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불꽃놀이 (10)2021.06.26.
뱀파이어들이 모두 모인 자리는 라이킨이 예상했듯 몹시 시끄러웠다. 그들은 그동안 서안으로 그에게 보내며 압박해대던 말들을 고스란히 면전에 대고 쏟아내고 있었다. 라이킨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그 말을 다 듣고만 있었다. 이들은 그의 침묵을 협정서에 서명하지 않겠다는 신호로 받아들인 모양인지 더 격렬하게 그를 압박했다. 그런다고 해서 압박이 될 사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걸 어디까지 들어줘야 하나.’
라이킨은 지루했다. 집으로 돌아가서 소렐의 상처가 얼마나 아물었는지 보고, 소렐이 무슨 책을 읽었는지, 식사는 잘했는지 듣고, 아무는 대로 글래스턴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말이다. 그랬다. 그는 무척 바쁜 사람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그는 지금 압박에 못 이겨 이 자리에 나온 사람으로 보였고, 어쨌든 잠시 동안은 개들이 짖어대는 소리를 들어줘야 했다.
“이건 서명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 자리는 논의를 하려고 모인 자리가 아니라, 서명을 하려고 모인 자리인가 보다. 젊은 뱀파이어들은 쓸데없는 사명감인지, 아니면 순혈이라는 선민의식인지에 사로잡혀 제 팔뚝에 상처를 냈다. 그렇다. 서명은 자신의 피를 잉크 삼아 이루어진다.
‘그놈의 피.’
앨리스 루이즈 칼리에르가 만든 협정서답다. 라이킨은 진절머리가 났다.
“마법사가 뱀파이어에게 위협이 되었는데 어떻게 안 할 수가 있습니까?”
“더구나 헬레인 토끼 아닙니까. 위험합니다.”
“뱀파이어에게 해가 된다면 마땅히 죽여야지요.”
작은 그릇이 찰 만큼 피를 빼내고, 사람 숫자대로 준비된 협정서에 연달아 서명한다. 서른 명이 서명했으면 협정서는 서른 장이 나온다. 그런 뒤 각기 한 장씩 가지는 거다. 누군가가 배신했을 때, 그를 제외한 모두가 증거로 가지고 있기 위함이다. 앨리스 루이즈 칼리에르는 항상 모두를 의심했다.
‘참 원시적이야. 새로 서명하는 사람이 늘어날 때마다 다 같이 서명을 하면서 친목과 우애를 다지자니.’
라이킨은 조용히 듣기만 하면서 생각했다. 딱히 다질 우애나 친목도 없으면서, 우스운 노릇이다. 결국 중요한 건 각자 가문의 안위다. 그딴 것도 관심이 없었던 라이킨은 어머니를 죽이고부터는 대학에 틀어박혀 연구나 하고, 논문이나 써왔다. 물론 적당히 정치에도 관여하고, 거물들을 암살하는 일에도 관여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가 건재하고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함이었다. 적당히 만만하지 않다는 걸 보여줘야지 귀찮게 굴지 않는다.
“칼리에르 공께서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의 앞에서 위협적으로 협정서를 돌려가며 서명하고, 뱀파이어들은 날카롭고 고풍스러운 칼로 망설임 없이 새카만 피를 내어 수십 장의 협정서에 서명했다. 라이킨에게 협박을 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열심히들 서명하고 계신데.”
라이킨은 뚝뚝 떨어지는 누군가의 피를 물끄러미 보며 입을 열었다. 그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놈들이 무슨 말을 했고, 또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었다.
“다들 고대마법의 계승자를 죽일 자신은 있어서 서명하는 겁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비아냥대는 것도 아니고, 농담을 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진지하게 물어보는 겁니다. 다들 그럴 방안이 있습니까?”
다들 자신이 있어서 이리도 성실하게 서명하는 건가? 그의 질문에 슈토넨 후작이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이 정도 되는 숫자에 막는 이만 없다고 한다면, 토끼 목은 손쉽게 비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런가.”
라이킨의 표정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슈토넨 후작 아서 모드릭 헴피온, 오블리앙 공과 나이가 엇비슷한 이는 차분하게 앉아 있는 젊은 칼리에르 공을 바라보았다. 그의 조각 같은 얼굴에는 한 점의 동요도, 어떠한 분노도 없었다. 칼리에르 공이 지금 현실적인 계산을 따지는 건가? 아무도 그의 속을 알 수 없었다.
“칼리에르 공. 아직까지도 이 사안의 심각성을 모르는가?”
슈토넨 후작의 말에 라이킨이 입술만 움직였다.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자네는 여태까지 협정서에 서명을 하는 것에 반대를 했잖나.”
“계속 반대할 거였으면 이 자리에 오지 않았겠지.”
뱀파이어들은 그 말에 입을 다문 채 모두가 서명한 협정서 더미를 라이킨 앞에 밀어놓았다.
“변경백. 이번 일로 가장 피해를 많이 본 사람은 나라는 걸 좀 알아줬으면 좋겠어.”
슈토넨 후작의 옛 작위를 고리타분하게 부르며 라이킨은 씩 웃었다. 그제야 그의 차가운 얼굴 위에 표정이란 게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 갑자기 태세를 전환했다는 걸 우리더러 믿으라는 건가?”
“변경백 입맛을 맞춰주기가 참 어렵군. 그래서 서명하라는 건가, 말라는 건가?”
결국 모두가 칼리에르 공이 협정서에 서명해주길 바랐다. 그래서 그가 직접 토끼를 사냥해주길 바랐다. 혹은, 이 자리에 있는 뱀파이어들이 전부 다 토끼사냥에 나섰을 때 그가 적어도 막지만은 않길 바랐다. 칼리에르 공과 맞서는 것만큼 수명을 단축시키는 짓도 없었다.
“아내라고 끼고 돌던 사람이 태세 전환이 이렇게 빠르니 믿을 수가 있어야지.”
라이킨은 슈토넨 후작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내내 웃기만 했다. 또르르륵, 누군가의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릇에 새로 담겨서, 서명되고 있었다.
“결혼은 실리지. 나도 엄연히 말해 정략혼이고, 변경백도 마찬가지 아닌가?”
“세상에 다 망한 왕실의 토끼와 정략혼을 하는 뱀파이어가 어디 있나?”
라이킨은 손을 뻗어 그의 앞에 놓인 은제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그의 뒤에 있던 뱀파이어 하나가 그에게 피를 받을 그릇을 내밀었다.
“여기 있지. 이드리스의 핏줄이면 자네라도 아들을 들이밀었을 거 아닌가.”
칼리에르 공은 철저히 주판알을 튕기고, 계산에 능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는 별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쉽게 팔뚝을 그었다. 금세 새카만 피가 그릇 안으로 쏟아졌다.
“다만, 내가 결혼으로 얻을 이익이 지금 좀 위기인 것 같아서.”
“꽤나 그 토끼를 위하는 것 같던데.”
“스무 살짜리 비위 맞추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수틀리면 당장 이런 일이 발생하잖나.”
그러니 적당히 맞춰주고, 마법을 쓰지 않도록 안정시킨다는 투였다. 무미건조한 말투는 딱히 어떠한 감상도 없게 들렸다.
“그럼 고대마법 때문에 결혼했다는 건가?”
라이킨은 미간을 찌푸리며 슈토넨 후작을 쳐다보았다.
“그럼 그거 말고 망한 왕가의 후손과 내가 결혼할 이유가 뭐가 있지?”
네 머리가 그렇게 안 돌아가냐는 표정이었다. 여태까지 입을 다물고 아무런 티를 내지 않고 있던 루드밀라는 조금, 아주 조금 만족했다. 인정하긴 싫지만 그녀에겐 듣기 좋은 소리였다.
“나는 여기저기 다 보험을 만들어놓는 것뿐이야. 고대마법은 내 것이지만, 딱히 제어할 수 없다면 없애야지. 그걸 이번에 제대로 실감했고.”
눈치를 보고 있던 젊은 뱀파이어 하나가 라이킨에게 물었다.
“많이 다치셨습니까?”
“하도 물어 뜯겨서 다리에 살이 남아나질 않았어.”
라이킨은 진심으로 짜증스러워 보였다. 솔직히 갑작스럽게 서명을 하겠다고 나서는 게 영 찜찜하긴 했지만, 서명하라고 압박한 사람들이 이제 와서 왜 서명하냐고 따지는 것도 웃기다. 라이킨을 위해 이미 준비되었던 서명서가 가득 쌓였다.
“바깥에 보여주지도 않는 정략결혼 상대라니, 좀 재미있군, 칼리에르 공.”
슈토넨 후작은 연신 비아냥거렸다. 어쨌든 라이킨이 그의 말에 동의하여 서명을 하러 온 모양새이니, 그가 의기양양할 수밖에 없었다.
“고대마법은 내 거야, 변경백.”
새파란 눈이 후작을 쳐다보았다. 저 지긋지긋한 아집과 비대한 자아에서 악취가 풍긴다. 당장이라도 물어 뜯어버리고 사지를 잘라내고 싶었지만, 소렐을 위해서라면 이딴 악취쯤은 참을 수 있었다. 그는 입을 다물고 있는 비겁한 놈들과 그가 고대마법을 욕심내었다고 분개하는 단순하고 무식한 놈들, 그리고 소렐을 단순한 토끼이자 고대마법을 담을 그릇 취급하는 놈들을 똑똑히 기억해두었다. 그 누구도 그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그게 내 친애하는 동족들에게.”
그는 딱히 친애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이곳에 있는 모든 뱀파이어들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대부분 작위도 있고, 수천 년은 기본으로 산 이들이며, 또 그만큼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명문가 태생이다. 지루하게도 말이다.
“위협이 된다면, 그건 안 될 말이지.”
라이킨은 기계적으로 계속해서 서명했다. 뱀파이어의 피로 남긴 서명은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의미’. 그뿐이다.
“토끼를 키우는 재미가 있긴 하지만, 기르는 것에 위협당하면 도살해야 하는 법 아닌가.”
도살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슈토넨 후작은 몸을 조금 뒤로 편하게 밀었다. 공격적으로 상반신을 기울여가며 라이킨에게 공격을 할 이유가 조금씩 사라졌기 때문이다. 라이킨은 시종일관 냉혹한 포식자의 입장으로 말했고, 한 번도 흔들림이 없었다. 결국 칼리에르의 피는 어쩔 수 없었다.
“기르는 기쁨이 꽤 큰 줄 알았는데.”
슈토넨 후작이 한 번 더 말했다.
“재미있지.”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아. 변경백도 한번 키워봐.”
“고대마법을?”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건 내 거고.”
라이킨은 마치 사물을 말하듯 소렐 이드리스를 지칭했다.
“애완동물을 뭐라도 들이라고. 적당히 예뻐해줄 만한 걸로. 뭐, 나처럼 효율 따지다가 도살하는 건 좀 슬프니까.”
그의 유려한 필체가 반복되며 서명을 했다. 뱀파이어들을 위협할 시, 모든 뱀파이어가 이 협정에 의거하여 고대마법의 계승자를 처단한다. 전부 다 개소리다. 이딴 문장을 쓴 손목을 다 잘라버리고, 저 욕심 사나운 눈깔들을 다 파내야지.
“주인을 물지 않을 만한 걸로. 애정은 적당히 주고.”
‘애완’이라는 단어가 알맞게. 칼리에르 공은 가차 없이 냉정하게 말했다. 그 모습이 꼭 이백여 년 전까지 뱀파이어들을 휘어잡고 있던 전대 칼리에르 공과 똑같았다.
“그리고 감당할 만한 걸로 키워야지.”
라이킨은 서명을 하다 말고 고개를 들어 슈토넨 후작이며, 주변에 있는 뱀파이어들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주인이 죽일 수도 없는 애완동물은 넘보지 말고.”
“꼭 일이 터졌을 때 협정서 이행을 본인이 직접 하겠다는 걸로 들리는군.”
“그럼 여기 나 말고 고대마법의 계승자를 죽일 자신이 있는 이가 있나?”
“여기 있는 모두가 다 출중한 능력이 있는 뱀파이어들로서, 서로 힘을 합치겠다고 약속한 이들 아닌가.”
개떼들이 떼로 덤비시겠다? 라이킨의 입가에 심술궂은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거 다행이군. 나는 나한테 전부 미룰까 봐 걱정했더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어.”
지레 찔린 이들의 시선이 흩어져서 방황한다. 라이킨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피를 잉크로 삼아, 서른 장 가까이 되는 협정서에 서명했다. 이것은 그의 암살명부다. 그는 서명한 대가로 얻은 이 협정서에 이름이 오른 이들을 전부 천천히 죽일 것이다.
“그러면, 언제 다시 보게 되는 겁니까?”
비교적 젊은 뱀파이어 하나가 물었다. 그렇다 해도 라이킨 또래였다.
“다시 볼 날이 없어야지요.”
에설론 백작 루드밀라가 입을 열었다. 이 협정서가 발동될 일이 없길 바란다는, 꽤나 자비로운 덕담이었다. 하지만 슈토넨 후작 아서 모드릭 헴피온은 동의하지 않는 듯, 침묵을 지킨 채 자리에서 일어나는 칼리에르 공을 바라보았다. 칼리에르 공은 제멋대로 말하고, 분위기에 따르지 않고 멋대로 자리를 떠나지만 그는 그래도 괜찮은 존재였다. 모든 사람이 그를 주목하고, 모든 사람이 그의 기세에 눌려 설설 기었다.
“하지만 협정서를 이행하려면…….”
라이킨의 눈치를 보며 열심히 말을 잇던 젊은 뱀파이어의 말은 완성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라이킨은 그 말을 들어주지도 않고 휙 나가버렸다. 다른 이들이 말하는 건 철저히 무시하는 오만한 태도였으나, 그에겐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저래도 되는 겁니까?”
기가 막힌 뱀파이어가 가장 연장자인 슈토넨 후작을 쳐다보며 물었다.
“상관없네. 이 협정서를 이행하는 때가 온다면, 아마 칼리에르 공의 집안일이기도 할 테니 공이 일단은 알아서 할 일이지.”
슈토넨 후작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양 손 끝을 마주했다.
“일단은 말이야.”
칼리에르 공이 갑자기 서명을 했다니 영 이상하긴 한데, 그걸 수상하다는 이유만으로 따져 물을 수가 없으니 이거 영 찜찜하다. 표면적으로는 후작이 바라는 대로 다 되었다.
‘그깟 개 몇 마리 풀었다고 일이 이렇게 되다니. 진작 내가 풀어버릴 걸 그랬어.’
그러면서도 슈토넨 후작은 갑자기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고작 개 몇 마리에 고대마법이 그토록 강하게 반응했다면, 그보다 더한 것이 달려들면 마법이 어떻게 반응할까? 루드밀라는 그런 생각을 하는 슈토넨 후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겁쟁이.’
비겁하기는. 그녀는 기가 찼다. 다들 설마 이렇게 서명 좀 한 걸로 다 됐다고 생각하는 거야? 모두가 한시름 덜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보 아냐? 어떻게 이딴 종이 쪼가리만으로 만족할 수가 있어? 아, 하긴 다 이럴 줄 알았다. 그들은 이쯤에서 만족할 뿐이고, 루드밀라 혼자서 만족하지 못할 뿐이다. 사실 그녀도 협정서에는 딱히 관심 없었다. 이건 그저 발판일 뿐이다. *
“이건 그저 발판에 불과해.”
카메론 셀레스트는 뱀파이어들의 협정서를 보고 솔직히 놀라고 있었지만, 별 거 아니라는 듯 집어 던지는 루드밀라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협정서에 서명한 이름들은 쟁쟁하다. 이 정도나 되는 뱀파이어들이 한꺼번에 달려든다면, 이제 갓 마법이란 걸 사용하기 시작한 어린 마법사는 맥을 못 출 거다.
“발판이라.”
“이건 뱀파이어들의 보험이지, 당신들의 방안이 아니잖아.”
소렐 이드리스가 큰 마법을 썼다는 게 알려지자 엘펜하임은 더더욱 심하게 동요했다. 저 마법이 그들을 겨냥할 가능성이 크다. 동시에 그 마법을 몹시도 가지고 싶었다. 엘펜하임은 멸망을 예언하는 봉인이 깨지는 것을 뜬눈으로 지켜보고만 있었다. 대마법사가 도대체 무슨 마법을 부려놨는지 파악할 수도 없다. 그럴수록 고대마법에 대한 갈망이 몹시 커졌다. 원래 타고나길 떼강도였던 놈들은, 지금도 남의 것을 갈취해서 제 배를 불리길 바라는 법이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해주시겠다?”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거니까.”
소렐 이드리스를 치울 곳은 엘펜하임이다. 그리고 루드밀라는 고대마법이란 것에, 솔직히 관심이 없었다. 가질 욕심도 나지 않는다. 그녀의 욕심이란 욕심은 전부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라는 한 남자가 쥐고 있는 권력과 부와 명예, 그리고 그 남자 자체에게 향해 있었다.
“나는 멈추지 않아.”
결국 모두가 쫓기고 있었다. 소렐 이드리스는 토끼라 그녀에게 이를 드러내는 뱀파이어들이며 엘펜하임으로부터 쫓기고 있었고, 루드밀라도 엘펜하임에게 쫓기고 있었으며, 엘펜하임은 그들을 뒤쫓아 오는 과거의 망령으로부터 쫓기고 있었다.
“이딴 것에 서명을 받았다 해서 넘어갈 생각 없어.”
이 서명서는 어찌 보면 고대마법이 뱀파이어들의 손안에 있다는 상징이기도 했다. 라이킨이 서명함으로써, 그렇게 인정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건 루드밀라가 원하는 것도 아니었고, 고대마법을 노리는 이들이 원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고대마법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고.”
카메론은 그만 웃고 말았다.
“뭐야, 왜 웃어?”
“아니, 어디 사는 누가 생각나서.”
“누구?”
“관심도 없는데 왜 물어봐?”
“하긴 그건 그래.”
사랑의 형태는 다양하다. 물론 그 사랑을 받는 수혜자인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 공은 짜증날 것이다. 루드밀라는 어쨌든 칼리에르 공만 온전히 바랐다. 그를 ‘소유’하길 바라고 있다. 하지만 카메론이 아는 또 다른 뱀파이어, 폴리아나 그린은 그녀가 그를 소유하는 게 아니라, 그가 많은 것을, 고대마법까지 포함해서 소유하길 바랐다. 글쎄, 어느 쪽이 칼리에르 공이 바라는 것과 맞아떨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루드밀라가 바라는 건 확실히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락을 넣어둬. 곧 고대마법을 넘겨줄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거야.”
루드밀라의 말에 카메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준다는데 마다할 수가 있나.
“그러지.”
엘펜하임에게 한 가닥 희망이 생길 거다.