 어서 감기길 기다렸다.

16606121103034.jpg“곧 나으시면, 이제 글래스턴으로 돌아가서 새 학기를 저와 함께 준비하시지요. 즐겁고…….”

그는 뱀파이어들을 하나하나 살해하느라 정신이 없을 거다.

16606121103034.jpg“모든 게 다 새롭고…….”

뱀파이어들이 모르겠나. 눈치채고 반발하는 이도 있을 거다. 라이킨은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에설론 백작과, 그를 끝도 없이 견제하던 슈토넨 후작의 눈을 떠올렸다.

16606121103034.jpg“공부할 거리가 아주 많겠지요. 저와 함께…….”

눈처럼 새하얗고 그저 포근하고 따뜻하기만 해서, 짙은 죄와는 거리가 먼 공주님에겐 어울리지 않는 남편이다. 알고 있었다. 라이킨은 잠시 눈에 힘을 주었다.

16606121103034.jpg“저와 함께 준비하시면 됩니다.”

모든 순간을 그와 함께하길. 협정서에 서명한 뱀파이어들을 모조리 죽이는 길을 선택한 건, 편리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는 소렐을 위협하는 모든 것을 없애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그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아주 오래 전부터. 어쩌면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크고 강한 존재였고, 마땅히 작고 어린 것을 지켜주려다가, 그러다가 이렇게 되어버렸다. 시작을 더듬어봤자 그게 무슨 소용인가. 라이킨은 지금 소렐이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그의 품 안에서 안락하고 행복하게 있길 바라는 파렴치한 남자가 되어버렸는데. 그랬다. 그는 소렐에게 오늘 벌어진 일을 말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 험악하고 무서운 일들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16606121103034.jpg‘나중에 말씀드려야지.’

그래, 나중에. 언젠가 소렐이 그런 일들을 다 알고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날이 올 때. 지금은 아니다. 아직은 소렐이 너무 어리고 연약했다. 아직 너무 아팠다. * 소렐은 고민했다. 한참 고민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그녀가 처한 상황이란 게 고민덩어리였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가운을 내려다보았다. 일단 이건 그녀의 가운이 아니다. 무척 크고, 무척 길고, 그녀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새카만 색이다. 고로 이건 그녀를 안고 누워 있는 남자의 가운이다. 일단 가운 한 장만 걸치고 있다는 것도 난감하지만, 그녀를 지금 안고 있는 사람도 문제였다.

16606121115201.jpg‘어, 어떡하지……?’

아무래도 토끼로 변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다시 원래 몸으로 돌아온 게 분명했다. 소렐이 입고 있던 잠옷은 잘 개어져서 침대 옆 탁자에 놓여 있었으니까. 소렐은 조금 울적해졌다.

16606121115201.jpg‘갑자기 토끼로 변하는 건 딱히 좋은 게 아닌데…….’

그녀는 익숙하지만, 라이킨은 놀라거나 거부감이 들 수도 있는 문제다.

16606121103034.jpg‘괜찮습니다.’

  괜찮다고는 했는데 그게 간신히 참으면서 괜찮다고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지금 라이킨이 그녀의 신체 대부분을 거의 몸 위에 올려놓다시피 하고 있다는 거다. 일단은 그녀의 부상을 입은 다리 하나와, 팔이 그의 몸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라이킨의 팔은 그녀의 몸을 완전히 감고 있었다. 소렐은 고개를 살짝 들었다. 오늘도 지나치게 잘생긴 라이킨의 얼굴 옆에는 그가 밤새 살핀 게 분명한 서류들이 흩어져 있었다.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 힐끗 보니 글래스턴을 비롯한 영지에 관련된 서류들이다. 전부 그의 서명이 필요했고, 라이킨은 아주 성실하게 서명을 남겼다. 소렐은 라이킨을 힐끔 보다가 꼬물꼬물 몸을 좀 더 위로 올려 서류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정확하게는 그가 남긴 서명을 보았다. 그녀를 안고 있는 남자는 생긴 것처럼 서명했다. 모든 획은 유려하면서도 힘이 있었고, 대충 흘려 쓴 것마저 반듯했다. 소렐은 자신의 동글동글하면서 또박또박한 필체를 생각해보다가 이 화려하고도 힘 있는 필체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입술이 삐죽 나오고 말았다.

16606121115201.jpg‘치.’

애초에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라이킨과, 그녀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잘난 남자이자 가장 좋아하는 남자와 어떻게든 좀 비슷하게라도 어울리는 부분이 있었으면 좋겠다. 소렐은 서류에서 눈을 떼고 깎아놓은 듯이 수려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침부터 이렇게 잘생긴 남자를 볼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사치였다. 하지만 이젠 슬쩍 일어나야 했다.

16606121115201.jpg‘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잖아!’

얼굴도 엉망일 거고! 무엇보다 라이킨은 분명히 그녀를 보살펴주러 온 거겠지만, 그녀는 혼자 통속소설에서 조금 맛만 본 야릇한 장면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16606121115201.jpg‘……정신 차려야지.’

정신을. 그래. 정신을 차리자. 소렐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철저히 외면하며 아주 조심스럽게 그에게 닿은 면적들을 줄여나갔다. 그가 밤새 그녀를 돌보아줬을 텐데, 자는 걸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지금은 몹시 부끄러운 차림이라, 어서 옷을 제대로 입어야 했다. 옷은 분명히 에벌린이 갈아입혀 줬을 거다. 암, 분명히 그럴 거다. 소렐은 조심스럽게 일어나려다가 라이킨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16606121115201.jpg‘딱 한 번만.’

응, 그래. 오늘처럼 같은 침대에서 일어나는 부끄럽지만 좋은 일은 드무니까. 무척 솔직한 소렐은 라이킨을 보다가 그의 입술에 소리 없이 입을 맞췄다. 그러곤 혼자 헤헤 웃으며 그에게서 완전히 떨어지려고 했다.

16606121115201.jpg“……응?”

이상하다. 분명히 일어났는데, 왜 몸이 뒤로 가더니 다시 누웠을까? 이상하다. 왜 자고 있던 남자가 눈을 뜨고 있을까?

16606121103034.jpg“하필 아침인데.”

라이킨은 탁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슬쩍 눈만 뜬 모습이 낯을 붉힐 만큼 은밀해 보였다.

16606121103034.jpg“저를 곤란하게 만드시고 그냥 가시는 건 너무 잔인하시지 않습니까.”

곤란하다니? 소렐은 지금 자신보다 더 곤란한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허리를 감은 팔은 강철보다 더 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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